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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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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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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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주의] 넷플릭스 '블랙미러:미움 받는 사람들' 초간단 리뷰
  2. 2020.05.18
    넷플릭스 '블랙미러: 사냥개' 초간단 리뷰
  3. 2020.05.18
    [스포주의] 넷플릭스 '블랙미러: 보이지 않는 사람들' 초간단 리뷰
  4.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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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0.04.04
    넷플릭스 '블랙미러: USS 칼리스터' 초간단 리뷰
  6. 2019.08.18
    '체르노빌' - 거짓의 대가
  7.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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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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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9.02.14
    '신의 나라:버닝헬' 초간단 리뷰
  10. 2019.01.28
    [스포주의] 넷플릭스 '킹덤' 초간단 리뷰

1. 몇 개의 '블랙미러' 에피소드를 보다가 얻게 된 깨달음: 이 녀석들은 통상 마지막 에피소드에 공을 들인다.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였던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시즌4의 마지막 '블랙 뮤지엄'은 특히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도 재미있을까?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미움 받는 사람들'이다. 썸네일을 보니 대략 청문회 내지는 법정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인터넷 혐오, 협박메시지 등 단어가 등장한다. 이것은 SNS에 대한 진중한 고찰일까? '블랙미러'의 여러 에피소드들 가운데 단연 묵직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러닝타임도 장편영화 하나에 이를 정도로 길다(1시간29분).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를 대하려면 마음에 준비가 필요할 듯 하다. 

2. 막상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말벌'이 등장한다. 그때 나는 "아, 이것도 결국 '블랙미러'구나"라고 깨달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듣도 보도 못한 과학기술이 등장하고 그것이 인간을 공격한다. 전자말벌 이야기를 해보자. ADI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벌의 멸종 후 식량난을 막기 위해 개발된 로봇 벌이다. 벌의 행동 패턴만 입력됐으며 시각센서를 통해 꽃을 구분한다. 놀란 점은 인류가 벌의 멸종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엔지니어 사정 생각 안 하고 막 만든 디자이너의 작품같지만 가능하다면 인류는 벌의 멸종에 따른 식량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과학계에서 우려하는 인류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별의 멸종'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한 셈이다. 이것은 대단히 혁신적인 기술이다. 

3.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야기에서 드러나지만 ADI가 정부의 승인을 받을 당시 정부는 식량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ADI의 시각센서를 활용하면 첩보활동이 더 쉬워진다는 점을 이용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ADI의 시각데이터를 보관해 관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ADI 개발에 참여한 한 직원이 이를 악용했다는 점이다. 진중한 사회고발극을 기대한 나에게 대뜸 '전자말벌의 습격'이 등장한 것은 신선한 뒤통수였다. 그것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처럼 스릴과 서스펜스를 주진 않았지만 전자말벌이 무차별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설정만으로 긴장감을 줬다. 물론 중요한 것은 전자말벌이 아니라 SNS였다. 

4. '미움 받는 사람들'은 SNS에서 소위 '관종', '어그로충'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사람은 온라인에 게임을 열고 '#DeathTo'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을 매일 1명씩 결산해 죽이겠다고 말한다. 돌고 돌아 이 이야기는 SNS의 익명성과 그 익명으로 형성된 집단의 부조리한 폭력을 고발한다. 그런데 뭐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좋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고 나서도 SNS의 부조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도 그것을 잘 아는듯 이 이야기의 결론은 여느 형사 버디무비처럼 마무리된다(마치 속편이 만들어질 것처럼). 이 이야기는 장르영화의 범주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뛰어논다.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미움 받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블랙미러' 에피소드 중 가장 재밌어야 했다.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치명적이긴 했다. 

5. '미움 받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형사 역할을 맡은 두 주연배우가 연기를 너무 못한다는데 있다. 이쯤에서 나는 OCN에서 봤던 몇 개의 드라마를 떠올렸다. 몇 년 전만해도 OCN 드라마를 종종 챙겨봤다. 지상파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장르로 재밌게 풀어낸 것이 좋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대사와 디테일에 정말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느껴졌다. 잔뜩 무게잡은 주인공은 거부감이 들 정도고 이야기는 낯이 익었다. 10개 던지면 하나 마구가 나오는 투수처럼 장면 중 90%는 유치해서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미움 받는 사람들'은 두 형사가 나오는 장면마다 대체로 보기 힘든 수준으로 연기를 못한다. 이 이야기에는 조연으로 베네딕트 웡이 등장한다. 연기를 잘할만한 작품에서 본 적이 없어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그는 거의 유일한 '연기 사이다'다. 한 예로 두 형사가 걸어오며 대화하는 장면을 풀샷으로 잡는데 둘의 대사를 들으며 "대체 지금 누가 말하는거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둘의 목소리도 비슷하다). 넷플릭스 자막 싱크도 이상할 때가 많은데...

6. 결론: 신선하고 재미있다. 러닝타임 89분이면 거의 영화 1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누가 날 잡아서 다시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다. ...아니, 다시 만들어줘...주인공 배우 바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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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랙미러'를 뒤늦게 보기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에서 갖기 시작한 매력은, 시리즈를 수식하는 단어기도 했던 '디지털 시대의 환상특급'에 딱 걸맞다는 점이다. 이미 SF영화 속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과학적으로 더 상상할 것이 없다고 여겨졌을때쯤 '블랙미러'는 새로운 상상을 제시한다. '과학이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문장에 대해 20세기에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스카이넷' 정도였지만 21세기에는 우리 스스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그림을 만들어낸다(그렇게 생각해보면 과학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시대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인가). 문장을 조금 다르게 나열해보자. '과학은 인간성을 어떻게 말살할 것인가'. '블랙미러'는 그 물음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것은 현재를 기반으로 한 근미래에 대한 상상이며 실현 가능한, 어쩌면 조금 더 다가온 디스토피아다. 

