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블로그 이미지
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 2,906,515Total hit
  • 220Today hit
  • 277Yesterday hit

'리뷰'에 해당되는 글 779건

  1. 2020.07.02
    넷플릭스 '사라진 탄환' 초간단 리뷰
  2. 2020.07.01
    '인베이젼 2020' 초간단 리뷰
  3. 2020.06.29
    [약간 스포] 넷플릭스 'Da 5 블러드' 초간단 리뷰
  4. 2020.06.26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간단 리뷰
  5. 2020.06.23
    [스포주의] '사라진 시간' 초간단 리뷰
  6. 2020.06.18
    '온워드:단 하루의 기적' 초간단 리뷰
  7. 2020.06.15
    [쬐금 스포] '#살아있다' 초간단 리뷰 (4)
  8. 2020.06.09
    [약간 스포]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 초간단 리뷰
  9. 2020.06.04
    [약간 스포] '언더워터' 초간단 리뷰 (1)
  10. 2020.05.29
    놀 줄 아는 형, 조정석

1. 프랑스 사람들은 바게뜨빵을 만드는 역동적인 문화가 있어서 그런지 액션영화를 잘 찍는다(농담이다). 그들이 만든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부터 굉장히 역동적인 영화다(무려 기차가 역에 들어온다!). 뤽 베송의 '택시'부터 시작된 역동적인 프랑스 액션영화는 파쿠르라는 괴상한 스포츠와 함께 더욱 발전했다. 프랑스 액션영화의 육체적 속도감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따라하기 힘들다. 어떤 형태로건 프랑스와 연관된 액션영화를 찾아봐도 '택시', '트랜스포터', '테이큰', '야마카시' 등 소위 '몸으로 조지는 영화들'이다. 주인공이 싸움을 매우 잘하고 카메라도 속도감이 넘친다. 이것이 프랑스 액션영화만의 개성이다. 내가 넷플릭스 영화 '사라진 탄환'에 대해 기대한 것도 그런 액션이었다. 

2. '사라진 탄환'의 예고편을 봤을 때는 '보급형 분노의 질주'를 상상했다. 일단 자동차가 달리고 부딪힌다. 주먹다짐이 오고 가는데 당연히 예고편이다 보니 편집에 속도감이 넘친다. 막상 뚜껑을 열어봤을 때 영화는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알던 프랑스 액션영화와도 전혀 달랐다. 일단 이 영화의 이야기는 차량개조 전문가인 주인공 리노(알반 레누아)가 동생을 도와주다 감옥에 가게 되고 감옥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경찰의 일을 돕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에 연루돼 도망자 신세가 되고 자신의 누명을 벗는 이야기다. 액션영화다운 간단하고 재미있는 플롯이다. '트랜스포터'나 '테이큰'을 떠올려봐도 이들은 간단한 플롯을 선호한다. 액션영화는 이야기가 간단한 게 좋다. 

3. 이제 재미있는 지점은 액션연출방식이다. 이 영화에는 리암 니슨이나 제이슨 스타뎀이 없다. 그 말은 주먹다짐을 정말 동네 양아치 개싸움 하듯이 한다. 리노가 양아치 개싸움방식으로 경찰 10명을 때려눕힌 걸 보면 차태식(원빈)보다 더 말도 안되게 세보이긴 한다. 아무튼 경찰 10명을 때려눕혔다. 영화의 막싸움방식은 카체이싱에도 적용된다. '택시'나 '분노의 질주'의 카체이싱은 '속도감'에 포커스를 맞췄다. 속도감을 줄 수 있다면 온갖 CG를 갖다 써서 차가 빨리 달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속도감보다는 '오직 박.력'이다('박.력'에 강조해야 한다). 프랑스 국민차 르노를 가지고 이렇게 박력있는 카체이싱을 찍을 수 있을까 싶은데 영화는 그걸 해낸다. 게다가 CG를 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큰 돈을 쓰진 않았지만 때려 부수고 줘 패는 것은 박력이 있다. 

4. 나는 일전에 넷플릭스 프랑스 액션영화 '라 테르'를 보고 심기가 불편했던 적이 있다. '라 테르'는 주인공인 아버지가 적들과 싸우면서 하는 행동들이 당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체 왜 저기서 차를 훔치고, 대체 왜 저기에 숨고, 대체 왜 거기로 가는가"라는 의문을 시종일관 안고 영화를 봐야 했다. 반면 '사라진 탄환'은 인물의 행동들에 명분이 있다. 간혹 명분없는 조연들도 있지만 액션영화에서 이 정도는 이해해줄만 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이 한결 개운하다. 게다가 '택시'처럼 유치하지도 않고 '테이큰'이나 '트랜스포터'처럼 판타지 스타가 나오지도 않아서 더 몰입할 수 있다. '사라진 탄환'은 대단히 현실적인 액션영화다. 

5. 영화를 만든 귀욤 피에레트 감독이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 찾아보니 단편영화 하나 만든 이력이 전부다. 게다가 주인공 알반 레누아는 액션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출연작이 꽤 다양하다. 특히 한국영화 '상류사회'에도 출연했다고 나와있는데 어디에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기억나는 외국배우는 단 한 명이다). 니콜라스 뒤포셸은 '파리의 인어'와 '그 누구도 아닌', '인사이드' 등에 출연했다. 잘 생겼는데 좀 재수없어 보이는 캐릭터다. 낯선 얼굴들과 낯선 연출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영화다. 

6. 결론: 카체이싱 연출은 약간 '가난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기도 한다. 스피디한 자동차 액션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를 권하진 않는다. 이 영화는 그저 박력만 있을 뿐이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1. 러시아 영화라면서 다들 영어를 쓴다. 마더로씨아 성님들이 서방 미제앞잡이들의 언어를 쓰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하다. ...아니, 그보다 일단 성우들이 연기를 못하고 입모양과 싱크가 안 맞는 언어를 듣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라 거슬린다. 

2. 듣자하니 전편이 있는 영화다(이 영화의 원제는 'Attraction2: Invasion'이다). 전편은 국내에 VOD로 소개돼있다. 아니 이럴거면 전편도 같이 개봉을 하던지, 아니면 전편이라도 미리 보고 갈 수 있게 속편이라고 알려주던지.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영화를 보니 대체 뭔소리인지 모르겠다. 

3. 그럼에도 CG 기술은 아주 좋다. 상상력이나 디자인이 다소 사회주의적이긴 하지만(농담) 아무튼 구현은 잘했다. 특히 헬기와 로봇이 싸우는 장면은 요즘 한국영화도 쉽게 구현하기 힘든 수준이다. 

