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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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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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9.02.26
    알폰소 쿠아론과 '여인 3부작'
  2. 2018.12.26
    하정우를 두 번 이상 사용한 영화감독들의 모임
  3. 2018.08.13
    고레에다 히로카즈, 자본주의와 가족애의 평행선
  4. 2018.04.03
    기예르모 델 토로와 미지와의 조우
  5. 2017.12.12
    양우석 vs 연상호 - 바람의 전학생들 (2)
  6. 2017.11.27
    친절한 영화에 대한 악평
  7. 2017.02.07
    '헐리우드 작가주의'의 미래를 찾아서
  8. 2016.03.25
    류승완 & 쿠엔틴 타란티노 - 네 멋대로 찍어라 (1)
  9. 2016.01.05
    Mexican Attack: 헐리우드의 멕시코인들
  10. 2015.08.03
    톰 크루즈 & 월터 힐 - 누가 '프렌차이즈'를 지배하는가


영화를 볼 때, 만드는 사람의 이력에 따라 영화를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여기에는 자의건 타의건 만든 사람의 가치관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그 가치관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의 생각과 신념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영화를 보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쫓아가는 일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만든 일련의 작품들을 쫓아가는 일은 그의 삶을 엿보는 일이다. 특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볼까"라며 만든 영화들은 그의 가치관이 잘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을 2006년 이후라고 정의내리겠다. 2006년 이후 알폰소 쿠아론은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든다.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그리고 '로마'다. 나는 이 세 작품을 '여인 3부작'이라고 정의내리겠다(이것은 대단히 직관적이고 단순한 정의다). 이 영화들은 알폰소 쿠아론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작품이다. 좀 살만해지고 여유가 생기자 그는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머니와 여인의 이야기다.

우선 세 작품의 공통적인 가치관을 언급해보자면 이것은 '강인하고 위대한 여인(=어머니)의 3부작'이다. 이 여인들은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일을 행하고 △치열한 삶의 의지를 가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감독의 기억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반복된다. 꽤 먼 길을 돌아서서 건넨 이야기다. 알폰소 쿠아론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 근미래의 인류멸망과 머나먼 우주까지 다녀왔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욕구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가치관을 증명한다는 점도 포함된다. 이것은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야기하는 아버지처럼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물론 볼거리는 훨씬 많다.


#칠드런 오브 맨 - 출산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성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더라도 "이것은 여자만 가능하다"라는 문장이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은 바로 '출산'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일은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여자만 가능한 일이다(혹시 누군가가 남자도 임신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학적 편의'에 부합하는 발명은 아니다). 다만 출산은 그 순간의 고통과 이후 찾아오는 부담 때문에 과거부터 이어져오던 '필연적 의무'로써 역할을 의심받고 있다. "굳이 애를 낳아야 하냐"는 물음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 물음에 대해 "그럼 낳지 마"라는 신의 대답처럼 영화가 시작된다. 

표면적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자가 아니다.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세계적인 독감으로 아들을 잃은 후 의지를 잃은채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어느날 전부인 줄리안(줄리안 무어)을 만나고 그녀에게 어떤 부탁을 받게 된다. 난민 소녀 키(클레어-홉 애쉬티)를 해안까지 데려가 달라는 것. 이 영화가 '어머니 3부작'으로써 역할을 하는 것은 소녀 키 때문이다. 그녀는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임산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오는 인류의 희망을 목격하는 관찰자가 된다. 즉 이 이야기는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출산'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 관점은 임신과 출산은 지켜져야 하고 그것이 인류를 구원할 희망이라는, 다소 이상적인 정의다(무려 소녀의 이름은 키Key다). 물론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이는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철 든 후부터 수십년간 한 달에 며칠은 뱃속이 뒤집어져야 하고 나중에 출산의 순간에도 온몸의 뼈마디가 벌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있고 집단은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젠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태어날 아기를 선전도구로 이용하려는 테러단체 두목 루크(치웨텔 에지오포)의 모습도 보여준다. 전세계가 출산을 바라던 시대에 이 남자는 출산 그 자체보다 정치적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세상에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과연 적을까?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되면 "출산 장려금 얼마를 주겠다"며 '흥정'을 한다.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억만금을 줘도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도 아기는 전쟁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아기가 떠나자 곧장 전쟁은 이어진다. 키와 아기는 그곳에 희망이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비티 - 그럼에도 굳세게 살아남아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고립된 라이언 박사(산드라 블록)의 생존기를 담은 영화다. 특별한 드라마를 드러내지도 않고 가치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는 굳세게 살아남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비티'의 사고는 러시아가 폭파시킨 인공위성의 잔해가 우주를 떠돌면서 여기에 부딪힌 라이언 박사의 팀이 고립된 모습을 보여준다. 지구가 눈앞에 보이는 먼 우주에 홀로 떨어진 것이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라이언 박사의 과거사는 꽤 기구하다. 태어날때부터 아들을 원했던 라이언 박사의 아버지는 그녀의 이름을 사내아이같은 '라이언'으로 지었다. 그리고 지구에서 사고로 어린 딸을 잃고 도망치듯 우주로 떠나버린 것이다. 

라이언이 지구에서 겪은 일들은 대단히 가혹하다. 자녀를 잃으면서 어머니를 부정당했고 아버지로부터는 딸임을 부정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로부터 규정지어진 정의다. 라이언의 딸은 존재했었고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부정하건 라이언은 '딸'이다. 그리고 우주에서 라이언은 인간이 아닌 시체가 될 위기(인간을 부정당할 위기)에 처해져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 당하는 삶'에 오랫동한 쳐해진 사람은 '여성'이었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시민임을 부정당했고 전쟁의 한 가운데서는 주체적 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부정당했다. 그리고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가족의 일원임을 부정 당한채 주방에만 머물렀다. 결국 '그래비티'는 라이언이라는 여성에게 가해진 모든 '부정'으로부터의 투쟁이다. 

나는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한다. 지구로 귀환한 라이언은 호수에 떨어졌다가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라이언은 물(=양수)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걸음마를 뗀다. 라이언이 '인간'으로써 새로운 걸음을 딛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모든 부정을 이겨내고 지구로 귀환한 라이언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여성'이다. 대기권에서 불타버린 것들은 그녀(여성)를 부정한 것들이었을까. 그녀가 착륙한 지구에는 온통 자연적인 것만 남아있다. 여기에 그녀(어머니)의 정체성을 부정할 것들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꽤 먼 길을 돌아서 왔지만 '그래비티'는 여성성과 모성, 인간성을 지킨 한 여인의 생존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가 먼 길을 돌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독특한 소재를 잘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로마 - 결국 내 어머니(=여성)의 이야기

'로마'와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가 닮은 이야기라고 하면 얼마나 공감할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세 영화가 닮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는 '그래비티'와 '칠드런 오브 맨'의 반복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놉시스에는 '감독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에서 찬사를 보낸 어머니(=여성)은 결국 감독 자신을 키워준 존재들이라는 의미다. 알폰소 쿠아론의 '어머니 3부작'은 결국 전부 다 자전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로마' 속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클레오(알리차 아파리시오)는 1970년대 멕시코시티 내 한 집안의 가정부로 지내고 있다. 집안일을 도우면서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게 그녀의 일이다. 그녀의 일상은 치열함과 평범함이 공존한다. 긴박한 집안일을 도우며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남자와 만나 소소한 데이트도 즐긴다. 그 삶의 치열한 순간은 갑자기 찾아온다. 잘 지내던 가정은 한 순간의 변화를 맞이하고 아이의 아빠는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클레오의 일상은 한 순간 많은 것이 부정한다. 라이언 박사였다면 우주로 떠나기라도 했겠지만 클레오에게 하늘은 마당에 비친 네모난 물웅덩이에 불과하다. 하늘은 너무 멀고 클레오의 임신은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나 클레오에게는 하늘 대신 그곳에 함께 머물러 줄 '연대'가 있다. '로마'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배신하고 도망치거나 폭력을 유발하는 존재들이다. 클레오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나)는 이들로부터 상처입고 버림받은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공동체 의식을 더욱 굳건히 한다. 비겁하고 가혹한 사회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인 여성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힘을 합쳐야 한다. '로마'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연대감 속에서 살아갈 클레오의 일상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시선은 처음 하늘로 향한다. 라이언 박사처럼 하늘 너머로 도망치진 못했지만 클레오에는 앞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영화 내내 시선은 물에 비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적어도 알폰소 쿠아론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온전히 영화에 다 담았다. 이것은 자전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위대한 여성에 대한 헌사다.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갇혀있긴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 공감을 얻어낼,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특히 모두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어머니는 인류 멸망의 위협과 우주에서 고립된 뒤에도 살아남아 뒷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키워준 존재는 그렇게 살아남아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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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는 소위 '믿고 보는 배우'가 몇 명 있다. 대표적으로 최민식, 송강호, 황정민 등이 있을 것이다(개인적인 견해로는 조진웅도 이 명단에 조심스레 들이대본다). '믿고 보는 배우' 중 감히 '최연소'라고 말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단연 하정우일 것이다. 일단 하정우가 나오는 영화라면 어떤 형태로건 재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다른 선배들에 비해 긴 커리어는 아니지만 이토록 성실하고 훌륭하게 경력을 쌓은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그냥 혼자서 하는 얘기긴 한데, 나는 배우의 가치는 필모그라피로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에 나온 배우일수록 그 가치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배우에게 필요한 여러 덕목 중 '작품 선구안'도 아주 중요하다. 비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정우는 선구안이 참 좋은 배우다.

