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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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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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84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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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6.13
    [약간 스포] '존윅3:파라벨룸' 초간단 리뷰
  3. 2019.06.12
    [스포주의] '행복한 라짜로' 초간단 리뷰
  4. 2019.06.11
    '알라딘' 초간단 리뷰
  5. 2019.06.07
    넷플릭스 '분노' 초간단 리뷰
  6. 2019.06.05
    [쬐금 스포] '엑스맨:다크 피닉스' 초간단 리뷰
  7. 2019.05.31
    [스포] '기생충' 속 박 사장은 왜 하필 IT기업 CEO인가
  8. 2019.05.28
    [강력스포] '기생충' 간단 리뷰(수정본) (4)
  9. 2019.05.24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 이상적인 시민사회
  10. 2019.05.16
    [약간스포] '아무도 없는 곳' 초간단 리뷰

1. '맨 오브 스틸'의 초반에 등장하는 크립토 행성은 꽤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구조는 계급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이다. 다시 말해 과학자는 과학자의 역할을 다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역할을, 군인은 군인의 역할을 다하는 사회다. 칼엘(a.k.a. 슈퍼맨)은 사회주의국가에서 태어난 자유주의적 영웅이다. 그는 태생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거부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원래 자유주의 국가의 이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체제를 전복시키고 자유주의 국가(미국)로 귀화한 영웅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미국인'으로 자리잡는다. '슈퍼맨' 코믹스에도 이런 이념적 흑백논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맨 오브 스틸'에서 드러나는 크립토 행성과 지구에는 그런 차이가 있다(미국영화라 그런지 '미국만세'가 진하게 느껴진다). 

2. 나는 '토이스토리'의 4편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 강한 불신을 가졌다. "3편을 그리 멋있게 만들어놓고 왜 굳이 4편을?"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트랜스포머'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3편의 마무리는 꽤 마음에 들었다. 3편까지 보고서야 이 영화의 정체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머'는 '아주 쓰잘데기 없는' 4편을 만들어낸다. '토이스토리4'를 보기 전에 내가 이 영화에 가진 인상은 '트랜스포머4'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토이스토리4'를 다 보고 나왔을 때, 나는 이 미국놈들의 섬세한 사고방식에 무릎을 탁 쳤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토이스토리3'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 것은 장난감의 아이덴티티에 갇힌 주인공들이었다. 앤디가 보니에게 물려준 장난감은 보니가 크면 다시 다른 아이에게 건네질 것이다. 그 과정을 몇 번 거치다보면 장난감은 고장나고 그렇게 수명은 다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장난감의 운명(혹은 역할)'에 이의를 제기하고 만들어졌다. 

3. 영화의 시작은 꽤 어둡다. 이것은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가 어린이용 판타지 영화에서 어른용 다크 판타지로 분위기가 뒤바뀐 것처럼 심각하다. 그리고 3편까지 언제나 소중했던 장난감들은 사소한 일로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우디(톰 행크스)의 가장 믿을만한 주인 앤디와 함께 할 때 였다. 그러니깐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앤디에 대한 관객의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 신뢰가 깨지는 지점은 3편까지 우디와 버즈, 그리고 친구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신뢰하며 봤던 관객들에게 "정신차려, 이건 그냥 장난감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신뢰가 배반당한 관객들은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4. 한낱 장난감은 주인공 우디에게도 가차없이 찾아온다. 앤디에게는 최애 장난감이었지만 보니에게는 '별로 안 땡기는 장난감'이 돼버린 우디는 늘 옷장 안에서 버려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디는 주인인 보니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몇 개의 갈등들은 장난감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뤄진다. 예를 들어 보 핍(애니 파츠)은 양치는 여인 장난감이지만 우디를 리드하는 주체적인 여성(장난감)이다. 포키(토니 헤일) 역시 쓰레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우디의 설득 끝에 그는 '장난감'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광고 때문에 망해버린 장난감 듀크 카붐(키아누 리브스)는 자신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개비개비(크리스티나 헨드릭스)는 자신의 모든 아이의 장난감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5. 누군가는 자신의 태생 목적을 거부하며 살고 있고 누군가는 목적에 부합하지 못했음에 좌절한다. 역할이 정해졌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상관없이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욕망과 역할이 다른 방향으로 간다면 자아는 고통받고 좌절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디에게도 고스란히 찾아온다. 최애 장난감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장난감이 됐을 때 우디의 자아는 갈 곳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집착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우디와 개비개비는 닮았다. 이제 '토이스토리4'가 해야 할 일은 역할에 갇혀 좌절한 자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하는 일이다. 그 과정은 마치 모험처럼 신나고 유쾌하게 펼쳐진다. 어쨌든 이것은 만화이기 때문이다. 

6. '토이스토리4'를 단순히 '장난감의 자아찾기'라고 결론 내리자니 신경쓰이는 부분이다. 앞서 '맨 오브 스틸'과 사회주의, 자유주의를 이야기한 것도 여기에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장난감들은 미국을 벗어나지 않았다('Made In China'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장난감들은 칼엘처럼 외부(다른 이념의 나라, 혹은 외계행성)에서 온 존재가 아닌 미국 내부의 존재, 미국인이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처럼 역할을 부여받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자유주의는 정말 자유로운 것일까?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국가를 존립시키기 위해 시민은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어린이는 때가 되면 유치원에 가야 하고 아빠는 자동차 타이어를 갈아야 한다. 가족과 사회의 구성원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혼란이 온다. 제 역할을 못하는 내비게이션처럼 말이다. 

7. 돌이켜보면 '토이스토리4'는 전편에 대해서도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앤디는 어른이 돼서도 장난감을 챙기면 안되는 것인가".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는 '역할'이 앤디와 장난감의 이별장면을 만들어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시민은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 돌이켜보면 클락 켄트도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를 하며 월급받아 생활하지 않는가. 그도 대출을 다 못 갚으면 집이 압류당하는 '시민'이다. 

8. 우리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른이라면 되돌아보자.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될까? 한글2017로 보고서를 올리고 싶어도 부장이 MS워드를 요구하면 거기에 맞춰야 한다. 디자인 시안을 모레 보내고 싶어도 클라이언트가 내일까지 요구하면 밤을 새야 한다. PPT에 보노보노를 넣고 싶어도, ...아무튼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체제는 완전히 자유를 보장한 자유주의 국가일까? 과연 우리는 우디나 보핍, 개비개비보다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을까? '토이스토리4'는 장난감들이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머물러선 안된다는 발상에서 시작해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혹은 자본주의=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영화다. 다만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겠다. 이것은 만화이기 때문이다. 

