'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일은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어떤 감정상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주 엉망진창인 영화에서도 건질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이별한 다음날, 세상 모든 노래가사가 다 본인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컬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같은 영화를 보고서도 심금을 울리는 진한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에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그런 영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영화를 욕해도 "분명 이 영화도 잘난 점이 있다"며 혼자 옹호했었다. 사실 그것은 한량 장선우 감독에 대한 옹호였을테지만 말이다.
<마이블랙미니드레스>는 도저히 필자의 취향과 부합할 수 없는 영화였다. 순전히 미모의 여배우들(박한별, 유인나) 얼굴 구경하러 극장에 간 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잠시나마 캐릭터들에게 묘한 연민의 감정을 느꼈었다. 그러나 결국 영화적 기술력이 그 실낱같은 연민의 정마저 떼어놓으면서, 이 영화는 필자의 대책없는 욕지거리를 맨몸으로 떠안게 됐다.
이 글은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캐릭터의 감정상태와 무관하게 관객 중 1명이었던 필자가 느꼈던 감정선을 따라갈 것이다. 그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은 이 영화가 어떻게 엉망진창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할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정 떨어지는 24살 여자 넷의 등장으로 진행된다. 어째 이야기를 들어봐선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대학 4년 신나게 논 여자 넷이 졸업하는 풍경이다. 물론 졸업하는 그 날은 최고급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받고 미용실에서 풀세팅하고 명품 장착한 채 클럽가서 신나게 논 날이다. 그러니깐 이 주인공 넷은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된장녀'다(이 표현은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마치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듯...)
그리고 10개월이 풀쩍 뛴다. 10개월의 시간을 그렇게 뛰어넘는걸로 봐서는 졸업 후 10개월 동안 세팅-클럽-외박-음주가무 등의 콤보로 지낸 듯 하다. 그렇게 10개월 신나게 논 이 청춘들은 "놀다 지쳐" 취직이라는 걸 하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대로 "연애와 사회생활에서 진탕 깨지고 우정에도 금이 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다 결국 화해하고 사이좋은 친구로 남게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아마도 수많은 남자들, 특히 필자와 같은 가난한 서민 남자들은 이 영화를 보면 최소 30분 이상은 네 명의 여주인공들에게 폭풍 욕지거리를 날리게 될 것이다. "부모 잘 만나서 집이 썩어나는 주제에 어디서 지 돈인양 한량처럼 놀고 먹다가 이제서야 취직한다고 깝치더니 별 고민같지도 않은 고민갖고 괴로운 척 하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낼 만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관객인 필자는 이 정떨어지는 네 여인의 고민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공감 말고 이해. 사실 그 고민들이 많은 관객들에게는 "같잖고 뻔한 고민"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라도 남의 고민에 무게를 잴 자격은 없지 않은가? 빌 게이츠도 자기 나름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김태희가 외모 컴플렉스를 느낀다고 해도 그녀의 주관적인 고민이니 우리가 뭐라 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그녀들의 고민을 최대한 이해했다. 그런데 기껏 이해하고 영화 지켜봤더니 꼴들이 아주 가관이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화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다 버려버리는 것이 그녀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래도 친구가 있어 행복해"라는 미소를 짓는다. 장례식장에서...
한 지인은 이 장례식장씬에 대해 "예의와 도덕을 모르는 몰상식한 장면"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맹비난을 날릴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장례식장이지만 일부러 침울한 표정을 일관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장례식장 장면을 최대한 의도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이 네 여인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죽은자를 포용하고 갈 수 있어야 했다.
죽은 자는 유민(윤은혜)의 학창시절 친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는 조용한 친구였다. 드라마 작가가 되길 꿈꾸지만 계속 낙방하게 되고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물론 자살전에 유민에게 한 통의 전화를 날리게 되고, 그녀는 외로운 친구의 장례식을 빛내기 위해 동창생들과 자신의 친구들을 모조리 부르게 된다.
뭐...잘한 일이다. 어쨌거나 마지막 가는 길 외롭지는 않게 됐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 장례식장을 계기로 24살의 아가씨 넷은 화해와 갈등해소의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그녀들과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죽은 자, 똑같이 24살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그녀는 결국 '자리주선'만 해주고 한 것이 없게 된다. 이 화해에 죽은 그녀도 뭔가를 할 수 있었어야 했다. 왜 똑같은 24살의 처녀들이 하나는 죽고, 넷은 죽은자를 잊은 채 웃어야 하는가?