2.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블랙미러' 시즌4의 5번째 에피소드 '사냥개'는 지금까지 본 '블랙미러' 중 가장 불친절하다. 이 에피소드는 많은 것을 생략하고 있고 많은 것을 축소시켰다. 그저 인간과 로봇개의 추격전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색깔조차). 그래서 나는 며칠 전에 이 에피소드를 봤음에도 리뷰를 쓰는 일을 망설였다. 이 이야기에서 숨어있는 과학을 찾을 수 없었고 인간성은 진작에 말살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쫓고 쫓기는 게임에 불과했다. 꽤 오래 고민을 해봐도 이 이야기는 도저히 쓸 말이 없는 에피소드였다. 그러던 어느날 TV에서 '엑스맨:데이즈오브퓨처패스트'를 보다가 뭔가 깨달았다. 저 이야기, 참 '사냥개'와 닮았다. 어쩌면 '사냥개'는 '블랙미러'가 강조한 '과학이 인간성을 말살한다'에 가장 직접적인 비유일 수 있다. 

3.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사냥개는 최첨단 과학 테크놀러지를 탑재하고 있다. 폭탄 형체의 위치추적 디바이스나 카메라, 총을 장착하고 있고 4족보행 로봇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빨리 달릴 것이다. 로봇공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KAIST와 연을 맺고 있는 입장에서 보고 들은 몇 가지 로봇들로 이해해보자면 로봇은 이제 두 발로 걷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전히 정말 로봇처럼 걷지만 이는 굉장한 발전이다. 4족 보행 로봇이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말 그대로 관절만 빨리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차만큼 빨리 달리는 로봇이라면?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자동차만큼 빨리 달리는 4족 보행 로봇이 대체 왜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다. 이는 사냥개는 실현 가능한 과학기술처럼 보이지만 '블랙미러'에 등장한 다른 과학기술처럼 미래의 기술이다. 

4. 과학의 집약체가 인간을 쫓는다. 물류창고에서 무언가 훔치려 했던 인간들은 사냥개의 공격을 받고 쫓기기 시작한다. 이들은 어느 집단의 소속이며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는 상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맨 마지막에 그들이 훔치려 했던 것이 보여질 때서야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에서 인간들은 휴머니즘이 극대화 된 모습을 보여준다. 사막을 달리고 총도 쏘지만 그리 전투적이지도 않다. 흑백에 가려져 있지만 이들은 누가 봐도 사람이고 사람답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과학'에 쫓기는 '인간'으로 봐도 무방하다. '과학이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문장이 통째로 이야기가 된 셈이다. 

5. 이 이야기는 대단히 낯이 익다. 제임스 카메론의 1984년작 '터미네이터'도 이런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터미네이터'의 진정한 매력을 오해하고 있다. '터미네이터'는 1과 2로 이어지는 타임 패러독스가 매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서 끝났다. 그렇다고 다 때려부수는 스케일도 매력이 아니다. 애시당초 '터미네이터' 1편은 뭐 때려부술 만큼 돈 많은 영화가 아니었다. '터미네이터'의 매력은 '겁나 센 녀석이 나를 죽이러 쫓아오는데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도 안 통한다'는 점이다. 나는 오히려 '터미네이터'의 아이덴티티를 계승한 영화가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터미네이터'의 아이덴티티를 계승한 이야기에 '블랙미러:사냥개'를 추가해도 될 것 같다. 

6. 결론: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다면 문명은 지금보다 수백년 뒤쳐졌을 것이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문명의 발달은 살육을 먹고 이어졌다. 인간은 개개인으로 싸우기도 하고 집단으로 싸우기도 한다. 어느 어른의 말인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인류 전체에 써도 무방하다. 망한 리메이크영화인 '인베이전'에서는 외계인이 인간을 잠식하고 갈등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서늘한지 보여준다. 감정을 가진 존재는 사랑하고 미워하다 갈등하고 싸운다. 찰스 자비에 교수와 에릭 랜셔도 그랬다. 그 오랜 싸움은 인간이기에 가능했고 거대한 위협(센티넬) 앞에 그들은 뭉쳤다. '엑스맨:데이즈오브퓨처패스트'는 그래서 인간성(엑스맨)과 과학(센티넬)의 대결이다. 이것이 '사냥개'와 '엑스맨'이 닮은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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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수업시간에 영화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당시 철학과 교수들의 가장 좋은 먹잇감은 단연 '매트릭스'였다. 장자의 사상부터 시작해서 장 보드리야르까지 이야기꺼리가 아주 풍부한 작품이었다. 교수들이 '매트릭스'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캐릭터는 싸이퍼(조 판톨리아노)였다. 그는 참혹한 현실을 택하느니 조금 더 나은 매트릭스를 택하는 '변절자'다.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의무일까? 행복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는 등을 돌려도 좋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싸이퍼의 대사 중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 고기와 와인맛은 결국 매트릭스가 보낸 신호에 불과하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즐거움이나 쾌락은 결국 허상이다. 아무튼 철학과 교수들에게 싸이퍼는 중요한 연구소재였다. 

2. '블랙미러' 시즌3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매트릭스'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망각으로 행복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현실에 고통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이 이야기에는 군인들이 등장한다. 하는 일로 봐서는 UN군처럼 보이는데 민간군사기업이 운영하는 모양이다. 이들에게는 '마스크'라는 장치가 이식돼있다. 이 장치는 증강현실(AR)을 볼 수 있고 드론 카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래도 마스크의 핵심은 AR에 있는 듯 하다. 여기서 AR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시청자가 마스크의 기능 중 AR을 의식한다면 이야기 초반에 반전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놀라운 것은 마스크의 역할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이다. 