9. 결론: '토이스토리4'는 전편들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나온 성숙한 영화다. 물론 거기에는 아주 큰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다. 예상치 못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어벤져스:엔드게임'과 '엑스맨:다크피닉스'에 이은 또 다른 이별 이야기다. 아무튼 잘 알겠으니 5편을 만들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여기서 더 내놓으면 진짜 구차해진다. 그땐 정말 '트랜스포머4'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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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마동석을 좋아하는 이유는 강력한데 귀엽기 때문이다. 대단히 안 맞는 두 개의 이미지가 이상하게 어울리는 시너지 효과는 '마동석'의 독보적인 고유영역이 돼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2편까지 그리 귀엽지 않았다. 다만 그는 겁나 세다. 이렇게 센 캐릭터는 저 옛날 척 노리스나 스티븐 시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 강력한 존 윅은 3편에 이르러서 금강불괴 수준으로 강력해졌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귀여움까지 탑재했다. 이것은 마치 날으는 옵티머스 프라임이자 묠니르 든 캡틴 아메리카와 같다. 원래 센데 더 세졌다. 이토록 사기에 가까운 액션히어로의 탄생을 어찌 감당해야 할 지 모르겠다. 

2. '존 윅'을 1편부터 대충 정리해봤다. '존윅'은 "존 윅은 이런 사람이다", '존윅-리로드'는 "존 윅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존윅3:파라벨룸'은 "존 윅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아마도 2021년 나오게 될 '존 윅4'는 "존 윅이 이만큼 빡쳤다" 정도로 나올 듯하다. 그만큼 점점 재밌는데 앞으로 더 재밌어질 영화가 '존윅'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최고 매력은 멋 부리면서 액션을 하는 것이다. 레트로풍 색깔 아래 속도감있는 액션을 펼치면서 멋도 부리고 즐거움도 준다. 사실 이것은 '리로드'부터 이어온 정서다. '파라벨룸'은 앞서 언급한대로 여기에 더해 '귀여움'을 탑재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스포일러라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 윅과 악당들 모두...귀엽다.

3. '파라벨룸'은 인간 존 윅에 대해 여러 정보를 준다. 그 여러 정보 중 꽤 임팩트가 있었던 것은 싸움실력의 기원이다. '리로드'까지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파라벨룸'에서는 유난히 잡아던지고 메치는 액션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구사하는 무술의 기원은 레슬링이다. 1편부터 꾸준히 느낀 것은 "존 윅은 사실 싸움을 잘하지 않는다. 그는 맷집이 겁나 좋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왜 맷집이 좋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3편에서도 존 윅은 훌륭한 맷집을 보여준다. 역대급으로 싸움 잘하는(귀여운) 악당들이 등장하지만 존 윅은 버티고 버티다가 이긴다. 역시 맷집에는 장사가 없다. 

4. '파라벨룸'에서 이야기를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사실 이 시리즈는 1편부터 꾸준히 '존 윅은 겁나 세다'를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매번 더 강력한 적을 등장시키고 존 윅을 더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파라벨룸'의 이야기에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존 윅이나 윈스턴(이안 맥쉐인)의 심경변화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존 윅의 가오가 떨어진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존 윅이 '더 빡쳐서' 더 강력한 적과 마주하기 위한 '밑밥'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이야기와 상황조차 액션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액션'을 향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 정말 좋아한다. 목적이 뚜렷하고 오직 그것만을 향해 뛰는 영화. 

5. 결론: 혹자들은 존 윅이 타노스를 잡으러 가는 합성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정도 강력한 액션영웅이라면 타노스보다 척 노리스를 먼저 만나는게 급선무다. 정 안되면 '최고 회의'의 집행관으로 '익스펜더블'이 몽땅 출동하는 그림도 보고 싶다. 어쨌든 존 윅하고 게임이 되려면 척 노리스가 출동해야 한다. 그게 안되면 핵폭탄이라도 쏴야 존 윅이 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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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초에 영화가 했던 일들 중 하나는 관객을 낯선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넓고 우리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그럴때면 영화는 우리의 여행을 대신해왔다. 시오타역에 도착한 열차를 시오타역에 가지 않아도 맞이할 수 있었고 저 먼 하늘에 떠있는 달에도 갈 수 있게 했다. 혁명의 순간을 직접 목격할 수 있게 했고 싸이코 살인마가 사는 저택으로 초대하기도 했다(그 순간에도 관객의 안전은 보장돼있다). 그런데 영화가 초대한 세계들 중 가장 낯선 세계는 바로 '모르는 사람의 삶'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내가 수십년전 이탈리아 중서부 시골에 사는 청년의 삶을 엿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서 낯선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인류는 이제 달의 뒷면까지 탐사를 시작한 상황에서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알리체 로르와커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고맙게도 그물망처럼 촘촘한 세계의 네트워크에서 닿지 않은 빈틈을 관찰한다. 그곳은 이탈리아 중서부 시골마을이며 거기에는 라짜로가 살고 있다. 

2.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청년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온갖 소소한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듣는다면 마치 그가 '홍반장'처럼 만능 재주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그 정도 기술도 없고 지위를 얻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성실하고 긍정적인 '예스맨' 청년이다. 삐딱하게 본다면 '호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청년은 어찌나 성실하던지 마을 부잣집 청년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의 납치 자작극도 도와준다. 그러다 일이 잘못돼서 마을 사람들은 속세로 흩어지게 되고 라짜로는 사고로 절벽에서 떨어진다. 

3. '행복한 라짜로'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다. 그렇다는 것은 라짜로가 메시아의 현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짜로는 처음부터 메시아였을까. 라짜로의 삶과 이 이야기에 큰 고비가 찾아온 지점은 라짜로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이다. 영화는 '라짜로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라짜로가 죽을만큼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오랫동안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오랜 시간 뒤에 라짜로는 깨어난다. ...아니, 정확히는 늑대가 부활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늑대가 라짜로의 냄새를 맡고 있었고 바로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늑대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사실 이 영화에서 메시아는 라짜로가 아니라 늑대다. 라짜로는 늑대의 축복을 받은 '성자(聖子)'인 셈이다. 

4. 거리의 성자처럼 길을 걷던 라짜로는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마을 사람들을 만난다. 도시에 사는 마을 사람들과 재회한 라짜로는 그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주고자 한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먹을 것을 알려주고 강아지를 맡아준다. 사실 그것들은 마을에서 라짜로가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고 도시의 밑바닥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됐다. 도시는 크고 비정하며 마을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피폐해졌지만 라짜로와 함께 희망을 찾는 듯 보였다. 심지어 음악까지 그들을 축복해주고 있었으니 라짜로는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천사와 같았을 것이다. 

5. 그런데 라짜로는 어느날 잘못된 선택을 한다. 탄크레디를 돕기 위해 은행으로 찾아간 것이다. 탄크레디는 데 루나 집안의 사람이다. 그 집안은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인물로 체포된 바 있다.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데 루나 집안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집안의 재산을 복원하려는 것은 복종하며 살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자유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복종이 안식을 준다는 논리는 MCU에서 하이드라가 하던 얘기다. 그리고 그 얘기를 빼더라도 과거는 때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아마 영화를 본 관객 누구라도 탄크레디가 라짜로에게 "우리는 배다른 형제와 같다"고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진 않을 것이다. 라짜로가 은행으로 찾아가 탄크레디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한 것은 미화된 과거로의 회귀를 요구한 것이다. 늑대는 그러라고 라짜로를 살려주지 않았다. 