그런데 하정우의 강점은 비단 이 선구안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선구안이 좋은 배우라면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하정우는 최소 두 번 이상 함께 한 영화감독들이 꽤 많다. 다들 하정우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친하다고 작품을 흔쾌히 수락한다기 보다는 좋은 작품에 수락을 해야 '선구안이 좋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정우와 여러번 함께 한 '인맥'들은 정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일까? 천재 곁에는 천재만 모이는, '끼리끼리 노는' 원리가 여기에 딱 적용된 것일까? 이 글은 '하정우를 두 번 이상 사용한 영화감독들'에 이야기다. 그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 '하정우를 적재적소에 사용한 것'도 빼놓을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들이 하정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아보고 이를 통해 하정우의 매력과 그들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화학작용을 일으켰는지 알아볼 계획이다. 


#윤종빈 - 계급의 포식자와 그것을 깨부수는 남자

윤종빈과 하정우는 중앙대학교 동문이다. 나이는 하정우가 한 살 더 많다. 윤종빈은 졸업작품인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하정우와 함께 하고 이 인연으로 무려 네 작품('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민란의 시대')을 함께 한다. 윤종빈 감독이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만든 세 작품에 대해 나는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산다는 것 3부작'(남자 3부작)이라고 부른다(아마 나 혼자만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이 작품에서 하정우의 역할은 대체로 관계의 상위에 위치한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호쾌한 성격의 고참, '비스티 보이즈'에서는 호스트들의 마담,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조직의 두목이다. 이 역할의 공통점은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해 계급의 윗 단계까지 올라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외향적이고 호전적이다. 이는 신입 계급일 때 부터 근면성실해야 하고 상관의 비위도 잘 맞춰줘야 가능한 자리다.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윤종빈에게 하정우는 '성공한 남자의 표본'이다. 재벌가의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자리 잡은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윤종빈의 '남자 3부작'에서는 '무너지는 남자'와 '근근히 버티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들의 대립점으로 자리잡는 역할을 주로 하정우가 했다. 이후 윤종빈은 '군도:민란의 시대'라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를 하나 만들어낸다. 여기서 하정우가 연기하는 '돌무치'는 앞선 '남자 3부작' 속 하정우의 시작과 같다. 철저한 계급 관계가 만들어진 조선 어느 곳에서 돌무치는 맨 밑바닥에 머물러있다. 그런데 돌무치는 계급의 위로 올라가는 대신 계급을 파괴해버린다. 어쩌면 앞서 하정우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군도'의 조윤(강동원)처럼 될 수 있었다. 마치 돌무치는 그간 마음의 짐을 내려놓듯 과감하고 저돌적이다. 윤종빈은 하정우를 통해 한국사회 속 계급의 원리를 보여주고 그것을 깨버린다. 


#김용화 - 어설프지만 인간적인 리더

하정우와는 역시 중앙대 동문이다(다만 동문이라서 뭘 함께 했을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김용화 감독은 총 6편의 필모그라피 중 3편('국가대표', '신과함께:죄와벌', '신과함께:인과연')에서 하정우와 함께 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2009년부터 2017년까지다. 이 기간동안 김용화 감독은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국가대표' 이후 4년만에 내놓은 '미스터 고'가 있다. '미스터 고'의 관객수는 132만명이다. 그리고 하정우와 함께 한 3편의 관객수 합계는 3507만명이다. 다시 말해 하정우가 없으면 크게 망한다는 의미다. 아마 김용화 감독에게 하정우는 '흥행토템'과 같을 것이다. 

그가 작품에서 하정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찾기는 의외로 쉽다. '국가대표'에서 차헌태는 어릴때 미국으로 입양된 스키 국가대표다. 그는 한국으로 건너와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의 리더가 된다. '신과함께' 속 강림차사의 역할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삼차사의 리더로서 상황을 지휘한다. 김용화의 영화 속 하정우는 대체로 리더였다. 그런데 그 리더에게 흔히 말하는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예를 들어 '캡틴 아메리카'같은). 이 리더는 실수도 하고 불안해 할 때도 있다. 듬직할 때도 있지만 관객이 주로 만나는 모습은 연약하고 초조한 내면이다. 그런데 하정우가 연기하는 리더의 불안한 면은 대단히 인간적으로 다가온다(사실 캡틴 아메리카가 정말 말도 안되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다). 이 인간적인 리더는 이야기 전체에 휴머니즘을 부여한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위기에 몰리지만 그것들을 이겨내고 성공하는 모습이 극적 재미와 함께 감동도 준다. 

김용화 감독은 하정우를 이야기의 큰 줄기처럼 활용한다. 그의 선택과 갈등을 통해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완성된다. '이야기의 줄기'라는 무게를 감당하기에 하정우는 대단히 든든한 버팀목이다. 나 역시 그의 방식에 지지를 보낸다. '신과 함께'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앞으로 더 만들어지는 이상 김용화 감독은 한눈 팔기 어려울 것이다. 그 말은 하정우와는 앞으로 몇 작품 더 한다는 의미다. 김용화 감독의 작품들이 앞으로도 승승장구 할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신과 함께'라는 걸출한 컨텐츠를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정우라는 '흥행토템'을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홍진 - 야누스의 얼굴

나홍진 감독은 영화 한 편을 내놓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장인정신'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그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좋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그는 현재까지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그 중 두 작품('추격자', '황해')에서 하정우와 함께 했다. 사실 나홍진의 영화 속 하정우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추격자'의 지영민과 엄중호(김윤석)는 대립을 펼치며 서로를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대신 '황해'의 김구남은 일방적으로 극한으로 몰린다. 사실 나홍진의 영화에서는 거의 모든 인물이 극한으로 몰린다. 특이할 점은 그 극한에서 하정우는 대부분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다. 지영민은 사람을 죽여놓고 순진하게 초콜릿을 까먹고 있고 하정우는 죽음의 위기까지 내몰린 뒤 산 속에서 오열한다. 

나는 나홍진이 하정우의 눈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진한 눈에 악마성을 부여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곡성'에서도 그는 어린 아이의 착한 눈에 악마를 씌운다. 사실 지영민이나 김구남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가 효진이(김환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홍진이 사용하는 하정우는 혼란스럽다. 선한 듯 악하고 악하지만 약하다. 어쩌면 하정우가 가장 입체적으로 그려진 영화는 나홍진의 작품에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김병우 - 위기의 남자

김병우는 최근 'PMC:더 벙커'를 통해 하정우와 다시 한 번 만났다. 두 사람은 '더 테러 라이브'로 만나서 흥행과 비평 모두 좋은 성과를 일궈낸 전적이 있다. '더 테러 라이브'와 'PMC:더 벙커'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다. 그만큼 인물과 이야기는 한정돼있고 김병우 감독은 그 공간을 스릴과 서스펜스로 채워넣는다. 거의 하정우의 원맨쇼에 가까웠던 '더 테러 라이브'에 비하면 'PMC:더 벙커'는 윤지의(이선균)를 등장시키며 다소 틈을 열어둔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정우의 원맨쇼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김병우가 쓰는 하정우는 나홍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다만 나홍진이 극한 속에서 하정우의 양면성을 봤다면 김병우는 그냥 위기에 몰린 한 남자를 봤다. 마치 '괴롭히기 좋은 녀석'인양 장애물을 던져주고 그것을 빠져나와보라고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물론 김병우 감독의 영화가 갖는 목적은 '서스펜스'에 있기 때문에 인물에게 집중할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하정우라는 배우는 김병우의 서스펜스 안에서 칼춤을 추기 정말 적절하다. 이것은 김용화 감독이 바라본 하정우와 어느 정도 통한다. 그는 유력 방송 앵커와 민간군사기업의 유능한 팀장을 맡고 있다. 대단한 능력자인 것처럼 소개되지만 결국은 흠집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 때문에 극한의 위기에 몰린다. 마치 견고하게 쌓은 모래탑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얄팍한 즐거움처럼 김병우의 영화 속 하정우를 보는 일은 약간의 죄책감을 유발한다. 김병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 '리튼'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이런 쪽에 장기가 있는 것 같다. 만약 그와 하정우가 또 만난다면 김병우 감독은 다시 한 번 하정우를 괴롭힐 것 같다. 그는 그걸 대단히 잘하는 사람이다.


#하정우 - 허허실실 유쾌한 상남자

하정우는 지금까지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롤러코스터', '허삼관', '577프로젝트'). 그리고 이 중 두 편('허삼관', '577프로젝트')에는 하정우 본인이 직접 출연했다. 그래서 이들 두 영화는 '하정우가 보는 하정우'로서 대단히 중요한 텍스트가 된다. 우선 그는 대단히 유쾌한 사람이다. 이것은 굳이 '허삼관'과 '577프로젝트'를 빌리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일단 그가 만든 모든 영화는 코미디다). 하정우는 개그를 하기 대단히 좋은 캐릭터다. 그는 굉장히 웃기는 이야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재밌는 이야기를 할 때 말하는 사람이 먼저 웃어버리면 망한다). 그리고 '장난 DNA'도 굉장히 발달돼있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친다(이것은 제작보고회 등에서 나온 답변들을 들어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미적감각도 뛰어나다. 영화 연출을 한다는 자체가 그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기도 하지만 미술과 사진에도 재능이 있다. 그야말로 예술적 '끼'가 상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하정우가 본 하정우는 가장 정확한 하정우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언제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경우에 따라 '하정우를 한 번만 사용한 영화감독'들을 폄하는 글처럼 보일 수 있다. 하정우를 한 번만 썼던 박찬욱, 전계수, 이윤기, 김성훈, 장준환 등은 다시 하정우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들 중 상당수는 "하정우와 한 번 더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중들에게 '믿고 보는 배우'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의 시선과 연출자의 시선은 통하기 마련이다. 대중들이 본 매력은 결국 연출자들도 본 것이다. 그래서 '하정우를 두 번 이상 사용한 영화감독들의 모임'에는 앞으로 회원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추신) 사실 김기덕 감독 역시 '숨'과 '시간'에서 하정우와 작업하며 '하정우를 두 번 이상 사용한 영화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그의 세계관에서 하정우만이 갖는 차별성을 찾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이 글에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라 빼고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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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영화 '어느 가족'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한 질문이 있다(이동진 모더레이터가 2층을 안 봐줘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무능하다. 이것은 극적인 장치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결같이 그것이 경제적인 무능함으로 향하고 있다면 나는 여기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특히 가장 최근작인 '어느 가족'에서는 가족을 이루는 경제적 울타리를 극복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 우리 모두가 믿는 것처럼, 가족을 이루는 울타리는 유대감과 사랑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비정하게도 사랑은 가족을 지켜주지 못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유난히 이 아픈 이야기에 매달리는 듯 하다. 

