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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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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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파운드푸티지 장르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좋아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블레어윗치'의 센세이션을 기억하며 여전히 "이것이 공포영화의 미래"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장르가 가져야 할 최대한의 미덕은 "나는 픽션이 아니다"라며 관객을 속이는 일이다. 영화의 모든 표현과 기술은 관객을 속이기 위해 준비했다. 파운드푸티지는 그 목적에 한발 더 다가간 장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녀석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IT기술이 발달하고 관객이 취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진짜인양 관객을 속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더 진화한 파운드푸티지 영화인 '서치'나 '언프렌디드'가 나왔다(나는 '언프렌디드'의 아이디어를 대단히 좋아한다. 수입사가 낮은 관람등급을 받기 위해 빌어먹을 블러 처리만 하지 않았아도 그 영화에 대단히 호의적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영화 '소름'은 파운드푸티지의 고전으로 회귀한다. 

2. 돈이 궁한 비디오 촬영기사 애런(패트릭 브라이스)은 낯선 남자 조세프(마크 두플라스)에게 촬영을 의뢰받고 그의 별장으로 받는다. 조세프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고 곧 태어날 아들에게 남길 영상편지를 찍게 도와달라고 한다. 애런은 일을 수락하지만 촬영을 진행할수록 조세프의 기괴함이 드러난다. '소름'의 이야기는 진짜처럼 포장하기 딱 좋은 소재다. '블레어윗치'의 마녀전설이나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저주받은 집이 등장할 필요도 없다. '클로버필드'처럼 뉴욕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설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이 이야기는 누가 봐도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는 '진짜로 속이기에 딱 좋은 소재'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대단히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이 영화에는 '아는 얼굴'이 등장한다. 

3. 파운드푸티지에는 보통 완전 신인배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배우를 쓰기 마련이다. 익숙한 얼굴이 등장해 "이것은 영화다"라는 거리감을 두는 일을 막고 관객이 진짜처럼 믿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름'에서 조세프를 연기한 마크 두플라스는 너무 낯이 익다. 검색해보니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제로 다크 서티',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툴리', '라자루스 이펙트', '타미' 등 영화와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워낙 난해한 캐릭터인 만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가 출연해야 했겠지만 장단편영화와 드라마만 47편에 출연한 배우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소름'은 영화라는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조세프의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실패한 파운드푸티지'가 된다. 이미 실패해버린 파운드푸티지에서 영화는 나름 최선을 다한다. 빌드업 과정에서 깜짝쇼를 집어넣어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카메라가 사건을 찍는 게 아닌 모니터를 찍는 형태로 비틀어서 반전을 준다. 파운드푸티지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잔재주를 부리지만 이미 '이것은 영화'라는 거리감은 지우기 어렵다. 

4. 결론: 차라리 정극으로 만들었다면 더 재밌었을지도 모르겠다. 파운드푸티지의 테크닉은 버려야 하겠지만 대신 정극 영화의 기술을 얻을 수 있다. 편집과 촬영의 리듬감을 살릴 수 있고 적재적소에 음악을 배치해 긴장감을 줄 수 있다. 어떤 장면에서는 정극이었으면 더 쫄깃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빌런의 정체는 장르적 특성을 떠나 존재 자체로 소름돋는다. 그가 소름돋게 하는 방식도 꽤 무시무시하다. 아이디어가 좋고 반짝이는 지점이 많은 영화다. 다만 이 영화의 유일한 실패는 아는 얼굴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라는 점이다. 이 실패는 꽤 크게 거부감을 준다. 


추신) '소름2'도 있다. 아는 얼굴이 또 나온다. ...이걸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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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멜로영화’를 이야기할 때 나는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높은 순위에 올려둔다. “멜로가 뭐 별거 있나, 저게 현실 멜로고 현실 사랑이지”라며 다소 꼰대스런 말을 해댄다. 연애니 사랑이니 뭐 그런 거 결국 “오늘 널 갖겠어”와 “오늘 너와 뜨거운 밤을 보내겠어” 사이의 팽팽한 기싸움이 아니던가. 홍상수 감독의 모든 필모가 그렇진 않지만, 그가 몽골음식점 사장님처럼 푸근했던 시절에는 말랑말랑하고 찌질한 연애담을 쓰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감정은 오직 자기들끼리만 절실하고, 스크린 너머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는 찌질하고 유치한 장난에 불과하다. ‘사랑’이라는 거 결국 당사자들끼리만 진지한 일이다. 제3자에게 그것은 가십거리이자 주전부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가십거리이자 주전부리로써 그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절절하게 포장된 사랑이야기에는 울다가 웃으며 공감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 찌질했던 자신의 사랑경험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나만 진지한 게 아니었어”라는 일종의 위로에 가깝다. 여기 한 괴짜감독이 질문을 던진다. ‘사랑’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한 결과물을 내놓고 “자, 여기에도 공감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다. 이 이야기는 진흙탕 같은 삶의 순간을 벗어나 온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만 남는다. 그 진흙탕 속에서 이들이 쫓는 사랑은 ‘에로틱’인지 ‘플라토닉’인지, 실체조차 불분명하다. 심지어 불끈 솟아오른 남근은 우뚝 솟은 십자가와 오버랩된다. 지금 이 영화는 예수를 향한 사랑마저 ‘에로틱’와 겹치게 하려는 셈일까? 소노 시온의 ‘러브 익스포져’는 모든 멜로영화 중 가장 혼란스런 작품이자, 사랑의 본질로 향하는 길고도 험난한 길이다. 


‘러브 익스포져’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사랑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유(니시지마 타카히로)는 어머니가 일찍 떠났고 아버지 테츠(와타베 아츠로)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서 아들을 배신했다. 테츠 역시 카오리(와타나베 마키코)와 사랑에 빠지지만 카오리로부터 배신당했다. 카오리의 딸 유코(미츠시마 히카리)는 가족(=아버지)이라는 울타리로부터 배신당해 남자를 증오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무려 아버지(이타오 이츠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코이케(안도 사쿠라)는 자신을 좋아하는 남학생을 죽이면서 배신을 ‘한다’. 유일하게 배신에 능동적이었던 코이케는 이 이야기의 ‘빌런’이 된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은 결핍을 가지고 있다. 브루스 웨인은 부모가 살해당한 장면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토니 스타크는 자신이 판매한 무기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클락 켄트는 아기 때부터 지구에서 쭉 살았지만 그의 막강한 힘은 그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히어로물이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주인공은 결핍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결핍을 극복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객과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러브 익스포져’의 인물들이 가진 결핍에는 ‘사랑’이라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 제목에도 ‘러브’가 등장하고 모두들 ‘러브’를 쫓는다. 아주 대놓고 ‘멜로영화(사랑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언을 하지만 이것이 쉽게 와닿진 않는다. 지금 이 등장인물들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있다. 


테츠의 직업인 신부다. 그는 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다. 그런 테츠 앞에 카오리가 등장한다. 카오리는 테츠의 설교에 감명받아 그를 열렬히 사랑한다. 카오리의 모습이나 사랑하는 방식은 편견을 갖게 한다. 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성스러운 것이고 카오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불경할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적어도 테츠의 아들 유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카오리는 엄밀히 따지면 정착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다. 테츠는 신을 향한 사랑과 카오리를 향한 사랑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 사랑과 ‘실재하는 것’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테츠는 실재하는 존재를 사랑하기로 한다. 카오리 역시 안착할 수 있음을 깨닫고 사랑스런 연인의 미소를 보인다. 