6. 영화는 라짜로의 생사를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그러나 떠나가는 늑대를 보며 라짜로가 죽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절벽에서 떨어졌을때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스스로 내려놓으려 할 때 이뤄진다(만화 '원피스'에서 비슷한 대사를 들은 것 같다). 게다가 라짜로가 은행을 찾아가는 장면은 처음으로 누구의 요구나 지시 없이 스스로 뭔가를 하려고 한 것이다. 첫 자유의지를 그렇게 썼다면 신도 노여워하기 충분하다. 그렇다면 '행복한 라짜로'는 돌고 돌아서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자본에 억압받고 구속된 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자유의지라는게 이 영화의 의도일까. 그렇게 이해해보도록 하자. 적어도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내 심금을 확실히 울리기 때문이다. 라짜로가 영화의 제목처럼 행복하길 바라며 영화를 봤지만 그는 영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다. 

7. 이쯤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신은 늑대의 형상을 빌어 라짜로를 구원했을까? 처음 그 절벽에는 정말 늑대가 있었을까?". 사실 라짜로가 사는 마을에 늑대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내내 소리만 들렸으며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처음부터 늑대는 마을을 지키려는 신의 의지였으리라. 라짜로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피를 흘렸고 고통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마을을 떠나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은 라짜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을 구하라고 한 셈이다. 그런데 그 대상에 데 루나 집안은 포함돼있지 않다. 

8. 결론: 영화를 다 봤을 때 함께 본 여자친구가 물었다. "라짜로는 영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워낙 그의 표정 자체가 감정이 없어보이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가 눈물 흘린 순간은 있어도 웃은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행복한 라짜로'라는 제목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은 작가의 소망이자 관객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라짜로가 어디에 있건, 혹은 다른 곳에 또 다른 라짜로가 있건, 그는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라짜로가 내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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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이 리치나 매튜 본, 그 밖의 패거리들에 대해 나는 '영국 깡패'라고 정의내린다. 실제로 깡패짓거리 하고 다닌 건 아니고 영화들이 어딘가 깡패같은 구석이 있어서다. 실제로 가이 리치가 연출하고 매튜 본이 제작한 초기 영화들은 죄다 깡패같다. 그런 가이 리치가 디즈니의 '알라딘'을 만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어디서 도박빚을 크게 졌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대단히 시원치 않았던 전작들 때문에 메꿔야 할 빚이 생긴건가 궁금했다. 이건 가이 리치가 잘 할 수 있는 영화도 아니었고 그의 기호와도 맞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잘 나온 영화'긴 했지만 내가 알던 '백인 영국깡패' 가이 리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건가 싶어 아쉽다. 

2. '알라딘'은 그동안 디즈니의 실사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만화적 콘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랍 지역이 배경이지만 모래빛보다는 형형색색 화려함이 눈에 띈다. 그리고 만화에서나 가능했던 모든 부분은 CG를 활용해 그대로 실사화시킨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실사영화지만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고민을 단 1g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만화적인 것은 만화적인대로 내버려둔다. 디즈니의 의도도 그것일테고 가이 리치 역시 거기에 큰 불만은 없어보인다. 목돈을 만져서 불만이 없는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불만은 내가 있다. 

3. 내가 가진 불만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디즈니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들은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했다" 이상의 의미가 전혀 없다. 기왕 돈 내고 보는 거 새로운 것을 보고 싶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건 오래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오래전 거장감독 구스 반 산트는 '그보다 더 거장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를 리메이크 했다가 저 세상 욕까지 모아서 다 들은 적이 있다. 구스 반 산트는 '싸이코'를 리메이크하면서 히치콕의 콘티까지 그대로 가져다가 썼다. 말 그대로 "Ctrl+C, Ctrl+V" 한 셈이다. 나는 디즈니의 최근 프로젝트들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4.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동안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를 다 봤다('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정글북'). 그 중에는 썩 괜찮았던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이 괜찮았던 이유를 찾는 것은 이 글에 대한 변명을 만드는 작업이 될 것이다(어쨌든 변명을 하긴 해야겠다). '신데렐라'는 원작의 영향이 크겠지만 눈이 자극적이진 않다. 이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원작이 아니라 안데르센 동화가 원작이다"라고 우겨도 설득 당할 것 같은 영화다. 케네스 브래너는 (원래 눈이 즐거운 영화를 잘 못하긴 하지만) 클래식 감성이 충만한 사람이다. '신데렐라'보다야 덜 하지만 '정글북'도 나쁘지 않았다. 정글에 단 한 번도 가지 않고 찍은 '정글북'이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재현'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글북'은 정글에 단 한 번도 가지 않고 촬영했다"는 사실은 누가 말해줘야 믿지, 보고서는 쉽게 믿기 어렵다. "'신데렐라', '정글북'과 '알라딘'의 차이가 뭐냐"라고 물을 수 있다. 앞선 두 영화는 그래도 "영화를 본다"는 느낌에 근접하다. 그런데 '알라딘'은 "만화를 본다"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차라리 영화 '페르시아 왕자'가 리얼해보일 정도다. 

5. 결론: 영화를 보기 전 사람들이 '4DX가 진리'라고 말하는 걸 봤다. '알라딘'을 4DX로 보고서야 느낀 점은 4DX도 이제 감정을 담는다는 점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4DX로 볼 때 "너를 이 의자에서 집어 던지겠어"라며 거칠게 흔들어대던 의자와 "나와 같이 춤추자"라며 덩실덩실하는 '알라딘'의 4DX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내가 '알라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한 이유는 4DX 때문이다. 4DX 아니면 '알라딘'은 볼 이유가 없다. 


추신1) 영화의 정치사회적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리진 않지만 이 영화만큼 PC니 뭐니 하는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4DX 때문인가. 

추신2) 엔딩크레딧을 보면서 "알라딘이 인도 출신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엔딩장면이 발리우드스러웠다. 

추신3) '알라딘'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가 타셈 싱의 '백설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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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남아 액션영화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대략 '옹박'부터인 것 같다. 편집과 카메라 흔들기, 크고 화려한 동작으로 조지는 액션이 아니라 무에타이의 간결한 동작과 긴 호흡으로 치고 받는 액션은 대단히 센세이션했다. 그 후 이코 우웨이스의 '레이드'를 보면서 동남아 액션영화의 글로벌한 상품성을 보게 됐다. '레이드'는 '옹박'은 찜쪄먹을 거칠고 강력한 타격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다. 게다가 '레이드'는 하드보일드 느와르 감성에 플롯까지 간결하고 재미있어서 이야기 보는 재미도 쏠쏠한 작품이다. 그때부터 나는 '걸출한 동남아 액션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종종 재미있는 동남아 액션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레이드'의 감동이 느껴지진 않았다('동남아 액션영화'라고 정의내렸지만 사실 태국, 인도네시아 등 국가는 다 다르다). 