소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라고 불리는 영화 중 몇 개의 작품은 돈 앞에 무너진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아무도 모른다'와 '어느 가족' 정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같은 화두로 이야기 할 만한 영화('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세번째 살인')도 몇 작품이 있다. 그러니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는 전통적인 가족에 대해 시종일관 같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가치로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고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까? '어느 가족'의 획기적인 화두에 대해,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뒤늦게 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 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추상적이다. 매끄러운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가 아니라 아키라(야기라 유야)와 아이들의 위태로운 일상을 담담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 일상은 점차 위기를 겪는다. 이는 '엄마(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돈의 부재'다. 아키라는 강한 금전관리 능력과 생활력,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만으로는 가족의 위기를 막지 못한다. 결국 돈의 부재는 이 든든한 가장인 아키라마저 일탈하게 하고 변하게 만든다. '아무도 모른다'가 보여준 여러 가슴 아픈 지점들 중 하나가 변해가는 아키라를 보는 것이다. 

아키라의 변화가 온전히 돈의 부재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종일관 보여주는 것은 식탁 위에 흩뿌려진 동전들과 체납고지서 등이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돈이 없어서 잃게 된 것들에 의한 고통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물이 없어서 공원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처지와 친구의 뽀얀 새 운동화에 대비되는 아키라의 헌 운동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거의 모든 비극은 경제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에게는 가족을 지킬 기회가 있었다. 편의점 누나가 권유한 방법(경찰이나 복지사무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나 사키(칸 하나에)가 건넨 돈을 받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키라는 이 방법을 거부한다. 특히 다른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가장 절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키라는 가족이 흩어지는 것을 염려해 이를 거부한다. 엄마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키라는 어떻게든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울타리는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이런 전개는 '어느 가족'이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다만 '어느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보다 좀 더 직접적이고 확장된 물음을 던진다. 사회적 합의에 맞고 전통적인 가족의 구조를 갖추지 못한 오사무(릴리 프랭키)의 가족은 그 안에서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만 결국 질서 안으로의 편입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물음을 던진다. 질서로 편입된 가족은 온전히 행복할까? 이 물음을 좀 더 확장시켜보자. 법과 질서는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염두해뒀을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법과 질서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단지 사회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장치'(=가족)일 뿐이다. 

'행복'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 장치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 안에서 행복한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불행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장치다. 이 장치는 여러 기능을 한다. 국가의 정책을 만들고 경제적 순환을 이루게 하는 최소한의 단위가 된다. 가족의 기능에서 이런 역할은 절대 뺄 수 없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가족=경제'의 등식은 성립할 수 밖에 없다. 간단한 예로, 가족 구성원 중 누구라도(특히 가장)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면, 그 가족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답은 너무나 뻔하다. 

오사무의 가족들이 도둑질을 하는 '영화적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실 도둑질 외에 경제활동도 다 하고 있다. 번듯한 직장은 아니지만 막노동과 세탁공장, 유흥업소 등에서 조금의 돈은 다 번다. 물론 가장 큰 수입원은 하츠에(키키 키린)의 연금이다. 도둑질은 이들 가족이 사회적 장치로써 가족이 아님을 의미한다. 경제활동에 기여하는 최소 단위에서 일탈해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난 이 가족의 실체와도 맞닿아있다. 이 가족은 사실 구성 자체부터 우리가 아는 가족과 다르다. 모든 면에서 오사무의 가족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다른 가족이며 그런 가족의 생존 가능성을 보여줘야 '가족의 가치'를 좀 더 확장할 수 있다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판단한 것 같다. 


사실 앞서 이야기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는 모두 온전한 형태를 지키지 못한다.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던 아버지는 돌아갈 수 없었고 딸같은 아이를 지키려 했던 '유사 아버지'도 딸의 곁에 머물 수 없었다. 고전적 질서 앞에 아버지의 입지는 혼란을 겪고 무너지게 된다. 다시 말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버지(혹은 그 역할을 한 큰 형)는 대부분 행복하지 않게 된다. 결국 돈 앞에 가족은 무너지는 셈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을 되돌려보자. 아키라의 가족들은 막내 유키(시미즈 모모코)를 잃은 대신 새로운 가족 사키를 얻었다. 그리고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일상을 살게 된다.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저 아이들은 더 나아질 수는 없을거라는 것을. 

'어느 가족'에서도 결국 오사무의 가족은 애틋한 정만 남긴채 해체돼버린다. 아마 누구도 이 가족들이 다시 만나 예전처럼 웃으면 살 수 없을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본주의'와 '가족애'가 합의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애시당초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는 이들 대립된 가치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오래된 질서 가운데서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가족의 가치'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영화에서는 실패할지언정 영화의 바깥에서는 조금이라도 '가족애'를 느끼길 바라는 배려라고 여겨진다. 

혹자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가족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두 종류로 나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영화가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사람 사이에 관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단위다. 그만큼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는 단위가 가족이다.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으로 귀결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모두 '최소한의 관계'를 관찰하며 씌여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그의 영화는 모든 사람들을 계몽할 순 없다. 감독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이미 그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고민할 화두를 던졌다. 화두에 대해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극장문을 열고 나서는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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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세계에 대해 딱히 의식을 해본 적은 없다. 내게 익숙한 그의 영화들은 '블레이드2'나 '헬보이', '퍼시픽림'같은 괴상하지만 큰 스케일을 자랑하는 영화들이었다. '퍼시픽림' 이후 '크림슨 피크'나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났을때 나는 그것이 그저 그런 소품인 줄 알았다. 그러다 깨달은 사실 하나: 2001년 영화 '악마의 등뼈'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필모그라피를 모두 정복했다. 20세기에 본 영화 '크로노스'나 '미믹'도 흔적 정도는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순서가 어찌됐건 '악마의 등뼈'는 내게 기예르모 델 토로의 마지막 퍼즐같은 영화가 돼버렸다. 

우선 델 토로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미지의 존재'다. 그의 영화는 매우 한결같이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고 그에 대한 혼란과 여러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델 토로가 미지의 존재를 상상해내고 그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면 알 수 있다. 유년기 시절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한 '셰이프 오브 워터'는 마치 이 안경털보뚱땡이가 샐리 호킨스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처럼 미지의 존재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이 '미지의 존재'는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영생의 존재, 하수도의 괴물, 귀신, 뱀파이어, 악마 등이다. 이 낯선 존재들에 대한 반응들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놀라기도 하고 궁금해 쫓아가기도 한다. 집착을 하기도 하고 싸워서 무찌르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미지의 존재와 마주했을때 인간들의 모습은 대단히 다양해진다. 델 토로는 바로 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델 토로의 필모그라피에서 조금 특별해보이는 영화가 2편이 있다. 바로 '판의 미로'와 '악마의 등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가혹할 정도로 이 아이들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그 비극은 매정하거나 냉정하지 않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아이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비극은 어떤 의미일까? 장난감을 빼앗기는 것?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다시 말해 환상이 깨지는 것이 보편적인 비극이다. 이보다 좀 더 극단적인 비극이라면 부모가 사라지고 울타리가 부서진 상태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판의 미로'나 '악마의 등뼈' 모두 그 정도의 극단적인 비극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비극에서 시작돼 미지의 존재로 향한다. 귀신, 혹은 이상한 나라. 상상 속에서 마주할 수 있었고 상상 속에서 두려워했던 세계로 향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으로의 회귀나 모험의 세계로 향하는 여행이 아니다. 오히려 모험은 더 큰 비극으로 향하는 문이 된다. '악마의 등뼈' 역시 귀신이 된 소년의 진실을 쫓지만 돌아온 것은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와 같은 '슬픈 해피엔딩'이다. 상상은 마치 불행으로 향하는 이정표처럼 잔인한 길안내를 한다. '판의 미로'와 '악마의 등뼈'는 모두 전쟁 중인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은 권력자들이 일으키고 사내들이 나가서 싸우는 일이다. 그곳에서 여자들은 착취당하고 아이들은 버려진다. 모든 전쟁은 비극적이다. 그리고 두 영화는 그 비극 속의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사실 델 토로의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와 아이가 만났을때의 비극은 다른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퍼시픽림'에서 마코(키쿠치 린코)의 어린 시절 기억은 사실 매우 잔인한 장면이다. 이 어린 소녀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에게 쫓기고 있다. 어린 아이가 삶에 대한 의지로 목숨 걸고 뛰어가는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꽤 괴롭다. '퍼시픽림' 속 그 장면은 마치 델 토로가 인지하는 '전쟁'의 모양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어린 마코는 예거를 만나지 못했다면 또 다른 비극적 환상의 세계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판의 미로'와 '악마의 등뼈'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표현한 영화들이다. 여느 전쟁이 그렇듯 이 전쟁에서도 아이들은 버려지고 굶어 죽어갔다. 전쟁은 무고한 소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델 토로와 여타 스페인 영화들은 이를 주로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아이들은 전쟁의 생리를 알지 못한다. 그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한채 떠나야 하니 떠나고 헤어져야 하니 헤어졌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다쳐야 하는지 아이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전쟁이란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셈이다.

