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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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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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빙다리 핫바지 감상문'에 해당되는 글 300건

  1. 2020.06.26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간단 리뷰
  2. 2020.04.23
    [스포주의]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 간단 리뷰 (1)
  3. 2020.03.24
    얼굴을 감춘 시대를 살며
  4. 2020.03.15
    [강력스포] 넷플릭스 '킹덤 시즌2' 간단 리뷰
  5. 2020.03.09
    넷플릭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간단 리뷰
  6. 2020.03.02
    '사이드 바이 사이드' 간단 리뷰
  7. 2020.02.18
    '1917' - 전쟁과 시간
  8. 2020.02.04
    [약간 스포] '작은 아씨들' - 우리의 19세기
  9. 2020.01.16
    '남산의 부장들' 간단 리뷰 (2)
  10. 2019.12.04
    [스포주의] '미안해요 리키' 간단 리뷰 (1)

1. 과거의 언론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야였다. 그들에게는 숨겨진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때는 그 사명감만 가지고도 충분히 먹고 살만 했다. 종이신문이 거의 유일한 수입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이 됐다. 종이신문은 사람들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그래서 언론은 돈 신경 쓸 필요없이 취재해서 진실을 알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다 세상이 변하고 당연히 언론도 변했다. 주된 플랫폼은 종이신문에서 웹페이지로 옮겨갔다. 인터넷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사는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해야 했고 광고를 따내기 위해서는 웹페이지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해야 했다. 당연히 자극적인 기사와 제목들이 등장했고 광고주의 입맛에 맞게 진실은 왜곡됐다. '언론은 돈이 된다'는 기억은 여러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언론사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과거처럼 윤전기를 갖춰야 하는 언론사와 달리 컴퓨터와 웹페이지만 있으면 누구나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언론사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능력있고 정의로운 기자가 아니라 전략적인 경영자의 몫이 됐다. 

2.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우)는 폭스뉴스를 살린 경영자다. 그는 자본에 잠식된 미디어 시장에서 방송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한다. 그 결과 로저는 오너인 루퍼트 머독(말콤 맥도웰)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다. 본인은 실력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줬다고 말하지만 그 와중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추악한 짓도 한다. '실력있는 경영자'와 '추악한 변태'는 그의 두 가지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연결고리를 갖는다. 로저는 자신을 항변하면서 "나는 그녀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줬다. 그런데 어떻게 성추행이 되냐"고 말한다. 이 말은 "나는 인재를 등용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은 챙겨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건 누가 봐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다. 매긴 켈리(샤를리즈 테론),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 그리고 많은 여성들의 재능과 노력을 깎아내린 처사다. 재능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요구에 응해줘서 이 자리에 오른건가" 혹은 "요구에 응하지 않아 이런 피해를 본 건가"라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3. 과거 언론에도 이런 괴물들은 있었다. 불합리한 시대에서 언론은 불합리한 '갑(甲)'이었고 그들은 그 위치를 충분히 누렸다. 소위 '성상납'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흔치 않게 쓰인다. 나는 과거의 '갑'들과 로저가 다르다고 여겼다. 로저의 경우에는 자본의 논리가 좀 더 명확하게 반영돼있다. 기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 못한다. 그저 기사 한 줄로 여론의 흐름을 바꿀 뿐이다. 직접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은 월급을 주는 사장과 고용된 직원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과거 언론사에서 경영자가 보도국에 개입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폭스뉴스와 같은 큰 방송국이거나 큰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경영자와 맞먹는 위치에 있다(영화 '더 포스트' 참조). 

4. '밤쉘'의 초반부에 보여진 것은 보도국의 뉴스방송에 적극 개입하는 경영자 로저의 모습이다. 마치 보도국장인양 전화해대는 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사 경영자의 할 일은 대외활동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직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적어도 '더 포스트'의 초보 경영자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그걸 한다. 간단히 말해 캐서린 그레이엄과 로저 에일스를 놓고 본다면 언론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방송국과 신문사는 다른 것 아니냐" "앵커와 기자는 다른 것 아니냐"라는 멍청한 질문이 나올까봐 미리 답하는데 폭스뉴스는 24시간 뉴스채널이니 언론사에 속하고 앵커는 기자의 리포팅을 전하는 입인 만큼 기자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저 회사에는 보도국의 개념이 없나 의심도 해봤다. 보도국장이라 할만한 사람을 구경도 못해봤으며 로저가 저렇게 날뛰는 걸 보니 CEO가 보도국장도 겸직하는건지 궁금해졌다. 만약 겸직이라면 로저는 기존의 '썅놈'보다 몇 배는 더 '썅놈'이다. 

5. 영화 내내 신경쓰이는 지점은 병풍처럼 등장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존재다. 미국 대선이 있던 시기의 언론사가 배경인 만큼 트럼프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매긴 켈리는 트럼프와 토론회를 진행한 앵커가 아니던가.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트럼프의 비중이 많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인상도 함께 받는다. 트럼프의 여성비하적 사고는 초반부 그의 트윗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성추행 사건에 깊이 파고들수록 배경으로 등장하는 트럼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영화는 마치 트럼프에게 "너도 가해자야" "너는 정말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안봐도 알 것 같은데?"라고 뉘앙스를 던진다. 실제로 영화에 언급된 이슈는 트럼프가 전 아내를 성폭행하려 했고 부부 사이에 성폭행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로저 에일스를 방패막이로 세워뒀지만 실상 트럼프의 여성비하적 사고와 성추문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6. 인터넷 시대의 기자는 과거와 같은 '갑'의 위치는 아니다. 과거의 기자는 독자 말고 무서울 것이 없었다. 돈의 논리로 계산하자면 과거의 언론은 종이신문이 주수입원이었고 종이신문을 구입하는 돈은 독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방송 역시 공영방송만 있던 시절에는 광고수익과 함께 수신료의 비중이 컸다. 수신료 역시 국민들이 내는 돈이다. 과거 언론에게는 독자가 '갑'이었다. 현재의 기자에게 '갑'은 광고주다. 말로는 독자를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 독자는 '돈 안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극히 일부의 경우에는 기자에게 갑질(성추행)하는 '갑'(광고주, 정치거물 등)이 나올 정도다. 나는 과거의 언론환경이었다면 로저 같은 괴물은 절대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였다면 그는 다른 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며 직원을 성추행 했을 것이다. '밤쉘'은 언론이 얼마나 오염됐는지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7.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용기있는 사람들 덕분에 변화된 환경에서도 정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얘기를 하면 누군가 발끈할 수 있겠지만) 나는 성폭력은 성별이 아닌 권력관계의 문제라고 믿는다(꽤 많은 남성들은 여성보다 권력적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편이다). 로저라는 절대적 '갑' 앞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낸 사건은 이후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됐다. 이 사건으로 세상에 많은 불합리한 권력관계를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꼰대적 정서'를 가진 모든 분야가 더 많이 바뀌길 바란다. 성폭력뿐 아니라 불합리한 갑질을 포함한 모든 권력형 범죄들이 사라지길 바란다. 

8. 결론: '자본에 의한 언론의 몰락'을 영화로 이해하고 싶다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전통있는 포토저널리즘 매거진 '라이프' 잡지도 시대의 흐름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각돼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월터'는 그것을 아름다운 퇴장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깐 언론은 '더 포스트'를 거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겪었고 '밤쉘'같은 사건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스포트라이트' 같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자본과 권력 앞에 굴복할 날이 올 것이다. 자본과 권력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모두 미국영화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것은 세상의 '을'들이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상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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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는 전편보다 속편이 더 훌륭한 영화다. 그러나 전편 역시 그 나름대로 매력이 훌륭한 영화다. '터미네이터'는 전편과 속편이 합쳐져서 거대하고 정교한 타임 패러독스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전편 하나만 떼어놓고 본다면 B급 감성이 물씬 풍기는 SF 액션 스릴러가 된다. '터미네이터'가 액션 스릴러로써 정체성을 갖는 방법은 간단하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있고 극단적으로 쫓고 쫓기는 것이다. 이 간단한 플롯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쫓는 자는 무슨 수를 써도 죽지 않는 로봇이 됐고 로봇을 등장시키기 위해 미래라는 배경도 끼어들었다. 아마 제임스 카메론도 '터미네이터'가 거대한 유니버스를 갖추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터미네이터'에서 미래는 타임 패러독스와 로봇을 만드는 도구에 불과했다. 

2. 쫓고 쫓기는 플롯은 단순하지만 아주 재미있다. 그것은 액션 스릴러 장르로써 오랫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여지가 있다. 그 '새로운 이야기'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영화 '사냥의 시간'이다.  '사냥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쫓기는 청춘들과 쫓는 암살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그리고 충분히 '터미네이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 노선을 택한다. 오히려 '쫓고 쫓기는' 오래된 플롯을 도구로 삼아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데 쓴다. 이것은 장르영화의 틀 안에 메시지를 녹인 것이며 전작인 '파수꾼'과 장르영화의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와 같다. 꽤 어려운 도전을 한 셈이며 그럭저럭 잘 해냈다. 