2.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분노'는 베트남 액션영화다. 돌이켜보니 베트남 액션영화를 본 기억은 없다. 영화가 시작할 떄 '롯데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뜨는 걸 보니 한국 자본도 어느 정도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색감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전에 봤던 느와르풍 액션영화의 질감이 살아있다. 이야기는 사채꾼 밑에서 채권추심 일을 하는 엄마 프엉의 딸 마이가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당하자 딸을 구하기 위해 과거의 상처가 있는 사이공으로 향하는 내용이다. 대충 '아저씨'나 '테이큰' 느낌이 나는 시놉시스다. 어쨌든 엄마가 가서 다 때려 부수겠다는 이야기다. 

3.. 영화는 프엉의 과거에 대해 간간히 언급한다. 베트남 전통무술 계승자인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가출한 어린 시절, 윤락녀로 일했던 과거, 사이공을 떠나 시골마을로 향하게 된 과정. 그런데 90분 안에 이 이야기를 다 담았다가는 액션을 할 틈이 없다. 곁가지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프엉이 얼마나 줘패고 다니냐는데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쯤 지났을 때 "이야기는 포기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4. '레이드'처럼 매력적인 플롯을 가진 영화가 아니라면 이 영화의 목적은 "언제쯤 줘 패고 다니냐"는데 있다. 본격적으로 액션을 시작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액션영화 팬이라면 영화 시작하고 1시간 동안은 "이게 뭐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액션이 시시해서 중간에 꺼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참 다행스럽게도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이 지나서야 만족스런 액션이 등장한다. 카메라 워킹과 편집으로 만든 액션이긴 하지만 타격감은 굉장하다. 이것은 여자주인공의 액션이라고 결코 부드럽고 화려하게 가지 않는다. 처절함을 강조한 거친 타격 액션이다. 액션은 뒤에 30분만 딱 마음에 든다. 

5.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영화, 액션의 완급조절을 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액션의 강도를 끌어올린다는 의미다. 관객을 점점 더 빠져들게 하겠다는 의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적어도 영화가 시작할 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볼꺼리가 있어야 한다. 넷플릭스에서 '분노'를 찾아 본 사람은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지간한 액션영화로는 눈 깜짝 하지 않을 고수라는 의미다. 그런 관객들을 상대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액션은 인내력 테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프엉의 과거를 언급하는 대신 악당들의 악행을 보여주는데 할해했어야 했다. '아저씨'가 차태식(원빈)의 사연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시간을 할해했는지 떠올려보면 답은 간단하다. 

6. 결론: 베트남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떠올려봤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언젠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무 영화나 보자"며 본 영화 중 어쩌면 베트남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임팩트 있는 영화는 없었다. 베트남의 장르영화는 당연히 처음 본 셈이다. 이것이 롯데의 힘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꽤 그림도 좋고 액션도 화려하다. 물론 제대로 된 액션을 만나려면 1시간 이상 인내해야 한다. 그 정도 인내를 거친다면 마지막 두목과의 열차 액션, 차고지 갱들과의 총기 액션을 볼 수 있다. 그 두 장면은 정말 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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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년 전, 디씨인사이드에 일명 '삼양라면 햄맛 사건'이 있었다. 한 네티즌이 삼양라면을 먹다가 햄맛이 별로라서 삼양라면 측에 컴플레인을 제기했고 그 결과 햄맛이 사라졌다는 것을 자랑스레 올린 글이었다. 그런데 햄맛으로 삼양라면을 먹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범인을 잡았다며 작성자를 거의 10년 넘게 깠던 일이다. 익숙하게 먹던 것의 맛이 조금 변하게 되면 그 원인이 뭔지 찾기가 어렵다. 나는 '엑스맨:다크 피닉스'를 처음 봤을 때 무슨 짓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의 실체가 궁금했다. 나는 그날 저녁 동네 중국집에서 볶음밥 곱배기를 먹다가 허전함의 원인을 알게 됐다. 그 실체는 글이 끝날 때 예기해보겠다. 

2. 우선 영화 얘기를 해보자. '엑스맨:다크 피닉스'는 '퍼스트 클래스'부터 시작된 '엑스맨'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이미 올해 MCU 11년 역사의 마무리를 본 입장에서 기대치가 한껏 올라가버렸다. 아마 그것이 '다크 피닉스'가 노잼이었던 것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다크 피닉스'가 재미없는 이유는 크게 둘로 나뉜다. 완결편의 여흥을 느끼기 전에 지나치게 금방 지나가버린 사건들, 그리고 이야기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점이다. 혹시나 이전의 '엑스맨' 3부작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제발 '엑스맨: 최후의 전쟁'은 보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뉴럴라이저가 있으면 '엑스맨:최후의 전쟁'은 기억에서 삭제해버리고 싶다. 

3. '다크 피닉스'는 진 그레이(소피 터너)가 엑스맨 전체를 위협하는 이야기다. 이는 '엑스맨:최후의 전쟁'의 세부적인 사건은 다르지만 큰 틀은 동일하게 흘러간다. 그 얘기인 즉슨 '다크 피닉스'의 전반부 거의 모든 상황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 그레이가 나빠져야 한다"는 전제가 머릿속에 있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다음 상황에 대해 예측할 수 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엑스맨:최후의 전쟁'의 존재 자체가 '다크 피닉스'의 스포일러인 셈이다. "원작 코믹스도 있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작 코믹스를 뻔히 두고도 재밌었던 다른 히어로 영화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크 피닉스'의 원작 코믹스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엑스맨:최후의 전쟁'에 있다(재미라도 있었으면 다행일텐데). 

4.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계속 의심했다. 정말 '엑스맨:최후의 전쟁'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모르고 본다면 조금 더 재미있을까? 물론 조금은 더 재미있다. 전반부에 예상치 못한 사건도 있었고 진 그레이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연출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세부적인 상황이나 연출일 뿐이다. 나는 "진 그레이가 나빠진다"는 큰 틀을 뒤집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언맨' 코믹스를 보지 않았지만 소문에는 만다린이 아이언맨의 최대 숙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언맨3'은 그걸 뒤집어버렸다. '토르:라그나로크' 역시 개봉 전 피의 혈전을 예고했으나 라그나로크는 이상한 지점에서 일어났다. '다크 피닉스'는 이미 엉망진창인 형('엑스맨:최후의 전쟁')이 있음에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건 대단히 큰 실수다.

5. 두 번째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지점은 수박 겉핥기 식 갈등이다. 인물 간의 감정변화나 갈등에 대해 지나치게 금방 언급하고 바뀐다. 예를 들어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는 찰스(제임스 맥어보이)와 만나자 마자 으르렁대다가 불과 몇 분 뒤 목숨걸고 그를 지키고 있다. '시빌워'부터 '어벤져스:인피니티 워'까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의 갈등을 몇 십분만에 퉁쳐버린 것이다. '다크 피닉스'의 거의 모든 갈등은 이런 식이다. 갈등이 생기다가 뭐 해보려고 하면 금새 전환된다. 어느 캐릭터 하나에 정 붙이고 이야기에 애절해 할 틈이 없다. 이것은 지나치게 짧은 러닝타임 때문이다.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안에 그 묵은 갈등들을 다 집어넣으려고 하니 영화가 '저스티스 리그'처럼 돼버렸다(오해는 하지 말자. '저스티스 리그'보단 재밌다). 