그래서 델 토로의 영화 속 미지의 존재들은 먼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헬보이2'에서 주인공 헬보이(론 펄먼)가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엄연히 헬보이는 '악마'이며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군인들과 과학자들이 괴생명체(더그 존스)를 가둬두고 고문한 이유는 그 존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일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미지의 존재'라는 극단적인 의미는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존재이긴 하다. 많은 관객들이 느꼈듯 일라이자와 괴생명체 사이에는 동질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헬보이'의 리즈(셀마 블레어)와 에이브(더그 존스)가 헬보이와 함께 지내는 것과도 같은 의미다. 

만약 델 토로의 영화세계를 두고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일반화 시킨다면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블록버스터들과 정반대의 지점에 서게 된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미지의 세계는 꿈과 모험이었으며 그 끝에 있는 것은 감동적인 사랑이었다. 반대로 델 토로의 영화에서 미지의 세계는 두려움과 공포의 세계였으며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그래서 더 두렵다). 이것은 빛과 그림자,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편에 선 표현방식이다.

본 적이 없는 세계나 존재에 대해서는 결코 일관된 결론에 도달할 순 없을 것이다. '이티'가 어린 아이들을 만나 모험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지 저 먼 우주선의 리플리라도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모를 일이다. 외딴 섬에서 유전자 배양으로 탄생한 공룡들이 델 토로의 세계로 향했다면 예거(보다 조금 작은 로봇)들과 맞짱을 떠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델 토로는 '크리쳐·로봇영화 덕후'로 알려져있다. 그가 덕후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그는 괴물이나 귀신을 정말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영화평론가는 '호러영화전문'이라고 하지만 정작 호러영화를 볼 때 정말 무서워하면서 본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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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가 알기론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학벌이나 스펙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직업이다. 토익도 필요없으며 치열한 입사시험 준비나 면접을 준비할 필요도 없는 직업이다. 그야말로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영화감독이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좋은 영화를 만들 순 없다. 그리고 아무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될 수 없다. 영화를 만드는 문은 낮고 만만하다. 그러나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가는 문은 그 어느 곳보다 높고 단단하다. 그 길은 어느 누구의 도전도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영화계에도 꽤 특이한 길로 입봉한 영화감독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국어교사를 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했고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 각본을 쓰다 '초록물고기'로 데뷔했다. 오랜 시간 영화제작자로 살던 이준익 감독은 말 그대로 '어쩌다' 직접 연출을 하게 됐고 이후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던 강윤성 감독은 오랜 시간을 거쳐 '범죄도시'로 입봉하고 흥행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오멸 감독은 공연 기획과 연출을 하다 2009년 '어이그, 저 귓것'을 연출한다. 영화감독이 되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연출부에서 '끔찍한 수준'의 돈을 받으며 일을 하다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좋은 제작자를 만나 입봉하게 된다.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길을 거쳐 영화감독이 된다. 그런 길을 가지 않고 입봉하는 사람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지 않고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금부터 언급하는 한국의 영화판을 '아는 범위'에서 들여다 봤을때 대단히 이질적인 길을 가던 사람이다. 한 사람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비주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다른 한 사람은 프로덕션과 여러 기업에서 영화와 창작 분야의 일을 해왔다. 그리고 그는 웹툰작가가 됐다. 두 사람 모두 영화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이지만 주류 시장에 걸 수 있는 장편 상업영화를 만든 이력은 없다. 그러다 그들은 처음 만든 장편 극영화로 '천만관객'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양우석과 연상호다. 


1969년생인 양우석 감독은 고려대학교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MBC프로덕션과 SK인디펜던스, 올댓스토리, 로커스 등에서 근무했다. 대체로 스토리 기획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임원으로 재직했다. 잘 알려진대로 그는 웹툰 '스틸레인'과 '봉이 김선달' 등을 연재했으며(스토리 담당. 그림은 제피가루 작품) 이 작품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밖에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역시 책으로 출간돼있다. 이력에서 드러나듯 그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구상하는 일을 해왔다. '경력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야기에 대해 "쓰면 쓸수록 는다"는 말은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아마도 양우석 감독은 오랜 시간 '이야기꾼'으로 다듬어졌던 모양이다. 

2014년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은 어쩌면 시대를 잘 타고난 영화일 수 있다. 억압된 시대에 간절한 그리움을 품고 탄생한 이 영화는 좋은 배우와 진중한 각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변호인'의 강점은 절대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을 보여주고 사건에 개입시키다 인물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침착하지만 느리지 않게 쫓아간다. 결코 들떠있거나 흥분되지 않았지만 관객은 지루할 틈도 없이 온전히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점은 '강철비'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북간의 긴박한 대치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사건의 순간에 어디를 보여줘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드라마를 집어넣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양우석의 강점은 철저한 자료조사에 있다. '픽션'을 전달하는 일은 관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없는 일을 마치 진짜인양 관객에게 들려줘서 믿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절대과제다. 거짓말을 진짜처럼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가짜를 뒷받침할 진짜'는 거짓말을 위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양우석 감독은 여기에 대단히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변호인'의 경우에는 거대한 진짜를 끌어와서 세세한 드라마를 더한다. 그 덕에 드라마는 진짜가 되고 이야기는 극적효과를 얻게 된다. '강철비'는 한국과 북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미국 등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려간다. 결과적으로 양우석의 강점은 꼼꼼한 조사와 침착함을 더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볼 수 있다. 


1978년생 연상호 감독은 상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애니메이션 회사인 한신코퍼레이션에서 근무했다. 1997년에 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연상호 감독은 2004년 스튜디오 다다쇼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그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어둡고 비관적이다. 군대와 학창시절, 종교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는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절망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애니메이션의 범주 안에서 이토록 극단적인 절망을 추구하는 연출자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울거라 예상된다. 그런 연상호가 실사영화를 만든다고 했을때 관객들은 "생지옥을 실사영화로 보겠구나"라는 예상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좀비영화라고 하니 동쪽에서 해가 뜨듯 생지옥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난해 만들어진 영화 '부산행'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좀비영화다. 게다가 달리는 열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꽤 재밌을만한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연상호의 이야기'다. 우울증 간접체험을 하고 나오기 딱 좋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때 관객들은 꽤 예상밖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연상호가 신파를?"이라는 반응이다. 물론 이 신파는 상업영화에 필요한 윤활제 정도의 역할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부산행' 역시 '연상호'라는 인증마크를 달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였다. 심지어 우리는 한국영화 사상 최악의 악당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용석(김의성)을 직접 만나지 않았던가. 용석의 존재만으로도 우울증 간접체험을 하기엔 충분하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과 실사영화를 만드는 일은 비슷한 듯 하지만 꽤 다르다. 흔히 알고 있는대로 상상한 것을 구현하는데 있어 물리적 한계를 겪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화실에서 이뤄지는 '그림'은 무엇이든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사영화로 넘어가면 자본의 제약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나는 연상호 감독이 '부산행'을 만들며 자신이 상상한 모든 것을 그대로 만족스럽게 구현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다시 한 번 '한국에선 낯선 영화'를 들고 돌아오려는 걸 보면 상상한 것을 실사로 구현하는데 꽤 만족을 한 모양이다. 아마도 그의 차기작 '염력'이 기대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뚝심 때문일 것이다.


양우석과 연상호에게는 꽤 많은 공통점이 있다(NEW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점은 빼자). 우선 이들은 첫 장편영화('변호인'과 '부산행')로 '천만관객'을 돌파했다. 그리고 웹툰(만화)에 참여했으며 애니메이션(만화)을 연출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은 한국영화의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연출부를 통해 영화를 배운 사람도 아니다. 이 말인 즉슨 기성세대의 영화적 전통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영화를 전공했다면 영화판의 선배들에게 배운 경험이 있을 것이고 연출부에서도 선배 감독들의 작업방식을 보고 배우게 될 것이다. 적어도 연상호와 양우석은 영화에 한해서는 누군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력이 없다.

기성 영화인들의 전통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명세나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 입장에서는 기성 영화인들의 활동이 단절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2003년 이후 새로 쓰여진 것 같은 한국영화의 정체성이 꽤 아쉽다. 그 이전의 세대들에게도 분명 배울 것이 있으며 지금의 세대들도 이르지 못한 그 시대, 그 작가의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성 영화인의 전통을 존중하지만 나는 이방인에게도 영화가 열려있길 바란다. 더 많은 상상력이 영화로 구현될때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확보된다. 양우석과 연상호의 영화에는 기성 영화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개성이 있다. 어쩌면 한국영화에 가장 절실한 사람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제작자와 배급사일지도 모르겠다(NEW 광고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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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17 02:00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검색으로 2018.04.07 07:23 address edit/delete reply

    멋진 글입니다





현대 영화에 있어서 오래된 화두 하나: 영화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보는 것일까? 그림을 보기 위해 보는 것일까? 만약 전자(前字)라면, 차라리 소설책을 읽는 것이 더 이야기에 집중해서 빠져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후자(後字)라면, 그 정도로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낼 영화작가가 몇이나 있을까? 이제 이 물음을 원론적인 화두로 되돌려보자. 대체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우선 내 경우를 해보자면, 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영화를 본다. 그런데 내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캐릭터의 대사나 행동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조합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림과 그림이 만나 언어가 되고, 그 언어가 만나 이야기를 만든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JTBC에서 방송하는 '전체관람가'를 재방송으로 봤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그대 없이는 못 살아'에 대한 양익준 감독의 코멘트 "현대의 관객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영화만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서 무릎을 탁 칠 정도로 크게 공감했다. 이명세 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않은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나는 '첫사랑'부터 그의 영화를 참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물론이고 혹평을 받았던 '형사 Duelist'나 'M'도 좋아한다. 적어도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오롯이 그림만으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명세 감독이 유일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림만 가지고 말을 하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도 이명세가 유일하다. 그의 영화는 친절하진 않다. 그러나 관객이 능동적으로 영화에 개입할 여지를 준다. 

