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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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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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끝자락, 멀리 하구둑이 보이는 부산 하단동에는 때때로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근처 비누공장에서 비누의 원료가 만들어 내는 그 냄새는 옅은 해로움이 돼서 동네의 공기로 자리 잡았다. 기분 좋지 않은 냄새를 풍겨오긴 했지만 매일 심각하고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진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 냄새를 풍겨왔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만했다. 
하단동은 마치 동네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역사관처럼 단계를 이루고 있었다. 단독주택과 다세대 주택이 모인 동네에서 빠져나오면 5층짜리 연립주택, 혹은 저층 아파트들이 있었다. 거기서 큰 길로 나오다 보면 8~15층짜리 복도식 고층 아파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강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3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한 지반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동네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하단동에서 나의 위치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어쩌면 2019년에 바라보는 나의 위치도 딱 복도식 아파트 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놀이들은 단순했다. 동네별로 세력을 나눠 구슬이나 고무인형, 드래곤볼 카드게임을 해서 세력을 결정지었다. 그 쓸모없는 물건들은 마치 자본처럼 동네의 권력을 결정짓는 도구가 됐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나와 내 형, 형의 친구들 몇 명이 권력의 주축을 이뤘다. 내가 다른 동네 친구들과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잃고 돌아오면, 형과 형 친구들이 가서 복구해왔다. 심하게 잃는 날은 몇 대 맞기도 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진 않았다. 라면 잘못 끓여서 맞은 날도 있었고 청소 안 해서 맞은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형이 밉진 않았다. 형은 아직까지도 집안의 대소사는 직접 나서서 챙긴다. 그때도 장남 노릇 하나는 정말 잘했던 것 같다. 
단순한 놀이들은 조금씩 진화했다. BB탄 총들이 유행하면서 각 집마다 총 한 자루 이상은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BB탄 총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놀이들을 생각해냈다. 때로는 잡지책을 뒤지며, 때로는 재미있게 봤던 영화들을 응용해가며 재미있게 놀았다. 여담이지만 낙동강 하구둑을 건너가면 을숙도라는 섬이 있었다. 그곳은 갈대밭이 아주 유명한 곳이다. 총을 가지고 놀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자연환경인 셈이다. 

중학교 생활이 끝날 즈음, 나는 이사를 했다. 지금은 ‘문화마을’이 돼버린 감천의 산 중턱에 위치한 빌라였다. 하단동에서 살던 곳보다는 대중교통이 불편했지만 집은 2배 이상 커졌다. 그리 잘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갖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큰 것에 욕심을 내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동네 친구들과 떨어져서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교에 가면 다 만날 녀석들이었다. 하단과 감천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전학을 가지 않았다. 
감천과 우리집은 꽤 이질적인 면이 많았다. 감천은 부산에서도 가난한 동네로 유명한 곳이다. 산 중턱에 자유분방하게 모여든 집들이 만든 이 마을은 초행길인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은 구조다. 그 자유분방한 미로 중에서도 우리집은 꽤 찾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마치 가난하고 어지러운 이 마을에서 우리집만 예외로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예외성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곳으로 스며들었다. 

부모님께서는 토성상가에서 도매업을 하셨다. 처음에는 사조식품 대리점을 하면서 로하이참치와 팝콘, 김과 같은 식료품을 납품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식료품 도매업 전반으로 확대해 온갖 냉동식품과 통조림 등을 팔았다. 그 덕분에 내 도시락 반찬은 항상 미니 돈까스와 후랑크소세지, 참치캔 등이 차지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나는 친구 도시락의 달래무침이나 파김치가 더 맛있었다. 
토성상가는 그 당시에도 엄청나게 낡은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어느 날 형과 나는 집에 있던 중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가게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다. 택시를 타고 황급히 가게로 향하자 상가 전체에 꽤 큰 불이 났다. 소방관들이 불을 끄고 있었고 놀란 엄마와 분주한 아빠도 보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이 난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나중에 불이 다 꺼지고 찾아간 가게는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다. 화재보험금과 보상금을 받긴 했지만 워낙 낡은 건물이었던 탓에 그 돈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왜 부모님은 그 후로 계속 불 탄 상가에서 장사를 하셨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가게를 옮길 여력이 안됐고 위험부담도 컸다는 대답이었다. 개운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불에 탄 가게에서 장사는 당연하게도 잘 되지 않았다. 결국 2년도 지나지 않아 가게는 망하고 우리 집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 때가 딱 1998년이었다. 다른 자영업자들은 IMF 때문에 사업이 망하고 빚더미에 올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건의 순서를 돌이켜봐도 우리집은 IMF와 상관없이 망했다.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도 분간이 잘 되진 않는다. 결국 부모님은 빚쟁이들을 피해 울산으로 피하시고 나는 고등학교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나와 형은 감천의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갔다. 감천의 예외적인 집에 살던 우리는 감천의 일반적인 집으로 이사 가게 된 것이다. 
형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는 거창한 의도도 있었지만 본인 쓸 돈을 벌겠다는 의도도 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여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악랄한 빚쟁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아빠의 친구였던 한 아저씨는 혼자 있을 때 집에 찾아와서는 용돈을 주고 가셨다. 예전에 집에 있던 재믹스와 컴보이도 그 아저씨 가게에서 싸게 산 것들이었다. 부모님께서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부산에 내려왔다. 그저 조금 이른 자취생활을 시작했다는 정도의 생활이었다. 
나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1년 재수를 했다. 재수하던 기간에도 형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군대에 갔다. 나중에 울산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 몇 달 동안, 나는 혼자 살았다. 그 기간이 그렇게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두 번이나 낙방했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부산대학교 앞에 ‘씨네마떼끄 1/24’에서 무보수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영화보고 사람들과 수다 떨고 노는 것에 더 가까웠다. 대학보다는 영상원에 가고 싶어서 준비를 했지만 결국 다 떨어지고 울산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부산을 떠났고 나의 10대도 끝이 났다. 