6. 그나마 다행스런 점은 눈요기는 시원시원하다는 점이다. 엠바고 때문에 쓸까말까 고민한 문장이 "'엑스맨:최후의 전쟁' 7에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3"이다. '엑스맨'이 할 수 있는 초능력 액션부터 피닉스의 스펙타클까지 볼꺼리가 아주 많다. 게다가 진 그레이가 겁나 세다는 것을 새겨준 최초의 영화가 아닌가 싶다. '엑스맨:최후의 전쟁'이나 '엑스맨:아포칼립스'에서 "진 그레이는 겁나 세다"라고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대체 뭐가 센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다크 피닉스'의 진 그레이는 확실히 세다. 인피니티 스톤 없이도 타노스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존재다. 

7.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내내 고민했다. "내가 올해 '어벤져스:엔드게임'을 봐서 기대치가 높아진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사실 '엔드게임'에 비빈다면 '다크 피닉스'에 토해낼 불만은 더 많다. 그걸 다 드러내고 봐도 위에서 언급한 2개의 불만은 지우기 어렵다. '엔드게임'이나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은 못돼도 '백투더퓨쳐3' 정도의 피날레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백투더퓨쳐' 중 3편을 제일 안 좋아하는 작성자). 이건 그냥 '스카이 캐슬' 마지막회다. 

8. 결론: 영화를 보고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동네 중국집으로 향했다. 짬뽕이 맛있는 집이었지만 나는 늘 시켜먹던 볶음밥 곱배기를 시켰다. 노란빛깔 식용유가 코팅된 밥알과 곱게 풀어진 계란은 여름의 초입에서 개나리꽃을 떠올리게 했다.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짜장소스는 개나리 나무 옆을 지나던 동네 백구가 싼 똥이었으리라. 사실 그 집 볶음밥은 맛있어서 먹는다기 보다는 익숙해서는 먹는 요리였다. 나는 그때 본능처럼 저렴하고 빠르게 먹을 식사가 필요했다. 볶음밥이 내 앞에 차분하게 놓였고 나는 밥을 먹기 위해 수저통을 열었다. 수저통에는 무광 스테인리스 젓가락과 강렬한 크롬빛깔의 숟가락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젓가락의 곧고 가느다란 무광 크롬빛을 보며 나는 기억하지 못한 채 빼먹은 것을 알게 됐다. '다크 피닉스'는 울버린과 스탠 리가 등장하지 않는 첫 번째 '엑스맨' 영화였다. 짐승남이 없으니 확실히 허전하다.


추신) 누군가 내게 "'엑스맨:아포칼립스'와 '다크 피닉스' 중 뭐가 더 낫냐"라고 물어보면 꽤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래도 '다크 피닉스'"라고 대답할 것 같다. 밋밋한 액션도 문제지만 엔사바누르(오스카 아이삭)와 돌연변이 4인의 '세기말 아이돌 코스튬'은 차마 보고 있기 힘들다. 후레쉬맨이나 파워레인저의 빌런으로 어울릴 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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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박사장의 직업이 왜 하필이면 'IT기업 대표이사'인지가 궁금했다. 한국영화에서 재벌을 묘사할 때 보통 재벌가 2~3세 정도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게 묘사하기 쉽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보다 조금 특별하고, 그래서 더 난해한 'IT기업 CEO'로 캐릭터를 잡는다. 

이 캐릭터가 특별한 이유, IT기업이라면 보통 90년대 중후반 벤처열풍 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터넷 기업들 살아남은 곳이다. 군사정권 시절 정치권의 압박과 탄압 속에서 기업을 일구기 위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짓도 서슴치 않는 과거 재벌총수들과는 다른 환경이다. 그들은 우선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일 시간이 없다. 생존을 위한 루틴을 만들어야 했고 오직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재벌가 2~3세처럼 안하무인에 느긋한 갑질 캐릭터보다는 자기 세계와 자기영역이 확실한 캐릭터가 영화에 필요했다.  

박사장이 "나는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라고 하는 말은 이런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네이버의 창업자 이해진의 경우 삼성SDS의 직원 출신이다(네이버는 사내벤처로 탄생한 기업이다). 당시 IT기업 중에서는 이런 형태로 탄생한 기업이 많다. 박사장은 사내벤처 출신일 수 있고 아니면 아이디어와 열정만 많은 컴공생일 수 있다. 어쨌든 그의 시작은 '흙수저'까진 아니고 대충 쇠수저나 스댕수저 정도 될 것이다. 그 얘기인 즉슨 IT기업 CEO는 '자수성가형 CEO'임을 의미한다. 어떤 직종이건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것을 잃는 걸 특히 더 싫어한다. 1세대 재벌총수들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짓도 서슴치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기 재산과 회사를 지키려고(물론 잘못된 방법이다). 그렇다면 '선을 넘는 사람'은 자기 루틴을 해치는 사람임과 동시에 자기 영역을 침범한 사람도 해당된다. 

다만 IT기업은 '경영승계'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창업자라도 기업의 경영자로 남는 기간이 그리 길진 않은 편이다. 네이버의 이해진 창업자도 지금은 해외사업 담당으로 나가있고 김정주 NXC 대표도 주주로서 권리만 행사할 뿐 넥슨의 사업에 관여하진 않는다. 제 아무리 주력사업 분야라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창업자는 뒤로 빠지기 마련이다. 1세대 벤처기업인들이 세운 회사들은 현재 대부분 전문경영인들이 사업을 책임진다. 

박사장이 창업자인지 전문경영인인지 확실치는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봉준호 감독이 IT기업의 CEO를 일반 제조업 CEO와 똑같이 해석해 창업자가 끝까지 회사를 지키는 것으로 설정했거나 이미 대형 IT기업을 일군 박사장이 재창업해 성공을 거둔 경우다. 후자의 경우라면 박사장은 이전 회사의 급여와 지분으로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재창업한 현재의 회사를 사업궤도에 올려둔, 아주 능력있는 경영인인 것이다. 박사장의 재산규모에 대해 등장한 것은 집과 벤츠 밖에 없다. 집은 위치를 보아하니 성북동 쪽 같다(영화 속 대사들로 유추함). 거기 살 정도라면 보통 재벌이 아니고서는 힘들다. 

글을 딱히 마무리 지을 말은 없다. 이 글은 "박사장은 왜 하필 IT기업 CEO일까?"에 대해 나름 생각한 내용들이다. 


추신) 스타라이브톡에서 어느 팬이 '박사장의 기생충이라도 되고 싶다'고 플랜카드를 들고 왔다던데....부자들은 뱃속에 기생충 안 살아요(동심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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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 28일 기 작성된 '기생충' 리뷰는 타 커뮤니티에서 봉준호 감독의 당부가 있어 한시적 블라인드 처리됐습니다. 해당 리뷰는 원래 오늘 노출할 계획이었으나 제가 어제 2회차를 보고 나니 리뷰를 일부 수정하고 싶어져서 다시 써서 올렸습니다. '산수경석'과 관련된 내용이 일부 수정됐음을 알립니다. 