테츠의 아들 유 역시 사랑이 뭔지 모르고 있다. 유의 갈등은 감정적 사랑이 발기(勃起)로 이어지면서 비롯된다. 유 본인은 유코를 향한 마음이 마리아를 만난 것처럼 성스럽고 숭고하지만 몸은 ‘발기’해버린다. 유 본인뿐 아니라 관객조차도 ‘발기’를 불경하게 바라본다(이미 그는 ‘오피셜’한 ‘변태’다). 유는 변태적 행위(도촬)에 대해 유코에게 변명을 하지만 뭐 그래 봤자 ‘변태’다. 다만 ‘죄를 짓기 위해 도촬했다’는 그의 사명과 도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죄를 짓기 위해 도촬했다’는 사명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얻기 위해 한 행위다. 아버지에게 도촬을 고백한 순간 테츠는 ‘신부’가 아닌 ‘아버지’로서 아들의 뺨을 때렸다. 즉 도촬은 사랑받기 위해 한 행동이다. 그리고 ‘발기’하지 않았으니 도촬의 순간에 성적 쾌락을 느끼진 않았다. 그럼에도 도촬을 한 것은 사랑에 대한 쾌락 때문이다. (쓰면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유는 사랑받기 위해 도촬했다. 

그런 유가 ‘발기’했다. 운명 같은 마리아(=유코)를 만나고 첫눈에 반한 순간 유의 몸에서 일어난 반응은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동공이 확장된 게 아니라 그것이 벌떡 일어났다. 에로틱하고 말초적인 대상에 그것이 반응한 게 아니라 ‘사랑’에 반응했다. 성적 페티시는 종류가 다양하다. 이성의 벌거벗은 몸이나 관능적 몸놀림에 반응할 수 있지만, 옷이나 물건, 상황, 물질에도 반응할 수 있다. 유는 이성의 속옷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페티시인 셈이다(마리아를 향한 페티시일수도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유의 성장환경을 고려한다면 그의 ‘발기’는 사랑(혹은 마리아)에 대한 신체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심장이 뛰고 동공이 확장되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신체반응과 같다. 영화 역시 우뚝 선 유의 남근을 십자가와 오버랩시키면서 그의 발기를 성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써놔도 어쨌든 변태는 변태다. 

유코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확실하게 사랑이 뭔지 모르는 인물이다. 자신을 구해준 사소리씨(=유)를 사랑하면서도 그 감정이 성경의 정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두려워하고 갈등한다. 사소리씨의 실체를 알았을 때 유코는 두려워하며 도망친다.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깨달은 것은 유는 두 번이나 유코를 구해줬고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유코는 그것을 깨닫기까지 멀고 먼 길을 돌아갔다. 코이케는 가장 많은 결핍과 상처를 가진 인물이다. 코이케는 사이비 종교에 귀의해 중역에 올랐고 존경과 두려움을 얻고 있다. 권력이 있고 추종자가 있지만, 세뇌시킨 테츠가 아들을 챙기는 순간에 혼자임을 느끼고 자살한다. 그러나 뒤늦게 달려온 추종자들은 죽어버린 코이케의 곁으로 달려와 오열한다. 그리고 품 안에 있던 새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복종과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곁에는 ‘존경’도 있었다. 코이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랑이 뭘까?”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20세기에 술 취한 복학생 형? 연애 한 번 찐하게 하고 차여서 오열하는 친구? 철학책 몇 권 읽고 인간사에 대해 고민하는 도 닦은 꼰대? 혹은 거창한 철학자? 여기 소노 시온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사랑이 뭔지 모르는 인물들을 잔뜩 등장시켜놓고 사랑이 뭔지 묻는다. 소노 시온이 누구던가. 괴짜들이 즐비한 일본 대중문화 시장에서도 성공한 ‘탑급 괴짜’가 아니던가. 때로는 변태 같으면서 저돌적이기도 하고 유머러스하다가도 피비린내 나는 비정함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정상(normal)’적인 길은 안 가는 사람이다. 이 괴짜는 사랑이야기를 해도 참 거창하게 한다. 예수와 성경, 마리아까지 언급하면서 이성과 가족, 신에 대한 사랑까지 모두 꺼내놓는다. 그리고 ‘발기’조차 사랑의 카테고리에서 이야기한다. 가히 소노 시온다운 발상이다. 거창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돌고 도니 남는 것은 “사랑이 뭘까?”라는 물음이다. 

문제는 정작 이 영화도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널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어. 너만 보면 내 그것이 벌떡 일어서”라는 고속도로 휴게소 성인가요 테이프 가사 같은 소리를 한다. 근데 그 이상으로 사랑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4시간 동안 사랑이 뭔지 설명했는데 그만큼 설득력은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이 영화의 최초 가편집본은 무려 8시간이었다). 확실한 것은 소노 시온은 홍상수나 김기덕보다는 로맨틱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 ‘러브 익스포져’는 ‘러브 액츄얼리’보다 로맨틱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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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영화는 대부분 '가짜'다. 이야기의 흐름은 감독과 작가의 설계에 따라 이뤄지고 배우 역시 그 설계에 맞춰 연기한다. 관객들은 대부분 영화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만 그 '가짜'를 즐기기 위해 극장으로 향한다. 때문에 영화의 오랜 과제는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 기술은 발전했고 현대에서는 CG 테크놀로지도 발전했다. 그리고 영화는 몇 가지 장난을 더해서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만든다. 그 장난 중 하나가 실제 인물이 실제 이름으로 출연하는 경우다. 생각나는 몇 가지 영화는 프랑스 영화 '장 클로드 반담'이나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차인표', '언컷젬스', 곧 개봉을 앞둔 영화 '인질' 정도다. 실제 사람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인도영화 'AK 대 AK'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무려 '실제 영화감독'과 '실제 영화배우'가 나와서 한국영화 '끝까지 간다'와 비슷한 걸 찍는다. 이 영화는 정말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는 영화다. 

2. 인도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실제 영화감독'으로 출연한 아누락 카시압은 범죄 스릴러부터, 멜로, 애니메이션, 휴먼드라마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찍는다(주로 범죄 스릴러 영화가 많은 편). 2016년에는 옴니버스 영화 '매들리'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출자는 아누락 카시압 외에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소노 시온, 미아 바시코브스카 등이 연출자로 참여했다. 인도영화가 워낙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기 어려운 만큼 그의 영화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적은 없다. 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작품이 종종 소개됐다. 가장 최근에는 2018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거리의 싸움꾼'이 아시아 영화의 창 섹션에 상영됐다. 2016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EFFFF 아시아 영화상'을 수상했다. 

3. '실제 영화배우'로 출연한 아닐 카푸르는 꽤 익숙한 얼굴의 인도 배우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의 인도 방송재벌이자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퀴즈쇼 진행자로 알려져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했지만 1959년생인 그의 나이처럼 이제는 점점 '옛날 배우'가 돼버렸다. 'AK 대 AK'는 이 지점 떄문에 아누락과 아닐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영화의 제목은 그들의 실제 이름의 약자인 AK에서 따온 것이다. 아누락과 아닐은 'AK 대 AK'라는 이름의 대담에 참여하게 되고 관객들의 질문을 받던 중 감정이 격해져서 큰 싸움으로 번진다. 두 사람의 싸움은 연예면 가십에 오르내리고 아닐과 아누락은 저마다 타격을 입는다. 특히 아누락은 준비 중이던 영화 프로젝트가 좌절되자 아닐에 대해 앙심을 품는다. 어느날 아누락은 그의 다큐멘터리를 돕던 여성 촬영감독 요기타(이 분도 실명으로 출연했다)의 제안을 받고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다. 바로 아닐의 딸 소남 카푸르(역시 실명)를 납치한 뒤 제한시간 안에 구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겠다고 말한다. 