4. 결론: 앞서 말한대로 전편을 못 봤으니 뭔소리인지 모르겠다. 혹시 이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VOD '어트랙션'을 보고 가는 것이 좋다. 본다고 더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추신) 조이앤씨ㅂ.....

TRACKBACK 0 AND COMMENT 0



1-1. 어떤 영화감독은 흔히 '20세기 거장'으로 불린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브라이언 드 팔마, 아톰 에고이얀, 에밀 쿠스트리챠, 장이모우 정도다. 그들은 20세기에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걸작을 만들었지만 21세기에는 귀신같이 잊혀졌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국내에서 파악되지 못한 어느 지점에서 꾸준히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20세기의 거장들은 예전과 같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파이크 리도 '20세기 거장'이다. '스쿨 데이스', '똑바로 살아라', '모베터 블루스'를 시작으로 '정글 피버', '말콤엑스', '클락커스', '썸머오브샘' 등 흑인의 삶과 권리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다수 만들었다.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흑인 영화감독이 많지 않던 시절인 만큼 스파이크 리는 가장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감독이었다. 

1-2. 현재에 이르러서는 배리 젠킨스나 스티브 맥퀸, 조던 필, 라이언 쿠글러 같은 젊은 감독들이 흑인의 삶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이들에게 스파이크 리의 영화도 유산처럼 남아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스파이크 리는 '20세기 거장'이다. 그는 21세기에도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다. 괜찮은 범죄 스릴러 영화인 '인사이드 맨'이 있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리메이크 한 '올드보이'가 있었다. 그 밖에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몇 편의 영화들이 있다. 2018년 영화 '블랙클랜스만'은 스파이크 리의 부활과 같은 영화였다. 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무려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각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그 해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그린북'이었다는 점도 이채롭다). 넷플릭스 영화 'Da 5 블러드'는 '블랙클랜스만' 이후 만든 첫 장편영화다. 

2. 'Da 5 블러드'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베트남전쟁과 마틴 루터 킹 암살사건 등 동시대 미국을 흔든 일련의 사건들이 교차돼 보여진다. 이것은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베트남 참전용사인 4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분대장 노먼(채드윅 보스먼)의 유해를 수습하고 숨겨둔 금괴를 찾기 위해 다시 베트남으로 향하는 내용이다. 소소한 로드무비나 유쾌한 모험극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 영화는 꽤 묵직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 이야기는 영화 초반부부터 노골적인 선언을 하고 시작된다. 4명의 할아버지들은 베트남에 도착한 첫 날 클럽에서 춤을 춘다. 클럽 DJ의 뒷면 벽에는 'Apocalypse Now'라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영어제목이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최고의 영화인 '지옥의 묵시록' 앞에서 흑인 4명이 '지옥의 묵시록'을 부정하듯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것은 '지옥의 묵시록'과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선언과 같다. 이 선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체를 드러낸다. 

3. 미국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베트남 전쟁 영화 몇 개를 떠올려보자. 가장 유명한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을 시작으로 '디어헌터', '람보', '야곱의 사다리'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 영화들은 모두 백인의 관점에서 본 베트남 전쟁 이야기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람보'를 언급하며 "그런 만들어진 영웅 말고 진짜 영웅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람보'조차 부정하는 셈이다. 'Da 5 블러드'는 흑인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쟁은 조금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흑인이 겪은 베트남 전쟁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며 어떤 미국영화도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4. 베트남전쟁은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일어났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베트남에 폭격을 가했고 이때부터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65년은 미국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말콤엑스가 '이슬람 국가운동' 소속 흑인에게 살해됐고 3년 뒤인 1968년에는 마틴 루터 킹이 살해됐다. 두 정신적 지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던 흑인인권운동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시기에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영화 속 주장에 따르면 미국인 중 11%가 흑인이지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흑인은 32%에 해당된다. 흑인의 관점에서 본 베트남 전쟁은 전쟁의 트라우마와 함께 인권이 탄압당했으며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는 슬픔도 느낀 사건이다. 백인에 비해 삼중고로 힘든 전쟁인 셈이다. 영화 속 노먼은 4명의 대원들에게는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엑스와 같은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이들이 50년 가까이 떠안고 있던 트라우마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는 것에 따른다. 

5. 이들이 다시 베트남을 찾았을 때는 KFC, 맥도널드 같은 미국 브랜드들이 자리잡은 나라다. 실제로 베트남은 아시아의 신흥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곳에서 4명의 할아버지들이 과거의 유산을 찾는다. 이때 이미 "그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을 한다. 실제로 그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 파병왔을 당시 이 미국인들은 명분없는 전쟁을 했다. 지금은 명분이 있는 전쟁을 한다. 그 명분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금을 챙겨가는 것이다. 금은 4명의 '블러드'에게 인생을 바꾸게 하기 충분한 돈이었다. 그러나 이 금은 과거 세대인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아닌 다음 세대들의 인권운동을 위해 넘겨진다. 그 인권운동은 전쟁터의 지뢰와 불발탄을 제거하고 '#Blacklivesmatter'라는 흑인인권운동에 지원된다. 이것은 노먼이 이루려 했던 '흑인을 위해 쓰여지는 돈'이다. 50년이 지났지만 그 돈은 여전히 흑인인권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은 노먼의 유산이자 마틴 루터 킹과 말콤엑스의 유산이다. 

6. 나는 '흑인인권운동'이라는 구체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인스타그램에 '#Blacklivesmatter'라는 해시태그가 달릴 때도 시큰둥했다. 나는 '흑인', '여성'이라는 구체적 계층보다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낮은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거기에는 유색인종, 여성뿐 아니라 어린이, 노약자, 가난한 사람, 다문화 가정, 장애인 등이 모두 해당된다. 그렇기 포괄적 범주에서 나는 이 영화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메시지가 반갑다. 우리에게도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받아들여져 구호가 돼야 하는 'Da 5 블러드'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Blacklivesmatter'는 우리에게는 '#No재팬'으로 바꿔도 된다. "내가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호기로운 젊은이처럼, 우리에게도 과거의 유산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7. 결론: 'Da 5 블러드'는 대단히 직접적인 영화다. 할 얘기가 있는데 둘러서 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기대보다 과감하고 묵직하게 전개돼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뒷통수 맞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4명의 '블러드'와 1명의 아들이 싸우다가 서로 위하는 저 관계가 대체 뭔가 싶다가도, '전쟁의 트라우마+오래 본 사내놈들'로 이해하면 쉬워진다. 원래 서로 쌍욕하고 싸우다가도 위험할 때 위해주는 게 친구다. 사내놈들에 대한 관찰이 꽤나 리얼해서 재미있다.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나 스티브 맥퀸, 조던 필,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의 인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로 했다. 이것은 1957년생인 그가 베트남전쟁과 말콤엑스, 마틴 루터 킹의 시대를 관통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1. 과거의 언론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야였다. 그들에게는 숨겨진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때는 그 사명감만 가지고도 충분히 먹고 살만 했다. 종이신문이 거의 유일한 수입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돈이 됐다. 종이신문은 사람들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그래서 언론은 돈 신경 쓸 필요없이 취재해서 진실을 알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다 세상이 변하고 당연히 언론도 변했다. 주된 플랫폼은 종이신문에서 웹페이지로 옮겨갔다. 인터넷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사는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해야 했고 광고를 따내기 위해서는 웹페이지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해야 했다. 당연히 자극적인 기사와 제목들이 등장했고 광고주의 입맛에 맞게 진실은 왜곡됐다. '언론은 돈이 된다'는 기억은 여러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그래서 언론사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과거처럼 윤전기를 갖춰야 하는 언론사와 달리 컴퓨터와 웹페이지만 있으면 누구나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언론사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능력있고 정의로운 기자가 아니라 전략적인 경영자의 몫이 됐다. 