내게는 성수대교 붕괴나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는 남의 일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너무 말도 안되는 일이라 체감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성수대교를 가본 적도 없었고 아현동에 살아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집은 IMF와 상관없이 망했고 내 생활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큰 불만도 힘든 것도 없었다. 변하면 변한대로 잘 살았던 것 같다. 가게에 불이 났다는 것은 큰 사건이지만 트라우마로 남지는 못했다. ...당연히 남지 않을 줄 알았다. 
사건은 삶에 큰 파도를 준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 파도가 다녀갔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IMF가 바꿔놓은 우리의 체질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 대해, 우리는 그 기원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대체로 부조리한 사건에 의해 변화한 것이며 그때 맹렬히 저항하지 못한 죄로 부조리를 몸에 체득하게 됐다. 트라우마는 때로 무기력함으로, 때로 맥락없는 분노로 몸과 마음에 새겨져있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로 남을 것이고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극복하지 못할 원죄로 마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무기력한 글로 과거를 회상하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의 20세기, 트라우마는 추억이라는 가면을 쓰고 서있다. IMF를 관통하는 청춘은 그 파도를 당연한 것처럼 넘실대며 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소녀는 새로운 가면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어른은 피를 흘리고 내장을 토해내며 20세기를 지나왔고 청년은 무기력하게 파도에 휩쓸려 가혹한 시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소녀는 가족에 기댄 채 시대를 관통해 새로운 곳을 마주할 채비를 하고 있다. 
나 역시 트라우마를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라는 방패 덕분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이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치열하게 살기 보다는 이상주의적으로 살고 있다. 현실 앞에서 몇 번의 좌절을 거치자 이상주의는 허무주의가 됐다. 많이 늦게 마주한 비범한 현실, 가족이라는 방패도 무기력해진 채 마주한 현실은 거대하고 단단하다. 그 앞에서 주저앉아서 하게 되는 많은 좌절들이 나는 꽤 당혹스럽다. 
나의 20세기, 나는 그 시절을 어떻게 관통해왔는가. 나는 그 시절을 감히 ‘좋은 추억’으로 포장해 담아가도 되는 것일까. 나의 ‘좋은 추억’을 위해 방패가 된 사람, 혹은 방패에서 트라우마로 돌변한 사람. 결국 지금의 부조리한 나는 과거 어느 지점의 산물인 셈이다. 나를 만든 그 사건과 사람 앞에 나는 좌절해 무릎을 꿇는다. 

은희(박지후)에게는 방패 혹은 트라우마가 된 가족과 친구, 혹은 어떤 사람이 있다. 미수(김고은)에게도 상처이자 사랑이 된 현우(정해인)가 있고 현우에게도 친구이자 상처가 된 정엽이 있다. 그들의 20세기에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남아있다. 나에게도 20세기의 사람은 상처와 애정을 오가며 현재로 건너왔다. 당연히 그것은 시절과 무관한 일이다. ‘우리들’의 현재에서도 관계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법이다. 그럼에도 ‘벌새’와 ‘유열의 음악앨범’, 그리고 20세기를 이야기하는 어떤 영화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라며 그때를 추억한다. 이것은 20세기의 추억을 한 꺼풀 벗겨내는 일을 한다. 사실 우리는 아름답지 않은 시대를 살았으며 아름답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순간’을 끄집어내는 것이 삶을 조금은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다. 은희가 1994년을 되돌아봤을 때 영지 선생님(김새벽)과 우롱차 마시던 순간, 혹은 햇살 뜨거운 날 친구와 방방 위에서 말간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뛰어논 경험처럼. 그리고 미수와 윤자(김국희), 현우가 빵집에서 보냈던 짧은 순간처럼. 그리고 형과 형 친구들이 우리집 방에 모여 앉아 라면박스 가득한 구슬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생라면 부셔먹던 1994년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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