4. 냉정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은 한국영화 '끝까지 간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다소 장난처럼 보이기도 하고 잠깐의 느슨한 전개로 늘어지게도 만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전개가 벌어지면서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든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끝까지 간다'와 분명 닮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두 남자의 '끝장승부'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이야기의 가장 특이할 점은 장난처럼 시작된 싸움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된다는 점이다. "이게 이렇게 심각해질 싸움인가" 싶다가도 그게 논리적 오류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일이 눈덩이처럼 커졌구나"라고 느껴질 뿐이다. 영화에서 이렇게 되는 사례는 꽤 많다. 미국에 살던 한 젊은이는 자신이 개 한마리 죽였다가 조직원 수십명을 잃게 될 줄 알았을까? 

5. 페이크다큐처럼 촬영되는 영화는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실제'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AK 대 AK'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모두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페이크다큐 장르를 좋아해서 이런 촬영은 대단히 마음에 든다. 다만 끝나고 나서 환기되는 장면까지 '진짜인 척'을 좀 더 했다면 좋았을텐데 갑자기 '영화'로 복귀해버린다. '복귀'해버린 마지막은 다소 구질구질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뒷이야기를 더 하고 억지로 후속편의 여지를 남겨두는 뉘앙스다. 다행스럽게도 이 모든 구질구질함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등장한다(무려 춤과 노래가 지나간 뒤). 때문에 적당한 때 디바이스를 꺼버린다면 더 깔끔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살다살다 "쿠키영상 안 보는 게 나아요"라고 말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이건 그런 경우다. 아...'스파이더맨: 홈커밍'도 쿠키영상 안 보는게 나은 경우였구나. 

6. 결론: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봤는데 의외로 재밌는 영화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전개를 지나 큼지막한 반전까지 툭 던진다. 조금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인도판 끝까지 간다'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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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 넷플릭스 6부작 교양 프로그램 '욕의 품격'에 대한 리뷰인 만큼 욕이나 그에 준하는 단어에 대해 '무삭제'로 내보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가 수입사에 의해 '블러(Blur)' 처리된 장면이 나오는 장면인 만큼 무삭제로 내보내고 싶었습니다. 만약 이 글이 누군가의 신고나 티스토리 측에 의해 삭제된다면 '클린 버전'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1-1. 체벌이 가능했던 시절, 내 고교 1학년 수학선생님의 이름에는 같은 낱말이 2개가 들어갔다. 때문에 그 선생님의 별명은 '쌍코피'였다. 그 두 명제 사이에 어떤 논리적 흐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선생님의 별명은 쌍코피다. 쌍코피는 내가 학창시절을 포함해 살면서 보고 들은 모든 교사들 중 가장 창의적인 체벌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때 그가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대에 경찰을 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고교 수학선생을 한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같았으면 쌍코피는 진작에 신고 당하고 교사 때려쳐야 한다. 

1-2. 한 가지 에피소드를 언급해보자면,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방학숙제를 검사하는데 우리 반에서 절반이 방학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쌍코피는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매 수업시간마다 단계를 올려서 4단계의 체벌을 줄거다. 모든 체벌을 버틴다면 숙제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했다(당시 수학은 일주일에 4시간이었다). 친구들은 "까짓 거, 해보지"라고 생각했다. 쌍코피의 제1단계는 콧구멍에 맨소래담로션 바르기였다. 강한 자극에 어질어질할 정도였지만 버틸만했다. 다음 시간이 되자 절반 중의 절반이 남았다. 2단계는 스프레이 파스를 콧구멍에 뿌렸다. 1단계보다 더 골고루 자극이 전해졌다. 친구들은 당장 죽겠다는 것보다 "대체 4단계는 뭐지"라는 공포에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3단계가 되자 나를 포함한 단 4명이 남았다. 쌍코피는 3단계를 준비하며 와사비를 물에 개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쌍코피에게 비밀기지가 어딘지 말할 뻔 했다. 공포가 극에 달한 아이들은 밤을 새가며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전교에서 4단계까지 간 사람은 나 혼자였다. 쌍코피는 장모님댁에서 가져왔다며 고추장을 물에 개기 시작했다. 3단계보다 자극은 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콧구멍을 씻어도 장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장냄새 빼는 데 일주일 걸렸다. 

2. 그런 쌍코피는 가끔 수업하다가 지루할 때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로 '욕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피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개새끼', '씨발', '지랄' 등등 당시 남자 고등학생들이 입에 달고 살던 욕지거리의 어원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주로 음담패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때 쌍코피에게 배운 '욕지거리 강연'은 지금도 술자리에서 가끔 써먹는다. 단어의 기원을 찾는 것부터 지역별로 욕하는 패턴까지 다양하다. 쌍코피에게 체벌(이라고 쓰고 고문이라고 읽는) 받는 순간은 참 지랄맞았지만 욕지거리 강연은 재밌었다. 그 인간에게 배운 미분, 적분은 다 까먹었어도 호남식 욕의 관용어구는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런 써글노무 자슥, 눈깔에 빨대를 꽂아다 먹물을 쪽 빨아먹어벌라". 

3. 넷플릭스가 걸쭉한 교양프로그램 하나를 내놨다. 총 6부작이지만 회당 20분 분량이니 2시간이면 다 본다. '욕의 품격'이라는 이 프로그램의 영제는 'history of swear words', 욕의 역사다. 영어단어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욕설 단어인 'Fuck', 'Shit', 'Bitch', 'Dick', 'Pussy', 'Damn'의 어원을 찾아간다. 사무엘 잭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작품에서 육두문자 걸쭉하게 쏟아냈던 니콜라스 케이지가 호스트를 맡았고 언어학자와 사전편찬하던 위원, 코미디언, 대학교수 등이 출연해 단어의 어원과 일상생활에서의 쓰임, 단어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들려준다(패널로 참여한 인터뷰이 중에서는 '주먹왕 랄프'에서 꼬마소녀를 연기한 사라 실버맨도 있다. 이 누나도 워딩 걸쭉하다). 단어의 역사를 전하고 그 쓰임을 이야기하는 만큼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워낙 유쾌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때때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첨삭과 깨알상식이 더해지면서 꽤 재미있다. 유쾌하게 즐기면서 교양도 얻어갈 수 있다. 게다가 간간히 영화 속 욕이 등장하는 장면은 유쾌함을 더해준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시작하자마자 무려 레트 버틀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클라크 게이블) 연기에 도전하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볼 수 있다. 