2.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우)는 폭스뉴스를 살린 경영자다. 그는 자본에 잠식된 미디어 시장에서 방송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한다. 그 결과 로저는 오너인 루퍼트 머독(말콤 맥도웰)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다. 본인은 실력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줬다고 말하지만 그 와중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추악한 짓도 한다. '실력있는 경영자'와 '추악한 변태'는 그의 두 가지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연결고리를 갖는다. 로저는 자신을 항변하면서 "나는 그녀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줬다. 그런데 어떻게 성추행이 되냐"고 말한다. 이 말은 "나는 인재를 등용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은 챙겨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건 누가 봐도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다. 매긴 켈리(샤를리즈 테론),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 그리고 많은 여성들의 재능과 노력을 깎아내린 처사다. 재능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요구에 응해줘서 이 자리에 오른건가" 혹은 "요구에 응하지 않아 이런 피해를 본 건가"라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3. 과거 언론에도 이런 괴물들은 있었다. 불합리한 시대에서 언론은 불합리한 '갑(甲)'이었고 그들은 그 위치를 충분히 누렸다. 소위 '성상납'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흔치 않게 쓰인다. 나는 과거의 '갑'들과 로저가 다르다고 여겼다. 로저의 경우에는 자본의 논리가 좀 더 명확하게 반영돼있다. 기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 못한다. 그저 기사 한 줄로 여론의 흐름을 바꿀 뿐이다. 직접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은 월급을 주는 사장과 고용된 직원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과거 언론사에서 경영자가 보도국에 개입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폭스뉴스와 같은 큰 방송국이거나 큰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경영자와 맞먹는 위치에 있다(영화 '더 포스트' 참조). 

4. '밤쉘'의 초반부에 보여진 것은 보도국의 뉴스방송에 적극 개입하는 경영자 로저의 모습이다. 마치 보도국장인양 전화해대는 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사 경영자의 할 일은 대외활동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직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적어도 '더 포스트'의 초보 경영자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그걸 한다. 간단히 말해 캐서린 그레이엄과 로저 에일스를 놓고 본다면 언론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방송국과 신문사는 다른 것 아니냐" "앵커와 기자는 다른 것 아니냐"라는 멍청한 질문이 나올까봐 미리 답하는데 폭스뉴스는 24시간 뉴스채널이니 언론사에 속하고 앵커는 기자의 리포팅을 전하는 입인 만큼 기자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저 회사에는 보도국의 개념이 없나 의심도 해봤다. 보도국장이라 할만한 사람을 구경도 못해봤으며 로저가 저렇게 날뛰는 걸 보니 CEO가 보도국장도 겸직하는건지 궁금해졌다. 만약 겸직이라면 로저는 기존의 '썅놈'보다 몇 배는 더 '썅놈'이다. 

5. 영화 내내 신경쓰이는 지점은 병풍처럼 등장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존재다. 미국 대선이 있던 시기의 언론사가 배경인 만큼 트럼프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매긴 켈리는 트럼프와 토론회를 진행한 앵커가 아니던가.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트럼프의 비중이 많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인상도 함께 받는다. 트럼프의 여성비하적 사고는 초반부 그의 트윗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성추행 사건에 깊이 파고들수록 배경으로 등장하는 트럼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영화는 마치 트럼프에게 "너도 가해자야" "너는 정말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안봐도 알 것 같은데?"라고 뉘앙스를 던진다. 실제로 영화에 언급된 이슈는 트럼프가 전 아내를 성폭행하려 했고 부부 사이에 성폭행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로저 에일스를 방패막이로 세워뒀지만 실상 트럼프의 여성비하적 사고와 성추문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6. 인터넷 시대의 기자는 과거와 같은 '갑'의 위치는 아니다. 과거의 기자는 독자 말고 무서울 것이 없었다. 돈의 논리로 계산하자면 과거의 언론은 종이신문이 주수입원이었고 종이신문을 구입하는 돈은 독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방송 역시 공영방송만 있던 시절에는 광고수익과 함께 수신료의 비중이 컸다. 수신료 역시 국민들이 내는 돈이다. 과거 언론에게는 독자가 '갑'이었다. 현재의 기자에게 '갑'은 광고주다. 말로는 독자를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 독자는 '돈 안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극히 일부의 경우에는 기자에게 갑질(성추행)하는 '갑'(광고주, 정치거물 등)이 나올 정도다. 나는 과거의 언론환경이었다면 로저 같은 괴물은 절대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였다면 그는 다른 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며 직원을 성추행 했을 것이다. '밤쉘'은 언론이 얼마나 오염됐는지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7.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용기있는 사람들 덕분에 변화된 환경에서도 정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얘기를 하면 누군가 발끈할 수 있겠지만) 나는 성폭력은 성별이 아닌 권력관계의 문제라고 믿는다(꽤 많은 남성들은 여성보다 권력적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편이다). 로저라는 절대적 '갑' 앞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낸 사건은 이후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됐다. 이 사건으로 세상에 많은 불합리한 권력관계를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꼰대적 정서'를 가진 모든 분야가 더 많이 바뀌길 바란다. 성폭력뿐 아니라 불합리한 갑질을 포함한 모든 권력형 범죄들이 사라지길 바란다. 