3. 현재의 AR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 수준의 캐릭터를 구현해내는 그래픽에 싱크도 그리 완벽하지 않다. 대용량 그래픽의 전송이 어렵고 이를 구현할 디바이스도 아직 개발되지 않아 AR과 실제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게다가 현재의 AR은 디바이스(글래스)를 장착하고 봐야 하는 수준이다. 그 무거운 걸 쓰고 있으면 누가 봐도 "아 이건 AR이다"라고 의식할 수 있다. 현재의 AR은 스마트폰 콘텐츠나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수준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AR의 발전과 활용은 딱 지금까지가 적절한 것 같다. 이 에피소드에서 AR은 굉장히 발전된 수준이다. 신체에 디바이스를 이식했고 무거운 글래스 없이도 AR을 볼 수 있다. 다만 조금 현실적인 관객이라면 "저것도 AR일까?"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4. 이 이야기의 반전을 의식하게 된 지점은 군인들이 '벌레'라고 부르는 존재가 처음 등장했을때다 그들은 의외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손에 뭘 들고 싸우고 군인들을 보자 도망가기 바쁘다. 벌레들은 첫 등장부터 좀 무섭게 생겼을뿐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때부터 반전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역시 '벌레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대신 이 이야기가 노린 지점은 "왜 기업이 군인들의 마스크에 그런 기능을 넣었냐"는 점이다. 마치 오대수에게 묻는 이우진처럼, 중요한 것은 "벌레는 무엇이냐?"가 아니라 "왜 벌레처럼 보이게 했냐?"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무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5. 마지막에 등장하는 설명을 요약하자면 군인들은 같은 인간을 상대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적을 사살하는데 주저함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적이 끔찍한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사살하기 더 쉽다는 게 기업의 설명이다. 이들은 군인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윤리의식을 기술로 제거해버린 것이다. SF영화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과학기술을 병사들에게 이식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대에 대해서는 이런 상상이 정말 많았다. 2013년 만들어진 네덜란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군대'(1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죽은 병사들을 기술로 살려낸다. 아마도 나치에 대한 수많은 음모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퍼스트 어벤져'의 레드스컬(휴고 위빙) 정도는 아주 윤리적인 군인이었다고 이해하자. 차라리 '캡틴 아메리카'를 탄생시킨 약물로 군대를 만들고자 했던 미국 정부가 더 무시무시하다. 

6. 마지막 장면은 '매트릭스' 싸이퍼의 선택을 떠올린다. 깨달음으로 얻은 불행 대신 망각으로 얻은 행복을 선택한다. 다만 이야기는 마지막 눈물에서 다시 물음을 던진다. 망각으로 얻은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이 이야기가 '매트릭스'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VR과 현실에 대한 물음은 '매트릭스' 이후 꾸준히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물음에는 답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이것은 '부먹'과 '찍먹'보다 논쟁적인 물음이다. 여기 어떤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불행해진다. 알게 되는 순간 돌이킬 수도 없다. 대신 단 한 번 사실을 지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행복한 가상을 인식받아 가상현실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매트릭스' 이후 오랜만에 이 물음 앞에 다시 섰다. 20년동안 과학이 그토록 눈부시게 발전해도 여전히 빨간약과 파란약 중 뭘 먹어야 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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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오래전 나는 어떤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다. L.A에서 조직 보스의 돈을 훔쳐 달아난 마피아가 있다. 그는 차를 타고 사막을 달리던 중 어떤 사고를 당한다. 차는 박살나고 황량한 도로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사막의 열기에 정신을 잃어갈 때 쯤 저 멀리 호텔 하나가 나타난다.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호텔에 도착한 주인공은 로비를 열고 들어가자마자 쓰러진다. 호텔 직원들은 그를 극진히 보살핀다. 주인공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 충분히 머물러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친절하고 맑은 호텔의 분위기에 이상한 거부감이 든다. 기력을 회복한 주인공은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빠져나가려 하지만 아무리 내려가도 자신이 들어온 로비를 찾을 수 없다. 직원에게 문의하지만 "지내시다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개선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한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호텔을 나갈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가 호텔을 나가려 할수록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를 위협한다. 

0-2. 이 이야기는 아주 어릴때 상상한 이야기다. 나도 잘 안다. 이 이야기는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샤이닝', '1408'을 연상시킨다.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이야기를 상상할 때 '샤이닝'은 보지 못했고 '1408'은 제작도 되지 않았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는....얼추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차이점을 찾자면 내 이야기는 시작하고 빠른 시간 안에 주인공을 미지의 공간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사실 저 이야기를 상상했을때 나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듣고 있었다. 서정적이고 슬픈 느낌도 있는 노래에서 묘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 이야기는 '호텔 캘리포니아'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제목도 '호텔 캘리포니아'라고 했었다. 

1. '블랙미러' 시즌4의 마지막 에피소드 '블랙 뮤지엄'은 첫 장면에서부터 '호텔 캘리포니아'를 떠올렸다. 그랬다는 의미는 누군가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블랙 뮤지엄'에서 '블랙'은 범죄를 의미하는 '블랙'이었지만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의 피부색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블랙 뮤지엄'은 내가 상상한 지점을 정확하게 후드러 패면서 반전을 주는 에피소드다(그 주인공은 '블랙 팬서'의 슈리다). '블랙 뮤지엄'이 내 이야기 '호텔 캘리포니아'를 연상시킨 것은 사막 한 가운데 박물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이 박물관이 신비로운 공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호텔 캘리포니아'처럼. 신비로운 공간은 당연히 고대 전설이나 영적인 존재에 기인한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등장한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2. 그러나 신비로운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과학기술이다. 그때쯤 잊지 않고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야 했다. 이것은 '블랙미러'다. '블랙 뮤지엄'은 '블랙미러'의 아이덴티티에 맞는 '신비로운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공포영화를 상상해봤다. 그것은 '이벤트 호라이즌'처럼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SF호러와 다르다('이벤트 호라이즌'은 오히려 우주 공간에 지옥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고전 호러와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검증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발전해버렸다. 더 이상 도시전설이나 신화 속 고대 괴물, 영적인 존재는 힘을 받기 어렵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미러'는 미래의 공포는 과학기술이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블랙 뮤지엄'에 등장한 기술들은 대체로 상식을 뛰어넘었다. 감각을 전송하고 의식을 다운로드 하는 기술은 놀라운 것들이지만 인간윤리에서 어긋난다. '블랙 뮤지엄'은 인간윤리에서 벗어난 혁신기술이 무차별로 사용됐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3. 그리고 놀라운 점은 '블랙 뮤지엄'은 앞서 언급한 나의 편견에도 반기를 든다. 이것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중반에는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부부도 등장한다. 그리고 잠깐 언급하는 '백인우월주의자'는 추악한 변태처럼 묘사된다. 놀라울 정도로 인종에 대한 문제를 배제했다. 이 에피소드는 인종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인종차별? 그거 너무 구식 아니니?"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를 통해 이 에피소드는 인종차별을 비판한다. 쿨내가 나면서도 멋있는 방식이다. 이 에피소드가 인종차별 이슈를 대하는 방식은 많은 영화들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4. 지금까지 '블랙미러' 에피소드 몇 개를 보면서 이제서야 이 녀석의 정체성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블랙미러'에 등장하는 기술들은 현재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반영하고 있지만 대단히 앞서 나갔고, 그래서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68년에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한 HAL9000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저게 말이 돼?"라며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사람들이 SF영화를 보면서 "저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뤄진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제 저녁 대전방송에서는 KAIST 로봇 '휴보'가 저녁 뉴스를 진행했다고 한다. 연구기관들은 코로나19 역학조사에 인공지능(AI)을 도입해 동선을 파악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가 사는 현재는 오래전 사람들이 상상했던 SF 세계다. 그 의미는 '블랙미러'가 상상한 SF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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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랙미러'를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녀석의 정체성이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정보는 '블랙미러는 디지털 시대의 환상특급'이라는 것이다. 낯설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던 '환상특급'은 아재들의 감성 자극 버튼이었다. '블랙미러'도 그런 역할을 하겠다며 등장한 모양이다. 시즌1의 '공주와 돼지'를 본 후 '핫 샷'에서 영 지루해서 관람을 멈춘 상태였다. 그 와중에 '밴더스내치'는 뭔가 매력적이라서 챙겨봤다. 'USS 칼리스터'를 보게 된 배경도 '밴더스내치'와 비슷할 것이다. 그냥 제목과 시놉, 썸네일 사진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이것은 '가장 원초적인 선택'이었다. 