4. '욕의 품격'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람 욕지거리 하는 거 다 똑같네"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 각 챕터에 등장하는 욕을 한글로 전환해보면 '씨발', '똥', '썅년', '좆', '씹', '젠장'이다. 한국인이 즐겨 쓰는 욕과 정확하게 일치된다(실제 어원도 들어맞는 편이다). 주로 욕에 쓰는 말은 더러운 것이나 외설적인 것, 음란하고 은밀한 것에 기인한다. 이 점에서 동서양이 그럭저럭 일치한다. 그리고 욕의 어원은 대체로 남성중심적이다. 영어에도 '썅놈'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글에서 '썅놈'과 '썅년'은 무게감이 다르다. 영어에서는 '썅년'을 의미하는 'Bitch'는 보편적인 단어지만 '썅놈'을 뜻하는 단어(정확하게 '썅놈'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글에서 '좆'과 '씹'의 무게감은 비슷하다. 반면 영어에서는 'Dick'보다 'Pussy'가 훨씬 모욕적인 말이다(남자에게 "Pussy"라고 하는 것은 해당 남자와 여성을 모두 모욕하는 말이 된다. 반면 Dick은 음흉하게 웃을 수 있는 말장난이 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여자에게 조신한 태도를 강요하다 보니 거친 언어는 남성을 중심으로 진화했다. 때문에 '욕의 품격'은 다소 페미니즘적일 수 있다(실제로 인터뷰하는 대학교수는 페미니즘 전공이다). 이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볼 필요는 있지만 '욕의 품격' 전체를 페미니즘 프로그램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욕의 품격'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진행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5. 부디 바람이 있다면 '욕의 품격' 한국판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한글패치가 너무 절실하다. 앞서 언급한 6개의 워딩을 한글로 전환한 것부터 지역별로 다양한 욕, 사라진 옛날 욕을 탐구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세계의 모든 언어를 다 연구해보진 못했지만 한글처럼 욕이 버라이어티한 나라도 없을거라 생각한다. 호남에 가면 "느자구 없는 놈"이 있고 영남에 가면 "세가 빠진다"라는 말도 있다. 이런 수많은 로컬 욕의 유래를 찾는 건 매우 재미난 일이 될거라 확신한다. 오죽하면 "'욕의 품격' 한글판을 만들면 니콜라스 케이지 역할은 누가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단 진행은 데프콘과 유병재 2MC로 가고 인터뷰이에 김영옥, 김수미 여사님과 국어국문학, 지역문화를 연구한 대학교수가 등장하면 된다(한글판은 육두문자 잘 터는 인터뷰이를 확보하기 어려울 듯 하니 2MC가 적당히 만담을 해줘야 한다). ...아, 이 프로그램 한글판 마렵다. 

6. 결론: '욕'은 가장 감정적인 단어다. 상스러운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주로 쓰이지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의지를 돋울 때도 쓰인다. 예를 들어 "씨발 한 번 해보자", "에휴 씨벌" 등이다. 어떤 여자들은 다른 사람의 공격에 맞설 때 "그래, 씨발 내가 썅년이다. 어쩔래?!!"라며 받아친다. 욕은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직장생활을 하는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옥상 위에 올라가 하늘 바라보며 담배 연기 내뿜은 뒤 "씨발 좆같네!"라며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상사 면전에 대놓고 뱉을 수는 없으니). 교양있는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 상스런 단어들을 지지한다. 감정노동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타인의 갑질에 속이 썩어서 살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간호사를 상대로 갑질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나는 감정을 숨기고 참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더 심각한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갑질하는 사람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혹은 상대가 들을 수 있게 정확한 발음으로) "야이 씨벌놈아 아가리 쳐닫어라. 눈깔 뽑아다 젓갈을 담궈버릴라니깐"이라고 말하는게 좋다. 감정은 곪기 전에 터트려야 흉터가 남지 않는다. '욕의 품격'은 교양없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교양을 갖추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니 어디선가 '씨발놈'을 만나면 당당하게 "자 지금부터 니가 왜 씨발놈인지 설명해줄게. '씨발'의 뜻은 말이야"라며 설명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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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은 역대 어느 올림픽 개막식보다 화려하고 웅장했다. 통상 올림픽 개막식의 경우 자국의 문화를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집중한다. 그런데 런던올림픽은 조앤 K. 롤링부터 시작해서 폴 매카트니, 미스터 빈, 해리 포터, 007, 오아시스 등등 세계 사람들이 '별 일 없으면 다 알고 있을' 문화들이 등장한다. 영국은 런던올림픽을 통해 문화를 알리는 대신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개막식을 보면서 새삼스럽게도 영국의 대중문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느 네티즌이 던진 한마디가 있었다. "영국이 대중문화로 이미지 세탁을 해서 그렇지, 저놈들 나치나 일본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역시 대중문화를 통한 이미지 세탁을 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주변국에게는 세상 개망나니로 찍혔다. 나치 독일 역시 세상 악랄한 집단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은 덩치가 비슷하거나 더 큰 나라들을 상대로 싸웠다.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자신들보다 약한 나라를 상대로 침략을 벌였다. 구체적인 만행들을 열거해보면 나치나 일본보다 결코 밀리는 나라는 아니다. 

2. 제니퍼 켄트의 영화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악랄한 만행에 주목한다. 호주 태즈메이니아 마을에 머무는 영국군을 이끄는 장교 호킨스(샘 클라플린)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일랜드인 죄수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쵸시)를 성폭행하고 남편과 아이를 살해한다. 호킨스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론스톤 마을로 떠나고 살아남은 클레어는 호킨스 일행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이 영화는 평범한 복수극이 될 수 있다. 저 옛날 메어 자르치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부터 시작해 코랄리 파르쟈의 '리벤지'까지 이어지는 '강간범 뚝배기 깨는 영화'와 계보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뚝배기 깨는 영화). 그러나 이 영화는 복수극의 카타르시스 대신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가해자가 영국군이고 피해자는 아일랜드인과 호주 원주민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3. 클레어는 호킨스를 쫓기 위해 안내자를 찾는다. 끈질긴 설득 끝에 클레어의 길안내를 돕는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는 호주 원주민이었으나 가족을 잃고 사냥할 권리도 잃었다. 원주민의 아이덴티티를 잃은 채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다. '영국인'으로 대표되는 호킨스는 클레어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빌리를 포함한 호주 원주민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클레어의 복수뿐 아니라 빌리의 복수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클레어와 빌리의 관계는 중요하다. 영화 초반까지 이야기의 절대적인 피해자는 클레어와 가족들이다. 관객 역시 클레어를 절대적 피해자로 받아들이지만 빌리가 등장하면서 사정은 바뀐다. 빌리에게는 호킨스나 클레어 모두 똑같은 백인이다. 그들은 먼 곳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기 위해 온 이방인에 불과하다. 실제 클레어와 빌리의 관계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이며 클레어 역시 호킨스와 마찬가지로 길안내자를 'Boy!'라고 부른다. 영화는 빌리를 등장시키며 클레어를 '절대적 피해자'의 위치에서 떨어뜨린다. 