8. 결론: '자본에 의한 언론의 몰락'을 영화로 이해하고 싶다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전통있는 포토저널리즘 매거진 '라이프' 잡지도 시대의 흐름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각돼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월터'는 그것을 아름다운 퇴장으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깐 언론은 '더 포스트'를 거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겪었고 '밤쉘'같은 사건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스포트라이트' 같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자본과 권력 앞에 굴복할 날이 올 것이다. 자본과 권력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모두 미국영화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것은 세상의 '을'들이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상대기도 하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1. 낯선 거리를 걸을 때는 보통 여행을 하거나 길을 잃었을 때다. 아무리 걸어도 여기가 어디인지 당최 알 수가 없을 때 오는 답답함은 얼굴에 짜증으로 표현된다. 한 사내가 있다. 헝클어진 머리와 다듬지 못해 듬성듬성 난 수염은 그가 꽤 오랫동안 스트레스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햇볕이 따가운지 그의 미간은 주름져있고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조금 벌어진 입은 듣지 않아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몹시 지쳤다. 남자는 더 저항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지쳤지만 발걸음을 멈출 순 없다. 길을 잃었어도 그는 숨쉬고 있고 삶은 계속 되기 때문이다. 

2. '사라진 시간'은 기이한 영화이자 올해 가장 논쟁적인 영화다. 시간과 공간, 정체성이 뒤엉킨 이상한 세계를 배경으로 인물의 내면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외피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애시당초 영화는 미스터리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과거가 지워져 새로운 사람이 됐다'는데 관심을 둔다. 영화가 관심을 갖는 이것은 충분히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스터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풀어야 미스터리다. 풀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살게 되는 '상황'에 불과하다. 당연히 형구(조진웅)는 사라진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만약 미스터리 스릴러였다면 그의 고군분투 앞에 단서와 성과를 제시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관객에게 당근을 주는 것처럼 약간의 단서로 이야기에 집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라진 시간'은 아무것도 관객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형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FAIL'뿐이다. 

3. 이 이야기에는 꽤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영화는 그 중 김수혁 선생(배수빈)과 그의 아내 윤이영(차수연), 박형구 형사, 문화센터 강사 초희(이선빈)에게 집중한다. 이 중 이영과 형구, 초희는 이상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외지인이다. 김수혁 선생 부부는 서울에서 내려와 시골학교 교사를 하고 있고 형구는 강한 부산 사투리를 쓴다. 초희 역시 외지에서 온 사람이다. 외지인들은 처음부터 이상한 현상을 겪었거나 마을에 와서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된다. 마치 '위커맨'이나 '미드소마'와 같이 섬뜩한 면이 있지만 '사라진 시간'은 그런 노선도 취하지 않는다. '위커맨'이나 '미드소마'의 경우는 낯선 세계 속에 머물면서 오는 불안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미스터리와 두려움을 강조한다. '사라진 시간'이 낯선 세계의 이방인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전 영화와 다르다. 

4. 누구나 낯선 공간에 남게 되면 불안하다. 불안함을 이기게 하는 것은 '적응'이다. 적응은 낯섦을 이겨내고 공간과 사람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형구는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전혀 진전이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실체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집에 불이 나는 장면도 반투명 유리에 번쩍이는 스파크와 아른거리는 불꽃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사건의 중요한 열쇠가 될 마을회관 음주 장면 역시 반투명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표현될 뿐이었다. 처음부터 진실은 전혀 단서조차 없었으며 형구는 돌아갈 수 없다. 그저 이 안에서 불안한 자신을 떠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을 뿐이다. 형구도 그것을 받아들일 때 쯤 교재를 펴고 내일 수업할 것을 준비한다. 

5. 그렇다면 이 영화는 '순종'적 태도를 강요하는 영화일까?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현상이다. 가면을 쓰듯 자아를 바꾸고 변하는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꿈처럼 환경은 변한다. 실재 같았던 환경도 지나고 나니 꿈처럼 아련하다. 혹은 환경에 가로막혀 아련한 꿈을 꾼다. '호접몽'은 다소 판타지스런 이야기다. 우리는 호접몽같은 삶을 살고 있다. 발버둥치 듯 현실의 바깥을 꿈꾸거나 꿈처럼 아련한 시간을 지나 답답한 현실을 산다. 거대한 시간과 환경 앞에 개인은 순응할 뿐이다. '사라진 시간'은 나약한 인간의 실체를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6. 다시 사내는 길을 걷는다. 헝클어진 머리와 다듬지 못해 듬성듬성 난 수염. 남자는 잔뜩 스트레스를 받았고 지쳐있다. 번잡한 환경은 그가 꿈에서 걸은 길인지 현실에서 걷고 있는 길인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사내도 어떤 길인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묵묵히 길을 걸아갈 뿐이다. '길을 걷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났고 환경이 그리 주어졌으며 벗어날 수 없었기에 걸어간다. 돌아갈 수도 있고 멈춰설 수도 있지만 어쨌든 걷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사내는 잔뜩 지쳤음에도 길을 걷는다. 

7. 영화는 궁극적으로 형구의 이야기지만 김 선생님 부부의 이야기에 꽤 많은 시간을 할해한다. 결과적으로 극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지만 마치 시간의 연결순서처럼 '형구'의 전편으로 배치됐다. 이것은 사슬처럼 단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김 선생의 아내 이영은 다른 누군가였을 것이고 어떤 계기로 마을과 인연을 맺었다가 현재가 됐다. 그리고 형구를 거쳐 그 집에서 저녁식사에 초대된 초희 역시 다른 계기로 다른 삶을 갖게 될 것이다. 형구와 초희 사이에는 분명 어떤 이야기가 있(었거나 만들어질 예정이)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누군가 다른 우주로 옮겨지면 그 우주의 누군가가 다른 우주로 옮겨간다. 기현상은 그렇게 다른 우주를 연결하며 존속됐다. 

8. 결론: '사라진 시간'을 미스터리 스릴러로 포장한 것은 마케팅 기획단계에서 최고의 헛발질이다. 환경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삶을 존속하고 있으며 인간은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인간탐구의 영화다. 어느 지인의 표현대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나 데이빗 린치의 영화와 같은 범주에 놓을 영화를 미스터리 스릴러로 포장했으니 그것을 기대한 간 관객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이 글의 본문에서야 어거지로 해석하고 이어붙이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이상한 세계를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적어도 '사라진 시간'은 익숙한 시골마을을 세상에 없는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이 대목만큼은 '미드소마'가 보여준 '공포의 낯'과 맞먹는 신선함이다. '사라진 시간'은 올해 등장한 한국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영화다. 


추신1) 전지현과 박주영, 박지성이 이름으로 등장한 것은 약간의 조크였다고 쳐도 정해균 배우는 왜 본명으로 출연했는지 궁금하다. 

추신2)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Me and Me'다. '사라진 시간'보다는 신선하고 담백한 제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 스릴러로 마케팅 펼친 것은 홍보라인의 욕심이다. 이 정도면 정진영 감독이 다 불러서 일렬로 세워놓고 빠따쳐도 정당방위일 듯 싶다. 