2. 'USS 칼리스터'는 '스타트렉'이나 그 이전의 우주 SF물을 떠올리게 한다. 함장과 대원들이 존재하고 저 옛날 '스타트렉2: 칸의 분노'에서 칸을 떠올리게 하는 악당 발닥도 존재한다. 뭐 대충 그런 우주 SF물을 기대했다가 갑자기 영 이상한 지점으로 흘러간다. 게임회사가 등장하고 CTO 로버트 데일리가 나타난다. CTO, 최고기술책임자는 우리나라 회사였다면 CEO 다음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다. 단지 할 줄 아는 것이 기술개발 밖에 없어서 사람 챙기는 건 조금 미숙하지만 말 그대로 회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 CTO 치고 로버트는 영 찐따 취급을 받는다. 그런 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3. 레트로풍 우주영화에서 갑자기 게임회사 찐따 얘기로 흘러가니 이것이 뭔지 당황스러웠다(사실 '환상특급'도 당황하는 맛에 본다). 그러다 중반에 다다를 즈음 이 이야기의 감이 잡힌다. 한마디로 반전이 중간에 등장하는 셈이다. 이 반전은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중간에 턱하니 박혀서 "이 다음에 어쩔 셈인가" 걱정됐다. 결국 이야기는 '반전'이 과제가 돼서 그것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된다. 아주 새로운 발상이라 마음에 든다. 특히 그 새로운 발상은 게임에 익숙한 세대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새로운 발상에 공감하는 것 역시 게임에 익숙한 세대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겜덕의, 겜덕에 의한, 겜덕을 위한'이야기다. 

4. 여기에 '스타트렉'을 비꼬면서 '스타트렉'스러움을 지킨다는 점도 기발하다. 'USS 칼리스터'는 '스타트렉' 팬이라면 부글부글하거나 "귀엽네"라며 코웃음 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정말 '스타트렉'스럽다. '스타트렉'의 이야기 전개방식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함장의 팬이라면 관람을 좀 더 고민해보자. 

5. 이 이야기의 아이덴티티를 깨닫고서야 나는 '밴더스내치'를 다시 떠올렸다. '블랙미러'가 생각하는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은 게임과 미디어, 네트워크를 말한다. 그 키워드를 가지고 무한한 상상을 펼쳐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몇 개의 에피소드를 더 봐야 여기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현재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은 '블랙미러'의 훌륭한 소재이며 그것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몇 개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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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이야기가 지향하는 지점에는 '체험'이 있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 혹은 아주 오래 전 존재했던 세계로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이야기의 목적이다. 때문에 글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체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고 영상으로 이뤄진 이야기는 더 세밀하게 세계를 구현해낸다. 특히 영화의 경우 체험에 이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한다. 과거에는 미술과 조명, 촬영 뿐 아니라 편집과 음향 등 후시로 이뤄지는 작업에서 체험을 목적으로 했다. 현재에는 이런 작업에 극장의 시설에서도 체험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돌비 애트모스나 DTS:X 등 음향시설, 3D, 4DX, 아이맥스 등 상영시설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접근하자면 TV나 스마트폰은 현대 영화과학에서 말하는 '체험'의 목적과 다소 거리가 있다. 그것은 불 꺼진 극장이 아닌 거실이나 방, 혹은 버스 안에서 영상물을 볼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험 그 자체보다는 휴대성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장비다. 다시 말해 TV나 스마트폰을 가지고서는 체험에 근접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HBO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TV나 스마트폰, 혹은 컴퓨터 모니터 정도다(소수의 사람들은 홈씨어터에서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분명 체험과는 거리가 먼 장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르노빌'은 나의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극단적인 체험의 세계로 초대한다. '체르노빌'이 안겨주는 체험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현장이다. 이 드라마는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발전소 직원과 인근 주민, 사건을 파헤치던 연구원, 정부 관계자, 사고를 수습하는 군인 등.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발레리 레가소프 교수(자레드 해리스)지만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사고를 조명해 온전히 당시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이야기에서 시청자는 이야기의 인물 중 누군가가 아닌 본인 그 자체로서 체르노빌 사고 한 가운데 떨어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시청자는 체르노빌 어딘가의 이름 모를 주민이 된 셈이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사고현장은 어떤 곳일까?


