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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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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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어릴적에는 트렌디 드라마가 유행했었다. 장동건이나 김희선 같은 배우들이 나와서 연애를 하거나 대충 여자주인공이 신데렐라처럼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런 드라마들 와중에 나는 유독 역사드라마를 좋아했다.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같은 대하사극은 부담스럽더라도 '제5공화국'이나 '코리아 게이트' 같은 드라마는 정말 재밌게 봤다. 당연히 '모래시계'같은 드라마도 좋아했고 '아스팔트 사나이', '올인' 같은 드라마도 좋아했다. 말랑말랑한 로코 드라마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그런 건 유독 보지 않았다.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드라마의 매력은 감정을 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바쁘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풍성하게 꾸려질 정도로 긴장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인물에 대해 어떠한 감정의 시선도 보내지 않기 때문에 실존인물이기도 했던 드라마 속 등장인물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2. '남산의 부장들'은 잊고 지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의 이야기다. 2004년 만들어진 영화 '그 때 그사람들'도 좋아하는 영화인데 당연히 '남산의 부장들'도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좋은 배우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과감한 해외로케로 이야기의 디테일과 몰입감을 더했다. 첩보장르영화로써 이 영화의 완성도는 굉장했다. 다만 그 와중에는 나는 이 이야기에서 위험한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40년전 얘기이며 사실상 '끈 떨어진 구시대의 독재자' 이야기가 더 이상 위험한 소재일리는 없다. 나는 이 이야기가 가진 정치적 태도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비록 이야기가 오래된 소재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시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3. 이 영화에는 이병헌과 곽도원, 이희준, 이성민 등 엄청난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맡은 역할 역시 역사 속에서 굉장한 무게감을 자랑했던 실존인물들이다. 영화는 이 인물들 가운데 김규평(이병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현직 중앙정보부장으로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전직 중정부장 박용각(곽도원)은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며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은 사건에 불을 지피는 인물이다. 그리고 박통(이성민)은 사건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만약 이 이야기에 정치적 태도가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에 박통에 대한 태도와 같다. 그 시대는 엄연히 '박통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우민호 감독은 이야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시대상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인물들에게 집중해 갱스터영화나 첩보스릴러 영화의 구조를 만들어버린다. 나는 이 태도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4. 이야기는 박통에 대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독재자'가 아닌 '장기집권을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5.16에 대해서도 감독의 의견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말을 빌어 '혁명'이었다고 표현한다(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감독의 의견이 아니다). '독재자'는 '절대악'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장기집권을 한 사람'이라면 그 고충에 접근하기 쉽다.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한 박통은 18년간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지치고 히스테릭한 상태다. 미국은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고 한때 데리고 있었던 박부장은 자신을 잡기 위해 해외에서 수를 쓰고 있다. 박통은 외롭고 지쳐있으며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과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혼재한다. 

5. 박통의 이같은 심리가 보여지면서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영화 속 박통을 동정했다. 그러다 단 몇 초만에 정신을 차리고 "아니지, 내가 왜 박통을 동정해?"라며 냉정을 유지했다(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자). 이것은 재벌 걱정하는 방구석 오타쿠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는 20년 가까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나는 그 권력의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다. 냉정을 찾고 난 뒤 나는 근원적인 물음을 갖게 됐다. "박통에 대한 '정치적 중립'이 가능할까?". 박통이 집권하던 시대에서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의 행적과 시대에 대해 쉬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역사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시대다. 그 평가는 정치적 이념을 바탕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져 이뤄진다. 그렇게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즉 한쪽 진영의 평가와 반대편 진영의 평가가 누적되면서 박통은 마치 동전처럼 양면만 존재하는 인물이 됐다. 그러고 나서 '남산의 부장들'이 하려는 시도는 동전을 세로로 세우는 일과 같다는 걸 알게 됐다. 