추신3) '송로주'가 무슨 술일까 상상하다가 '송로버섯술'인가 싶었다(마침 영화 초반에도 버섯이 등장한다). 송로버섯으로 술을 담궜는데 저렇게 마실리가 없잖아!

TRACKBACK 0 AND COMMENT 0



1. 영화가 반드시 모든 계층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나이와 국적, 종교, 취미, 환경에 따라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다만 상업영화로 태어나 상업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상업영화들의 궁극적 과제는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보게 하고 그들 다수가 만족하고 나가서 또 다른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디즈니도 예외가 없다"는 표현을 쓸 게 아니라 디즈니야 말로 이 법칙을 가장 성실하게 실천하는 회사다. 저 옛날 디즈니 애니메이션부터 불특정 다수의 많은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 그들에게 최상의 과제였다. 

2.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편적 주제로 감동을 주는 것이 좋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은 10년간 쌓아온 MCU의 문화 트렌드를 집대성해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명량'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뤄 공감을 샀고 '기생충'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을 풍자해 공감을 얻었다. MCU는 그동안의 흥행성적과 영화 외적으로 쌓아온 인프라를 바탕으로 콘텐츠 자체를 최대 이슈로 만들었다. '명량'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위인을 영화화했다. '기생충'도 상위 0.1%가 아닌 현대인 다수의 보편적 불만을 녹여냈다. 그렇다면 '흥행의 귀재'인 디즈니와 픽사가 내놓은 새 애니메이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은 어떨까?

3. '온워드'는 하루 동안 일어나는 형제의 모험을 다루고 있다. 마법으로 죽은 아버지를 하루 동안 살릴려다 반쪽만 살려버려서 나머지 반쪽을 살리러 떠나는 얘기다. 여기에는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이 따라온다. 판타지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마지막으로 붙잡는 어드벤쳐 판타지이자 자신감없는 소년이 자신감을 찾는 이야기다. 대충 3개의 플롯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들은 대부분 '특수한 플롯'이다. 관객들 중에서 가족관계에 형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판타지 게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거나 대단히 자신감이 없는 경우에 공감을 살 수 있는 이야기다. 내 경우를 대입해보자. 

4. 나는 형이 있고 판타지 게임은 쿨하게 끊었다. 자신감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극복했다. '온워드'에 충분히 내 경험을 투영할 수 있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들은 그저 쿨하게 서로를 이해했고 한때 즐겨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자신감이 없었던 시절을 아는 사람은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분명 세계에는 이 이야기에 공감할 관객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공감 못하고 거리를 둘 관객도 많다. '온워드'는 이야기의 선이 명확하고 주제도 특수하다. 그래서 '공감하는 관객'과 '그냥 재밌게 볼 관객'이 아니라 '공감 못할 관객'이 발생해버린다. 이는 상업영화에게는 대단히 치명적인 문제다. 당장 내 경우만 해도 '에반게리온' 보기 싫은 이유가 이카리 신지 보다가 속 터져버려서다. 이 세상 어딘가에 이안(톰 홀랜드)이나 발리(크리스 프랫)같은 녀석들이 있을지 몰라도 굳이 스크린에서 그런 녀석들을 보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안이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도 조금 성급하다. 제목대로 이 이야기는 '단 하룻동안'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루만에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엘프도 마찬가지다). 

5. '온워드'는 이런 특수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편적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소외된 어머니 로렐(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과 만티코어(옥타비아 스펜서)가 자꾸 눈에 밟힌다. 이야기에서는 나름 고군분투 하지만 클라이막스에 이르렀을 때 두 여인의 성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로렐은 모험 후 달라진 아들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 할 뿐이고 만티코어는 정체성을 찾은 듯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타협에 불과했다. 로렐 역시 전사의 정체성을 찾은 보이지만 어머니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에 완전 다른 사람이 돼버린 이안이나 '한심하지 않은' 형이 돼버린 발리에 비하면 만티코어와 로렐의 성취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주인공'이라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현실과 이상의 타협에 있어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PC)을 그렇게 강조한 디즈니가 '온워드'에서는 어느 한 쪽은 신경 못 쓴 모양새다. 

6. 결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 "끝내준다"라며 볼 때가 있다. 그것은 '디즈니'라는 후광이 아니어도 작품 자체가 훌륭한 경우다. '온워드'는 최근 봤던 몇 개의 디즈니 작품 중에서 대단히 별로다. 만약 '디즈니'라는 이름값이 없었다면 조금 재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 한해서는 '디즈니/픽사'라는 이름값이 독이 됐다. 형제가 있는 나조차 공감이 안 될 정도다. 한국 신파멜로물에서 느꼈던 거부감을 '디즈니/픽사' 영화를 보며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추신) 그 와중에 간간히 재미있는 장면은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영화 최고의 씬스틸러는 귀네비어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1. 나는 이제 어디 가면 '젊은이(=청년)' 소리를 듣기 힘든 나이다. 최대한 양보해도 이제는 '청년'의 마지노선에 이르러있다(그래도 젊게 놀면 젊은게 아닌가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런 내가 감히 '청년'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면, 나는 내가 느낀 허무와 좌절, 고통이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IMF 이후 불완전하고 부실해진 사회구조에서, 좋은 시절 다 누린 꼰대들의 갑질을 견뎌내며 꾸역꾸역 살지만 장밋빛 미래는 어째 먼 일 같은 기분. 그 언저리에 지금 청년의 심정이 머물러 있지 않을까 싶다. 그저 게임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은 채 현재를 소비하는 것이 허무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FLEX'라는 말이 유행했고(이제 대충 지나간 유행어같지만), '시발비용'이라는 말은 직장인의 흔한 루틴이 됐다. 부모님은 "돈 모아라"라고 잔소리 하시지만 이 나라에서는 아무리 돈을 모아도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행복을 찾는 것이 삶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2. '#살아있다'는 분명 그들을 위한 영화였을 것이다. 오준우(유아인)에게서는 '엑시트'의 용남이(조정석)가 오버랩됐고 오준우와 김유빈(박신혜)의 치열한 생존투쟁은 '엑시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선가 조금 달라졌다. 그것은 투자자의 개입이나 블라인드 시사의 악평 같은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버텨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살아있다'는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집에 머물러있는 우리들 자신과 닮았다. 개봉 전만 해도 '현실을 못 따라갈 영화'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살아있다'는 현실보다 긴박하거나 드라마틱할 필요가 없는 영화다. 그저 현실의 거울이면 충분한 영화다. 