4. 클레어로 상징되는 아일랜드는 실제 1172년부터 지속적으로 영국의 침략을 받아왔다. 식민지배를 받다 켈트족의 저항으로 몰아내고 다시 침략당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든 제니퍼 켄트는 호주 국적의 백인이다. 감독의 혈통이 잉글랜드계인지 아일랜드계인지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건 그녀 역시 이방인의 자손이다. 만약 빌리가 부각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클레어(혹은 감독)의 자기 변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빌리가 '절대적 피해자'의 위치에 자리잡으면서 감독 자신을 포함한 모든 백인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호주의 본래 주인인 원주민에게만 춤 추고 노래할 권리를 준다. 이런 선택이 '아일랜드'에는 좀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저항과 독립 역사에 비해 호주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장 검색을 해봐도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저항을 다룬 영화는 꽤 여러 편 나오지만 호주에 대한 영화는 거의 없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독립에 성공했고 호주는 실패했다. 그리고 감독은 호주인이다. 감독이 굳이 아일랜드까지 살피며 변명의 여지를 줄 이유는 없다(그리고 현재의 아일랜드는 이미 잉글랜드와 활발히 교류하며 갈등하는, 복잡한 애증의 관계다). 

5. 다만 호킨스로 상징되는 영국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로 묘사된다. 호킨스는 나태하고 폭력적이며 위선적이다. 어린 아이까지 가차없이 죽이는 그는 자신의 만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최악의 인간'이다. 이 영화는 호킨스 외에도 많은 영국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변인물을 제외하고 캐릭터성이 부여된 인간은 호킨스와 루스(데이몬 해리맨), 자고(해리 그린우드) 등 군인들뿐이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모두 영국군이다. 영화는 복수극의 프레임에서 가해자의 위치에 영국을 덧씌운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감독은 백인이다. 그녀는 아일랜드인의 자손일 수 있지만 영국인의 자손일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자신과 그 혈통의 정체성에 대한 '자아비판'일까? 꽤 무시무시한 고백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호주에 사는 모든 백인들에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한 자들의 자손인지 보게 만든다. '나이팅게일'을 보면서 "영국인들이 참 불편하게 보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영국인보다 호주에 사는 백인들이 영화를 보면 정말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검색을 해봐도 '호주 출신 영화배우'에는 크리스 헴스워스, 휴 잭맨, 케이트 블란쳇, 마고 로비, 에릭 바나, 토니 콜렛 등이 언급된다. 원주민 출신 배우는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누가 있으면 제보 바란다). 당장 호주에서 원주민 출신 연방장관도 2013년에 처음 등장했다. 

6. '역사적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한다. 문화적 정체성을 깨닫고 국가적 근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미 호주는 백인이 주류를 차지한 나라다. 감독은 자신을 포함한 백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자리 잡았는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포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비단 호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메리칸 인디안을 학살하며 미국땅을 차지한 백인들, 우리나라 문화 깊은 곳에 '친일' 정서를 심어둔 일본인들, '하나의 중국'이라는 명목으로 타국의 문화를 시기하고 침략하는 중국인들. '나이팅게일'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모든 나라에 거울을 들이대고 추악한 민낯을 보게 만드는 영화다. 인류의 발전이 전쟁의 역사와 함께 간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리고 침략의 역사는 이미 일어난 것(혹은 이미 시작된 것)들이다. 이미 시작된 침략이라면 지금 당장 멈춰야 하고 지나간 침략의 역사를 가진 국가와 민족이라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침략'은 '갑질', '강간', '폭행'과 같은 말이다. 추악하고 파렴치한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날뛰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7. 결론: 침략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침략을 일삼는, 일삼으려는 모든 국가에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쳐 웃지마, 니 얘기야". 




추신) 병장 루스를 연기한 데이몬 해리맨은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에서 무려 찰스 맨슨을 연기했다. 다른 작품에서 본 적은 없지만 나쁜 놈이 정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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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지향적 인간'이다. 특별히 뭔가를 수집하진 않지만 손에 들어온 것은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20년된 부산국제영화제 데일리가 먼지 소복히 쌓여서 굴러다니고 있고 전(×7)여친의 손편지도 어딘가에서 잠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내 방 책꽂이에서 발견한 핑클 이진의 엽서를 봐도 그 위력을 알 수 있다(그 엽서 24년 된 물건이다). 물건이나 사람과 관계없이 뭔가에 마음을 주면 쉽게 그 마음을 끊지 못한다. 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럴테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더 심한 편이다. '정 떼는 일'은 나에게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라고 되물어야 할 정도로 낯선 작업이다. 

그러나 때로는 정을 떼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도 정을 떼야 할 때가 온다. 갓 스무살이 됐을 때 부산 깡통시장 수입용품 상점에서 구매한 티셔츠가 있었다. 회색에, 요즘말로 '오버핏'의 반팔 라운드 티셔츠였다. 이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나는 이 티셔츠를 좋아했다. 너무나 단순하게도 그 티셔츠를 좋아한 이유는 가슴에 프린트 된 '허리케인 죠' 때문이었다. 매니악한 프린트는 티셔츠를 꽤 레어템으로 만들었다. 그 티셔츠를 너무 좋아해서 거의 6년 가까이 입었다. 반팔 티셔츠 치고는 꽤 오래 입은 셈이다. 사실 더 입고 싶었는데 그쯤 되니 가슴에 프린트가 갈라져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는 그 레어함을 지킬 수 없어서 그 티셔츠를 '외출복'에서 '홈웨어'로 강등시켰다. 한낱 천쪼가리와도 이렇게 정 떼는 일이 힘든데, 사람과 정을 떼는 일은 어떨까? 하물며 그 사람이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면?

다큐멘터리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현재'인 커스틴 존슨(감독)을 중심으로 감독의 아버지이자 '과거'인 리차드 존슨과 '미래'가 될 그녀의 아이들이 한 프레임에 등장한다. 이 같은 구성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가족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구성이 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미래는 현재가 되고 더 지나가 과거가 된다. 리차드는 탁자 위에 놓인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을 보는 아이들에게는 고조할머니뻘이다. 오래된 과거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리차드가 미래였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리차드는 과거가 돼가고 있다. 뉴욕에 머무는 리차드가 잠든 사이, 거리에서는 하수도공사가 이뤄진다. 노후된 하수도를 드러내는 장면이 잠든 리차드의 모습과 이어지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죽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한 의견을 낸다. 

죽음은 미래에서 현재에 이르러 과거로 향하는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가족을 물려주는 작업이다. (애니메이션 '코코'에 나올법한 소리지만)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으로 남아 삶을 지속한다. '힐빌리의 노래'가 장식하는 첫 장면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인들은 유난히 가족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가족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존속되는 작업은 당연히 구전과 기억을 통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할아버지는 고조할머니의 이야기를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것과 같다. '가족'은 인류 보편적 정서지만 미국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서는 분명 이질적인 지점이 있다. 정작 가족구성원 간에 상당히 개인주의적 면모가 강하지만 그들은 유난히 가족의 유대감을 강조하며 그 역사를 기억하려고 한다(어쩌면 이게 그들이 가족의 역사를 찾아 유대감을 강조하는 이유일 수 있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가 죽음에 접근하는 방식은 보편적이다. 미국인, 한국인을 가리지 않고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영화로 찍겠다'는 감독의 아이디어도 대단히 기발하다.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이고 담담하게 접근한다. 섣불리 감독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미 '죽음' 자체가 보편적 화두인 만큼 굳이 영화에 보편적인 뭔가를 넣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 보인다. 워낙 보편적인 화두인 만큼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 사는 사람이건 영화를 보고 자신만의 정서로 죽음에 접근할 수 있다. 때문에 감독이 접근한 미국적인 방식 역시 사적인 형태로 남겨둬도 무방하다. 죽음에 대해 미국인이 접근하는 미국적인 방식은 '감독의 견해'일뿐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해석하려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며 코멘트를 더할 수 있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매력적인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죽음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이미 의사가 정한 데드라인은 오래전에 지났다. 벌써 몇 년 째 요양병원에서 계신다. 2019년까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려갔었으나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이라 보기도 어려운 모습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여기에 적고 싶지 않은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아버지와 등을 돌린 채 지냈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형은 나에게 "그래도 자식된 도리는 하자"며 마지막을 챙기기로 했다. 그러나 구급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 어쩔 수 없이 고향 근처 요양병원에 모시게 됐다. 