1. 겜블을 하면서 패를 다 까발릴 때는 주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뭘 해도 자신이 있는 경우다. 이런 거창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화투를 치다가 바닥패에서 싼 것이 나왔을 때 그걸 가지고 있으면 이마에 붙이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호기롭다. 부자가족과 가난한 가족이 등장하고 가족희비극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패를 거의 까발렸다. 이미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생충'에 대해 요르고스 란티모스나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그런 분위기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이미 자신의 패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자신의 패를 거의 까발린 듯 하면서도 '스포일러 조심'이라고 당부한다. 뭔가 더 보여줄 것이 남았을까. 영화가 나를 도발한다. 나는 그 도발에 순순히 응했다. 결과는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2. 우선 '기생충'의 시놉시스를 살펴보자.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영화는 시놉시스에 대단히 충실하다. 이야기는 부잣집에 고액과외를 가게 된 기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이 가족이 소동을 벌이는 동안 관객들은 "들키지 않을까"라며 조마조마하게 영화를 봐야한다. 그러나 이때의 '조마조마함'은 분위기가 전환되는 후반부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3. 공개된 시놉시스는 이 영화의 딱 절반만 이야기하고 있다. 박사장의 저택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급반전된다. 이때도 '봉준호스러운' 엇박자의 유머를 잃진 않지만 마치 지상 500m 외줄 위에서 제기를 차면서 폴라포를 먹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영화는 진행된다. 이것은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언젠가 크게 터트릴 것임을 선언한 셈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관객들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 어떤 형태로 분출할 지 알 순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긴장감은 더욱 커진다. 사실 이런 것들은 장르영화의 대단히 전형적인 공식이다. ①분위기를 뒤집고 ②갈등과 감정을 쌓다가 ③한 번에 확 터트리는 것. 이야기의 구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패턴은 뻔하다. 그러나 잊지 말자. 상대는 봉준호다.

4.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위해 내내 떡밥(복선)을 뿌린다. 보통의 복선이라면 그것이 복선임을 금방 알 수 없지만 '기생충'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야 그게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기우가 기정(박소담)에게 "너는 이 집에서 살게 되면 어느 방을 쓰고 싶냐"고 묻자 기정은 "일단 살아보고 얘기하고 싶다"며 웃는다. 흔히 공포영화에서 '죽는 사람'을 말하는 이 공식은 아주 간단하지만 묘하게 비틀어졌다. 그 순간은 '공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박사장의 집에서 쫓겨난 문광(이정은)이 캐리어를 끌고 급하게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 역시 나중에 일어날 반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마블이 10년동안 뿌릴 떡밥을 100분만에 다 뿌리고 나머지 시간에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 2시간짜리 영화 안에서 그토록 치밀하고 꼼꼼하게 움직인다. 괜히 '봉테일'이 아니다. 

5. '기생충'에서 특이할 점은 다소 과장된 대사들이다. 예고편에서도 드러났지만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버지, 저는 이게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등이다. 주로 기택이나 기우의 대사가 이런 식인데 이는 등장인물 중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다른 예로 박사장네 아들 다솜 역시 인디언 놀이에 젖어 "오버~"같은 말들을 한다. 그리고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들은 선의 양쪽을 모두 본다. 기택은 가족들 중 분노를 토해낸 인물이고 기우는 경계 너머에 처음 발을 들인 인물이다. 그리고 다솜은 박사장네 가족 중 유일하게 비밀을 목격한 인물이다. 자본으로 나눠진 계급의 양극단을 오고 간 인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말투에서 드러난 셈이다. 그게 그렇게 비현실적인지 모르겠지만(그렇다면 너무 가혹하긴 한데) 영화는 "응, 그건 비현실적인 일이야"라고 말한다(문광의 말투도 꽤 과장됐다). 

6. '기생충'은 키워드로 '해석'하듯 풀어보고 싶은 지점이 많다. 예를 들어 '냄새'나 '물', '인디언', '산수경석' 등이다. 최근 '어스'나 '우상' 등의 영화들에 대해 했던 것처럼 키워드를 두고 풀어보고 싶지만 영화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것을 방해한다. 이는 기우의 대사 한 마디 "저는 이것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해요"(잘 기억나지 않지만 '상징적'이라는 단어는 들어갔다)를 통해 완성된다. 이미 영화에서 상징적이라고 못 박은 이상 그것을 상징적으로 정하고 해석하는 것은 영화에게 패배하는 기분이다. 때문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키워드를 정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패배선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 일부는 감독의 말을 인용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늘 하던대로 '상징적인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난 이미 영화에게 졌기 때문이다.

7. '냄새'는 감독의 말대로 '무례함'을 말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너 냄새나"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물은 '빗물'을 통해 표현된다. 박사장네 저택에서 물은 낭만을 즐기는 도구가 되지만 같은 시간 기택의 집에서 물은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이 된다. '인디언'은 연교가 지향하는 '미국제'의 상징이자 착취 당해 죽어버린 민족이다. 영화 내내 연교는 어설픈 영어를 쓰고 미국제를 선호한다. 그녀는 '천박한 재벌'의 전형을 보여준다. 당연히 아메리칸 인디언이 당한 착취의 역사도 알지 못한채 문화콘텐츠로 인식할 것이다. 인디언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인디언 덕후가 된 다솜이가 마주한 실체는 착취의 역사와도 다르지 않다. 나는 처음에 민혁(박서준)이 기우에게 선물한 산수경석이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중간에 돌이 물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시멘트를 가지고 만든 가짜 돌쯤으로 여겼다. 감독은 돌의 진위여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나는 여전히 그 돌은 가짜일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진짜건 가짜건 중요하지 않다. 희망의 실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8. 나는 늘 '한국영화가 재벌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마치 "보고 화내라"며 전시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 맥락에서 벗어난 재벌이 '여교사'의 혜영(유인영)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서 모두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밟아버리는 식이다. '기생충'의 박사장과 연교는 '여교사' 이후 가장 완벽한 재벌묘사다. 박사장은 IT기업의 사장이다. 구체적으로 뭘 하는 회사인지 알 순 없지만 대충 저 정도 재력을 이룬 사람이라면 90년대 후반 벤처열풍에 뛰어들어 살아남은 '벤처 1세대'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벌과 다르다. 대부분 자수성가형 재벌이라면 군사정권의 험한 시기를 가로질러 살아남아 '깡만 남은' 사람들이다.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지만 회사를 지키는데는 성공했다. 반면 벤처세대들은 무한경쟁사회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회사를 살린 사람들이다. 일중독이고 독하지만 비윤리와 부도덕은 조금 덜하다. 게다가 자수성가형 재벌인 만큼 안하무인한 성격도 갖지 않았다(이건 주로 곱게 자란 2, 3세대들에 해당된다). 박사장은 그 경계를 잘 타고 있다. 안하무인하진 않지만 자기가 이룬 것을 누리고 사는 일중독자다. 이렇게 디테일한 재벌묘사는 처음 봤다.