3. 현대인의 '고립'을 이야기하는 한국영화는 '김씨표류기'가 대표적이다. 천만인구가 북적거리는 서울 한 가운데 무인도처럼 혼자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만만한 코미디 영화처럼 보였던 것과 달리 꽤 애잔하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직장인이 느꼈을 외로움과 공허함에 공감하고 연대와 소통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김씨표류기'는 다른 영화와 달리 자신만의 이야기로 '도시인'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살아있다'는 '김씨표류기'에서 조금 더 진화한 이야기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메신저와 카페글로 세상과 소통하던 여자 김씨(정려원)와 달리 준우는 게임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세상과 소통한다. 세상이 뒤집어진 후 집에 머물면서 준우는 극심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SNS를 열어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과 소통했던 준우는 여자 김씨와 조금 다른 이유로 고독함을 느낀다. 

4. 그럼에도 준우와 유빈은 치열하게 이 아포칼립스를 살고 있다. '#살아남아야한다'는 해시태그처럼 이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지는 간절하다. 이것은 '엑시트'에서 용남과 의주(임윤아)를 떠올린다. 조금 다른 대목이라면 신체적 능력이 우월한 용남에 비하면 준우는 신체적 능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유빈보다 생존에 적합한 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장기인 드론 조종과 IT기기 조작 등을 활용해 꾸역꾸역 생존한다(준우처럼 드론을 조종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활용해 꾸역꾸역 생존을 이어간다. 유빈은 상대적으로 용남이나 의주에 가깝다. 과감하고 적합한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유빈의 취미는 등반이다. '#살아있다'의 주인공들은 '엑시트'의 주인공들보다 한결 평범하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생존의지'가 부여되자 처절할 정도로 삶을 갈구한다(심지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유독가스'보다 마구 달리는 '좀비'의 레벨이 더 세다). 

5. 때문에 이 영화는 우울한 청춘들의 생존의지를 드러내는 '엑시트'와 닮았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엑시트'와 다른 노선을 취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것은 코로나19의 영향이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이제 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지금은 좀비 아포칼립스보다 더 무서운 시대일지도 모른다. 좀비영화를 본 어느 의사는 "좀비 바이러스는 상대적으로 쉬운 전염병이다. 잠복기가 거의 없고 증상이 눈에 바로 보이기 때문에 즉각 통제가 가능하다. 감염 초기에 구역을 봉쇄하고 검역 조치를 취한다면 좀비 바이러스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 창궐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집에 머물면서 정부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그 정부가 믿을만한 정부일 때 얘기다. 

6. 나는 '#살아있다'를 이야기할 때 '김씨표류기'+'엑시트'라고 설명했다. 두 영화 모두 유쾌하고 애잔한 코미디 영화인 점을 감안하면 '#살아있다' 역시 유쾌한 영화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간혹 유쾌한 지점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대단히 진지하다. 오히려 좀비영화로써 긴장감도 상당한 수준이다. '부산행' 못지 않은 휴먼빌런도 등장하고 '아이엠어히어로' 못지 않은 슈퍼좀비도 등장한다. 좀비영화 팬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코미디 영화라기 보다는 좀비영화에 가깝다. '부산행'이 재미있었다면 꽤 만족하며 볼 것이다(물론 나는 뛰는 좀비보다 걷는 좀비가 '정통파'라고 믿는다). 

7. 결론: 마지막 장면을 두고 "뻔하다", "오글거린다", "계몽적이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이 영화가 코로나19 이후 새로 편집한 것이 아닌가 예상되는 지점도 마지막에 있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 불만은 없다. 이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영화가 현재의 관객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메시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시국이 만든 영화지만 시국 안에서 이 영화는 최상의 결과물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영화는 코로나19를 기억할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추신) 공복에 관람을 자제할 것을 권고한다. 짜파구리도 나오고 하는데 하이라이트는 진라면 매운맛이다. 

TRACKBACK 0 AND COMMENT 4
  1. BlogIcon 자스민차향기조아 2020.06.16 10:1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요즘 광고하는 영화 중에 그래도 제일 땡기는 영화가 이거였어요. 엑시트와 결이 비슷한가요? 엑시트보다는 덜 유치하면 정말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2. 김송옥 2020.06.17 12:19 address edit/delete reply

    글 잘보고
    갑니다^^
    저희 블로그도
    들러주세요^^
    오늘하루도
    활기찬 하루
    되세요^^

  3. 혹시 휴먼빌런이.... 2020.06.21 21:11 address edit/delete reply

    혹시 휴먼빌런이 이현욱씨인가요?




1. '동성애'와 '기독교'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가? 이 물음은 "1 더하기 1은 무엇인가?" 만큼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두 단어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그 어떤 단어와도 평등한 위치에 선 적이 없다. 권력의 관계에서 기독교는 '예수'라는 위치만큼 절대자의 위치에서 다른 종교와 민족을 억압하고 살육했다. 이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하나님이라는 빽'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어느 나라, 어느 집단에서건 교회의 권력은 막강하다(하나님이 진짜로 교회의 빽인지는 하나님 입장도 좀 들어보고 싶다). 때문에 교회가 동성애자(=성소수자)를 비난하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이 아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억압이다. 

2.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은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키워드를 마주보게 한다. 권력의 상하관계가 명확한 두 키워드가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지속될수록 두 키워드는 실제 뜻과 무관한 많은 것들을 내포하기 시작한다. '동성애'(=10대, 자유분방, 진보적 사고, 타인에 대한 사랑, 평등), '기독교'(=어른. 복종, 보수적 사고, 교리, 상하관계)로 나뉜다. 이야기는 기독교 앞에 선 동성애에게도 많은 권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여느 영화였다면 이런 구조에서 폭력과 맹신이 난무하는 극단적인 서스펜스 스릴러도 치닫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여기에 '폭력'은 개입하지 않는다. 십자군과 같은 폭력을 휘두르는 강압적인 교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선생님이 아이들을 훈육할 뿐이다. 훈육은 곧 정서적 폭력임이 고백된다. 그리고 정서적 폭력은 무엇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3. '동성애'라는 단어에는 '사랑 愛'라는 한자가 들어간다. 이것은 '사람하는 감정'의 한 종류라는 의미다. 영어로 풀어쓸 때 'Love'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겠지만 '하나님의 약속'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누군가를 사랑한 죄'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학교와 기성세대들이 가르치는 것은 타인과 자기 자신을 혐오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이다. 어른들은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존재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선망해왔다(돈을 선망하더라도 그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네모난 종이에 부여한 인위적 가치를 선망한 것이다). 아이들은 사탕이나 고양이, 친구를 선망한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만화캐릭터나 아이돌이 허상인지 실체인지 묻는다면, 최소한 하나님보다는 실체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의 방향을 무형의 가치에 향하게 하는 것은 감정을 희석시키기에 좋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듯,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 희석되기 마련이다. 