우리가 아는 재난영화에는 '생존의지'가 있다. 이는 이야기의 중요한 축이며 관객들이 일말 희망을 가지고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체르노빌'에는 그것이 없다. 발전소 직원들은 명령에 거역하지 못해 죽음으로 향하고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죽음의 땅에 머물러 있다. 이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현장으로 향한 레가소프와 셰르비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체르노빌에 도착하고 피폭자들을 만난 호뮤크(에밀리 왓슨)도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에서 생존에 대한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살 수 있을거라 기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살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이렇게 끔찍하고 절망적인 재난이야기는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시청자들은 이 이야기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만 기어이 끝까지 향하게 될 것이다. 참사의 시작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결말을 맞이할 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들 말고도, 이 이야기를 마주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체르노빌 참사를 부른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 기반을 둔 관료주의적 질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부조리는 끔찍한 참사를 불렀으며 더 큰 참사로 이어질 여지도 만들어두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의 발단은 원자력발전소 내의 관료주의적 질서다. 승진을 위해 무리하게 안전검사를 강행한 디아틀로프 연구원(폴 리터)과 그를 거역할 수 없었던 선임연구원 아키모프(샘 트로우턴)와 톱투노프(로버트 엠스), 사고를 덮기 바빴던 브류카노프(콘 오닐)와 포민(아드리안 로린스). 사고를 부른 질서 속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벗어나면 구 소련 전체를 지배했던 부조리와 마주하게 된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사고를 덮기 바빴던 소련. 원자력 과학기술의 오점이 전세계에 알려질 경우 체제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과 우주산업의 경쟁을 했다. 공산주의 진영의 대장급 국가로서 자유주의 진영에 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공산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그런 국가와 질서라면 몰락하는 것이 나았다). 

'애국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국가가 있다면 아무리 자유로운 시장경제 활동이 이뤄지더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된다. '애국심'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때문에 그것은 개인에게서 국가로 향해야 정당성을 갖는다. 과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독립운동을 했다. 반면 일본군은 '황국의 신민'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위해 싸울 것을 강요했다. 이것은 자국민들에게도 행해졌고, 식민지였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행해졌다. '체르노빌'의 개인들은 국가의 체제 유지를 위해 희생당한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하고 국제사회에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30여년전 어느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체제와 사회질서(라고 부르고 '권력'이라고 뜻하는 그것)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은 요구되기 마련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큰 권력으로부터 희생을 강요받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희생당하는지도 모른 채 희생될 것이다.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 지 의문이다. 

'체르노빌'의 재난은 원자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 등장한 RBMK 원자로는 저렴하게 만들어졌고 결함이 있지만 수습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과학기술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 사실을 부정했다. 결함을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었다면, 혹은 더 안전한 원자로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면 사고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은폐에 더해 승진에 목마른 연구원, 결함과 사고를 부정하는 상급자. 이들의 콤비네이션이 더해져 체르노빌 사고는 일어났다.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은 원자로가 아니라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왜 미국인들이 지금에 와서 체르노빌 사고를 꺼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을지 궁금해졌다. 어딘가에 연출자나 작가가 인터뷰 한 것이 있겠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상황에 꽤 와닿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된 두 가지 이슈가 있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와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다. 정부에서는 탈원전 기조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를 위해 대체 에너지원을 마련하고 원전 해체산업도 육성하고 있다. 다만 원전 관련 기업들과 연구자들, 학생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유망했던 직종이 한순간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원전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전세계로부터 수주를 받고 있으며, 반도체 만큼은 아니더라도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다만 원자력발전 자체가 갖는 위험성 때문에 정부에서도 '탈원전'을 꺼내든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체르노빌'에 등장하는 사고의 진짜 원인은 원전의 결함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조리한 관료주의 때문이다. 위험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그 말은 상명하복의 수직적 계급체계가 아니라 신중하되 자유로운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중요한 결정은 누군가의 독단이 아니라 신중하고 정확한 검토를 거쳐서 이뤄져야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의 공직사회와 직장사회는 '원자력'이라는 위험한 것을 사고 없이 다룰 수 있을만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는가? 그에 대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하고 싶다. 때문에 나는 누군가 나에게 "'탈원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탈원전'해야 합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원자력은 효율적이고 편리한 에너지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다룰 만큼 합리적인 질서를 갖추지 못했다. 이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직장 내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지역사회, 정치가 투명하고 정직하게 움직인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부의 '탈원전'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집회도 벌어지고 정치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탈원전'에 반대하려면 우리나라에서는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난 아직 못 믿겠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다. 이 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간단하다. 주변 지역에 대한 '대충 수습'과 사고의 은폐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은 안전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마치 "체르노빌의 사고는 심각하지 않다"고 국제사회에 알리는 소련 정부와 다를 바 없어보인다. 일본이 원전사고를 은폐하려는 목적은 '과학기술의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는 소련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다르지 않다. 바로 '체제의 유지'다. 만약 후쿠시마 사고를 제대로 수습하려 했다면 일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베와 자민당이 집권하는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최악의 참사를 남긴 진영이라면 아무리 일본이라도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때문에 아베와 자민당이 할 수 있는 말은 "후쿠시마 사고는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국제사회의 눈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르노빌'을 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결국 사고의 여파는 서서히 확산될 것이고 정부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일본의 국민들은 무차별로 방사능에 피해를 볼 것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인용해 "소련의 몰락은 그때 사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는 레가소프와 셰르비나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수습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천, 수만명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말대로 소련은 몰락했다. 아베가 후쿠시마를 어떻게 수습했건 희생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베와 자민당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만약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대가가 '보수진영의 몰락'이라면 그것은 37층 건물에서 떨어졌는데 손가락 긁힌 것 정도의 부상과 같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본 땅이 아무리 넓다한들 소련만큼 넓진 않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일본은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방법으로 '거짓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추신1) 여전히 모르겠다. 왜 미국인들은 하필 지금 체르노빌 이야기를 꺼냈을까?

추신2) 이 드라마는 철저한 고증을 거쳤지만 실제 사건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이 꽤 있다고 한다. 호뮤크 캐릭터 자체도 그렇고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실제와 다른 부분이 꽤 있다. 이처럼 극화된 지점의 대부분은 사고를 일으킨 부조리를 강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목적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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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이야기'는 2016년 첫 공개 때 보진 않았다. 넷플릭스에 가입한게 1년이 채 되지 않으니 올해 초, 아니 불과 몇 달 전에 이 드라마를 봤다. 시즌1의 3회까지는 끊어서 보면서 느긋하게 봤다. 그러다 4회가 시작할 때 쯤 갑자기 미친듯이 재밌어지더니 그 길로 1시즌을 정주행해버렸다. 하루 쉬고 다시 시작한 시즌2 역시 그 길로 하루만에 정주행을 완료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드라마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용이 무서운 게 아니라 한 번 손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즌3을 손꼽아 기다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이나 '기생충'도 이렇게 학수고대하며 기다리진 않았던 것 같다. 다소 직접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 드라마 너무 재미있다. 