3. '사냥의 시간'은 배경이 되는 시대부터 의미심장하다. 이 시대는 일단 '가상의 미래'다. 대략 "경제가 어렵다"라는 설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대단히 낯이 익다. 영화에 간간히 등장하는 뉴스들로 미뤄봤을 때 이 시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나라 경제가 파탄난 대한민국이다. 1997년을 살아본 세대라면 영화 속 풍경들이 그리 낯설진 않을 것이다. 물론 IMF의 기억을 되돌려봐도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다. '원화'가 더 이상 가치를 상실하고 달러로 거래하는 시대라면 원 가치는 영화 속 대사처럼 '휴지조각'이 됐다는 의미다. 추측해보건대 영화 속 시대는 IMF 당시 금모으기 등 이것저것 하지 않고 그대로 쭉 살았을 경우 맞이했을 '현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이는 가상의 '미래'가 아닌 가상의 '현재'가 될 수 있다. 

4. IMF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까지 살았다면 정말 나라는 파탄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사는 젊은이라면 정말 보석상이라도 털지 않는 이상 먹고 살 길이 막막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준호(이제훈)의 일행은 킬러 한(박해수)에게 쫓기기 전부터 이미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다. 때문에 킬러 한에게 쫓기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쫓고 쫓기는' 플롯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불확실한 시대 속 청춘들의 삶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준호 일행이 도둑질을 하며 훔친 것은 달러였고 한이 찾으려는 것은 하드디스크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애시당초 둘은 지향점이 다르다. 그래서 곽철용 선생의 말처럼 "이 경우엔 원래 쇼당이 안 붙"는다. 

5. 추격전은 결국 도구로 전락했지만 감독은 최대한 재미를 끌어내려 시도한다. 닌자처럼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한의 카리스마를 강조하기 위해 그의 얼굴에는 유독 역광을 심하게 줬고 미세먼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안개와 붉은 조명은 암울한 시대 분위기를 한껏 살려낸다. 특히 몇몇 장면에서는 사소한 리듬을 살려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준호 일행이 주차장에서 차를 훔칠 때 반복되는 자동차 경보음이 긴장감을 더한다. 그리고 준호가 바에서 전화벨 소리를 듣는 장면도 소리의 리듬으로 긴장을 주는 장면이다. '사냥의 시간'에서 추격전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그 한계 속에서 재미를 주려는 시도는 충분히 했다. 그리고 그 시도에 나는 만족한다(물론 '터미네이터'에 비할 바는 아니다). 

6. 극단적인 추격전 끝에 준호는 한에게 죽을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한에게 죽은 봉식(조성하)을 쫓는 형 봉수(조성하)의 일행이 한을 쫓아 공격한다. 사냥꾼(=한)이 또 다른 존재의 사냥감이 된 순간이다. 추격전에서 준호는 쫓기는 자이긴 했으나 '주체'였다. 그러나 봉수의 등장으로 준호는 주체의 위치를 빼앗긴다. 그 가운데 준호는 겨우 살아남아 홀로 대만으로 향했다. 그러나 친구들을 모두 잃고 도착한 대만에서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애시당초 이 추격전은 준호가 주체인 싸움이 아니었다. 준호의 일행이 훔친 것은 도박장 환전소 금고의 돈이었으나 누구도 그 돈을 쫓진 않았다. 즉 준호와 그 일행들은 모든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도 아니고 자신과 상관도 없는 싸움에 내던져진 것이다. 

7. 결국 혼자 남아 도망친 준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이것은 조금 꼰대같은 결론이 될 수 있다. 준호는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를 한을 죽이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 마치 도망치려 한 현실에 피하지 말고 맞서라는 '꼰대'스런 메시지처럼 들린다. 온전히 청춘들 안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파수꾼'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사냥의 시간'은 청춘들의 불안과 좌절에 대해 시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랬다면 영화는 끝에 가서도 시대가 바뀌어야 함을 요구해야 한다. 여느 청춘들처럼 친구들과 있을 때 욕이나 찍찍 해대지만 결국 친구를 좋아하고 가족을 그리워 하는 아이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시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닌 청춘들 스스로에게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함은 "시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선언인지 꼰대의 도피인지 물어보고 싶다(차라리 '패배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덜 비겁해보인다). 

8. 궁금한 장면이 하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2020년 4월 23일 오후 9시16분) 온라인에서 진행 중일 GV를 본다면 다행이겠지만 귀찮아서 그냥 혼자 궁금증으로 남겨둔다. 영화에서는 네 친구 중 상수(박정민)와 기훈(최우식)이 죽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수는 준호의 꿈을 통해 죽었음을 짐작할 뿐이고 기훈은 빈대(김원해)의 대사에서 추측할 뿐이다. 차라리 장호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의 죽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쉬웠을텐데 굳이 상수와 기훈만 죽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의문스럽다. '친구를 잃었다'와 '친구가 죽었다'는 분명 맥락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상수와 기훈은 '잃은 것'으로, 장호(안재홍)는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장호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상실'을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싶었지만 기훈의 죽음은 장호의 죽음 이후에 언급된다(빈대의 대사와 자전거 가게의 상상). 이건 참 궁금한 대목이다. 

9. 결론: 추격전(장르영화)의 재미와 청춘에 대한 관찰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균형을 잘 잡았는가'라는 질문에는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보다는 위로와 휴식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장르영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 영화를 보는 일은 피로하다. 과연 세상의 모든 청춘들이 자신을 쫓아오는 킬러와 맞서 싸울만큼 여력이 남아있을까? 킬러를 없애고, 돈을 훔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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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SNUPE 2020.04.24 02:4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인터넷'이 생기고 세계가 조금 가까워졌을 때, 언젠가 '얼굴 없는 자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온전한 개인을 조금 더 표현할 수 있게 했고 그렇게 사람들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미래가 만들 '얼굴 없는 자들의 시대'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다른 의미의 '얼굴 없는 자들의 시대'를 맞이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는 것이 일상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마스크에 표정을 감춘 채 거리를 걷거나, 집에 머물고 있다. 사회에서의 익명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확대돼 버렸다. 소위 '코로나블루'라고 불리는 우울증세는 각자가 얼굴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타인의 존재가 희미해지면서 홀로 남았다는 고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해본다. 당연히 우리는 각자가 살기 위해, 타인을 살리기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마스크를 쓰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마음의 병은 짙어지고 있다. 

그러다 어떤 사진을 보게 됐다. 위 사진은 AFP 통신이 대구에서 코로나19와 사투 중인 한국 의료진들을 찍은 모습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감추고 곳곳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얼굴이지만 땀에 젖은 머리칼과 마스크, 반창고, 그리고 방호복에 눌린 흔적은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옅게 웃고 있는 그들의 눈에서는 "지쳤다"는 느낌보다 '생기' '열정'이 느껴진다. 그것은 '책임감'이나 '의무'같은 무거운 것에서 비롯됐겠지만 그 무게를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와 같다. 의지를 가진 자는 비장함과 함께 눈빛이 생기가 돈다. 그 눈빛은 신뢰를 준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든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선함'이다. 그는 비록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미처 가리지 못한 곳에서 선함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감춰가던 어느날, 한 청년의 얼굴이 공개됐다. 이 청년은 대학 신문사 편집국장까지 할 정도로 자기 생활에 충실하며 얼굴 역시 선량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텔레그램에 채팅방을 만들고 미성년자를 성착취한 영상과 사진을 공유했다. 파렴치한 성범죄의 정점에 이른 청년의 얼굴은 평범했다. 아니, 선해보인다고 말해야 맞을 것 같다. "악마의 얼굴은 어떨까?"라고 상상했을 때 붉은 얼굴빛과 바싹 올라선 눈썹 끝, 뾰족한 귀, 기괴한 원형을 그리다 날카로운 끝의 살기를 내뿜는 뿔, 소름 돋는 입꼬리를 떠올릴 수 있다. 매번 잔혹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얼굴이 공개됐을 때, 그들의 행동을 더해 '악마'의 얼굴을 덧 씌울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을 뺀다면 그들은 지하철과 버스, 혹은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얼굴은 행동의 증명이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얼굴은 행동의 증명이 되지 않는다. 