'친절'이라는 것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기본적인 자세다. 사전적으로는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을 말한다. '친절한 영화'는 보는 사람이 행동하고 움직일 여지가 없도록 한다. 친절하게 묘사하고 설명해주니 관객은 그것을 받아먹으면 끝나기 때문이다. '월-E'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우주에서 생활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나온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편리한 이동수단은 인간을 퇴화시키고 둔하게 만든다. 과학은 편리(便利)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먹고 자란다. 만약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과학이 발전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가 될까? 결국 나는, 친절한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을 퇴화시킬 고도의 과학기술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쉽게 리뷰를 쓸 수 없는 영화'라고 알려진 '인랜드 엠파이어'를 봤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한 탓에 영화 보는 내내 졸음을 참으며 봐야 했다. 이것은 나에게 꽤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 공간의 경계,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 이야기는 '몽환적'이라는 표현이 꽤 잘 어울렸다. 몽환적인 영화를 비몽사몽으로 보는 경험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내가 본 장면, 내 기억이 영화 속 장면인지 눈을 감았을 때의 상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인랜드 엠파이어'를 온전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 감성이 무엇인지는 진하게 느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니키(로라 던)에 가장 근접하는 방법은 '비몽사몽'으로 보는 것이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비슷한 예로, 안드레이 타르코스프키의 '희생'을 볼 때도 '졸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맨정신으로 보기 힘든 영화였다. 90년대 중반 '희생'이 정식 개봉했을 당시 한 영화기자는 "영화를 보면서 졸다가 깼는데 희뿌연 눈으로 본 스크린이 너무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너무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다. 영화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 영화 보다가 조는 일을 두려워 한 적도 있었다. 영화를 본 후 그 감정이나 이해를 정리해서 글로 풀어내야 직성이 풀릴 때도 있었다(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나는 '인랜드 엠파이어'와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덕분에 그 버릇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외부상황과 개인적 사정, 모든 것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영화 비평(혹은 리뷰)이라는 작업은 영화에 깊게 파고들어서 장면과 기호를 분석하는 일에 해당된다. 이 작업은 때로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 나무 하나하나를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 중턱에 올라 숲 전체를 바라보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 관찰하는 일을 주로 한다. 이 작업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필요한 일이며 영화평론가는 그 작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평론가는 숲 속으로 뛰어든다. 굳이 관객까지 따라서 뛰어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관객은 산 중턱에 올라 파라솔과 돗자리를 펼쳐놓고 김밥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숲 속의 영화평론가가 가져온 정보를 확인하면 될 일이다. 관객까지 숲 속으로 뛰어드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직업이 아닌 이상, 그 일에 대해 좀 더 자유로워져도 좋을 것 같다.


추신) '리얼'의 리뷰를 쓰면서 했던 이야기지만, 나는 '리얼'의 지향점이 이명세의 영화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사랑의 이미지는 언어적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오히려 언어를 방해하는 허세와 쓸모없는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세처럼 영화 만드는 일은 이명세 아니면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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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나는 '헐리우드의 작가들'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거대 자본이 오가는 냉정한 영화시장에서 자기 생각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검증된 연출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헐리우드의 작가주의 감독'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같은 '거장'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전에 언급한 크리스토퍼 놀란, J.J 에이브럼스, 대런 애로노프스키. 그리고 당시 언급하진 않았지만 데이빗 핀쳐 역시 작가주의의 계보를 이어받기에 충분한 '거물'들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이후 언급하게 될 세 사람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오스카상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충격적이었던 미국 입성작과 달리 차기작에서 엄청난 혹평을 들은 사람이다. 


이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다. 이미 '발굴된 천재'이긴 하지만 그들이 세계 최고 영화시장의 주류를 지배할 거물이 될 것이라 공언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흥미로운 라인업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젊은 작가들(혹은 배우 출신 연출자)의 이름이 대거 자리잡은 오스카상 라인업을 보면 '새 시대'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놀란과 핀쳐, 에이브람스(뜻밖에 뒤로 물러난 애로노프스키)의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다소 이른 감도 있긴 하지만 이제 슬슬 그들 이후의 시대를 점쳐 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영화감독 중에서는 단연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다. '물랑루즈'의 바즈 루어만이나 '트루먼쇼'의 피터 위어, '라이언'으로 올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가스 데이비스, 필립 노이스, 로저 도널드슨, 러셀 멀케이 등 미국의 영화시장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인들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뜻밖의 회춘'을 보여준 조지 밀러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다. 조지 밀러와 저스틴 커젤을 함께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조지 밀러를 회춘하게 만든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저스틴 커젤의 헐리우드 작품들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저스틴 커젤이 미국으로 건너와 만든 두 작품, '맥베스'와 '어쌔신크리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흙먼지'다. '맥베스'에서 전투씬의 처절함이나 '어쌔신 크리드'에서의 삭막한 중세 도시를 표현하기 위해 흙먼지는 적절한 미장센으로 잘 활용되고 있다. 저스틴 커젤의 인증과도 같은 이 흙먼지는 사실 '매드맥스'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 '어쌔신 크리드'에서 보여준 마상추격씬에서도 몇몇 관객들은 '매드맥스'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CG를 배제하고 스턴트에 상당 부분 기댄 측면 역시 '매드맥스'와 유사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은 조지 밀러가 더 이상 '매드맥스'를 만들기 힘들다 싶을때 그 후임은 저스틴 커젤이 맡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물론 조지 밀러가 할 수 있는 한 계속 하는게 좋긴 할 것이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와 '어쌔신 크리드'는 대중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작품이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저스틴 커젤은 늘 한결같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여전히 흙먼지 풀풀 날리고 있고 야성적인 박력을 갖추고 있다. 저스틴 커젤은 여전히 자기가 잘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평가가 엇갈린 것은 역시 '게임의 한계'였을 것이다. '맥베스'와 '어쌔신 크리드'의 격차는 딱 셰익스피어와 콘솔게임의 차이였다. 그렇다 보니 저스틴 커젤이 오스트레일리아 시절에 찍은 영화가 더욱 궁금해진다. 


그의 2011년작 '스노우타운'은 홍콩과 모스크바, 런던, 토론토, 시카고, 부산 등 전세계 영화제에 초청되며 주목을 받은 영화다. 사실상 그의 헐리우드 진출에 초석이 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어쌔신 크리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저스틴 커젤은 여전히 바쁘다. IMDB 기준으로 두 가지 프로젝트가 언급되고 있다. 이 중 'The Siege'라는 프로젝트는 인도 타지마할팔라스호텔에 무장한 파키스탄 테러리스트가 공격한다는 내용의 시놉시스를 가지고 있다. 저스틴 커젤의 흙먼지가 인도로 향한다니 더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와 함께 가장 야성미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 낼 인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출생의 다미엔 차젤레는 지금 언급하는 3명 중 가장 혹평이 없는 감독이다. 장편 데뷔작 '위플래쉬'부터 '라라랜드'까지 만드는 족족 오스카상을 노크하며 그 진가를 증명하고 있다. 1985년생의 이 어린 천재는 각본가 출신으로 꽤 괜찮은 시나리오에 많이 참여한 전적을 가지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는 국내에 '라스트 엑소시즘'의 속편으로 원안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또 존 쿠삭과 일라이저 우드의 영화 '그랜드 피아노'의 각본에 참여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댄 트라첸버그의 영화 '클로버필드 10번지'의 각본가로 참여했다. 그러고 보면 다미엔 차젤레의 장기는 '재즈'가 아니라 '스릴러'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연출 필모그라피에는 가장 완벽한 스릴러 영화인 '위플래쉬'가 버티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다미엔 차젤레는 재즈 영화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 '위플래쉬'를 내놓기 이전에 만든 두 개의 단편('위플래쉬', '가이 앤 매들린 온 어 파크 벤치') 역시 음악영화다. 음악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시각적 특성에도 잘 드러난다. 그의 장편영화 '위플래쉬'(단편 '위플래쉬'와 구별이 필요하다)는 마치 재즈무대와 같은 영화다. 어둑한 무대에 내려진 핀조명처럼 명암이 강한 무대를 꾸민다. 이것은 플레처(J.K 시몬스)와 앤드류(마일즈 텔러)의 관계를 부각시키기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결코 밝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는 재즈 무대에서 세션간의 기싸움('라라랜드'에서 셉이 언급한)처럼 보여진다.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잘 드러난다. '위플래쉬'는 빅밴드의 지휘자와 드러머의 팽팽한 기싸움으로 2시간을 끌고 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각적 특징은 '재즈무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라라랜드'는 좀 더 밝고 화사한 가운데 '재즈무대'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재즈무대는 셉(라이언 고슬링)이 지키고 싶었고 그리워 한 무대와 같다. 미아(엠마 스톤)와의 추억, 그녀와 소망했던 행복한 미래, 거기에 대비되는 현실의 재즈바. '위플래쉬'의 재즈무대가 피 튀기는 기싸움의 장이었다면 '라라랜드'의 재즈무대는 추억과 그리움, 사색이었던 것이다. 재즈에도 여러 장르가 있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감정이 다른 만큼 다미엔 차젤레는 각기 다른 재즈의 감상을 영화로 그려낸 것이다. 즉 다미엔 차젤레의 시각은 철저하게 음악(청각.재즈)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다미엔 차젤레의 차기작은 의외로 재즈와 무관해 보이는 '우주비행사'의 이야기다. 닐 암스트롱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퍼스트맨:닐 암스트롱의 일생'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연출을 맡게 된 것. 미항공우주국 소장이었던 제임스 핸슨의 원작이고 '스포트라이트'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존 싱어가 각본 작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라라랜드'에 이어 다시 한 번 라이언 고슬링과 작업을 한다. 아직 영화의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장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60년대 재즈 스코어들이 등장하냐는 것이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기대할 수 있다.