9. 연교에 대해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그녀는 재벌의 딸로 추정된다. 굴지의 대기업이라기 보다는 돈만 많은 졸부 정도다. 경영수업을 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부모와 주변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느긋하게 자랐다. 그러다 사교모임이나 적당한 파티에서 박사장과 만나 연애하다 결혼했을 것이다. 연교는 기택 집안 사람들의 말대로 '착하다'. 거의 호구에 가까울 정도로 눈치가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때부터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해"라며 자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도 못할 것이며, 그것이 눈 앞에서 벌어졌을때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연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10. '기생충'에서 꽤 소름돋고 슬픈 부분은 기택과 '문광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비현실적 사고를 하고 무능력하며 처참한 현실 앞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의외로 그들의 과거는 흔한 이야기다. 자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대리운전과 발렛파킹을 하다가 백수가 됐고, 혹은 자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빚쟁이에 쫓기는 사람. 그 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될 일 없을 것 같지?"라며 영화가 보내는 경고처럼 들린다. 기택과 '문광의 남편'이 처한 비현실적 상황은 '언덕 아래에 사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게 이 영화의 최대 공포가 아닌가 싶다. 

11. 봉준호 감독은 제작보고회와 칸 영화제,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배우들이 다 한 영화"라고 겸손한 표현을 했다. 정말 배우들이 다 한 영화(혹은 '배우가 훔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 배우들은 봉준호 감독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정말 신나게 뛰어논다. 제작보고회와 기자간담회, V라이브에서 배우들의 분위기가 유난히 화기애애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일거라 생각된다. 팀 분위기가 이토록 좋았기 때문에 훌륭한 앙상블이 나올 수 있었다. 봉 감독의 말이 맞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다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다 할 수 있게 멍석 깔아준 것은 봉 감독이 한 일이다. 

12. 결론: '기생충'은 블랙코미디와 스릴러가 어우러진 크로스오버 장르영화다. 유쾌하게 웃다가 심장 졸이다가 놀라 나자빠지는 영화다. 그렇게 신나게 즐기고 극장을 나설 채비를 할 즈음 영화는 관객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그런데 소름돋는 사실은, 사실 영화는 내내 관객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있었다. 관객은 부잣집 동경하다가 자기 집 물에 잠기는 줄 모르는 기택의 가족처럼, 가슴에 칼 꽂히는 줄 모른채 낄낄대며 웃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참 아픈 영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파서 몸부림 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금방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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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공립도서관은 세계 5대 도서관이자 미국에서는 워싱턴 국회도서관 다음으로 큰 곳이다. 85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으며 연구 목적의 도서관 4곳도 운영 중이다. 민간 기부금과 시의 예산으로 운영 중이며 뉴욕시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우선 이 영화에 대한 첫 번째 감상은 “도서관이 이런 일도 해?”라는 의문이었다. 이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강연이 이뤄지고 (당연하게도) 저자와의 대화도 매번 열린다. 이밖에 음악회와 교육, 직업소개가 이뤄진다. 강연의 내용도 다양하고 직업 소개도 다양하다. 마치 이곳은 ‘엄청나게 큰 문화센터’처럼 보인다. 도서관의 익숙한 역할이라면 책을 열람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도서관을 평소 자주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뉴욕공립도서관은 매번 열리는 강의만큼 다양한 일을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상적인 시민사회’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앞으로 3시간 30분 동안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에 대한 선언과 같다. 영국의 동물행동학자인 리차드 도킨스는 “미국에서는 이성과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며 ‘공개 세속주의’를 주장한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종교주의자들이 미국의 다수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성과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더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강연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가 이성과 과학, 다시 말해 ‘지식’을 이야기 할 것이라는 선언이다.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런데 그 지식은 책을 통해 전달되지도 않고 감독의 생각을 통해 전달되지도 않는다. 지식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해 전달된다. 구직자들을 위해 직업에 대해 소개하고 유대인의 미국 정착기에 대해 설명하고 마르크스와 링컨의 관계에 대한 역설은 모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마치 시민 각자가 한 권의 책인 것처럼 말이다. 지식은 책 속에도 있지만 그 책을 읽은 사람들 각자에게도 있다. 그래서 대화는 지식을 공유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영화 속 이같은 행위들이 바로 ‘이상적인 시민사회’다. 시민의 권력은 그들이 ‘공동체’라는 것에서 나온다. 누군가는 영미문학에 능하고 누군가는 수학에 능하다. 누군가는 소방일에 능하고 다른 사람은 요리를 잘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자신이 잘하고 잘 아는 것들을 나눈다. 이것은 한 사람(소수자)이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지식이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고, 더 가질 수 있는 계층이 바로 ‘시민’이다. 권력은 지식으로 유지된다(지식에 따라 권력이 이동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막강한 권력’은 바로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이상적인 시민사회는 “막강한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전제를 두고 그 권력이 어떻게 해서 시민에게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 속 뉴욕 시민들의 모든 활동은 스스로 권력을 가지는 활동이다.