얼굴은 개인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운이 없어서 도플갱어를 만난다던지 어렸을 때 헤어진 쌍둥이를 만나지 않는 이상 얼굴은 개인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태어나고 나서 타인에 의해 부여되는 이름, 주민등록번호에 비하면 얼굴은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아이덴티티다. 더 나아가 얼굴은 내 부모의 자식이라는 증명이자 내 자식의 부모라는 증명, 내 형제의 형제라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은 그 자체로 책임이 따른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얼굴에 나타난다. 사람이 자주 지었던 표정은 주름으로 얼굴이 기억한다.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목숨걸고 싸운 의료진의 얼굴에는 영광의 상처가 기억되고 행동이 덧씌워져 얼굴과 정체성을 결정한다. 반대로 n번방 박사가 했던 행동은 얼굴에 덧씌워져 그 얼굴 자체를 '파렴치한 성범죄자'로 기억하게 할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이제서야 보는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할머니와 30대 사진작가는 프랑스 각지를 돌며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어 거대한 벽에 새긴다. 새겨진 사진은 삶을 온전히 새긴 작품이 된다.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가 있고 현재를 살고 있다. 얼굴은 그 모든 에피소드를 온전히 들려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지 않고 그들의 얼굴사진을 본 사람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JR이 찍은 얼굴사진은 바르다가 찍은 이야기와 만나 온전히 영화가 된다. 이것은 '얼굴'과 '삶'이 만나는 순간, 인간의 서사 그 자체다. 

나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이야기하며 '코로나19 의료진'과 'n번방 박사'라는 극단적인 사례를 가지고 왔다. 당연히 영화에는 이처럼 극단적인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고다르라면 조금 극단적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화철학은 가히 극단적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속 사람들은 '코로나19 의료진'과 'n번방 박사' 사이의 사람들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마스크에 얼굴을 감춘 채 삶을 사는 우리 다수는 그들처럼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n번방'에 동조한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코로나19 의료진'처럼 선한 의지와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얼굴은 이것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즉 얼굴은 가장 확실한 아이덴티티지만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때쯤 아녜스 바르다의 눈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바르다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선글라스를 벗은 JR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얼굴은 흐릿할 뿐이다. 사실 바르다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도 그토록 흐릿했을 것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사진으로 얼굴을 마주한 다음에야 그 얼굴은 조금 또렷했을지도 모른다. 바르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사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흐릿한 얼굴에 덧씌우고 있었다. 사람을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은 얼굴과 함께 이야기에서도 비롯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르다는 오래된 친구 장 뤽 고다르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고다르는 바르다를 만나주지 않고 문 앞에 메시지를 남긴다.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는 메시지에 바르다는 울컥한다. 짖꿎은 장난에 바르다는 매정함을 느낀다. 젊은 시절 선글라스를 즐겨쓰던 고다르의 얼굴에서는 차가운 지식인의 인상이 강하다. 영화 내내 바르다와 동행한 JR은 놀랍도록 고다르를 닮았다. 영화를 찍던 시기의 고다르는 90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됐다. 바르다가 기억하는 고다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다. 고다르는, 그의 영화에서도 드러나지만, 노인이 될수록 자의식이 더 강해졌다. 아마도 그의 마음 속에는 '길게 본 친구' 바르다를 맞이할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JR이 바르다를 맞이한다. JR의 얼굴에서는 '다시 쓰는 고다르'가 보인다. 흐릿한 그의 얼굴은 다시 써가는 친구와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앞서 코로나19의 시대를 '얼굴 없는 시대'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를 '얼굴을 숨긴 시대'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마스크와 스마트폰 액정너머에는 분명 얼굴이 있다.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 가장 확실한 아이덴티티다. 그러나 얼굴은 행동과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것을 담아낸다. 선한 사람은 얼굴을 감춰도 선하고 악한 자는 선한 얼굴을 드러내도 악하다.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다시 일상을 영위할 것이며 여전히 행동과 이야기를 얼굴에 새길 것이다. 마스크를 벗고 다시 만날 일상을 대비해야 하듯,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맞이할 일상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꽤 삶을 산 편이다. 내 얼굴은 내 지난 삶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은 어떻게 읽혀질까. 얼굴에 새겨질 삶이 조금 무겁게 다가온다. 


※ 이 글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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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플릭스 '킹덤' 시즌1은 작년 1월말에 공개됐다. 당시 나는 넷플릭스 미디어 행사에 참석해 남들보다 하루 빨리 시즌1의 1, 2화를 봤다. 그때 본 '킹덤' 시즌1의 인상은 진득하고 묵직한 기운의 정치사극에 가까웠다. 맛보기로 보고 흥미가 생긴 나는 '킹덤'이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전부 시청했다. 당시 이 드라마는 2018년 10월 개봉했던 '창궐'과 비교됐다. 두 작품 모두 조선시대에 좀비가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한량 느낌의 세자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무사(혹은 내시)가 있었다. 권력을 탐하려는 영의정이 있고 그는 왕을 능가하는 실세다. 여러모로 닮은 배경에서 '킹덤'이 '창궐'과 차별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음모와 지략이 오고 가는 싸움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즌2는 기대에 못 미쳤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실히 '킹덤' 시즌2는 기대와 다른 결과물이긴 하다. 액션은 더 강력해졌고 이야기는 더 뒤통수를 친다. 무게감은 한껏 줄어들었고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사극의 기운은 빠졌다. 시즌1과 많이 달라졌지만 이것대로 나름 매력이 있다. 적어도 '창궐'보다는 이야기의 맥락이 합리적이다. 

2. 시즌2가 전편과 달라진 점은 '슈퍼히어로 서사'에 있다. 더 정확히는 '토르의 서사'라고 봐도 좋다. 마블 히어로들의 특징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토니 스타크나 스티브 로저스, 토르 오딘슨은 저마다 결핍이 하나씩 있다. 토니는 자신이 판 무기로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다. 때문에 자신이 세상을 구하는 행위는 무기판매에 대한 회개와 같다. 스티브 로저스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군인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야 집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창(주지훈)과 꽤 닮아보이는 토르 오딘슨은 모든 것을 잃은 왕족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마다 죽음을 맞이했고 누나에 의해 자신의 왕국은 무너졌다. 동생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헤임달은 타노스에 의해 살해당했다. 토르는 모든 것을 잃고서야 가장 강력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3. 창은 시즌2 초반부터 (좀비가 된) 아버지의 목을 베고 스승(허준호)의 죽음을 목격한다. 게다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스승을 괴물로 만들고 다시 한 번 목을 친다. 가장 믿을 수 있던 무영(김상호)는 자신을 배신했고 결국 죽었다. 적어도 창이 갖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토르보다 뒤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시즌2는 이것을 보여주는데 집중하지 않는다. 사실 창은 처음부터 정의로운 세자였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변화를 주기 어렵다. 다만 좀 더 강해지고 비범해지는데서 "창이 변했다" 정도만 깨닫게 할 뿐이다. 그리고 창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접근했다가는 이야기가 길어지고 느려질 수 있다. '킹덤' 시즌2의 여러 장점 중 하나는 전개가 빠르다는 점이다. 여기에 내면에 대한 묘사는 방해만 될 뿐이다. 작가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4. 반면 조학주(류승룡)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빌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히어로 영화에서는 빌런의 서사에도 대단히 집중한다. 조커나 타노스처럼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빌런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 조학주는 3년전 왜군이 침략했을 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낸다. 극 중 대사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전쟁으로 많은 군사가 죽었다. 전쟁은 그 정도로 치열했고 크게 밀렸다. 이는 '대의명분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 몇몇 빌런을 연상시킨다. 흡사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저주받은 인디언 묘지에 아이의 시신을 묻는 아버지와 같다. 다만 이것으로 조학주가 어떻게 권력을 탐하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왕이 죽고 세자인 창이 왕이 되면 조학주와 그 가문은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창을 견제하기 위해 왕을 생사초로 살려뒀다고 이해할 뿐이다(시즌1에 이것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5. 그런데 시즌2에서 조학주는 중요한 빌런이 아니다. 마치 '무한도전' 초창기에 유재석이 "조학주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아~!"라며 박수치는 것과 같다. 끝판대장처럼 묵직했던 조학주가 죽어버리고 메인빌런으로 중전(김혜준)이 등판한다. 시즌1에서 사극에 없던 낯선 중전을 보여줬던 이 배우는 중전에 대한 감을 익힌 것인지 내가 적응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한결 보기 편해졌다. 보기 편해진 중전은 그제서야 무시무시함을 뽐낸다. 궁 안에 좀비를 풀어버렸을 때 "아, 얘는 권력이고 뭐고 그냥 미친 애구나" 싶었다. 원래 그게 더 무서운 법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긴 호흡을 가진 정치사극이었다면 중전이 창을 제압하고 긴 호흡의 정치싸움을 했을테지만 이것은 좀비액션사극이니 그냥 이판사판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는 '창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이 토르의 서사에 충실할 생각이었다면 그때쯤 '세자무쌍'이 펼쳐져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즌2는 그 길로 갈 생각이 없었는지 처절한 생존싸움으로 향한다. 다행스럽다. 