캐나다 퀘백 출신의 드니 빌뇌브는 앞선 두 사람에 비해 필모그라피가 화려한 인물이다. 첫 장편영화 '지구에서의 8월 32일'은 이미 20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고 2010년 '그을린 사랑'으로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프리즈너스'와 '에너미'로 특유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국내에도 팬층을 확보하다 '시카리오:암살자들의 도시'에서 크게 한 방 터진 셈이다. 아마 헐리우드에서도 그 독특한 시각적 정체성 때문에 주목받는 인물이 됐을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이미 오랜 경력을 쌓고 충분히 검증된 인물인 만큼 그는 헐리우드의 주류 영화시장에 가장 먼저 안착할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각적 정체성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잘 짜여진 설계에 있다. 오직 빛과 어둠을 이용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의 마음마저 쥐락펴락한다. 이것은 최근작 '컨택트'에서도 상당히 잘 드러난다. '컨택트'의 특징은 '햇빛'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어두운 밤이거나 흐린 낮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도 날씨처럼 우중충하고 심각하다. 당연히 관객들도 우중충한 날씨처럼 심각하고 축 쳐져서 영화를 마주할 것이다. 장마가 길어지면 사람이 축 쳐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이것은 국제관계와 몬타나 캠프 내부의 갈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눅눅해져서 싸우면 더 짜증나는 것과 같다. '컨택트'는 결말에 치닫기 위해 갈등이 더 깊고 더 짜증나야 한다. 여기서 '빛'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전작인 '시카리오'에서도 그는 빛을 정말 잘 쓴다. 피사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가 막 졌을때의 옅은 역광은 인물이 누가 누구인지 구별조차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적과 아군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마치 '암살자'처럼 그림자만 남긴채 타인을 경계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가 중요한 영화는 역시 '느와르' 영화다.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정통 느와르와 달리 '시카리오'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 느와르 영화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 영화의 빛과 그림자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가 된다. 


이런 드니 빌뇌브의 차기작은 한때 'SF느와르'로 불리던 '블레이드러너'의 후속작이다. 리들리 스콧의 전작에서도 빛과 그림자의 활용이 두드러졌던 만큼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러너'는 과연 탁월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개된 예고편에서도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러너'는 리들리 스콧 시절의 느와르적 색감을 잘 계승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참 기대되는 영화다. 



앞서 말한대로 이들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이달 말 열리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때문이다(저스틴 커젤은 후보에 없다). 여기에는 드니 빌뇌브와 다미엔 차젤레 외에도 케네스 로너건('맨체스터 바이 더 씨'), 데이빗 맥켄지('로스트 인 더스트'), 배리 젠킨스('문라이트'), 가스 데이비스('라이언'), 데오드르 멜피('히든 피겨스') 등 오스카에서 자주 보지 못한 인물들이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내가 언급한 3인 외에 전혀 다른 인물이 미래의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됐건 가장 부러운 것은 헐리우드에는 재능있는 영화작가가 참 많다. 이 긴 글의 주제는 사실 그거 하나다. 미국 영화시장에는 재능있는 인재가 많다. '세계 최고'를 고수하는 시장답게 세계의 인재는 결국 미국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미국에서 탄생한 인재들도 있다. 어쨌든 인재가 많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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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공감할(혹은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 류승완과 쿠엔틴 타란티노는 닮은 구석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다. 그 여러 닮은 점 중 하나가 영화감독이 되는 쉬운 경로를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배웠다기 보다는 현장에서 배웠고, 현장 이전에 지독한 '덕심'으로 영화를 독학한 인물이다. 참 다행스러운 점은 이들이 독학한 영화가 개성 강한 장르영화라는 것이다. 이들은 '배운 자'들의 고뇌와 공식이 담긴 영화보다는 내가 '찍고 싶고',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재미가 무엇인지 알고 멋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글은 매우 예민한 글이다. 한국과 미국의 '두 거물'들을 감히 비교하는 발칙한 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생각을 풀어놓는 기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의 데뷔과정은 흥미를 끌었고 어쩌면 '롤모델'이었다. 그래서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두 사람의 '업적'을 되짚어볼까 한다. 닮은 부분이 생각보다 많이 보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류승완과 같은 거물이 있는 것은 어쩌면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류승완과 쿠엔틴 타란티노는 어릴적부터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류승완은 온양중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8mm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었고 타란티노는 8살때부터 엄마손을 잡고 극장을 다니며 영화를 봤다. 이후 타란티노는 모두가 아는대로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고 단골들과 수다를 떨었다. 류승완 감독은 24살때 첫 단편 '변질헤드'를 만들고 '삼인조', '닥터K'의 연출부와 '여고괴담'의 소품팀에 참여하며 현장을 뒹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타란티노는 '트루로맨스'와 '내추럴 본 킬러', '황혼에서 새벽까지' 등의 시나리오를 이때 완성한다. 그리고 1992년 '저수지의 개들'을 만들기 전까지 배우학원을 다니며 '리어왕'같은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첫 작품 '저수지의 개들'은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원고료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인맥의 다리를 건너 만난 하비 케이틀의 도움으로 완성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선댄스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시작한다. 그의 다음 작품인 '펄프픽션'은 199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게 된다. 


류승완 감독은 1998년 단편영화 '패싸움'으로 부산단편영화제 우수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듬해 '현대인'으로 한국 독립 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과 두 개의 단편이 더 모여 1999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탄생한다. 이 작품은 2000년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PSB영화상과 21회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 8회 춘사영화상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다음해 38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도 거머쥐게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류승완의 시작은 날 것의 감성이 강한 폭력영화였다. 




류승완과 타란티노의 접점은 바로 '폭력영화'라는 것에 있다. 타란티노는 데뷔 전부터 한결같이 폭력과 냉소가 담긴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가 어릴적부터 봐왔던 장르의 정통성을 비틀어서 구현해낸다.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매우 낯이 익은 영화다. 그래서 반가운 영화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 그의 영화가 장르에 대해 보여주는 이해도는 엄청나다. 존 웨인이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멋을 갖췄는가 하면 샘 페킨파같은 저돌적인 면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장르영화의 거장들을 모조리 빨아들인 괴물을 보는 것 같다.


웨스턴 무비에서 벗어난 타란티노 역시 마찬가지다. 이소룡을 중심으로 한 홍콩액션영화의 명작들이나 70~80년대 미국 B급 폭력영화, 심지어 동시상영관용 쌈마이영화까지 마구 가지고 논다. 영화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부분까지 끄집어 내 즐기면서 그는 영화 역사의 주류로 올라선 셈이다. 타란티노 자체가 장르영화의 역사가 돼버렸다.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대단한 성찰이나 철학을 찾기는 어렵다. 애시당초 그런 시도를 하려는 평론가나 관객도 없었으리라 예상된다. 어린 시절부터 장르영화를 보고 자랐던 만큼 장르영화 안에서 뛰어놀며 그 풍부했던 경험과 지식, 생각들을 가지고 논다. 사실 타란티노 영화의 숨은 특징은 대단히 수다스럽고 말이 많다는 것이다. 이 대사들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말 '잡담'이다. 마치 타란티노 영화의 '인증'처럼 등장하는 이런 잡담들은 마치 "내 영화 안에서 떠들고 놀라"는 것처럼 유쾌하고 의미없다. 가만 듣고 있으면 당최 뭐라는건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의미없는 수다들이 타란티노의 아이덴티티다. 마치 의미없는 말장난같지만 대단히 유쾌하고 흥미로운 수다들.




류승완 역시 장르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한국과 홍콩의 많은 폭력영화를 보고 자란 그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에 '다찌마와 리'라는 유쾌한 영화를 만든다. 이 작품은 마치 "내가 어릴때 이런 영화를 보고 자랐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전 액션영화를 재치있게 찍어냈다.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짝패' 등 장르의 틀을 뛰어놀며 즐기는 영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 그의 필모가 변하기 시작한 시점은 단연 '부당거래'다. 액션영화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류승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하기 전에 잠시 다른 영화를 이야기해보자. 바로 '주먹이 운다'다.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의 첫번째 야심과 같다. 좀 장난스럽게 표현하자면 이것을 '퍼스트 임팩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주먹이 운다'는 대단한 웰메이드 영화다. 그동안의 화려했던 류승완과 달리 섬세하고 세밀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훗날 그가 어떻게 발전할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컨드 임팩트'로 넘어가기 전 류승완이 2005년에 참여한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은 그가 세상에 가지게 되는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힌트가 된다. 2005년은 류승완에게 특별했다. '주먹이 운다'와 '다섯개의 시선'그가 어떻게 진화할지 보여주는 발판이 된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렸던 '세컨드 임팩트'는 2010년 '부당거래'에서 비롯된다. 류승완은 그동안 가져온 문제의식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부당거래'는 노골적이지만 선동적이진 않다. 그의 장기인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그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에 대해 자기식으로 가지고 놀며 표현해낸다. 이런 의도는 다음 작품인 '베를린'에서도 은연 중에 드러난다(물론 '베를린'은 첩보영화에 많이 가깝다). 그리고 '베테랑'과 '군함도'에 이르기까지, 그는 타란티노처럼 장르 안에서 뛰어노는 소년이었지만 어느새 머리가 자라서 문제를 제기할줄도 알게 됐다. 한편으로는 류승완을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의 선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볼 필요도 있다.




같은 듯 다른 길을 가는 두 남자는 사실 가장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꽤 재미있는 배우'라는 점이다. 배우 류승완의 필모는 대단히 화려하진 않다. 주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우정출연으로 나서거나 조연으로 참여하는게 전부다. 물론 그는 자신의 영화 '짝패'와 초기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류승완의 연기는 솔직히 '취향저격'이다. '능글맞는 배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류승완은 대단히 능글맞다. 어색함이나 두려움이 없이 장난치듯 느긋하게 연기를 한다. 그렇게 완성된 캐릭터는 영화에 좋은 감초로 남게 된다. 아마 우리나라 감독들 중 연기 잘하는 걸로는 인정해줘도 좋을 것이다. 


