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 과거, 현재를 살게 하는 에너지
3월은 늘 그렇듯 극장가의 비수기다. 뭐 그런 이유로 볼 영화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건축학개론'은 이것을 떠나서 개인적인 기대작이다. '불신지옥'의 탄탄함에 매료된 것도 있었고 극장에서 미쳐 보지 못한 '시라노:연애조작단'같은 풋풋한 멜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앞의 두 작품과 전혀 무관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영화를 다 본 한 기자는 "'불신지옥'에서의 연출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이성적 재미를 떠나서 감성적으로 깊게 파고든 영화다. 또 이성적 재미를 압도적으로 제압할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이 '멜로영화'가 해야 할 역할일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근래 보기 드물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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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그것은 남의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누군가 말한대로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필자는 그게 참 심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학개론'은 참 반가운 영화였다. 필자만큼 과거에 대한 이토록 섬세한 관심을 보인 사람이 있다는게 다행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집착은 어떻게 '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에 녹아 들어있는지도 잘 보여진다. 집과 사랑, 그것은 모두 과거라는 자양분을 먹고 사는 예쁜 꽃과 같은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30대 중반의 건축가 승민(엄태웅)에게 15년전 첫사랑 서연(한가인)이 찾아와 제주도에 집 재건축을 의뢰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승민과 서연은 대학시절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다가 처음 만난 사이로 같은 동네에 산다는 우연과 그로 인해 건축학개론 숙제를 함께 시작하며 가까워진다. 승민은 서연의 집을 설계하고 짓는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가슴 아팠던 첫사랑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된다.
어떤 영화들은 이성에 호소하게 되고 그만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 거리들을 안게 되기 마련이다. 또 어떤 영화들은 화려한 비주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기도 한다. '건축학개론'은 철저하게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영화다. 사실 멜로영화들은 어느 정도 이런 면을 가지고 있다. '건축학개론'은 그런 면에서 참 철저한 영화다. 이 영화는 영화적 해석이나 기술력에 대한 이해가 무의미 할 정도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나 첫사랑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태어난 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성에 기댄 리뷰를 써야겠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여자에 대한 궁금한 점 하나를 떠올리게 됐다. 왜 여자는 과거의 사랑에게 가끔 연락을 건네게 되는가? 뭐 실제로 이런 연락을 받아 본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 여성들의 심리가 궁금해졌었다. 이에 대해 몇몇 주변의 여성 지인들이 말하기를 "현재의 사랑과 뭔가 잘 안 풀릴때 과거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서연이 승민을 찾아오게 된 이유도 이 말과 일치한다. 서연도 그랬고 그때 필자에게 연락 온 그 여자애도 마찬가지로 과거를 찾게 한 암울한 현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는 현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잠깐의 도피처가 되는 것인가? 물론 서연은 "제주도 집 재건축"이라는 현재와 과제를 가지고 승민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첫사랑의 풋풋했던 감정을 떠올리게 되며 스스로를 정화한다. 어쩌면 남자에겐 좀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승민(이제훈)에게 서연(수지)과의 첫사랑은 그리 아름다운 기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기적이고 아픈 작업은 승민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결혼을 앞둔 여자(고준희)가 있고 결혼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승민이 있고 지낸 것은 너무도 변해버린 현재의 자신과 다른 순수했던 과거였다.
서연은 힘들어진 현재만 제외하면 크게 바뀐 것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승민은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변했다. 수줍음 많은 순수한 청년은 능글맞은 아저씨가 되어버렸고 담배도 못 피우던 순진남은 어느덧 골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랑에 서툴지만 그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던 이 청년은 쫓기듯 결혼을 준비하게 된다. 승민이 변하지 않은 것은 엄마에게 막 대하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서연을 만나면서 변하게 된다. 한결같이 보살펴 준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태어나서부터 쭉 살던 정릉의 낡은 집, 쪽팔림을 안겨줬던 짝퉁 티셔츠에 대한 소중함과 추억을 알게 된다.