6. 시즌2는 생략을 많이 한 만큼 궁금한 것도 많다. 특히 중전의 서사는 정말 궁금하다. 나름 메인빌런이고 '이 구역의 미친년'인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대사 몇 마디로 추측해야 할 뿐 알 수가 없다. 만약 '킹덤'의 스핀오프가 하나라도 나올 수 있다면 나는 중전의 탄생과정을 보고 싶다. 분명 이 아이는 딸이라서 아버지에게 핍박받는 수준이 아니라 딸 중에서도 서열이 밀려서 아버지에게 핍박 받았을 것이다. 그러다 자기보다 서열이 앞선 또 다른 딸을 지략으로 죽이고 왕까지 어떻게 해버려서 중전으로 올랐을 것이다. 나이로 따지면 처음부터 중전이 아닌데 기존 중전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수 있다. '중전 라이즈'같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한국 드라마 중 연민정(이유리), 신애리(김서형) 이후 최강의 악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7. 중전 외에 범팔(전석호) 캐릭터도 재미있다. 괴물이나 좀비가 나오는 이야기에서 범팔 같은 비호감에 허당 캐릭터라면 일찌감치 죽는다. 그런데 이 캐릭터는 서비(배두나)와 함께 큰아버지 조학주의 음모를 알아가면서 조금씩 변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의외의 검술까지 보여주며 창에게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아마 '킹덤'의 모든 시즌을 통틀어 가장 변화가 큰 인물이 아닐까 싶다. 범팔의 변화는 나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것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표현 중 하나다. 갑자기 각성해서 강한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꾸역꾸역 해나가고 힘들 때는 남에게 의지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도래한다면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가 범팔일 것이다. 

8. 다시 세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에 대한 슈퍼히어로 서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창궐'이었다면 별일 없이 왕이 됐을 세자는 스스로 왕이 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원자(로 위장된)에게 왕위를 주고 자신은 세상으로 나가 역병을 정복하려고 한다. 익숙한 대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그는 조선이 필요로 하는 왕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그래..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쫓는거야.. 그는 왕이 아닌 조심스럽게 묵묵히 돕고 보호하는 구원자.. 세자저하이기 때문이지..". 슈퍼히어로 서사를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마무리다. 시즌3을 암시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전지현은 강호를 누비는 어둠 속의 무사처럼 보인다. 시즌3에 이르게 된다면 이들은 본격적으로 슈퍼히어로처럼 굴지 않을까 싶다. 

9. 결론: 시즌1에 비하면 더 가볍고 전개가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세세한 부분에서는 클리셰를 뒤집으며 의외의 재미를 준다. 혹시 시즌1이 별로였던 사람이라도 시즌2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추신1) 드라마 '검사내전'을 볼 때 성사무관(a.k.a 카뮬로스 대군주)을 연기한 안은진 배우가 인상적이었다. 그 분을 다시 보니 반갑다. 

추신) '킹덤' 시즌2는 돌비 비전과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한다. 폰(갤럭시S9플러스)으로 이걸 감상하는데 다른 넷플릭스 작품과 달리 화면이 깨진다. 원래 올 하반기에 폰 바꿀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폰 바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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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라는 명제는 나에게 꽤 오랜 논쟁꺼리다(아무도 관심없겠지만). 예를 들어 나는 '기생충'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그것이 온전히 봉준호 감독 개인의 성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생충'의 시작은 봉준호 감독의 아이디어였을지라도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제작자와 촬영, 조명, 미술, 편집, 연기, 홍보가 있었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들 각자에게 '기생충'은 자신의 업적이 되고 필모그라피가 됐다. (봉준호 감독 스스로도 늘 하고 다니는 말이지만) '기생충'은 좋은 배우들과 스탭들이 감독의 의도를 온전히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는 모두의 예술이다"라고 믿는 편이다. 

1-2. 그런데 어떤 경우에 "영화는 모두의 예술"이라는 주장은 썩 개운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김보라 감독의 '벌새'의 경우 당연히 그 영화에도 좋은 배우와 스탭들이 참여해 감독이 뜻하는 바를 온전히 반영했다. 그럼에도 '벌새'에서 가장 깊게 드러나는 것은 감독의 경험과 거기서 나오는 자의식이다. '벌새'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보편적 경험을 끌어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감독이 자신의 사적인 경험에 대해 얼마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내며 표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벌새'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이야기를 쓰고 장면을 그려낸 김보라 감독이다. '기생충'의 경우와 다르게 '벌새'는 온전히 '감독의 예술'이다. 

2. 나는 안젤리나 졸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와 대화를 한 적도 없고 그의 생각이 담긴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이자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몇 명의 아이를 입양했으며 난민과 아동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넷플릭스 영화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안젤리나 졸리가 가지고 있는 '난민과 아동 문제에 대한 관심'이 온전히 반영된 영화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공포정치의 혼란을 헤쳐 나가는 7살 소녀 로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단 전쟁과 아이가 등장한다는 지점에서 "화면 왼쪽 상단에 유니세프 로고하고 ARS 번호만 박으면 완벽한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적어도 '가버나움'을 볼 때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가버나움'보다 더 멀리 간다.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봤다면 나를 포함해 온 사방이 눈물바다가 됐을테니 말이다. 

3. 주인공 로웅은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어린 소녀다. 미국에 협조하는 공무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언니, 막내 동생 포함해 무려 6남매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고 크메르 루주 정치가 시작된다. 수도 프놈펜에 살던 로웅의 가족은 영문도 모른 채 집을 떠나 먼 피난길을 떠난다. 이때부터 로웅의 고난은 시작된다. 영화는 지루할 정도로 로웅 가족의 피난길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 공을 들인 이유는 이 이야기가 로웅의 가족이 크메르 루주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유복했던 한 가정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길바닥에 주저 앉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영화 시작 30분 안에 모두 지나간다. 이어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4. 로웅의 가족은 어느 수용소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어린 로웅도 예외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그들이 농사지은 모든 작물은 군인들에게 보내지고 이들에게는 물에 불린 곡식 한 국자가 한끼 식사다. 로웅의 어린 동생조차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로웅의 오빠 킴은 옥수수를 훔치다가 군인들에게 맞는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버팀목이 됐던 부모마저 잃은 아이들은 이제 전장에서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의 진짜 고통은 수용소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돼 혼자 살아가는 로웅에게서 극대화된다. 이것은 소위 '가난포르노'라는 비판적 단어의 지점을 넘어서 전쟁과 독재가 아이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야기와 개인적 경험이 맞닿지 않는 이상 어떤 이야기에도 잘 울지 않던 나조차 이 이야기에서는 몇 번 울컥하게 된다. 

5. 이 이야기가 특히 슬프고 끔찍한 이유는 이 모든 이야기가 로웅의 시점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볼 때 크메르 루주 공포정치와 킬링필드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 볼 것을 권장하고 싶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은 영화를 다 보고 찾는 것이 좋다. 영화가 로웅의 시점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로웅이 가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문도 모른 채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고, 몇날 며칠을 걷다가 수용소에 도착해 강제 노역을 해야 한다.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는 군인들의 요구에 주눅든 어깨로 수긍하게 되고 그 와중에도 로웅을 바라볼 때는 자상하고 따뜻한 눈빛을 건넨다. 심지어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에도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면서 "잘 지내야 한다"고 인사한다. 그 모든 상황은 로웅의 관점에서 로웅이 체감하고 그 체감을 관객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한다. 

6. 나는 최근 '1917'을 보면서 '전쟁을 체험'하게 한 연출에 감탄한 바 있다. '1917'과 맥락은 다르지만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역시 전쟁을 체감하게 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영화적 문법을 활용하고 집요하게 한 사람(로웅)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 이뤄진다. 그나마 '1917'의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총을 든 군인이었다. 그리고 로웅은 이제 막 7살이 된 여자아이다. 로웅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지뢰를 매설하는 장면은 영화 속 사건의 아이러니와 크메르 루주의 잔혹함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 잔혹함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고통스럽고 슬프다. 아재들의 눈물버튼이었던 한국영화 '오싱'('똑순이' 김민희 주연)이 있다. 적어도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슬프다.

7-1. 결론: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캄보디아의 딸은 기억한다"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캄보디아의 딸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버지를 죽인 자들의 얼굴은 어느덧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매설한 지뢰는 자신의 동족을 죽이고 있다. 전쟁은 혼란이고 이념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혼란 속에서 껍데기를 벗어내고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딸은 살아남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딸은 기억한다"는 문장은 혼란 속에서 떠난 가족을 기억한다는 말과, 가족을 죽인 자들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 혼란을 기억한다는 말. 여러 가지 말로 해석된다. 피바다를 걸어서 나온 캄보디아의 딸은 결코 그 기억과 감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7-2. 결론: 앞서 거론한 물음에 대해 정리하자. 나는 안젤리나 졸리가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그런 거 찾아보는 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아는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정보를 종합해보면 그에게 이 이야기는 운명처럼 다가갔을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이 의도한 바를 담아 영화를 만들었다(넷플릭스 제작이니깐). 이 영화에는 감히 '유니세프 로고와 ARS 번호를 박자'라는 말도 못하겠다. 전쟁으로 인한 고통에 등급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킬링 필드 속 7살 여자 아이'의 이야기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난민과 전쟁고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추신) 넷플릭스가 이상한 건지 내 스마트폰이 이상한 건지, 자막 싱크가 안 맞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의 선전구호 몇 개는 자막도 없다. ...그건 자막이 없는 게 다행이다. 선전구호를 있는 그대로 계속 봤다면 나 역시 선동됐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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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영화를 아주 오랫동안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언제까지 필름영화를 봤으며 언제부터 디지털 영화를 보게 됐는지 구별하지 못한다. 촬영과 영사시스템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애시당초 관심도 없었고) 디지털 영화를 맞이했다. 그저 나는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매료됐던 것 같다. '디지털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게 됐을 때, 극장에서는 강철 수트를 입은 중년 재벌이 하늘을 날고 있었고 망치를 든 데미갓이 천둥번개를 부르고 있었다. 방패를 든 미국 군인도 아이스바가 돼있었다. 디지털과 필름은 내가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데 그리 깊게 고민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디지털이면 어떻고 필름이면 어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만인 것을. 