아버지와 등을 돌리게 된 것에 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많이 어렸고 세상물정을 몰랐다. 그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고 용서가 들리지도 않는 상태다(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아버지가 어떤 심정으로 삶을 마감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여느 건실한 아들처럼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정'을 짓기에 우리 관계는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당연히 홀가분할리는 없다. 나는 아직도 추운 겨울날 아버지의 과일가게 장사를 돕고 저녁으로 먹던 뜨끈한 버섯전골과 소주 한 잔을 기억한다. 아버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싸게 구매했던 건담 프라모델과 컴보이, 재믹스를 추억한다. 왜 올라가는지 모르고 따라갔지만 올라가면 기분 좋았던 몇 번의 산행도 기억한다. 

등 돌리기 전 수십년의 시간과 등 돌린 후 몇 년의 시간이 뒤엉켜있다. 나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와 같은 유쾌하고 훈훈한 영화는 못 만들 것이다. 내 아버지는 딕 존슨과는 완전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아무 계기도 없는 용서와 화해도 할 수 없다. 이해하려는 시도도 할 수 없다. 그건 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버지를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의 큰 부분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떄문이다. 죽음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삶에 종속돼서 '두 번째 장'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삶의 순간을 단절시키는 지독한 '반대편'이 될 수 있다. 만약 내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면 소통의 단절에 대한 후회들로 페이지를 채워갈 것이다. ...내가 독자라면 그런 이야기는 절대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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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미 스타가 보장된 배우'로 날먹하고 있는 콘텐츠입니다. 

올해도 한 번 날먹 해보겠습니다.


 

 

송지인
- '성혜의 나라'에서 처음 보고 신인인 줄 알았는데 오랜 경력을 가진 배우였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주류 시장에 나오지 못했고 이 영화로도 주류 시장에 나오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대로 잊혀지기는 아까운 배우라는 생각에 이렇게나마 영업을 해봅니다. 

 

 

김은영
- 요즘들어 든 생각인데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결국 연기의 일종이 아닌가 싶습니다. 때문에 어떤 아이돌이나 가수는 아주 기가 막힌 연기를 펼칠 때가 있죠. '초미의 관심사'에서 김은영은 그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펼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배우 연기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은 꽤 들었습니다. 뭐... "처음치곤 괜찮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최정운
- '남매의 여름밤'은 풍경의 영화입니다. 여름날 할아버지댁의 일상과 밥상에 모인 가족의 풍경이 기억에 남는 영화죠. 이 풍경에서 배우는 하나의 미장센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의미죠. '남매의 여름밤'에 등장한 두 아이들은 미장센의 구성요소로써 자신의 역할에 대단히 충실한 편입니다. 잘했다는 얘기입니다. 

 

 

박혜은(편집장 아님)
- 앞짱구 이마에 개구진 표정을 한 이 소녀는 이상한 드라마인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독보적으로 이상합니다. 안은영 못지 않게 초롱초롱 뜬 호기심 많은 눈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놓을 수 없게 만들죠. 이 배우 역시 연기를 더 보고 싶게 만듭니다. 

 

 

송희준
-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에 본 적 없는 낯선 드라마입니다. 그 중에서도 옴잡이는 더 낯선 캐릭터죠. 송희준은 억양과 말투로 이 캐릭터의 낯선 면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특유의 멍한 표정은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어주죠. 감독이 어떻게 디렉션을 줬는지 모르겠는데 옴잡이 에피소드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송희준의 공이 대단히 큽니다. 

 

 

문승아
- 아역배우를 주목하는 일을 지양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배우를 계속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죠. '소리도 없이'에 출연한 문승아는 어린이 그 이상의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근래 본 어떤 아역 캐릭터보다 난해한 연기죠. 문승아는 그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냅니다. 유아인과 앙상블도 놀라운 수준이죠. 이 배우가 중간에 연기를 그만둔다는 것은 한국 콘텐츠 시장에 큰 손실입니다. 

 

 

김동희
- 어떤 사람은 연기력 논란을 제기하기도 하던데... 이 글은 '잘 될 배우'를 찾는 글입니다. '이태원 클라쓰'나 '인간수업'으로 스타성은 충분히 보장된 듯 합니다. 벌써부터 팬이 꽤 있어보이네요. 스타성이 보장됐으니 내년에는 더 많은 기회를 잡을 듯합니다. 어떤 기회를 잡아서 어떻게 연기하느냐가 중요하겠네요.

 

 

김규백
- 단역 경력이 상당한 배우입니다. 올해 '오케이 마담'과 '반도'에서 얼굴을 좀 알렸네요. 저는 '반도'로 이 배우를 처음 봤습니다. 구교환과 함께 '그나마 건진 배우'로 언급할만한 캐릭터입니다. 복합적인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소화한 걸 보니 내공은 탄탄해 보입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더 비중있는 캐릭터를 만날 듯 합니다. 

 

 

이현욱
- '#살아있다'는 사실상 유아인 원맨쇼의 영화입니다. 박신혜를 제외한다면 다른 배우가 눈에 들어오기 힘들죠. 그 와중에 어느 댓글에서 이현욱 배우를 찾더군요. 누군가 싶어서 찾아보니 준우의 집에 들어온 1호 좀비였습니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더군요. 잘생겼고 팬도 많습니다. '제2의 김선호'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새 드라마 '써치'와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마요'에 출연 예정입니다. ...이미 스타 확정인가 싶네요.

 

 

박세현
- '청춘기록'에서 소위 말하는 '여주 절친'으로 등장합니다. 안정하(박소담)의 메이크업샵 동료이자 친한 동생이죠. '여주 친구'는 크게 연기할 부분이 많진 않지만 박세현은 꽤 재미있게 이를 소화합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 단역을 꽤 했더군요. 뭐...내년에는 스타 한 번 돼봐야죠. 

 

 

고윤정
- 넷플릭스 '스위트홈' 공개 후 사실상 '이미 잘 된 배우'에 해당합니다. 온라인상에서 핫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보건교사 안은영'과 '사이코메트리 그녀석' 등에 얼굴을 비췄네요. 처음에는 그냥 '예쁜 모델'인가 싶었는데 연기에 욕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차분하게 제 갈 길 잘 가고 있네요. 2021년 활약이 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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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 든 사람의 상상력은 재미없다". 이것은 내가 종종 하는 말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적당히 철딱서니가 없는 것이 좋다. 철 든 사람의 상상력은 대부분 사회적 통념과 규범 안에 머문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내 경우 그런 이야기는 별로 매력이 없다. 적당히 '도른자'가 도른 상태에서 쓴 이야기가 재미있다. 예를 들어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얼마나 '도른자'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쓴 소설 '돈 키호테'는 도른자의 아이콘이 돼버렸다. 돈 키호테 같은 인물의 이야기는 '도른자 서사'의 정석과 같다. 그래서 재미있고 즐겁다. 세르반테스가 철이 든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돈 키호테는 철이 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종종 나온다). 