6.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전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동전을 세우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지게 된다. 그때 어느쪽 면이 위로 올라올 지는 알 수 없다. 박통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굉장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문득 광화문에서 태극기 흔들던 어르신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봤다. 아마도 "각하께서 저렇게 외로운 시간을 보내셨다니"라며 펑펑 울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만약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면 정치적 반대편의 반응도 예상이 가능하다. "이 영화는 박통을 미화하는 영화다"라며 분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로 인해 뜨거운 불판위의 오징어처럼 한바탕 논쟁의 장이 펼쳐질 수 있다(영화를 흥행시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7. 나는 '남산의 부장들'이 박통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업영화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의 결과물처럼 내놓을 것이라면 아예 박통이라는 인물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의 결과물에서는 박통이 엄연한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등장인물이 아닌 부장들 사이의 대상이나 도구가 됐다면 영화는 더 안전한 길을 갈 수 있다. 임상수 감독의 '그 때 그 사람들'과 비교해보자. 이 영화는 박통뿐 아니라 사건 전체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허허실실대며 비아냥대듯 사건을 바라보는 이 태도는 실제 사건과 관객 사이에 거리감을 준다. 이 거리감으로 인해 관객은 오히려 사건과 인물, 정치적 상황에 대해 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그 사람들'에서는 모두가 우습고 유치했다. 

8. '남산의 부장들'은 브로맨스 영화같은 구석이 있다. '천문'과 같은 훈훈한 브로맨스였다면 좋겠지만 이것은 박통과 김부장, 곽실장으로 이어지는 삼각 로맨스다. 김부장이 비오는 날 궁정동 안가에서 박통의 전화를 엿듣는 장면, 여기서 김부장의 표정은 참 멜랑꼴리하다. 마치 "그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나를 버리려 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배신감을 눈으로 표현하며 애절한 장면을 연출한다. 박통 역시 "나는 외롭고 지쳤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해. 나는 김부장이 좋은데, 김부장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거야. 곽실장은 좀 멍청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잘 헤아려줘"라는 분위기다. '남산의 부장들'과 '천문'을 같은 야오이 장르로 본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좀 더 어른스럽다. 

9. 나는 지금의 20대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 지 정말 궁금하다. 10.26과 5.16, 12.12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성세대들보다 더 거리감이 있을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박통과 그 때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꼰대' 마인드인지 모르겠다. 그저 바램이라면 '천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브로맨스가 가미된 첩보스릴러 영화로 보고 휘발시키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묘사한 박통에 대한 감정적 접근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위험해 보인다. 그에게 공감하는 대신 그가 한 일들을 찾아보는 정도로 역사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역사공부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픽션은 그저 매개체일 뿐이다. 

10. 결론: "'남산의 부장들'이 흥행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썩 긍정적이진 않다. 긴장감 넘치는 첩보스릴러긴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다. 게다가 약간 난해하기도 하다. 가상의 사건을 다룬 첩보스릴러와 실제 사건을 다룬 동 장르영화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실제 사건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라면 관객들도 당연히 무게감을 가지고 극장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마케팅팀도 난감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SNS 마케팅처럼 유머러스한 마케팅을 펼치기에도 부담스럽다. 결국 이 영화가 잘되는 방법은 '입소문' 밖에 없다. ...그래서 말하자면, 영화는 재미있다. 촘촘하고 긴장감 넘친다. 김부장을 쫓아서 이야기만 즐긴다면 이 영화를 안전하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추신) 이성민 배우와 서현우 배우의 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캐릭터의 무게감도 당연하지만 이성민은 다이어트에 귀 분장도 붙인 듯 하다. 게다가 서현우는 M자 탈모분장까지 했다....분장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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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자스민차향기조아 2020.01.19 12:0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번 주에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김재규 관련 책도 읽었고 말이죠.. 박통이 미화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라면... 음... 고민되네요..

  2. silentfilms 2020.01.25 19:16 address edit/delete reply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박정희란 인물에 대한 감독의 일정정도의 판단이 부재하는 영화. 박정희를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자체가 이미 불가능,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재미조차 없었거든요... 그래서 막 화가 나있던 찰나에, 도대체 이 영화 뭐가 문제지? 하던 중에 글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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