2. 이것은 마치 취권을 연마하던 성룡의 마음과 같다. 양손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무술을 연마하다가 모래주머니를 내려놓는다. 그러면 갑자기 손이 빨라진다. 디지털 영화를 의식도 못하고 거기에 익숙해져있던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 필름영화를 다시 만났을 때 새삼 '필름은 영화에 최적화 된 매체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디지털 영화의 세상이 돼봐야 필름의 귀함을 아는 것이다. 디지털 영화가 주류가 됐던 어느날,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과 스탠리 큐브릭의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를 필름으로 볼 기회를 얻었다. 내가 어릴적 봤던 비 내리는 필름영화의 우월함은 분명히 존재했다. 단지 어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지나왔으며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필름영화를 지지하는 '영화보수주의자'일까?

3. 크리스토퍼 케닐리의 다큐멘터리 '사이드 바이 사이드'는 재미있는 화두를 던진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온 시기는 영화의 진화일까, 퇴보일까? 디지털은 영화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미래의 영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는 키아누 리브스(제작자)를 인터뷰어로 앞세워 헐리우드 영화의 내노라는 거장들을 다 만난다. 제임스 카메론과 마틴 스콜세지, 데이빗 핀처, 크리스토퍼 놀란, 조지 루카스, 리차드 링클레이터, 로버트 로드리게즈 등 연출자부터 비토리오 스토라로, 윌리 피스터, 로렌조 디 보나벤투라 등 촬영감독과 편집, 영사 등 헐리우드 영화를 지탱하는 감독과 스태프들을 모두 만나 필름과 디지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여지껏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던 '필름 vs 디지털'에 대해 영화는 진지하게 '백분 토론'을 벌인다(실제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99분이다). 

4. 동시대를 산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도 필름과 디지털에 대한 입장 차이는 명확하게 갈라진다. 디지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제임스 카메론과 조지 루카스, 필름을 지지하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윌리 피스터('인셉션', '다크나이트' 등 촬영감독), 데이빗 핀처. 필름을 지지하지만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마틴 스콜세지. 의견은 모두 제각각이며 각자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요약하자면 디지털 작업은 영화 제작과 영사에 편리를 가져다 줬지만 영화를 작업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권위는 내려놓게 한다. 필름작업은 그 자체로 최고의 퀄리티를 얻을 수 있고 영화 예술의 경지를 가능케 했지만 작업이 불편해 영화를 소수의 예술로 만들도록 한다. 

5.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디지털 작업이 가져다 주는 '예술 민주주의'에 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모두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진정한 영화예술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음악에 있어 디지털화가 불러온 폐해를 알고 있다. 과거 LP판으로 음악을 듣던 시절 LP판은 음악을 담는 거의 유일한 저장매체였다. 때문에 레코드샵에서 구매하고 커다란 전축이 있어야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조금만 관리를 자롯해도 LP판은 뒤틀리고 스크래치가 생겨 망가진다. 때문에 한 번 음악을 듣고 나면 마른 헝겊으로 닦아서 보관해야 했고 그 작업에서 'LP판은 소중히 다뤄야 한다=음악은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디지털 음원이 음악시장의 중심이 되고 음악은 더 이상 소중히 다뤄야 하는 것이 아니게 됐다. 장터처럼 쫙 깔린 음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악은 더 자극적이고 시각적이어야 했다. 이미 MTV 시대를 거치면서 '보는 음악'이 자리 잡았지만 디지털 시대는 모든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만들어버렸다. 

6. '사이드 바이 사이드'는 영화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작이 간편해진 카메라와 편집, 영사시스템·플랫폼의 등장은 모두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화 민주주의를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숙고해서 어렵게 만들어내는 '영화 예술'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게 '영화보수주의자'들의 우려다.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캠코더가 등장했을 때 영화는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중고등학생들이 캠코더를 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내던 시기가 있었다. 현재에도 영화를 만드는 청소년들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영화 민주주의'의 장밋빛 미래가 보였던 20세기말과는 다르다. 영화에는 점점 더 거대자본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자본은 '영화 민주주의'를 집어삼켰다. 영화예술을 종식시킨 것은 디지털이 아닌 그것을 이끌어 낸 자본이었다. 

7. 그렇다면 디지털은 예술이 될 수 없을까? 이것 역시 1995년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를 중심으로 등장한 '도그마95' 선언에서 등장한다. 2020년에 와서 말하지만 '도그마95'는 실패한 영화혁명이다.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기존의 문법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는 기존 영화인과 새로운 영화학도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묻혔다. 캠코더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어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디지털 영화는 기존 영화와 질감이 다르다. 때문에 필름영화의 문법으로 디지털 영화를 찍으면 아주 어색해질 수 있다. 나는 소위 '파운드 푸티지' 영화라고 불리는 것이 영화의 미래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역시 호러영화의 하위장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8. 나는 프랑스 누벨바그와 아메리칸 뉴 시네마, 독일 뉴저먼 시네마가 등장하던 시기의 영화를 알지 못한다. 이 이름들은 모두 영화혁명을 대표하던 이름이다. '도그마95' 선언의 멤버들처럼 디지털 영화는 분명 거대한 혁명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디지털 영화는 조용히 세상을 바꿀 뿐이다. 이 혁명은 자본을 등에 업고 모든 영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비자본의 영역(독립영화)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서 새로운 장르영화를 만났고 새로운 예술적 성취를 목격했다. 이미 영화는 혁명에 잠식됐다. 모두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지만 영화예술은 늘 그곳에 굳건히 존재했다. 디지털을 무기로 삼은 자본은 시장을 잠식하고 있지만 필름은 죽지 않고 좀비처럼 힘을 발휘하고 있다. 디지털 영화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가 아닌 혼돈의 시대다.

9. '사이드 바이 사이드'는 2012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8년은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나기 충분한 시대다. 이 영화에서는 넷플릭스의 시대까지 예견했다. 2020년에 영화가 가져야 할 고민은 디지털 영화가 아닌 VR 영화 시대의 영화 예술을 고민해야 하고 전염병 정국 속 극장 플랫폼의 위기가 영화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 '사이드 바이 사이드'가 던진 화두는 영화를 보고 만드는 사람이라면 매년 새롭게 고민해야 할 화두다. 

10. 결론: '사이드 바이 사이드'는 다큐멘터리지만 아주 재미있다. 걸쭉한 단어로 디지털 영화를 디스하는 데이빗 핀처부터 필름 영화에 대한 맹신을 드러낸 크리스토퍼 놀란, '매트릭스'에 대해 궁금한 것을 키아누 리브스에게 직접 물어보는 꼬맹이 등. 여러 볼꺼리와 재미가 많은 영화다. 