2. 시즌3은 전편으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킨스 마을에는 큰 쇼핑몰이 들어섰고 마을 상권의 구조도 바뀌었다. 지하실에서 판타지 게임만 하던 소년들은 어느새 자라서 연애도 하고 멋도 부린다. '기묘한 이야기'의 오랜 팬이라면 시즌3의 초반부는 적응이 안 될 수 있다. 특히 1회 초반부터 등장하는 마이크(핀 울프하드)와 일레븐(밀리 바비 브라운)의 끈적한 키스신은 "내가 지금 '기묘한 이야기'를 보는게 맞나" 싶은 착각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기묘한 이야기'다"라고 인증을 박아둔다. 물론 이전 시즌에 비하면 등장인물 대부분이 사랑에 빠져있다. 미국의 여름은 연애하기 좋은 계절인 모양이다. 

3. 여기에 음모론의 비중도 더 커졌다. 이전 시즌에서 미국 정부 비밀조직의 음모를 다루고 있다면 이번에는 러시아 정부의 음모다. 드라마 속 배경인 1985년이 냉전시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무시무시한 상상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러시아를 묘사하는 지점이 2019년 감독의 정서를 반영한 것인지 그 시절 첩보드라마의 감성을 재현하기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확실히 1980년대 미국 창작물에 러시아는 꽤나 극단적인 모습이다. 자칫 해묵은 발상으로 보일 수 있는 지점이지만 '기묘한 이야기'의 분위기와는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는 러시아가 헷갈린다. 특히 이들은 이전 시즌에 보여준 미국 정부보다 더 무자비하다. 당연히 시즌3의 스케일을 크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악랄하고 무자비한 러시아 군대에는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인다. 

4. 로맨스와 음모론은 이전 시즌과 분위기를 달리 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미 시청자는 이전 시즌을 보면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미스테리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데모고르곤이나 마인드 플레이어가 다시 나와도 시청자들은 이미 봤던 녀석이기 때문에 놀라거나 충격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크리쳐를 등장시키자니 이전 시즌의 반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미스테리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그 자리를 음모론과 알콩달콩 연애담으로 채워넣었다. 이 연애담이 그리 어색하거나 재미없진 않다. 당연히 아이들은 성장하고 사춘기가 되면 이성에게 관심이 생긴다. 그러면 연애도 하기 마련이다. 7월, 연애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던가. 이것이 굳이 불편하다면 드라마 속 '아주 노골적인' 레퍼런스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5. 시즌3은 이전 시즌에 비해 레퍼런스들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야기에 작용할 수도 있고 의미없는 떡밥일 수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레퍼런스는 '죽음의 날', '빽투더퓨쳐', '코쿤', '네버엔딩스토리', '가라데 키드' 등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바로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이다. SF호러의 고전인 이 영화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될 정도로 인기있는 작품이다. 냉전시대와 그 이전의 간첩들에 대한 공포를 외계인에 묘사해 다룬 이 작품은 이념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외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간첩=외계인'이라는 의미다. 영화는 외계인이 신체를 강탈하고 그 사람으로 변하는 외계인과 싸움을 다루고 있다. 시즌3 역시 이를 차용해 미지의 존재가 인간들을 조종하는 공포를 다루고 있다. 1978년작 필립 카우프만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 냉전시대 간첩에 대한 공포를 다룬 것처럼 시즌3도 그 길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묘사하는 러시아가 오싹하다. '네버엔딩스토리'의 차용은 시즌3의 백미다.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진 않지만 아마 시즌3을 통틀어 최고로 웃기는 장면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판타지 영화였는데 그 노래까지 듣게 돼서 정말 반가웠다. 

6. '기묘한 이야기'의 오랜 팬이라면 시즌3은 꽤 마음 아픈 작품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꽤 성장했고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모험을 떠나던 아이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그리고 큰 사건 이후의 어른들도 그 자리에 없다. 시간에 따라 삶이 변하듯 영원할 것 같았던 호킨스 마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시즌3의 중요한 의미는 시간이 흘렀다는데 있다. 누군가는 이별을 하고 누군가는 다시 만난다. 시간은 이미 떠난 사람을 돌아올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버린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어른이 되는 건 매일 이별하며 사는 것이다. 호킨스 마을의 아이들도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고, 나도 그렇게 어른이 됐다. 

7. 결론: 시즌4 만들건가? 만들 것 같기도 한데...


추신) 루카스 동생 이번 에피소드에서 발암력 제대로 폭발. 그런데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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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이야기'가 등장한지 꽤 오래 지났지만 그리 챙겨보진 않았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야기를 진득하게 볼 만큼 인내심이 많거나 차분한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는 잘 안 보는 편이다. 이번에 보게 된 것도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며 "뭐 볼 거 없나"라고 찾던 중에 보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시즌 3회까지는 그냥저냥 봤다. 아마 거기서 멈추라면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부터 슬슬 재밌어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1일 1시즌'을 할 정도로 푹 빠져서 봤다. 꽤 오래된 드라마긴 한데... 이거 정말 재밌다. 

2. 사실 '기묘한 이야기'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만한 것은 전혀 없다. 80년대 미국 SF드라마나 영화들의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오고 당시의 팝음악으로 트렌디한 장식을 한다. 아주 노골적으로 80년대 감성으로 돌아가려하고 있다. 당장 이 드라마에 대한 첫인상도 "'E.T.'와 '엑스파일'을 섞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환상특급'이나 '미지와의 조우', '스탠바이미', '캐리'같은 영화·드라마들이 마구 떠오른다. 이런 '7080 감성'을 즐기기만 해도 이 드라마는 매우 풍성하다. 그런데 그것들을 대충 걷어내고 나면, 이 드라마의 새로운 '즐길꺼리'가 보인다.