4. 카메론(클로이 모레츠)와 친구들은 어른들의 가치를 거부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로드무비 속 청춘들을 연상시킨다. 대륙을 가르는 곧게 뻗은 길 위에서 아이들은 이야기를 써내려갈 것이다. 이것은 마치 '델마와 루이스'나 '아이다호' 같은 길 위의 영화를 떠올린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두근거린다. 길 위에서 이야기를 써내려간 청춘들은, 그렇게 길 위로 올라섰구나. 이것은 마치 역사적인 청춘영화와 로드무비의 프리퀄과 같다. 길은 여행과 설렘을 담고 있다. 그런 길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억압과 피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카메론 포스트와 친구들은 길 위에 설 자격이 충분했다. 

5.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은 드라마가 강렬한 작품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드라마가 강렬할만한 배경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영화는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카메론 포스트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카메론 포스트에게 집중해야 한다. 영화 역시 카메론 포스트의 내면을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관객은 카메론 포스트를 바라봐야 한다. 친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카메라가 그 사람을 잡아줘도 관객은 이야기를 듣는 카메론 포스트에 집중해야 한다. 학교 전체를 뒤엎을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건을 접한 카메론 포스트에게 집중해야 한다. 관객의 눈은 곧 카메론 포스트의 눈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드라마는 조금 짙어지고 감정도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 중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은 카메론 포스트 밖에 없다. 

6. 결론: 문명사회에서는 '약하다'는 것도 때로 권력이 된다. 약하기 때문에 여론을 자기 편으로 가져오기 더 쉽다. 이 영화에서 학생들과 목사의 관계도 그렇다. 표면적으로 훈육의 위치에 있지만 목사는 학생들보다 약자다. 그리고 학생들 역시 무조건적 약자의 위치에 두지 않는다. 영화는 하나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교회'가 절대적 위치에 있는 것을 부정한다.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기독교적 이해를 해보자면) 하나님은 절대적이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실상 '동성애'와 '하나님'이 합의를 본 이야기다. 거기에 굳이 교회가 낄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과 타인을 사랑하는 청춘들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가장 잘 실천한 인간들이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1. '언더워터'에 대해 정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이고 심해에서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정보의 전부다. 대뜸 시작부터 황량한 복도가 보이고 꽤 외로워 보이는 노라(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등장한다. 노라의 나레이션이 들려오는데 뭔소린가 싶은 내용이다. 외롭고 무기력하다는 이야기같다. 첫 장면만 해도 이 영화는 심해에 고립된 한 개인의 서사인 줄 알았다. 해양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아트무비가 기대됐다. 어느 방향이건 나는 영화에게 뒤통수 맞는 걸 좋아한다. 그것은 영화에게 유쾌하게 패배하는 감정이며 "너 이녀석, 날 속였어"라는 기특함의 표현이다. 

2. 갑자기 복도가 터지고 외로워보였던 노라는 동료들을 깨우며 도망친다. 혼자만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친구가 하나 더 있다. 그리고 꾸역꾸역 동료가 모이더니 흔한 해양스릴러가 돼버린다. 다행히 이 영화는 간간히 힙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래 뭐 밑밥 깔고 긴장감 넘치는 해양스릴러가 되려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영화는 해양스릴러의 전형에 갇혀버린다. 특출나게 쫄깃하지도 않고 힙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한 영화가 돼버렸다. 처음부터 기대감을 떨어뜨린다면 다행이겠지만 신선해질 여지가 많았음에도 결국 평범해진 영화를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3. '언더워터'에게는 몇 가지 길이 있었다. 먼저 노라의 서사를 중심으로 고립된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래비티'나 '더 문'이 취한 방식으로 인물을 최소화하면서 개인의 서사에 집중한다. 여기에 외적 요인이 추가되면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라의 깨달음과 성장을 다룰 수 있다. '언더워터'가 가야 할 첫 번째 레퍼런스는 '그래비티'였다. 두 번째는 인물의 서사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건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언더워터'는 시작부터 심해에 가 있는 상태다. 사실상 이 영화는 심해에서 시작해 심해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맥락없이 사건이 터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클로버필드'가 이와 같은 방식을 취했고 '큐브'도 초반에는 이렇게 전개된다('큐브'는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의 서사를 드러낸다). '언더워터'가 가야 할 두 번째 레퍼런스는 '클로버필드'다. 

4. '언더워터'는 언급한 두 레퍼런스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러다 결국 어떤 방향도 선택하지 못하고 '레비아탄'이 돼버린다. 추측해보건대 감독은 분명 힙한 해양스릴러를 원했을테지만 제작사에서 해양스릴러의 클리셰가 보여지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괴물을 다 보여주고, 최소한의 사람은 살며, 스펙터클이 있고, 끝내 미스테리로 남아, 속편의 가능성을 남기는 영화. 그런 걸 제작사가 원한 모양이다. 매력적인 방향을 설정해두고도 가지 못한 영화라면 당연히 그런 아쉬움이 생긴다. 특히 괴물을 온전히 다 보여주는 지점에서 확실히 느꼈다. 이 정도로 감추고 시작한 영화라면 분명 괴물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클로버필드'가 그랬던 것처럼 괴물의 존재를 최대한 감추고 공간을 한정시킨 뒤 스릴러를 펼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괴물이 온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이거 완전 '퍼시픽림'이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5. 마지막 장면도 '사족'에 가까운 장면이다. 시작부터 그렇게 밀폐시켜놓고 대뜸 마지막에 환기시켜버리는 것은 김이 빠지게 한다. 이럴 경우에는 나가면 어떻게 되는건지 모르게 하고 끝내는 것이 좋다. 이것은 '큐브'와 '에이리언2'가 택한 방식으로, '에이리언2'의 경우 살아남은 존재들의 향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3편을 만들 계기를 마련했다. 공간 안에서 생략한 채 끝을 냈다면 속편으로 연결하기도 쉽고 관객도 미스테리한 기분을 끝까지 안은 채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6. 결론: 태어날 때 굉장히 비범한 아이였는데 자라는 과정에서 평범해졌다면 과정에서 문제를 찾게 된다. 이 경우는 대부분 평범함을 원하는 주변 사람과 획일적인 교육과정, 조언의 부재가 원인이 된다. '언더워터'는 분명 특별하게 태어난 아이다. 꽤 매력적이고 유니크한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등하다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돼버렸다. 이 영화, 좀 아깝다. 