추신) 이 영화는 2013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와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현재 왓챠플레이에서 서비스 중이다. 왓챠플레이 서비스본은 EDIF 상영본으로 일부 오타와 문어체 번역이 거슬리지만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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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절대적인가"라는 주제는 물리학자들이나 해야 할 토론이다. 어쩌면 물리학계에서는 시간의 절대성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학계의 근거까지 찾아볼 생각은 없다. 과학적 근거가 없이도 우리는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말은 평일보다 시간이 빨리 간다"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말은 실제로 평일보다 시간이 짧다. 대신 살면서 누구나 해보는 "아무것도 안 할 때 시간이 빨리 가더라"라는 한탄을 이야기 할 계획이다. 이 말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내 군생활은 천년만년 지나는 것처럼 길던데 남의 군생활은 참 빨리 끝나더라"는 '체감'에서 비롯된다. 시간은 물리적 단위이자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시간의 경과'를 체감으로 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은 절대적 측정이 가능할까? 시계가 움직이는 물리적 단위는 초침 하나가 가는 간격만큼 일정하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시간의 단위는 그렇게 규칙적이고 일정할까? 2월이 28일까지 있는 것과 29일까지 있는 것은 시간의 절대성에 반대되는 근거다. 즉 시간은 절대적 측정이 불가하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에 이르러 시간의 상대성을 영화에 적용했다. 자각의 범위('인셉션'), 공간('인터스텔라'), 경험('덩케르크')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무의식과 우주, 전쟁터에서 각기 다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테넷'에서도 시간의 상대성을 이야기 할 지 모르겠지만) 그의 '특수상대성이론 3부작'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고 믿는 놀란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놀란은 "시간은 상대적이다"라고 강조하기 위해 무려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샘 멘데스의 '1917'은 '덩케르크'와 반대지점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시간의 단위는 절대적이다. 영화적 시간과 영화 밖의 시간이 동일한 단위로 흐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전쟁 바깥에 있는 관객을 전쟁 내부로 끌어들여서 관객과 인물의 시간을 동일시 시킨다. 이것은 체험을 극대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1917'이 시간의 절대성을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쫓아가는 인물은 윌(조지 맥케이) 한 명이기 때문이다. '덩케르크'에서처럼 해변과 배, 하늘에서 각각의 인물을 보여주는 대신 시간을 체감하는 단 사람만이 이야기를 이끈다. 당연히 한 사람에게 시간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체감하는 시간만이 그가 아는 시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시간(개인)은 상대적 시간(집단)에 귀속되는 것일까? 이론상 개인의 시간은 집단의 시간에 귀속된다. 그리고 집단은 개인의 합으로 이뤄진 만큼 그 안에서 시간은 상대적이다. '덩케르크'에서처럼 해안가에 떼거지로 있는 군인에게도 시간은 분명 상대적이었을 것이다. 해안가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던 군인은 배가 침몰하자 바다에 빠지고 이어서 보트를 타고 온 민간인에 의해 구조된다. 해안가의 시간이 바다의 시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1917'은 시간의 상대성에 절대성을 부여한다. 이는 집단의 시간도 일치하고 동일하게 흐를 수 있다는 주장과 같다. 영화 속 윌이 하는 경험은 2시간의 제한을 가지고 관객과 함께 간다. 관객은 윌이 보고 듣고 걷고 뛰는 만큼을 공유하며 그와 동일시 된다. 시간을 절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감각을 차단한 채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 영화는 개인의 경험을 집단이 공유하는 행위다. '경험의 공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는 편집으로 시간을 잘라내고 붙이고 늘리고 줄인다. 영화적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15년이 흘러도 현재에서는 30분만 흘렀을 수 있다. '1917'은 편집으로 완성되는 영화적 시간을 부정하고 영화적 경험을 관객과 공유한다. 그 결과 '1917'은 '영화적 체험의 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시네마'를 부정하고 '시네마'의 지향점에 도달한 괴상한 성과에 이른다. '1917'은 편집으로 시간을 늘리고 줄이며 관객의 감각을 조작하고 메시지를 담아내던 과거의 영화이론을 부정한다. 이런 시도가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버드맨'이나 '그래비티'처럼 영화적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일치시키려는 영화는 많았다. 그 와중에 '1917'이 조금 더 특별하게 보인 이유는 이 영화는 '덩케르크'라는 반대방향의 영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시간', '상대적 시간'으로 대변되는 '덩케르크'와 '개인의 시간', '절대적 시간'을 보여주는 '1917'은 분명 비교할 가치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터에서의 시간'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인간성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극한의 야만적 현장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의 시간'이라고 설명하면 더 쉬울까? 나는 '죽음과 가까운 순간의 시간은 조금 더 다르게 흐르겠다'라고 짐작할 뿐 그것을 자세히 알 방법이 없다. 그저 '1917'과 '덩케르크'를 보며 '전쟁터에서의 시간'을 '체감'할 뿐이다. 

'1917'은 기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다. 전쟁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고도의 장치가 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있다. 여기에 더 의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죽음에 인접한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그래비티'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지만 두 영화가 마주한 죽음은 약간 다르다. 이것은 사방에 죽음이 널린 전쟁터와 공기조차 없는 우주가 주는 감각적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17'의 기술적 완성도는 결국 '전쟁을 체험'하게 하는데 있다. 공간의 이동을 지워버린다던지 넓은 공간을 활용해 전쟁터를 연출한다던지, 대단히 뛰어나게 '사실'을 묘사해낸다. 

그에 반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윌이 명령서를 전달하러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것이 전부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떠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이야기적 차이점을 찾기는 어렵다(솔직히 소설로 본다면 '1917'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훨씬 재밌을 것 같다). '1917'이나 '그래비티' 모두 굉장히 뛰어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최고의 영화가 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이야기'에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버드맨'은 앞선 두 영화와 맥락이 다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해 최고의 영화는 '보이후드'였다고 주장한다). '1917'은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지만 영화 안에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여러 가지 텍스트를 필요로 한다). '1917'은 성과와 과제가 명확한 영화다.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에 대한 지식만 풍성했어도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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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야기'가 고갈된지는 이미 오래다. 헐리우드는 진작에 코믹스를 시각화하며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있고 일본은 버블경제 시절의 유산을 갉아먹으며 망해가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삶이 변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이야기꺼리가 생긴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과거의 유산'이라는 안전한 보물창고에서 이야기를 찾아내 영화로 만들어낸다. 이런 콘텐츠의 가뭄 속에서도 간혹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시네마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사유하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반갑고 축복된 일이다. 나는 '과거의 유산'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유산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혹은 어떻게 가공할 수 있는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히어로영화의 악당을 통해 피폐해지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봤고 오래된 역사의 한 자락을 통해 관계를 이해했다. 그리고 고전문학을 통해 현재를 투영할 수 있었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1868년 미국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적 소설이다. 150년도 더 된 고전문학이자 '자전적 소설'인 만큼 150년전 여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성별이 '남자'인 나는 영화를 보기 전 궁금증을 갖게 된다. "지금 150년전 여인의 삶을 엿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은 아씨들'은 1995년 영화로 본 적이 있다. 오래된 소설이라는 기억이 있었고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이라는 것도 생각나지만 그리 인상적인 영화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추천한 'YWCA 선정 청소년 추천영화'에나 들어갈법한 연출이 시큰둥하게 다가왔다(그 '추천영화'에 들어갔던 목록은 '사운드 오브 뮤직',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같은 것이었다. ...죄다 명작이었지만 사춘기 반항심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나 봤었다). '작은 아씨들'이라는 콘텐츠 자체가 나에게는 '낡은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레타 거윅은 배우이자 감독이며 꽤 진보적이고 세련된 영화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연출작인 '레이디버드'조차 레트로의 향기가 진한 영화였다. '작은 아씨들'은 '레트로'라고 부르기엔 너무 멀리 간 이야기다. 

'작은 아씨들'이 원래 이런 전개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복잡한 전개를 띄고 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나눈 색(色)이다. 보통의 영화들은 '과거=흑백', '현재=컬러'로 나눈다. 어떤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색구분을 하지 않기도 하고 색보정을 다르게 해서 차이를 두기도 한다. 한국드라마 '시그널'의 경우는 아예 화면을 다르게 구성해서 차이를 둔다. '작은 아씨들'의 경우는 과거와 현재의 '색'이 꽤 많은 것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과거는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을, 현재는 푸른 계열의 '차가운 색'을 유지한다. 가족이 함께 모여 지내는 기억 속 과거가 따뜻했다면 뿔뿔이 흩어진 현재는 차갑고 외롭다. 색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직접적이면서 꽤 고전적인 방법이다. 마치 "옛날이 좋았지"라는 것을 대놓고 표현하는 모양새다. 

그러다 베스(엘리자 스캔런)가 위독하면서 뉴욕에 살던 조(시얼샤 로넌)가 집으로 돌아오고 가족이 모이기 시작한다. 작은 차이였겠지만(혹은 내 착각이었겠지만) 베스의 죽음이 근접할수록 현재의 톤은 더 푸른 빛을 띄고 있다. 그러다 에이미(플로렌스 퓨)와 로리(티모시 샬라메)가 돌아오고 가족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색은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조가 학교를 내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살기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색은 유년시절을 보여주는 색과 거의 비슷해진다. 영화 속 색깔의 'Warm & Cool'은 인물의 감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때가 좋았지"가 아니라 "그때가 좋았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좋아질 수 있다"는 의미와 통한다. 