타란티노는 앞서 말한대로 '배우수업'도 받은 사람이다. 배우로서 그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과 자신이 시나리오 쓴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주연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로베르토 로드리게즈나 미이케 다카시, 혹은 존경하는 선배 조지 로메로의 영화에 얼굴을 비춘다. 타란티노는 냉정하게 말해 '잘 생긴 얼굴'은 아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썩 명랑하지 않은 영화에 나온다. 당연히 곱고 선한 역할은 맡을 수 없을 것이다. 본인도 그걸 잘 아는지 능글맞고 나쁜 역할을 주로 맡는다. 그리고 그걸 대단히 잘 해낸다. 어쩌면 타란티노의 진짜 재능은 저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악당 똘마니를 하기에 정말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이렇게 말하는 작성자는 본인이 못 생겼다는 걸 잘 안다). 


두 사람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잘 알겠지만 두 사람은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영화감독이 된 경우다. 장르 안에서 뛰어놀고 즐기고 싶어서 영화를 찍어대며 그렇기 때문에 연출 뿐 아니라 연기로도 영화에서 뛰어놀고 있다. 그것이 아마 이들이 연기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한컴타자연습'에서 본 것 같다(아니라면 미안하다). 내 생각에 이들은 '즐기는 자'에 해당된다. 



추신) '베테랑' 이후 류승완에게는 어떤 '책임감'같은게 생긴 것 같다. 그 책임감은 불완전한 사회를 바라보며 생긴게 아닌가 싶다. 류승완이 걱정없이 뛰어놀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투표는 반드시 해야 한다. 류승완이 걱정없이 뛰어놀때 우리는 '짝패'만큼 신명나는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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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가을하늘 2016.06.09 05:57 address edit/delete reply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작년 부천영화제에서 멕시코 호러영화 특별전을 했을때 나는 한 편도 보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스케줄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저 당시 프로그램 면면을 살펴보며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련한 기대만 한 채 넘어갔다. 내가 아는 멕시코 영화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가 전부였다(조도로프스키 감독은 칠레 출신이다). '엘 토포'나 '홀리 마운틴', '산타 상그레'같은 영화는 내게 멕시코 영화의 첫인상이자 멕시코의 정서로 다가왔다. 


멕시코 영화를 딱히 의식한 적은 없다.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본 멕시코 영화는 '멕시코 영화' 이전에 '조도로프스키의 영화'였다. 그런데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멕시코 영화, 더 정확히 '멕시코인의 영화'는 꽤나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대중영화의 본거지 헐리우드에서 말이다. 지금부터 언급할 감독들은 헐리우드에서 아주 중요한 이름들이다. 이미 대세를 이루며 거장의 반열에 도전하고 있거나 자본과 예술의 융합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천재들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는 호러영화와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대단히 반가운 이름이다. '크로노스'와 '미믹', '악마의 등뼈' 등 개성 강한 공포·스릴러 영화를 만들던 델 토로는 2002년 미국으로 넘어가서 '블레이드'의 속편을 연출한다. 델 토로가 연출한 '블레이드2'는 시리즈 중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가 헐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착륙하는데 기여한다. 


이후 그는 '헬보이'와 '퍼시픽림' 등 개성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며 주류영화의 거물이 된다. 이 와중에도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같은 멋진 영화를 내놓기도 한다. 최근 그가 내놓은 '크림슨피크' 역시 대단한 시각적 내공을 자랑한 작품으로 델 토로가 헐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지고 있는 무기가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확실히 델 토로의 무기는 엄청난 시각적 상상력에 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꾼으로서도 굉장한 자질을 보인다. 자신의 거의 모든 영화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자신과 닮은 피터 잭슨의 영화 '호빗' 시리즈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한다. 게다가 누가 봐도 델 토로 영화같은 호러영화 '돈 비 어프레이드'의 각본에도 참여한다. 




델 토로의 개성은 역시 '덕후스러움'에서 묻어난다. 초기에 그의 호러영화들은 새롭다기 보다는 '잘 만든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분위기와 이야기를 잘 녹여내서 만드는 재주꾼의 영화들이었다. 한마디로 장르에 능통하며 거기에 자신만의 개성을 녹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개성은 헐리우드에 가서도 더욱 크게 묻어난다. 엄청난 자본을 쓸 수 있고 시각적으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헐리우드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그가 만들어내지 못할 영상은 아무것도 없다. 당연히 그는 반인반흡혈귀를 만들어냈고 지옥에서 온 쿨가이 히어로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는 거대로봇과 괴수의 싸움도 만들어냈다. 일본영화가 수십년간 전통을 가지고 만들던 장르를 한방에 구현해낸 것이다. 동양의 섬나라 일본의 해묵은 이야기를 헐리우드까지 밀어붙혀서 거대자본으로 만들어 낸 그의 뚝심은 가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크림슨 피크'에서도 그는 고전적인 유령의 집을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소싯적에 고전공포소설이나 만화책을 엄청나게 본 내공이다. 이처럼 그의 영화적 바탕은 만화와 소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새롭지는 않을 지언정 바탕은 탄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탄탄한 바탕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 이후에도 대단히 바쁠 것으로 보인다. 언급되고 있는 신작만 해도 '피노키오', '퍼시픽림2', '헬보이3' 등 다양하다. 뭘 내놓건 그는 '델 토로'의 문양이 박힌 자신만의 블록버스터를 내놓으리라 예상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감각적인 영상과 진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감독이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첫 장편영화 '아모레스 페로스'를 내놓은 이냐리투 감독은 데뷔작부터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작가주의 감독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이후 '21그램'과 '바벨', '비우티풀'까지 연이어 화제를 모았으며 '버드맨'으로 진정한 거장의 면모를 입증한다. 


1963년생인 이냐리투 감독의 첫 장편영화는 2000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고 있었다. 이미 20대 초반부터 감독과 제작자, 라디오 DJ, 쇼프로 MC로 활동하던 이냐리투 감독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6편의 장편영화에 음악을 맡았고 영화사를 세웠으며 폴란드에서 연극연출도 배웠고 미국에서 연기연출도 배웠다. 1995년과 97년에는 TV중편영화를 연출해 상을 받은 이력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틈틈히 광고도 만들어 2013년에는 미국 감독조합상 광고부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데이빗 핀쳐, 리들리 스콧 등 고수들이나 찍는다던 BMW 광고영화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냐리투 감독의 장기는 역시 감각적인 영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냥 '감각적이기만 할 뿐인 영상'이 아니다. 마냥 감각적이기만 한 영상이라면 '아드레날린24'를 만든 마크 네빌딘과 브라이언 테일러도 상당히 잘한다. 이냐리투의 영상은 감각적이기는 하나 허투루 쓰는 영상은 없다. 말 그대로 영화적 실험을 하는 것이며 목적을 가지고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냐리투의 영화에서는 영상과 함께 이야기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의 영화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작인 '레버넌트' 역시 복수극이자 설원에서의 생존추격극이다. 영화로써는 꽤 자주 나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레버넌트'는 이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영화적 상황이 극단적인 것도 있지만 상황에 대한 인물들의 심리를 극단적으로 관찰한다. 대자연의 풍광부터 인물의 얼굴근육까지 멀고 가까운 풍경을 극단적으로 잡아낸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을 일체시키며 인물의 깊은 내면을 풍경이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다. 그렇게 관객은 인물의 내면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버드맨'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장면으로 인물들을 쫓으며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아낸다. 이 영화에는 거대한 흐름이 있으며 그 흐름을 쫓다보면 관객이 인물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실험으로 이룩된 이 성과는 관객이 영화를 간접체험하게 하는 새로운 방법이 된다. 이냐리투의 모든 영상은 이처럼 더 강한 간접체험을 위한 영화적 실험인 것이다. 이냐리투는 현재 'The One Percent'라는 TV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에드 해리스와 힐러리 스웽크가 나온다는 이 시리즈는 IMDB 기준으로 2015년작이라는데 진행상황을 모르겠다. 아마 '레버넌트' 극장 걸리는거 보고 진행하려는 모양이다.




사실 이 글의 시작은 '레버넌트'와 '그래비티'를 비교하려는 것이었다. 두 영화는 극한의 생존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두 영화 모두 멕시코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비티'를 연출한 알폰소 쿠아론은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영화와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대단히 작가주의적인 영화를 만들 것 같지만 의외로 그는 매우 대중적이다. 감히 말하건대 그는 델 토로와 이냐리투를 섞은 것 같다. 적당히 대중적이고, 적당히 실험적인 영화들이 그의 필모그라피에 즐비해있다. 


멕시코에서 단편영화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와 장편 '러브 앤 히스테리'를 연출한 그는 금새 미국으로 넘어가 '소공녀'와 '위대한 유산'을 연출한다. 그리고 다시 멕시코에서 '이투마마'라는 흥미로운 영화를 만든 쿠아론은 영화의 성공과 함께 헐리우드로 돌아온다. 그것도 무려 '해리포터'라는 거대한 프렌차이즈 중 한 편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로 말이다.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흥미로운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특히 델 토로의 영화 '판의 미로'와 이냐리투 감독의 '비우티풀'에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이력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2006년 '칠드런 오브 맨'부터다. 여러 매체들로부터 '21세기 최고의 SF영화'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실험적인 연출과 독특한 이야기로 SF영화의 새로운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그의 재능은 SF 장르에 있었을까? 2013년작 '그래비티'는 다시 한 번 '혁명적인 SF영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가장 미니멀한 우주 생존극이지만 가장 처절하고 디테일한 이 영화는 '매트릭스' 이후 다시 한 번 영화의 시작적 진화를 이뤄냈다. 