장례식장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죽은 자를 마음으로 떠나보낸 뒤여야 한다.
이후 그녀들의 선택은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개월이 지났지만 더 나아진 것이 없는 이 친구 넷은 여전히 그 우정을 과시하며 지낸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명품 두르고 클럽이나 출입하며, 최고급 스파에서 수다떨던 넷이 갑자기 그렇게 자기애가 피어나고 자기 일에 열심일 수 있는가? ...어떤 계기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과연 그녀들이 영화가 진행되며 겪었던 계기들이 그녀 자신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할만큼 강렬했는가?
어차피 25살에서 영화가 끝이 나는 만큼 그녀들의 삶에 어떤 결과를 내놓을 필요는 없다. 적어도 클럽과 명품을 포기하게 된 계기 정도는 설명을 해야 한다는거다. 물론 유학 간 민희(유인나)와 집이 부도난 수진(차예련) 정도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흥청망청의 최전방에 있는 유민과 혜지(박한별)는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 마지막 장면에 넷이 통화를 할 때도 한 명 정도는 호텔에서 전화를 받았어야 설득력이 있는거다.
아마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리 최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적 테크닉이나 기술로 따지면 이 영화는 최악 중의 최악이 된다. 이 두가지 면에서 이 영화가 한국영화 최대의 괴작 <맨데이트>보다 나은 점을 꼽아보라면 "조명 갯수가 많은 것" 정도 밖에 설명 못할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감각적 젊은 세대들을 타겟으로 한 영화치고 전혀 감각적이지 않은 클럽장면(저 옛날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도 이것보단 세련됐다), 갑자기 정체성이 이상해지는 캐릭터(유민의 선배작가),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주변인들(이용우, 신동호), 로맨틱코미디 임에도 불구하고 개그는 조연들만 하는 이상한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대사'다.
정작 재기발랄한 대사를 어느 정도 보유한 조연들에 비해 주연급들(정확히 말하면 이쁘고 잘생긴 역할들)은 대사가 하나같이 20여년전 국방홍보영화 수준이다. 혹은 수년전 EBS청소년드라마 수준?...아니다 오히려 그쪽이 더 나은 것 같다.
필자가 인물들의 고민을 이해하려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든 게 바로 이 대목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들로 훈계하듯, 예견하듯 뻔한 결말로 질주하는 부분은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갑갑하다. 그러니깐 이 영화가 테크닉적으로 절망적이라는 점은 대사와 캐릭터 세공, 뻔한 이야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 하나 추가하자면 그 감각 떨어지는 카메라워크다. 젊은 세대, 그 가운데서 패션에 민감한 세대들을 공략하는 영화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찍는 건... 뭐 어쩌자는건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의도는 대략 "사람들이 된장녀라 부르는 상류층 여인들에게도 나름 고민이 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기 고민 떠안기도 바쁜 사람들이다. 비싼 돈 내고 극장에 앉아서 자신의 고민보다 같잖은(혹은 공감 안되는) 고민 들어줄 여유는 없다.
설령 그 고민을 들어달라고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감각적 영상과 발랄한 이야기로 캐릭터들과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의 즐거움이라도 줘야 한다. 명품을 걸치고 등장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결코 돋보이지 않으니... 최소한 명품소비를 줄이는 효과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대사와 뻔한 캐릭터들은...아...내가 어쩌다 아주 잠깐 이들의 고민을 이해했었을까? 과연 대한민국 20대 여성들이 이 영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담1) 그런데 솔직히 장례식장에 축하화환 보낸 24세 여성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여담2) 이 영화의 여배우 넷을 보면서, 대사가 배우의 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다.
여담3) 충격적인 사실은 이 영화의 네 주연배우들 중 유인나가 제일 나이가 많다. 그리고 차예련이 제일 어리다.
감독
출연
상세보기
'영화이야기 > 빙다리 핫바지 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로맨틱 헤븐' - 이미지가 이야기를 망치다 (4) | 2011/03/17 |
|---|---|
| '줄리아의 눈' - 하마터면 재밌을뻔한 영화 (0) | 2011/03/16 |
|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3) | 2011/03/14 |
| '레드 라이딩 후드' - 발레리, 나쁜 년!! (6) | 2011/03/14 |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 - 장르영화 테크닉의 집대성 (0) | 2011/03/14 |
| '킹스 스피치' vs '포레스트 검프' (0) | 2011/03/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