지금이 그때처럼 좋아지기까지, 그들 각자는 원하는 삶을 살았을까? 마치가(家)의 네 자매는 유년시절 꿨던 꿈을 모두 이루고 이어질 것 같았던 사랑을 찾았을까? 당연히 아니다. 메그(엠마 왓슨)는 배우의 꿈 대신 아등바등 사는 아내가 됐고 에이미는 화가가 되지 않았다. 조는 자신의 책을 출간했지만 수많은 좌절과 포기를 경험했다. 게다가 로리는 에이미의 남편이 됐다. 베스의 삶은 더 지속되지 않았다. 내가 영화리뷰를 쓰면서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쓴 기억이 있어 찾아봤다. 그레타 거윅이 출연했던 영화 '우리의 20세기'를 보고 썼던 말이다. 관련이 없을 수 있지만 '작은 아씨들'은 '우리의 20세기'가 하려 한 말을 이어서 하고 있다.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을 하더라도, 당연히 될 줄 알았더라도 결과는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그 길에는 행복이 머물고 있다. 계획한 방향과 다른 길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 길조차 온전히 걷다 보면 '행복'이라는 녀석이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석이 가능할까? 잠깐이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을 떠올렸다. 나쁜 남자 고추 박살내는 영화보다야 우아하고 지적이지만 '작은 아씨들'은 조를 중심으로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영화는 150년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출판사의 말처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다.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코르셋을 거부하고 머리를 짧게 깎으며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는 것일까? 그것 또한 그녀들의 선택이라면 페미니즘이라고 불러도 좋다. 다만 그것이 '근본'은 아니다. '작은 아씨들'의 조는 결혼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지만 결국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한때 조는 언니 메그가 존 브룩(제임스 노턴)과 결혼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메그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존과 결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한때 "여성의 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 동생에게 "개소리 집어쳐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성을 보호할 것이면 그냥 강철정조대를 차는 것이 낫지, 그 무슨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냐"라는 취지에서 한 말이다. 성을 보호하는 일은 정조대를 차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성'(어쩌면 '이상적인 성')은 성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성이다. 이는 남녀노소 모두가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다. 그 합의를 위해 동물은 구애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이게 연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작은 아씨들'의 여성주의는 나쁜 남자 고추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메그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기를 선택했고 에이미는 부자 약혼자의 프레드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리고 언니를 사랑했던 로리를 받아들인다. 조는 꿈을 찾아 떠났던 뉴욕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연애의 자기 결정권을 확보한다.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걷다보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거기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걸어가야 한다. 이것은 21세기 여성의 범주를 넘어 삶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정치적 활동을 하고 권리를 찾는 모든 일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옷을 입어야 하며 핸드폰 요금을 내야 한다. 삶은 우리의 사상과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그 삶의 가이드라인과 같은 영화다. ...이게 원작소설부터 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추신) 1995년에 봤던 '작은 아씨들'은 워낙 어릴 때 봤고 감흥도 적었던 탓에 원작소설이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2020년의 '작은 아씨들'은 원작이 조금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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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어릴적에는 트렌디 드라마가 유행했었다. 장동건이나 김희선 같은 배우들이 나와서 연애를 하거나 대충 여자주인공이 신데렐라처럼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런 드라마들 와중에 나는 유독 역사드라마를 좋아했다.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같은 대하사극은 부담스럽더라도 '제5공화국'이나 '코리아 게이트' 같은 드라마는 정말 재밌게 봤다. 당연히 '모래시계'같은 드라마도 좋아했고 '아스팔트 사나이', '올인' 같은 드라마도 좋아했다. 말랑말랑한 로코 드라마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그런 건 유독 보지 않았다.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드라마의 매력은 감정을 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바쁘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풍성하게 꾸려질 정도로 긴장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인물에 대해 어떠한 감정의 시선도 보내지 않기 때문에 실존인물이기도 했던 드라마 속 등장인물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2. '남산의 부장들'은 잊고 지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의 이야기다. 2004년 만들어진 영화 '그 때 그사람들'도 좋아하는 영화인데 당연히 '남산의 부장들'도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좋은 배우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과감한 해외로케로 이야기의 디테일과 몰입감을 더했다. 첩보장르영화로써 이 영화의 완성도는 굉장했다. 다만 그 와중에는 나는 이 이야기에서 위험한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40년전 얘기이며 사실상 '끈 떨어진 구시대의 독재자' 이야기가 더 이상 위험한 소재일리는 없다. 나는 이 이야기가 가진 정치적 태도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비록 이야기가 오래된 소재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시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3. 이 영화에는 이병헌과 곽도원, 이희준, 이성민 등 엄청난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맡은 역할 역시 역사 속에서 굉장한 무게감을 자랑했던 실존인물들이다. 영화는 이 인물들 가운데 김규평(이병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현직 중앙정보부장으로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전직 중정부장 박용각(곽도원)은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며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은 사건에 불을 지피는 인물이다. 그리고 박통(이성민)은 사건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만약 이 이야기에 정치적 태도가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에 박통에 대한 태도와 같다. 그 시대는 엄연히 '박통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우민호 감독은 이야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시대상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인물들에게 집중해 갱스터영화나 첩보스릴러 영화의 구조를 만들어버린다. 나는 이 태도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4. 이야기는 박통에 대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독재자'가 아닌 '장기집권을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5.16에 대해서도 감독의 의견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말을 빌어 '혁명'이었다고 표현한다(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감독의 의견이 아니다). '독재자'는 '절대악'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장기집권을 한 사람'이라면 그 고충에 접근하기 쉽다.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한 박통은 18년간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지치고 히스테릭한 상태다. 미국은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고 한때 데리고 있었던 박부장은 자신을 잡기 위해 해외에서 수를 쓰고 있다. 박통은 외롭고 지쳐있으며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과 그래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혼재한다. 

5. 박통의 이같은 심리가 보여지면서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영화 속 박통을 동정했다. 그러다 단 몇 초만에 정신을 차리고 "아니지, 내가 왜 박통을 동정해?"라며 냉정을 유지했다(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자). 이것은 재벌 걱정하는 방구석 오타쿠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는 20년 가까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나는 그 권력의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다. 냉정을 찾고 난 뒤 나는 근원적인 물음을 갖게 됐다. "박통에 대한 '정치적 중립'이 가능할까?". 박통이 집권하던 시대에서 벌써 40년이 흘렀다. 그의 행적과 시대에 대해 쉬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역사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시대다. 그 평가는 정치적 이념을 바탕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져 이뤄진다. 그렇게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즉 한쪽 진영의 평가와 반대편 진영의 평가가 누적되면서 박통은 마치 동전처럼 양면만 존재하는 인물이 됐다. 그러고 나서 '남산의 부장들'이 하려는 시도는 동전을 세로로 세우는 일과 같다는 걸 알게 됐다. 

6.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전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동전을 세우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지게 된다. 그때 어느쪽 면이 위로 올라올 지는 알 수 없다. 박통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굉장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문득 광화문에서 태극기 흔들던 어르신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봤다. 아마도 "각하께서 저렇게 외로운 시간을 보내셨다니"라며 펑펑 울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만약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면 정치적 반대편의 반응도 예상이 가능하다. "이 영화는 박통을 미화하는 영화다"라며 분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로 인해 뜨거운 불판위의 오징어처럼 한바탕 논쟁의 장이 펼쳐질 수 있다(영화를 흥행시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7. 나는 '남산의 부장들'이 박통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업영화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의 결과물처럼 내놓을 것이라면 아예 박통이라는 인물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의 결과물에서는 박통이 엄연한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등장인물이 아닌 부장들 사이의 대상이나 도구가 됐다면 영화는 더 안전한 길을 갈 수 있다. 임상수 감독의 '그 때 그 사람들'과 비교해보자. 이 영화는 박통뿐 아니라 사건 전체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허허실실대며 비아냥대듯 사건을 바라보는 이 태도는 실제 사건과 관객 사이에 거리감을 준다. 이 거리감으로 인해 관객은 오히려 사건과 인물, 정치적 상황에 대해 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그 사람들'에서는 모두가 우습고 유치했다. 

8. '남산의 부장들'은 브로맨스 영화같은 구석이 있다. '천문'과 같은 훈훈한 브로맨스였다면 좋겠지만 이것은 박통과 김부장, 곽실장으로 이어지는 삼각 로맨스다. 김부장이 비오는 날 궁정동 안가에서 박통의 전화를 엿듣는 장면, 여기서 김부장의 표정은 참 멜랑꼴리하다. 마치 "그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나를 버리려 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배신감을 눈으로 표현하며 애절한 장면을 연출한다. 박통 역시 "나는 외롭고 지쳤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해. 나는 김부장이 좋은데, 김부장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거야. 곽실장은 좀 멍청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잘 헤아려줘"라는 분위기다. '남산의 부장들'과 '천문'을 같은 야오이 장르로 본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좀 더 어른스럽다. 

9. 나는 지금의 20대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 지 정말 궁금하다. 10.26과 5.16, 12.12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성세대들보다 더 거리감이 있을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박통과 그 때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꼰대' 마인드인지 모르겠다. 그저 바램이라면 '천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브로맨스가 가미된 첩보스릴러 영화로 보고 휘발시키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묘사한 박통에 대한 감정적 접근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위험해 보인다. 그에게 공감하는 대신 그가 한 일들을 찾아보는 정도로 역사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역사공부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픽션은 그저 매개체일 뿐이다. 