TRACKBACK 0 AND COMMENT 1
  1. BlogIcon 언더워터 2020.06.04 18:11 address edit/delete reply

    1boon.daum.net에서, 미리 예측해보는 2020년 망작들에 망작으로 예측된 영화인데 저는 흥행할것으로 예측했었지요.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에 재미있는 형이 있었다. 키도 훤칠하고 늘씬한 몸매를 가진 그럭저럭 미남인 형이었다. 이 형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고 운동도 잘한다. 그리고 같은 아재개그도 찰지고 맛있게 살렸다. 낯가림이 없어서 남녀노소 누구와도 친하게 지냈고 성격도 활달해 학교의 절반 이상은 이 형을 알 정도였다. 거의 학교에서 '스타'에 가까운 형이었다. 그 형은 내가 1학년 때 4학년이었으니 오래 볼 일은 없었다. 공부도 별로 안 하는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도 졸업은 칼 같이 했다. 졸업한 후 들려온 소식은 평범한 회사에 다니면서 여전히 유쾌하게 산다는 것 정도였다. 결혼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만약 결혼을 했다면 형수님도 대단히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형은 말 그대로 '잘 노는 형'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언제 어느 시기고 '놀 줄 아는 형'을 만나게 된다. 어릴 때 만났을 수 있지만 주로 기억하는 '놀 줄 아는 형'은 고등학생 이후에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놀 줄 아는 형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배우 조정석 얘기다. 1980년생인 조정석은 공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했다. 데뷔작은 2004년 연극 '호두까기 인형'이다. 이후 오랫동안 연극과 뮤지컬을 하던 조정석은 2011년부터 드라마와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건축학개론'의 그 유명한 '납득이'부터다. 조정석은 아주 전형적으로 무대에서 내공을 쌓고 카메라 앞에서 만개시킨 '천생배우'의 길을 걸었다. 

조정석의 커리어는 무대와 TV를 거쳐 스크린으로 향하는, 좋은 배우가 갈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길이다. 그런 길을 걸어서 성공한 배우는 아주 많지만 조정석은 조금 특별해보인다. 우선 그는 잡기에 능하다. 기타와 노래, 춤, 운동 등 여러 가지를 잘한다(심지어 영어도 잘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도 등장하지만 배우는 다양한 배역을 따내기 위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것이 좋다. 조정석은 바로 그 '이것저것'을 잘한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엑시트'에서는 "저게 가능해?" 싶은 철봉동작도 척척 해낸다. 그리고 작가의 대본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애드립을 하는데 그게 반응이 아주 좋다. 애드립을 잘한다는 점이 유쾌한 재치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이쯤 되면 그는 박철민이나 김수로, 유해진 등 '천생 광대'들과 계보를 같이 한다. 그러나 조정석은 이전의 광대들과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잘생겼다. 

조정석은 잘생겼다. 주관적 견해기도 하지만 객관적 데이터로도 그는 '주연감'의 외모다. 우리가 아는 잘생긴 배우들을 몇 명 떠올려보자. 정우성, 원빈, 조인성, 장동건, 현빈 등. 이 잘생긴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뽐내며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때로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기를 하지 않는 자리에서 이들은 중후하고 점잖은 배우가 된다. 내보일 끼가 많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조정석은 잘생겼으면서도(조정석을 정우성, 현빈, 원빈, 장동건, 조인성의 외모와 나란히 놓을 수 있는지 코멘트를 하진 않겠다) 끼를 마구 내보인다. 영화 '형'의 비하인드에서는 무려 아이돌인 EXO 도경수를 압도하는 잔망스러움도 보여준다. "얼굴을 저렇게 써도 되나"라는 걱정도 들지만 저렇게 쓰기 때문에 조정석은 더 특별해진다. 

그렇다면 이 배우는 그저 놀 줄 아는 배우이기만 할까? 앞서 말한대로 그는 무대에서 탄탄히 내공을 쌓고 온 배우다. 당연히 연기도 잘한다. '관상'에서의 절절함도 있고 '마약왕'에서의 카리스마도 있다. '뺑반'의 나쁜놈도 있고 '엑시트'의 용남이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학개론'의 납득이도 있고 '더킹 투하츠'의 은시경도 있다(난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더킹 투하츠'의 은시경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런거 다 가지고 있으면서 '헤드윅'의 헤드윅도 있다. 조정석은 잘생긴 데다 아무 역할을 던져줘도 액체괴물처럼 달라붙는다. MCU의 토르가 브루스 배너만큼 똑똑하다면 이런 느낌일까? 잘생겼는데 아무 역할이나 맡겨도 된다는 점은 배우로서 '역대급 사기캐'라고 봐도 무방하다(사생활면에서 그가 자상한 남자 사기캐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겠다. 여기는 배우로서 이야기하는 자리다). 

심지어 작품 선구안도 괜찮은 편이다. 드라마의 경우 '더킹 투하츠'부터 '최고다 이순신', '오 나의 귀신님', '질투의 화신',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주연을 맡을 경우 타율이 좋은 편이다. 영화는 종종 말아먹는 영화('특종:량첸살인기', '시간이탈자' 등)에 출연하는 편이긴 하지만 '관상'과 '엑시트'라는 걸출한 대작도 가지고 있다. 다만 괜찮은 타율을 가지고도 천만영화가 없는 걸 보니 이러다 커리어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되는 건 아닌가 우려도 된다. '다 가진 남자' 조정석의 유일한 과제라면 '천만영화' 하나 커리어에 올리는 것 정도다. 천만 문턱 앞에서 주저 앉은 '관상'과 '엑시트'를 생각하면 더 아쉽다. 

조정석은 범상치 않은 배우다. 박철민, 유해진의 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인공급으로 잘생겼다. 얼굴 쓰는데 두려움이 없어서 아무 역할이나 갖다줘도 다 해낸다. 멜로도 되고 나쁜 놈도 되고 액션도 되고 변태도 된다. 동시대 배우 중에 역대급 사기캐인 이 배우는 이제 겨우 40살이다. 아직도 쌓아야 할 커리어가 아주 많다. 조정석은 무대와 스크린, TV에서 충분히 오래 볼 수 있는 배우다. 그리고 지금까지 별의 별 역할로 나온만큼 앞으로도 별의 별 역할로 나올 것이다. 놀 줄 아는 형하고 놀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즐겁다. 조정석을 보고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든다. 

TRACKBACK 0 AND COMMENT 0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218)
일상생활 (137)
창작의 공간 (11)
영화이야기 (959)
음악이야기 (41)
야구이야기 (21)
포토샵 장난질 (3)
Entertainment (31)
익스트림알콜 (9)
본의 아니게 떠난.. (4)

CALENDAR

«   2020/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