2. 넷플릭스 영화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실존했던 유명한 '도른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재지만 사회성이 좀 떨어져 보이는 엔지니어 조르조 로사(엘리오 게르마노)는 자신의 발명과 상상에 제약을 거는 법질서에 불만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조선업을 하는 친구 마우리시오(레오나르도 리디)와 함께 이탈리아 영해 바깥에 인공섬을 짓는다. 그리고 그곳을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명하고 독립국가를 선언하게 된다. 대통령이 된 로사는 유엔이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유럽 평의회에 찾아가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에 착수한다. 그 사이 이탈리아 정부 관료들과 바티칸 시국을 중심으로 한 종교권력은 로즈 아일랜드를 불편하게 여긴다. 자신의 영역에 속해있던 국민이 독립을 선언했고 여기에 다른 국민들이 동요한다면 보수 관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영화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으려는 로사의 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이탈리아 정부의 대립으로 번진다. 

3.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1967년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영화화 한 것으로 400㎡의 인공섬을 짓고 독립국가를 선언한 로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 사건과 영화의 차이점은 이탈리아 정부가 왜 로즈 아일랜드를 저지하려 했냐는 점이다. 대의적 명분은 이탈리아 정부는 로사가 탈세를 목적으로 독립국가를 선언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의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실상 탈세에 대한 언급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또 이탈리아 해군이 로즈 아일랜드를 저지한 후 로사가 망명정부를 선언했다는 내용도 나오지 않는다. 알려진 내용보다 영화가 더 조사해서 실체를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영화적 허용을 위해 실제 사건을 각색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바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4.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이 해프닝을 보수적인 관료와 어느 몽상가의 대립으로 다루고 있다. 작은 플랫폼 형태의 섬나라와 국가 체계를 완벽하게 갖춘 이탈리아의 대립은 애시당초 게임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풍차와 싸우는 돈 키호테를 보는 듯 하다. 로즈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분쟁은 비교적 시시하게 끝났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은 로사를 응원한 관객들에게 꽤 사이다가 된다.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국가와 시민의 권리·의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애시당초 그건 철 든 사람의 서사에서나 가능하다). 철 없는 몽상가가 이룬 작은 성과는 관객들에게 조금은 엉뚱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 때 "회사 때려치고 내가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실천에 옮기는데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영화는 그 용기에 약간의 불을 당길 것이다. 

5. 결론: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귀여운 소품이며 조금 유쾌한 영화다. 무엇보다 '도른자 서사'를 좋아한다면 재미나게 볼 수 있다. 조금 설득이 부족한 상황도 존재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건 '국가의 탄생'을 목격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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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티스트컴퍼니 포스트

내가 서른살이 됐을 때를 돌이켜봤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의욕은 넘쳤지만 요령은 없었다.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을 낯선 세계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써내려가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나의 서른은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딛었을 때다. 배우에게 서른살은 조금 다른 의미일까? 몇 개의 직업이 그러하겠지만 배우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학교를 다니면서 작품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일을 한다. 예를 들어 스무살 때 작품을 시작한 배우가 있다면 서른살 때 그는 이미 10년차 배우가 됐다. 그 간격을 처음 체감하게 한 배우는 유아인이었다. 

2003년 드라마 '반올림'으로 처음 데뷔했을 때 유아인은 19살이었다. '반올림'을 촬영하며 성인이 됐고 그 후 썩 괜찮은 하이틴스타가 됐다.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지만 그는 트렌디한 작품과 마이너를 가리지 않고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때의 유아인에게서는 자기 주관을 찾는 일이 어려웠다. 서른살을 막 넘겼을 즈음 그는 마치 자기 주관을 찾은 듯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드라마 '밀회'와 영화 '베테랑'에 출연했다. 당시 나는 서른살의 유아인이 뭔가 비범한 뜻을 가지고 강호에 발을 내딛은 무림고수처럼 보였다. 이후 유아인은 영화 '사도', '버닝', '국가 부도의 날',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시카고 타자기' 등에 출연했다. 트렌디함을 내려놓진 않았지만 이전보다 작품 선택에 자기 주관을 더 반영한 듯 하다. 그리고 작품의 바깥에서 하려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고 자기 주관으로 뱉은 말들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였다. 서른살을 관통한 유아인은 이전의 유아인과 확연히 달랐다. 

배우 박소담은 2020년 서른살을 맞았다. 박소담은 2013년 영화 '소녀'에서 조연으로 데뷔했다. 이후 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참여해 어느 새 8년차 배우가 됐다. 20대의 마지막을 '기생충'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박소담에게 서른살 이후 배우인생 2막을 열었다. '기생충' 이후 첫 해를 보낸 박소담은 자신의 2막을 어떻게 열고 있을까? '기생충' 이전 잠깐의 침체기를 겪었던 박소담은 올해 다시 활기를 찾은 듯 하다. 영화 '특송'의 촬영을 마쳤고 드라마 '청춘기록'도 성공적으로 방송했다. 이미 촬영을 마쳤던 '후쿠오카'도 올해 개봉했고 하반기에는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 다시 참여했다. 그리고 무려 음악시상식 MC를 맡았고 예능 '갬성캠핑'에도 출연해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영화 '특송'을 제외하면 올해 대중들은 영화와 드라마, 예능, 연극무대에서 모두 박소담을 만났다. 데뷔 이후 이토록 종횡무진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박소담은 늘 치열하게 연기했다. 내가 처음 이 배우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치열하게 산 흔적이 보이는 필모그라피 때문이었다. '마담 뺑덕'의 캐스팅 리스트에서 이 배우의 이름을 발견하고 필모를 검색했다. 다른 것도 아닌 '필모그라피'가 준 첫인상은 "이 배우, 연기가 정말 하고 싶구나"라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얼마나 재능있는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검은 사제들'을 만나게 됐다. 박소담에게는 재능을 넘어선 대범함이 있었고 대범함을 넘어선 열정이 있었다. 박소담은 '지쳐있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어떤 작품에서 연기를 했다. 필모그라피상으로 이 배우에게는 쉬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그 모습처럼, 이 배우는 한결같이 연기를 하고 싶어했다. 