10. 결론: "'남산의 부장들'이 흥행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썩 긍정적이진 않다. 긴장감 넘치는 첩보스릴러긴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다. 게다가 약간 난해하기도 하다. 가상의 사건을 다룬 첩보스릴러와 실제 사건을 다룬 동 장르영화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실제 사건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라면 관객들도 당연히 무게감을 가지고 극장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마케팅팀도 난감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SNS 마케팅처럼 유머러스한 마케팅을 펼치기에도 부담스럽다. 결국 이 영화가 잘되는 방법은 '입소문' 밖에 없다. ...그래서 말하자면, 영화는 재미있다. 촘촘하고 긴장감 넘친다. 김부장을 쫓아서 이야기만 즐긴다면 이 영화를 안전하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추신) 이성민 배우와 서현우 배우의 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캐릭터의 무게감도 당연하지만 이성민은 다이어트에 귀 분장도 붙인 듯 하다. 게다가 서현우는 M자 탈모분장까지 했다....분장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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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자스민차향기조아 2020.01.19 12:01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이번 주에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김재규 관련 책도 읽었고 말이죠.. 박통이 미화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라면... 음... 고민되네요..

  2. silentfilms 2020.01.25 19:16 address edit/delete reply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박정희란 인물에 대한 감독의 일정정도의 판단이 부재하는 영화. 박정희를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자체가 이미 불가능,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재미조차 없었거든요... 그래서 막 화가 나있던 찰나에, 도대체 이 영화 뭐가 문제지? 하던 중에 글 잘 읽고갑니다




1. 일 때문에 서울 용산에 위치한 LG유플러스 사옥에 가끔 간다. 한강대교 북단 옛 데이콤 사옥에 위치한 이 건물은 주변에 별 것이 없어서 대단히 한적한 편이다. 가끔 이곳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희망연대노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이 노조에는 LG유플러스의 설치기사들도 포함돼있다. 이들은 LG유플러스의 사업방향과 비정규직 처우에 대해 요구하며 노숙농성이나 집단시위 등을 벌인다. 인터넷이나 에어컨 설치기사들의 처우는 택배기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청업체 소속이거나 '개인사업자'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원청의 간섭으로 빡빡한 스케줄에 조금 낮은 임금을 받는다. 이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정치권에서도 나서는 걸 본적이 있지만 아직 성과가 뭐 있는지 잘 모르겠다. 

2.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봤을 때 우리나라 택배기사(혹은 쿠팡맨)와 유사한 처우를 보고 많이 놀랬다. "'개인사업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비정규직의 처우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기형적으로 변화한 사회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켄 로치는 늘 그렇듯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것은 오랜 과거에서 비롯된 우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3. '미안해요, 리키'의 가장 큰 화두는 ICT산업의 발달과 고령화사회다. 리키(크리스 히친)는 주택자금 대출에서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 그는 택배기사의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확실히 과거보다는 택배가 늘어난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직접 장을 보는 대신 주문해서 배송을 받는다. 최근에는 '새벽배송', '주말배송' 등 택배기사 괴롭히는 서비스가 자꾸 등장한다. 직장인과 프리랜서 등 다양한 생활패턴을 가진 사람들의 요구에 충족하기 위해 서비스는 더 늘어날 것이다. 리키가 뛰어든 일은 ICT산업의 발달로 커져버린 서비스 시장의 중심이다. 

4. 택배기사의 고용형태는 꽤 기형적이다. 이들은 명목상 '개인사업자'다. 개인사업자는 회사의 복리후생을 제공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준) 당연히 4대보험이나 국민연금도 직장이 아닌 개인으로 처리된다. 번 만큼 가져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돈을 벌어야 하는 '개인사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회사의 통제를 받는다. 이 통제는 그저 돈을 더 주고 덜 주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인사고과'에 해당된다. 개인사업자는 인사고과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하청'의 형태라면 원청의 간섭을 받을 이유 없이 주체적으로 운용돼야 한다. 그러나 택배기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 기준)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불법 고용형태다. 그들 각자가 '개인사업자'라면 원청은 그들이 어떻게 일하건 간섭할 이유가 없다. 프렌차이즈 음식점의 가맹 형태가 어떤지는 모르겠다. 프렌차이즈 가맹점주들이 영화 속 리키만큼 간섭을 받는다면 나는 이 주장을 접어야 할 것이다. 

5. 고용형태에 대한 고발과 함께 이 영화는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리키의 행동반경을 통제하는 PDA다. 회사에서는 그 기기의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파손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그 대사 자체가 "이 기기는 잠시 후 파손될 것이다"라는 복선이다). 기기는 택배기사의 행동패턴을 통제한다. 2분 이상 운전석을 비우면 안되고 기사가 어디에 있는지 고객과 회사가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편의점에서 알바 감시용으로 장착한 CCTV와 닮은 꼴이다. PDA의 시스템(회사가 만든 근무시스템)은 대단히 비인간적이다.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할 틈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고객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서비스를 강화한 것이다. 즉 PDA는 ICT산업의 발달로 변화된 일상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6. '국가 부도의 날'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에게 부조리한 고용형태의 등장은 IMF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정규직들이 넘쳐나던 시대는 끝나고 비정규직이 확대됐으며 대부분의 주요한 일들은 하청업체를 통해 진행된다. 원청은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하청업체의 일에 간섭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하청업체 직원을 고용하고 원청이 직접 일을 시키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원청은 책임지지 않는다. 이런 부조리는 이미 수년간 이어졌다. 최근에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서비스직 직접고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확대되진 않고 있다. 경제사정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택배기사가 직접고용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7. 리키의 일상과 함께 애비(데비 허니우드)의 일상도 주목해야 한다. 현재 ICT산업은 고령화사회에 맞춰 사물인터넷(IoT) 기기를 확대하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의 건강상태나 활동패턴, 사고유무를 사회복지사나 가족에게 직접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보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늘어나진 않았다. 다만 제 아무리 IoT 기기가 발달하더라도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는 행위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고령화사회에 늘어나는 직업이 '간병인'이다. 이 직업조차 로봇이 대체하는 시대가 곧 올 수 있지만 당장은 인공지능(AI) 스피커로 유산슬의 노래나 틀어주는 것이 AI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많은 노인들을 돌봐야 하는 애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남편 리키 못지 않게 빡빡한 삶을 산다. 

8. 리키와 애비가 일에 치여 힘든 삶을 보내는 사이 셉(리스 스톤)과 리사(케이티 프록터)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셉은 친구들과 거리를 떠돌며 그래피티를 하고 학교에서는 반항적인 아이가 됐다. 리사는 겁이 많아졌다. 둘은 모두 스마트폰을 친구삼아 지내고 있으며 중요한 일상과 소통수단을 모두 그곳에 담아두고 있다. 당연히 부모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스마트폰이다. 영화에서 리키와 애비가 셉의 그림을 살펴보면 아이의 예술적 재능을 뒤늦게 알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이같은 의식의 흐름을 쫓다보면 결국 부모와 자식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은 ICT 시대의 변화된 일상이다. 정리하자면 리키의 발목을 붙잡는 것도 스마트 기기이고 셉과 리사의 일상을 차지한 것도 스마트 기기다. '미안해요 리키'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 잊혀지는 것에 대해 사회제도와 개인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비추고 있다. 

9. 때문에 이 영화는 버릴 구석이 하나도 없다. 리키가 택배를 전달하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애비가 돌보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이 영화에서 굳이 '나쁜 쪽'을 꼽아보면 택배회사의 관리직원이나 간병인 용역의 전화상담사 정도다. 그런데 이들 역시 회사의 방침에 따라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리키와 애비가 만나는 사람들 중 까칠한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저 일상적이다. 누구 하나 갑질다운 걸 하진 않는다(오히려 멱살잡힌다). '미안해요 리키'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는다. 잘못은 제도와 변화된 일상에 있으며 그것 자체에 책임을 물을 뿐이다. 이것은 꽤 희망적이다. 제도와 기술의 변화가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더라도 사람들 각자는 여전히 따뜻하고 유쾌하다. 이것은 우리가 '모던타임즈'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유다.

10. 결론: 이 영화가 드라마틱한 극영화라면 이 가족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주택자금 대출과 더 쌓여버린 빚 때문에 리키는 아픈 몸에도 일을 쉴 수 없다. 영화는 우리의 인간성에서 희망을 보여줬지만 당장 우리는 거대한 물결을 이겨낼 힘이 없다. 리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운전하는 차는 그래서 후진을 한다. 그것은 차를 가로막는 가족들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밀려나는 리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대한 물결을 이겨낼 수 없다. 그 물결 속에서 죽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남길 바랄 뿐이다. 


추신)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Sorry, We Missed You'다. 리키가 택배를 배송했는데 수취인이 부재중일 경우 남기는 메모에 들어간 문구다. 그리고 한글제목은 '미안해요 리키'다. 나는 이 제목이 참 불만이다. 제목대로라면 리키한테만 미안하고 애비한테는 안 미안한건가? 정작 가장 미안한 셉과 리사에게도 안 미안한가? 왜 리키한테만 미안한건지 궁금하다. ...솔직히 한글제목 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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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낙 2019.12.25 22:04 address edit/delete reply

    현재 이시대에 어느나라 어느곳에서나 일어날수있는 우리 가족의 참담한 모습이더군요.가슴이 먹먹하도록 숨죽이며 몰두하고 봤읍니다.
    ^^아주 좋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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