승민은 서연의 집을 짓는 작업과 함께 결혼준비도 하게 된다. 그리고 서연의 집이 완성되고 승민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순간 승민의 마음 속에는 서연을 통해 알게 된 '낡은 것의 소중함'을 안고 떠났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현재란 참 힘들고 치열한 삶이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지만 소중한 것을 잊고 살게 된다. 핸드폰이 생기면서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연락을 주고 받게 됐지만 삐삐로 연락을 주고 받던 시절의 간절함이나 기다림은 사라진지 오래다. MP3로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음악을 다운받는 탓에 CD 한 장 사서 듣는 그 시절 음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현재에는 캐드나 3D MAX로 설계하던 집모양을 당시에는 두꺼운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이어붙였다.
...여기까지는 아날로그 예찬론자들의 이야기다. 필자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 보태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첫사랑이 아름답고 풋풋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 모든 것이 느리고 불편했던 아날로그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대한 배움이 늦어져 순수를 간직한 20살 소년소녀들과 모든 것이 디지털이 아닌 물질로 존재했기에 갖게 되는 추억의 매개체들. 그리고 불편함이 오해를 만들어냈기에 더 가슴아프게 기억되는 첫사랑. 첫사랑이 아름답고 풋풋하고, 가슴 아프고 아쉬웠던 이유는 그것이 아날로그 시대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사랑' 그 자체가 아날로그적 감성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화두인 '집' 역시 추억을 한껏 머금은 '유기체'다. 특히 '태어난 집'이라면 어릴적부터 있었던 많은 추억을 곳곳에 새겨두고 있다. 그것은 승민의 정릉 집이나 서연의 제주도 집 모두 마찬가지다. 승민의 엄마가 30년 넘은 정릉집을 떠나지 않는 이유, 병상에 누운 서연의 아버지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 집 재건축을 맡긴 서연이 집의 몇몇 기억들을 허물지 않길 바라는 이유. 낡은 집에 새겨진 많은 기억들이 우리가 우리였음을 알게 해주는 아이덴티티가 된다.
아날로그적 낡은 단독주택의 추억을 모르는 세대들은 아마 대부분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물론 아파트에서도 많은 추억이 있을테지만 단독주택의 낡은 추억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집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조금만 낡아도 그 집에 불편함을 느끼고 새 아파트를 찾으려 한다. 아마도 이용주 감독은 이 영화의 낡은 집을 첫사랑과 같은 것으로 봤을 것이다. 아름답고 슬프고 즐거웠던 많은 추억들을 머금고 있지만 그 추억을 미쳐 꺼낼 엄두도 못 내고 그것이 아름다웠음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낡은 집에서 변해버린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낡은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은 잊고 지낸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고 누군가는 오래전 살던 집, 그리고 누군가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돌이켜보니 나 자신이 과거에 비해 참 많이 변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이 영화를 보게 될 30대 관객들은 첫사랑을 떠올림과 동시에 과거의 자신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를 만든 이용주 감독은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했다. 관객 역시 이 영화를 보며 변해버린 현재의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때 그 첫사랑에게 했던 실수들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 시절, 첫사랑에게 오해로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떠올려보자. 그 실수, 오해 역시 첫사랑의 추억이다.
여담1) 리뷰를 다 쓰고 보니 뭔가 통속적이고 흔한 이야기다. 뭐...어쩔 수 없다. 영화가 필자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 영화 차갑게 보는 기자들조차 촉촉하게 적셔버린 작품이니 오죽하겠는가? 잠시 과거에 좀 젖어살자.
여담2) 영화는 예쁜 배우와 예쁜 집, 예쁜 제주도가 앙상블을 펼친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쁜 배우란 한가인과 수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 엄태웅까지 예뻐보일 지경이다.
여담3) 아마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봄날은 간다'를 볼 적에 강릉 이후 오랜만인데, 정말 영화 속 장소인 정릉과 제주도에 가보고 싶어졌다. 영화 속 저 집 아직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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