알폰소 쿠아론은 사실 설명하기가 녹록치 않은 감독이다. '소공녀'나 '위대한 유산'처럼 고전문학의 재해석에 소질이 있는가 하면 로맨틱코미디에도 재능이 있어보인다. '해리포터' 시리즈같은 판타지 모험극도 잘 만드는가 하면 SF영화에서는 완전 날아다니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다재다능'이라는 말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연출자다.


게다가 '그래비티'나 '칠드런 오브 맨'에서 보여준 영화적 실험도 서슴치 않는다. 충분히 실험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대중적이고 재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는 재미가 있다. 어쩌면 가장 취향을 타지 않을 영화이며 누구나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거기에 깊이까지 갖추고 있다면 가히 완벽한 조합이지 않은가. 


현재 그는 특별한 연출계획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조나스 쿠아론과 함께 'A Boy and His Shoe'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그래비티' 이후 그는 'Believe'라는 TV시리즈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이 대단한 재능을 가진 멕시코 감독의 신작은 분명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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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국을 다녀간 톰 크루즈는 오지랖이 넓은 배우다. 그만큼 자신의 영화에 대한 애착이 큰 배우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연출자 입장에서는 다소 피곤한 일일 수 있다. 특히 '미션 임파서블' 1편을 만들면서 브라이언 드 팔마와 빚은 갈등은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브라이언 드 팔마는 자신의 필모 중 '미션 임파서블'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톰 크루즈의 열정 덕분에 우리는 모두 5편의 '미션 임파서블'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연출자의 이름과 배우의 얼굴을 걸고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제작자가 영화를 지배할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제작자가 지배해주길 바라는 영화인 '트랜스포머'가 있지만 그 시리즈의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름을 이 자리에서 언급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언급할 사람은 '미션 임파서블'의 지배자 톰 크루즈와 '에이리언'의 지배자 월터 힐이다. 


'에이리언'과 월터 힐의 관계는 다소 낯설 수 있다. 샘 페킨파 이후 폭력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월터 힐은 '48시간',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 등을 만든 '옛날 거장'이다. 그런 그의 특이한 이력 중 하나는 '에이리언'의 모든 시리즈에 제작자로 참여했으며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2'에는 각본 작업을 맡기도 했다(물론 이때 월터 힐은 '제작지원(executive producer)'의 자격으로 실질적인 현장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시리즈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에 의해 '에이리언'이 창조되긴 했지만 사실상 이 시리즈를 돌본 사람은 월터 힐인 것이다. 


헐리우드에는 많은 프렌차이즈 영화들이 있고 그 영화들의 뒤에는 시리즈를 이끌고 가는 제작자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흥미롭고 이야기꺼리가 되는 사람은 톰 크루즈와 월터 힐이라고 여겨진다.




톰 크루즈는 앞서 말한대로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사생활이나 종교관이 어떤지 몰라도 영화를 만들때 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에 임하며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때로 독이 되기도 한다.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연출자와 갈등을 빚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갈등의 일을 찾아보면 거장 감독들과 작업할때 생긴다. 이미 알려진 사례만 하더라도 '미션 임파서블', '바닐라 스카이', '아이즈 와이드 셧' 등이 있다. 


그는 1996년 이후 많은 영화들을 제작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는 역시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 프렌차이즈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한 '미션 임파서블' 1편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2편은 시리즈 고유의 매력을 잃어버린 액션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2편은 1편의 바로 뒤에 붙어서 비교된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리즈의 1편과 2편은 성공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유럽풍 첩보영화와 헐리웃 블록버스터 사이에 낀 1편이나 홍콩느와르 풍 액션만 남은 2편은 시리즈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사실상 이 시리즈를 이끈 구세주는 3편을 연출한 J.J 에이브람스다. 그는 '떡밥투척'이라는 특유의 장기를 살려 시리즈의 미스터리적 재미요소를 부여했다. 여기에 전편과 다른 깔끔한 액션연출은 헐리우드에 블록버스터로서 이 시리즈가 구사해야 할 정체성에 기반이 됐다. 에이브람스는 이 시리즈 이후 4편부터 톰 크루즈와 함께 '미션 임파서블'의 제작자로 참여한다. 톰 크루즈가 3편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화적 상상력과 장르에 대한 이해가 깊은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4편 '고스트 프로토콜'은 스파이액션영화의 말초적 재미를 살렸으며 이 시리즈의 처음부터 논란이 됐던 '팀웍'에 대해 가장 훌륭하게 살려낸 작품이다(영화의 모태가 된 드라마 '제5전선'은 팀웍이 돋보이는 첩보드라마였다). 최근 개봉한 '로그네이션'은 톰 크루즈가 '잭 리처'부터 함께 작업한 크리스토퍼 맥쿼리와 함께 했다. 그는 시리즈 특유의 팀웍과 '고독한 스파이'의 정체성,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재미를 모두 녹여냈다. 물론 1편의 고풍스런 첩보영화에는 부족하지만 이것은 시리즈의 모든 장점을 녹여낸 영화임에 틀림없다(물론 그게 욕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분명 순탄하게 진행된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리즈는 헐리우드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파이영화가 됐으며 거기에는 온전히 톰 크루즈가 보여준 시리즈에 대한 열정이 크다. 비록 그 열정이 때로는 독이 되어 시리즈에 장애가 되더라도 어쨌든 꾸역꾸역 이 화끈한 액션영화를 만들어내니 관객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통해 재능있는 연출자들이 기회를 얻는 것 또한 반가운 일이다(물론 톰 크루즈가 부려먹기 편하려고 거장을 피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월터 힐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액션의 거장이다. 그는 컬트 액션의 정점에 오른 작품인 '워리어'나 '롱 라이더스',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부터 시작해서 '48시간', '레드 히트', '쟈니 핸섬' 등 단순한 폭력액션 뿐 아니라 간결하고 재미있는 플롯으로 극적 재미를 주는 영화들까지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에이리언' 시리즈에 관여하게 된 데는 1편의 인연이 크다. 그는 애초 리들리 스콧 이전에 '에이리언' 1편의 연출자였다. 하지만 '에이리언'의 연출은 TV시리즈를 연출하던 리들리 스콧에게 돌아갔고 그는 제작자로 참여하게 됐다. 


'에이리언'에 대한 월터 힐의 관심 또한 대단했다. 그는 '에이리언'의 모든 시리즈와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심지어 '프로메테우스'까지 제작자로 참여했다. 사실 톰 크루즈가 자신이 주연한 영화의 제작자로 직접 참여하며 자신의 뜻을 내비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것과 달리 월터 힐은 온전히 제작자로서 작품에 참여한다. 그만큼 '에이리언' 시리즈는 연출자의 개성이 존중된채 만들어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에이리언' 시리즈는 온갖 개성강한 연출자들이 제멋대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리들리 스콧의 1편은 이후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와 함께 SF 장르의 신기원을 이룩한 걸작이 됐고, 제임스 카메론의 2편은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를 탑재한 블록버스터가 됐다. 공간의 미학을 잘 살린 데이빗 핀쳐의 '에이리언3'은 이 시리즈가 무한히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고 장 피에르 주네의 4편은 특유의 괴팍한 분위기로 살려낸 개성강한 영화가 됐다. 이처럼 '에이리언' 시리즈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영화가 됐다(심지어 매 시리즈마다 리플리(시고니 위버)도 다른 사람이 된다).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1편을 연출한 폴 W.S 앤더슨은 말초적인 오락영화를 만드는데 능한 사람이다. 영화 역시 그 개성을 잘 살려 원초적인 재미에만 집중한다. 사실 이벤트성이 강했던 이 영화에 대해 그리 진중한 작가가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속편은 시각효과 출신인 스트라우스 형제가 연출을 맡는다. 이들은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지만 최근까지 시각효과일에 더 집중하고 있으며 '샌안드레아스'와 '인투더스톰', '엑스맨:데이즈오브퓨쳐패스트', '007스카이폴' 등의 시각효과에 참여했다. 


월터 힐의 '에이리언'을 향한 열정은 여기서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에이리언'의 프리퀄격인 '프로메테우스'를 만든다 했을때도 그는 기꺼이 도움을 건넨다. 이쯤되면 월터 힐과 리들리 스콧 사이에 진한 우정이 있겠구나 싶어진다. 워낙 헐리우드에서 오래 구르고 지낸 감독들이다 보니 적잖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월터 힐은 현재까지 '에이리언'이라는 크리쳐가 등장하는 모든 영화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6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 속편에도 제작자로 참여했다. 


사실 연출자로서 월터 힐의 커리어는 진작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액션영화의 스케일이 커진 지금 월터 힐의 아기자기하고 촘촘한 액션영화는 더 이상 대중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다. 가장 최근에 만든 '불렛투더헤드' 역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나마 13년전 영화인 '언디스 퓨티드'가 나쁘지 않은 평가를 얻었다. 언듯 '흘러간 거장'처럼 보이는 그이지만 적어도 '에이리언'이라는 걸출한 브랜드의 숨은 공로자로 있는 한 언제든 그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거라 기대해본다.




톰 크루즈와 월터 힐은 언듯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수도 있다. 한 사람은 본업이 배우고 다른 사람은 감독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출연하는 영화의 제작자이고 한 사람은 자기가 연출할뻔한 영화의 제작자이다. 하지만 제작자로서 두 사람의 스타일은 확실히 비교대상이 된다. 영화제작자에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관여하는 사람과 연출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적극적으로 작품에 관여했던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역시 성공적인 블록버스터이며 훌륭한 장르영화다. 그리고 '에이리언' 시리즈는 SF호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누가 더 낫다고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이 훌륭한 프렌차이즈를 만들어 낸 공로자들을 짚고 넘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톰 크루즈는 대놓고 공로자이긴 하다). 


헐리우드에는 많은 프렌차이즈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들은 한 명의 연출자가 이끌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한 명의 제작자이 이끄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능력있고 열정있는 사람이 프렌차이즈를 이끄는 것은 중요하다. 톰 크루즈와 월터 힐은 모두 능력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건 결과물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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