사진=아티스트컴퍼니 포스트

'기생충'의 영광은 온전히 박소담의 것이 아니다. 칸 영화제에서부터 오스카상에 이르기까지 '기생충'이 안겨준 영광은 엄밀히 말해 봉준호 감독의 것이다. 박소담은 그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한 배우다. '기생충'은 박소담에게 이전과 다른 커리어를 쌓도록 했다. 이전과 다른 커리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박소담도 그 사실을 아는지 '기생충' 이후의 행보는 한결 더 치열해졌다. 그러나 그 치열함에는 이전과 다른 게 느껴진다. '기생충' 이후 처음 확인한 그녀의 연기는 '청춘기록'의 '정하'였다('후쿠오카'는 지난해 먼저 봤다). 캐릭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정하'를 연기한 박소담에게는 여유가 보인다. '기생충' 이전 작품에서 박소담은 열정적으로 연기했지만 '여유롭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작품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던 데뷔 초창기 모습처럼 치열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춘기록'의 박소담은 이전보다 능숙해졌고 마치 연기하는 자체를 즐기는 듯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이 배우는 이제 카메라의 시선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는 연기뿐 아니라 예능에서도 드러난다. '기생충' 이후 박소담은 '삼시세끼 산촌편', '갬성캠핑' 등 예능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기생충' 이전에 박소담은 예능 게스트로 나간 적은 있지만 고정으로 출연한 적은 없었다. 약간의 리얼리티가 가미된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소담은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닌 자신을 조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저 카메라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배우였다면 연기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여유를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기생충'으로 박소담의 입지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기생충'으로 달라진 것은 박소담의 입지보다 그녀가 작품에 대해 갖는 태도다. 박소담은 이제서야 연기하는 것을 '즐기는' 배우가 됐다. 그 성과는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극무대에는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연장에서 카메라를 대신하는 것은 관객의 눈이다.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선 박소담은 늘 그랬듯 깡총깡총 무대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특히 이번 시즌3 공연은 전보다 더 텐션이 올라가서 "배우가 무대에서 뛰어놀고 있다"는 생각을 전보다 더 많이 하게 된다. 무엇보다 공연을 보는 내가 전보다 더 즐거웠고 위로가 됐기 때문에 무대 위의 박소담은 전보다 더 즐거웠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2016년부터 박소담 덕질을 하면서 이 배우가 예능을 잘 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사실상 이 배우의 첫 예능인 '라디오스타'를 보면서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MC와 제작진조차 "예능 병아리니깐 조심해서 다뤄야 해"라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이후 '내게 남은 48시간'이라는 리얼리티 예능에 나서니 조금 편안해보였다. 그리고 '박소담'이 대중들에게 조금 가까워지도록 한 TV프로그램인 '삼시세끼 산촌편'과 '갬성캠핑'에서도 이 배우는 꾸미지 않은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다. 배우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캐릭터'다. 이는 '자신'과 '대중' 사이에 '캐릭터'라는 벽을 만드는 것과 같다. 당연히 배우가 하는 일은 '캐릭터'를 잘 가공해서 관객 앞에 내놓는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과 '대중'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기에 리얼리티 예능은 썩 괜찮은 매개체다. '삼시세끼 산촌편'과 '갬성캠핑'을 본 덕에 박소담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됐고 박소담 역시 자신을 보여주는 일에 편안함을 느끼는 듯 했다(리얼리티 예능 역시 편집과 연출이 관여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때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캐릭터'가 아닌 박소담이다). 

유아인의 서른살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스타'라는 직함을 떼고 드러난 '유아인'은 자기애가 강한 지식인이자 예술가였다. 서른살 이후의 유아인은 그런 자신과 '스타'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박소담의 서른살은 이름에 책임을 지는 시간이다. 스무살 이후 자신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에 도전했고 가능한 모든 기회마다 찾아가 연기했다. 그런 박소담에게 '오디션을 보지 않고 처음 따낸 역할'인 '기생충'의 기정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조금은 자신을 돌봐도 되는 위치에 이르렀고 그 위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찾았다. 전세계가 알아본 배우가 된 만큼 그 어깨도 무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박소담은 올해 그 무게를 즐기며 여전히 바쁘게 일했다. 박소담의 30대는 20대보다 더 즐거울 듯 하다. 이제는 그래도 좋을 만큼 결실을 거뒀다. 그 이름 석자의 가치가 더 높아진 만큼,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배우이자 선한 영향력을 가진 한 사람이 됐다. 

이 배우의 성장을 보는 일은 즐겁다. 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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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 탄소배출과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한다".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가 내는 TV광고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다. 북극곰이 살지 못하면 인간도 살지 못하니 환경파괴를 줄여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일부 과학자들은 "이제와서 탄소배출, 플라스틱 사용 줄여도 이미 지구는 끝장났다. 재생 가능한 선을 지나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환경파괴를 소재로 한 디스토피아 재난영화에도 영향을 준다. 과거의 디스토피아 영화라면 '환경파괴로 지구는 끝장났지만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터전을 가꾸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단 생각나는 영화가 '매드맥스' 정도다. 그러나 현재의 디스토피아 영화는 '환경파괴로 지구가 끝장나서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으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2.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일단 끝장난 지구에서 시작한다. 이미 대기오염으로 지구 인류 대부분이 사망했고 주인공 어거스틴(조지 클루니)은 북극 우주관제센터에 홀로 지낸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그는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어거스틴은 임무 중인 우주선을 찾던 중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발견하고 귀환하는 에테르호를 발견한다. 그리고 에테르호에 지구로 돌아와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그러던 사이 어거스틴의 사무실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이 아이리스(카오일린 스프링올)가 발견된다. 어거스틴은 본의 아니게 아이리스를 보살피면서 에테르호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3. 영화는 에테르호와 북극 우주관측기지로 나눠 진행된다. 여기에 어거스틴의 젊은 시절 회상이 섞이지만 이는 어거스틴이 머무는 공간에 포함된다(어거스틴의 의식 속 공간이라는 의미다). 영화는 두 공간 중 어거스틴이 머무는 기지에 더 집중한다. 이 공간에서 어거스틴은 큰 기지에서 혼자 지내는,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다. 영화는 그의 외로움을 부각시키다 아이리스가 나타난 후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 지점은 반전의 중요한 열쇠가 되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는 한 남자의 생존기와 같다. 그는 에테르호와 무전을 위해 더 큰 안테나가 있는 기지로 이동한다. 이 과정은 지난해 영화 '아틱'과 조금 닮기도 했다. 아이리스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남은 어거스틴이 그토록 살아서 에테르호와 무전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이야기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4.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인터스텔라'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는 환경파괴에 책임이 있는 부모 세대가 해야 하는 의무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의무는 자녀 세대를 지나 그 자녀에게로 이어진다. 이는 '인터스텔라'에서 시공간을 넘어 딸에게 메시지를 전한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다. 배경은 다르지만 중국영화 '유랑지구'도 2500년에 걸쳐 지구를 옮기는 목적도 이와 같다. 실패한 세대의 과오를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모 세대의 책임을 제시하고 있다. 환경영화로써 이 같은 메시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그린피스가 광고하는 '북극곰을 살려야 한다'보다 더 현실적이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북극곰을 살리는 일'보다 '내 새끼 살리는 일'이 더 피부로 와닿는다. 

5.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환경영화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시국에 대한 어른 세대의 책임을 제시한다고 봐도 된다. 이 때문에 여러모로 유익한 영화지만 이 시국에 봐도 될까 싶을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혼자 지내는 어거스틴의 모습은 몇 달 자가격리한 사람처럼 우울하고 여기에 아이리스가 나타나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극장가가 모조리 침체기인데다 사람들의 마음도 지쳐서 우울하고 불안한데 이 영화를 보는 일을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끝까지 다 본다면 희망을 안고 극장을 나설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다분히 고통스럽다. 그래서 차라리 이 영화야말로 넷플릭스에서 보는게 어떨지 싶다. 캄캄한 극장보다는 조금 영화와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결론: 담백하게 잘 만든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를 소화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둡고 우울하다. 영화에 너무 몰입하지 않는 환경에서 보는 것을 권고한다. 


추신) 어거스틴의 과거에 대한 부분은 영화로 각색되면서 많이 생략된 듯 보인다(소설을 안 읽어봐서 장담은 못하겠다). 어거스틴의 과거를 좀 더 알 수 있다면 그의 캐릭터에 더 깊이 몰입하고 이야기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 ...영화는 일종의 '요약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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