영화에서는 시민사회의 지식 공유 뿐 아니라 시스템을 지지하는 자들의 역할도 등장한다. 도서관 운영 관계자들은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고 기금의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이사회와 실무 회의도 진행한다. 여러 번의 실무회의 중 꽤 흥미로운 회의 한 자락이 등장한다. 전자책의 대기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추가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과제에 부딪히게 된다. 대중들이 즐겨찾는 베스트셀러를 확보해야 할지, 다양한 책들을 확보해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할지 고민이다. 
공동체의 운영을 맡은 사람들은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딪히게 된다. 이는 기초자치단체뿐 아니라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요구는 절대적인 합의에 이를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때문에 공동체 운영에서 고민은 다수의 의견을 따르면서 소수의견을 배려하는 것이다. 도서관의 운영진들은 그 고민을 한다. 
그러니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시민사회는, 구성원 각자는 지식을 쌓고 ‘공유’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수와 소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의견을 ‘공유’하고 실행에 옮긴다. 즉 이상적인 시민사회는 유기적인 지식 나눔과 의견 공유로 이뤄진다. 그것이 이 영화가 ‘시민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도서관을 택한 이유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권력은 지식(=정보)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을 나누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가 군 장병들에게 휴대전화 반입을 허가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이 디지털 정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보로부터 도태되는 것은 시민의 권리를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변하고 있다(영화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가 된 이후, 사람들은 책의 종말을 예견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맞는 말이긴 했지만 다행히 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보화 사회를 넘어서 4차 산업혁명 사회에 이르고 있다. 이제 인터넷의 바다에서 지식을 찾는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이 지식을 알려주는 시대에 이르고 있다. 다행히 뉴욕공립도서관은 정보화 사회의 파도를 무사히 넘은 것 같다. 이제 인공지능의 파도 앞에 그들은 얼마나 굳건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오래전 ‘아기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푹 빠진 적이 있다. 200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문화권이 다른 전 세계 4개국(미국, 일본, 나미비야, 몽골)에서 태어난 아기들의 1년을 관찰한 영화다. 어떠한 내레이션도 없고 설명도 없이 그냥 아기 크는 것만 보는 영화다(‘키우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영화가 이상하게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감독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개입할 수 있는 자리는 ‘편집’이 유일하다. 직접적인 언어가 없이 그림의 조합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심지어 이 그림은 매우 즉흥적이다. 그리고 영화 속의 말들은 화자가 관객에게 전하는 말이 아닌 강연에 온 청자, 혹은 회의에 참석한 실무진과 나누는 말이다. 감독은 그 말들을 모아서 자신의 말로 만든다.
이는 대단해 보이진 않지만 매우 탁월한 스킬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할 말을 다 하는 것은 마치 무림고수처럼 간결한 공격력이다. 아마도 다큐멘터리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며 닿아야 할 이상향이 아닌가 싶다.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메시지와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거기에 영향을 준 영화는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프랭크’와 정윤석 감독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다. 문명은 인간의 삶을 이롭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기도 했다(이를 설명하기 위해 타노스가 토니 스타크에게 말한 ‘지식의 저주’를 빌려오진 않겠다). 문명(文明)은 언어로부터 비롯된다. 언어는 지식을 담는 수단이자 대화의 도구다. 대화는 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며 나아가 사회를 형성하는데도 역할을 한다. 
언어가 관계를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는데 있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관계에서는 오해를 만들게 되고 사회를 확장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회는 별개의 집단으로 나눠서 형성됐고 집단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나는 감히 오해와 갈등의 원인, 그리고 전쟁의 원인으로 ‘언어’를 지목했다. 대화를 할 수 있기에 갈등하고 싸운다는 의미다. 
‘프랭크’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탈주하는 이야기다. ‘프랭크’는 비언어적인 노래로 언어적 족쇄를 풀어버린 사내의 이야기고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비언어적 노래로 자유를 얻은 청년들이 좌절을 느끼고 언어적 세계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나는 이들 영화의 생각에 지지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내 생각에 반대되는 영화다. 영화는 지식(=언어)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상적인 사회로 향하는 희망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나 역시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사회로부터 빚을 지고,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이것은 마치 롯데자이언츠를 욕하는 롯데팬처럼 이율배반적이다. 그래서 얄궂은 결론 하나 내려보자면 “인류가 가진 모든 갈등은 언어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다”. 언어로부터 해방되고 탈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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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갑자기 죽는 소리 할 때는 심경에 변화가 있거나 요즘 몹시 힘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소위 '자살의 신호'나 '우울증으로부터 구조요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할 능력이 되지 않아 판단이 어렵다. 특히 나와 관계가 없는 '영화감독'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변호텔'은 아주 이례적인 작품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강변호텔'에 대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죽음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영화"라고 말했다. 거기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이제부터 이야기 할 '아무도 없는 곳'은 마치 김종관 버전의 '강변호텔' 같은 영화다. 물론 모든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심정과 연관 지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직전에 만든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에 이어 이번에도 '죽음'을 화두로 이야기를 던진다. 

2. '아무도 없는 곳'은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창석(연우진)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오래된 커피숍에서 미영(이지은)을 만나고 한적하지만 건조해보이는 공원 옆 카페에서 후배 유진(윤혜리)를 만난다. 그리고 출판일을 도와주던 사진작가 성하(김상호)와 바(bar)에서 일하는 주은(이주영)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건 죽음과 연관돼있다. 본인 스스로 죽음에 근접한 미영, 죽은 새를 마주한 유진, 아내가 죽으면 함께 죽으려는 성하, 죽을 고비를 넘긴 주은. 죽음과 가까이 한, 혹은 가까이 했던 사람들과의 대화는 어딘가 초연하다. 그들은 각자의 성격대로 삶의 마지막, 혹은 이미 지나버린 그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3. 그런데 이 초연한 순간에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바로 창석이다. 영국에서 결혼을 했던 창석은 아이를 낳았으나 어떤 일로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이미 그는 '자녀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은 몸이다. 게다가 아내는 아직도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끔찍한 상실은 이들 가족의 울타리 뿐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 또한 파괴해버렸다. 그 때문인지 창석과 주변의 공기는 이른 새벽 해무처럼 낮고 짙게 깔려있다. 그런 창석의 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노부부의 모습이다. 시선이 노부부를 발견하기까지 따라가는 풍경은 아무도 없는 밤거리다. 마치 그 거리는 창석이 지나간 것처럼 어두운 공기만이 맴돌고 있다. 

4. 나는 이 영화를 본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리 젠킨스 감독의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빌 스트리트')이라는 영화를 봤다. '빌 스트리트'는 어린 시절 추억과 소울이 담긴 거리를 기억하기 위해 그 거리를 생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비춰준다. 초상화처럼 담긴 얼굴들은 거리에 담긴 이야기와 그에 따른 감정들이다. 다시 말해 거리는 사람을 통해서 기억된다. 김종관의 '아무도 없는 곳'은 '빌 스트리트'와 정반대에 있는 거리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있었던 거리에는 점점 사람이 사라져간다(상실). 우울함은 표정이 없이 공허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사람을 잃어가는 거리는 그곳을 관찰한 사람의 마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걷는 창석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 거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감독의 마음이기도 하다. 

5. 오래전에 봤던 김종관 단편선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서 살펴본다면, 이 영화는 김종관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통틀어 가장 우울한 영화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그의 현재 상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궁금함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강변호텔'을 만든 홍상수의 심정에 대해 추측만 할 뿐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점과 같다. 심지어 그는 엉망진창이 된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한예리)에게도 나비같은 날갯짓을 선사했다. 창석에게는 그것마저 없다. 그는 그저 사라져버렸다. 

6.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주은이다. 그녀는 이전의 김종관 영화 속 여성캐릭터들과 달리 외모와 성격이 꽤 강하다. 그렇다고 '걸크러쉬'이 매뉴얼에 들어맞는 강함이 아니라 '시원시원함' 정도의 강함이다. '더 테이블'이나 '최악의 하루'에서도 여성캐릭터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감이었고 누군가는 조금 밉상이었다. 어떤 형태건 김종관 감독이 이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담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아무도 없는 곳'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랬기에 그곳에 있는' 인물들이다. 연출자가 애정을 가지고 가꾼 캐릭터라기보다 가장 적절하게 존재해야 하는 캐릭터로써 배치한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창석과 유진이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빛의 사라짐'을 그대로 표현한다. 빛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물이 사라지고 심지어 실루엣도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밤거리에서 창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더해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전 영화들에 비해 인물들이 예쁘게 보이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7. 결론: 김종관 감독은 '아무도 없는 곳'이 상실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아는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영화를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내리겠다. 영화 속 곳곳에 짙게 깔린 죽음의 정서는 우리가 아는 익숙한 거리를 맴돈다. 참 다행스럽게도 죽음에 대한 이 영화의 정서는 '강변호텔'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죽음 전체와 개인의 죽음에 대한 차이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는 '강변호텔'보다 훨씬 더 우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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