3. 외계인에 대한 SF영화들을 정치적인 이야기할 때 흔히 '주적관념'에 대한 언급을 한다. 돈 시겔의 영화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을 리메이크한 영화 1978년 영화 '우주의 침입자'는 냉전시대 본토에 숨어있는 소련 스파이들을 외계인으로 묘사한 작품이다(미국인의 흔한 일상 속에 소련 스파이가 숨어있다는 것에 대한 SF적 상상이다). 외계인은 국제정세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기묘한 이야기'는 그런 정치적 은유들을 꽤 명확하게 보여준다. 

4. 우선 '기묘한 이야기' 시즌1을 살펴보자. 이 이야기에서 표면적인 악당은 다른 차원의 괴물 데모고르곤이다. 그러나 이야기 내내 데모고르곤보다 더 나쁜 역할이 호킨스연구소의 브레너 박사(매튜 모딘)다. 브레너 박사는 MK울트라 프로젝트를 주관하며 어린 아이를 데려다 강제로 실험시키는 등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실험은 냉전시대에서 소련에 대적할 무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이며 그 실험의 산물로 초능력 소녀 일레븐(밀리 바비 브라운)이 만들어진다. 시즌이 끝날때까지 이야기의 최고 나쁜 놈은 브레너 박사(=미국 정부)다. 이 이야기에서 소시민들의 '주적'은 음모를 품은 미국 정부다. 사실 음모론은 냉전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그것들 중 일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실제는 망상에 불과했다. 불안하고 불신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정부도 불신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이 한적한 시골마을에는 브레너 박사가 심은 불신이 곰팡이처럼 자란다.

5. 시즌2는 1편과 다른 적이 등장한다. 여기서 적은 다른 차원의 존재(마인드 플레이어)다. 이 존재가 마을에 침투하는 방식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바로 마을의 땅 밑에 굴을 뚫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힌다. 그리고 마인드 플레이어의 영역이 된 자리에는 나무와 호박이 썩어버린다. 미국인의 일상 속에 자리잡은 공산주의가 바이러스처럼 자라서 정신을 '썩어버리게' 만든다는 상징과 같다. 말 그대로 다른 이념(국가)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것이다(특히 '땅굴'은 우리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익숙하다). 게다가 무려 '스파이'라는 개념도 등장해 다른 차원의 괴물과 마을 주민들의 싸움을 '첩보전'으로 끌고 간다. 이런 상상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차원의 마을에 날리는 먼지들이 유난히 핵폭발 후 낙진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차원'은 핵전쟁 후 마을 모습이라고 봐도 될 듯 하다. 

6. 그런데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음모론과 냉전시대는 비교적 해묵은 이야기들이다. 왜 드라마는 굳이 이런 지점까지 7080 감성을 따라갔을까? 그 이유는 드라마의 몇몇 장면에 등장한다. 호킨스연구소에서 마을 주민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장면은 스노든의 폭로처럼 감시와 정보수집을 기반으로 한다. 게다가 냉전시대의 상징같은 땅굴과 썩어버린 일상은 온·오프라인의 테러를 통해 언제든 노출돼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기묘한 이야기'의 '7080 SF 감성'에 바탕이 되는 레퍼런스에는 당시 정치상황을 알 수 있는 비유와 상징이 깔려있다. 그건 꽤 직접적이고 낡은 것들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현재와 닮은 것들을 끼워넣는다. 마치 물로 희석시킨 보드카처럼 이 낡은 이야기는 묘한 생명력을 얻는다. 

7. 이런 정치적인 것들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 드라마는 매우 재미있다. '스탠바이미'나 'E.T.'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도 좋지만 그냥 10대 소년소녀들 꽁냥거리는 이야기 보는 재미도 있다. 배우들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 지점을 보는 재미도 아주 좋다. 드라마다 보니 CG의 디테일이 어설픈 부분도 있지만 중요한 몇몇 장면에서는 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그림을 선사한다. 특히 그림자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을 정도로 아주 좋다. 그리고 시즌1의 "R! U! N!" 장면도 너무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8. 결론: 이렇게 취향저격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시즌3 예고편을 보니 이것도 아주 재미있어 보인다. 나오자마자 1일 1시즌으로 끝낼 것 같긴 하지만... 별 수 없다. ...재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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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명 넷플릭스 '킹덤' 시작할 때 '원작: 신의 나라'라고 나오길래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완전 다른 이야기'다. 드라마 '킹덤'과는 아주 무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나마 공통점을 찾자면 '지율헌'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펼쳐지는 이야기도 드라마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덮었을때 꽤 큰 혼란에 빠졌다. 분명 작가도 똑같고 드라마 시작에도 '원작'이라고 등장한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드라마 '킹덤'이 탄생한 것일까? 이것은 거대한 '유니버스'를 염두해둔 스토리일까? 당혹스러운 이 심정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 '신의 나라:버닝헬'과 '킹덤'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배경이 조선시대고 좀비가 등장한다. 공통점은 정말 그것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2개의 에피소드가 개별적으로 펼쳐진다. 하나는 버려진 섬에서 만난 조선과 일본의 살인귀가 펼치는 무협액션. 다른 이야기는 어린 세자를 보호하는 산적과 무사의 추격전. 우선 두 이야기는 모두 화려하고 잔인한 액션이 가미된 무협 이야기다. 인물관계도 흥미롭고 액션도 화려하다. 인물관계를 구성하는 방식은 김은희의 스토리답게 촘촘하다. 

3. 그런데 두 개의 에피소드에는 숨은 공통점이 있다. 이야기가 완전하게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열린 결말'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것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정확히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서 기승전결은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이것은 마치 다음 시즌을 남겨둔 것처럼 종결되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완결된 책이다. 조각난 파편같은 이 이야기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의외로 그 해답은 드라마 '킹덤'에 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킹덤'은 시즌제 드라마다. 그 때문에 '킹덤'의 결말은 종결되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킹덤'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에서 '신의 나라'도 종결지을 실마리가 잡힐지 모르겠다. 아니면 '신의 나라'는 실패한 만화일 가능성도 있다.

4. '신의 나라'의 두 에피소드 중 어린 세자와 산적의 에피소드는 '킹덤'과 연관성이 있다. 궐내 분쟁에 몰린 세자가 나오고 '지율헌'도 등장한다. 다만 세자의 이름도 다르고 지율헌의 구조도 달라서 드라마와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이 에피소드가 재미있는 지점은 산적 무사의 설정이 마치 '자토이치'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표절' 운운할 수준은 아니지만 일본영화에 등장하는 닌자와 떠돌이 사무라이의 싸움을 보는 기분이다. 물론 여기에 좀비를 더했으니 '신남'은 배가 된다. 

5. 결론: 이 만화의 뒷배경이 궁금하다.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은 채 끝나버려서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이야기가 깔끔한 완결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 난장판을 벌인 이야기라면 더 내질러야 카타르시스가 생길 것 같다. 드라마 '킹덤'과 마찬가지로 앞으로가 더 궁금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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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킹덤'은 일정 부분까지는 '창궐'과 닮았다. 좀비가 등장하고 궁중에 음모가 발생한다. '창궐'의 이청(현빈)과 김자준(장동건)은 각각 '킹덤'의 이창(주지훈)과 조학주(류승룡)로 치환된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조학주가 궁을 장악한 방식은 더 견고하고 음모는 더 촘촘하다(동래에 좀비가 창궐한 상황은 조학주도 예상 못한 듯 하다). 아무래도 '킹덤'은 드라마인 만큼 조학주 주변에 중전이나 아들(정석원) 등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영화보다는 공간이 넓은 만큼 좀 더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2. 중반 이후 '킹덤'과 '창궐'은 어긋난다. '창궐'은 주요 인물들이 궁 안에 고립되면서 이곳에서의 생존게임으로 진행한다. 다만 이들의 명분은 좀비들을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대부분 좀비물의 경우 좀비들이 공간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싸우는 것과 반대된다. '킹덤'은 상주를 배경으로 주요 인물들이 고립되고 좀비들과 대립한다. 상주의 북쪽에는 조학주의 군대가 있고 남쪽에서는 좀비떼가 밀고 올라온다. '킹덤'의 시즌1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마무리짓게 된다. 

3. 나는 '창궐'에 대해 좀비영화와 정치사극 모두에게 욕심을 내다 다 놓친 경우라고 결론내렸다. 다시 돌이켜보니 '창궐'이 욕심을 내던 것은 정통 좀비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같은 정통파가 아닌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와 같은 좀비액션영화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인 대립을 담으려니 좀비영화의 정통성은 죽어버리고 정치는 몸싸움이 됐다(당연한건가?). '킹덤'은 정통 좀비영화가 정치사극 사이에서 협상을 시도한다. 좀비영화가 갖는 고유의 정체성을 밑바닥에 깔아두고 큰 틀에 정치적 음모를 끼워둔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상황은 좀비영화지만 큰 틀은 정치사극인 것이다. 

4. 조학주는 김자준보다 이야기의 장악력이 막강하다. 김자준의 경우 이청과 대립각을 세우는 수준이었다면 조학주는 이야기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창 뿐 아니라 안현대감(허준호)과 군사들, 백성들, 중전, 왕, 대신들까지 그의 손아귀 안에 있다. 인물 간의 구조로 파악하자면 조학주와 이창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이 점이 '킹덤'의 이야기를 완성시킨 중요한 요인이다. 정치사극과 좀비영화가 수평관계가 아닌 수직관계에 놓이게 하는 요소인 셈이다. '킹덤'은 이 지점에서 굉장히 똑똑했다. 

5.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를 본 게 그리 많지 않았다(원래 드라마를 잘 안 본다). 그나마 제대로 본 게 '유령'이 전부다(그 흔한 '시그널'도 안 봤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김은희 극본의 특징을 떠올려봤을때 3부까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김은희 작가는 꽤 템포가 빨랐기 때문이다. '킹덤'의 경우도 3부까지는 대단히 전개가 느리다. 특히 김성훈 감독 역시 '끝까지 간다'의 숨 막히는 전개를 감안한다면 3부까지는 꽤 많이 느렸다. 4부부터 전개가 빨라지더니 6부에 이르러서는 '김은희 작가다'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됐다. 이 이야기... 재미있는 장르물이다. 끝까지 보고 싶게 한다. 

6. 앞서 언론시사에서 3부 초반까지 봤을 때 김혜준 배우에 대한 연기력 논란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뻣뻣하다'는 그 인상은 '어린 중전(=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선 여인)'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연기라는게 풍부한 테크닉으로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배우가 가진 역량이나 특징이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말에 봤던 '아사코I&II'의 경우 카라타 에리카는 연기를 잘하지 않는다. 솔직히 '발연기' 소리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연기못함'이 아사코와 너무 잘 어울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과 어색하게 내뱉는 대사들이 아사코의 처지와 거의 찰떡이다. 김혜준의 경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중전의 배경과 썩 잘 어울린다. 이 중전은 '능숙한 중전'이 아니라 '아주 어색한 중전'이다.

7. 배두나의 경우 연기력 논란을 솔직히 예상 못했다. 살펴보니 배두나가 사극연기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이다. 배두나라는 배우가 갖는 이미지가 모던하고 세련됐기 때문에 사극에서는 대체로 배제됐던 것 같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김성훈의 배두나 캐스팅은 모험에 가깝다. 역시 그 모던한 이미지가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 듯 하다. 또 힘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도 영향을 준 듯 하다. 내 경우는 "배두나 목소리네"라며 듣긴 했는데 그게 아닌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이 경우는 그저 '꼼꼼하게 보신 분'들의 의견을 내버려 두고 싶다. 난 어색함을 못 느꼈기 때문에 반박할 꺼리가 없다.

8. 결론: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보고 좀비영화의 팬이 된 입장에서 CG가 범벅이 된 좀비영화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레지던트 이블' 같은 건 좀비영화의 카테고리에서 제외시킨다). 게다가 느릿느릿 꼼꼼하게 씹어삼키는 좀비의 정체성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뛰는 좀비도 좋아하지 않는다. '킹덤'의 경우 좀비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뛰어다닌다. 정말 빠르다. 다만 좀비는 뛰면서도 이야기는 느린 좀비처럼 천천히 옥죈다. 마치 빈티지 좀비와 모던 좀비의 합의점을 찾은 느낌이다. 이 이야기...끝이 궁금하다. 둘 중 누가 죽는 꼴을 반드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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