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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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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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20.05.06
    잡담 200506 - 코로나19와 국제영화제
  2. 2019.10.29
    '심판' 초간단 리뷰
  3. 2019.10.17
    '야구소녀' 초간단 리뷰
  4. 2019.10.16
    [약간스포]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초간단 리뷰
  5. 2019.10.07
    [스포주의] '두 교황' - 세상의 모든 아이러니
  6. 2019.09.25
    [강력스포] '아워바디' 간단 리뷰 (1)
  7. 2018.10.26
    영화 속 의회의 역할
  8. 2018.10.16
    '클라이맥스' 초간단 리뷰
  9. 2018.10.11
    영화 '군대' 초간단 리뷰
  10. 2018.10.10
    '군산:거위를 노래하다' 초간단 리뷰 (1)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매년 국내 3대 국제영화제(부산, 부천, 전주) 중 최소 1개 이상은 무조건 갔습니다. 부산에서는 두 번 정도 '내부자'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나름대로는 우리나라 영화제의 생리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아는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최근 우리나라 국제영화제는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보입니다. 관객의 관심과 영화제의 지향점이 다르다던지, 효율적인 운영을 할 돈이 없다던지. 뭐 그런 문제들이죠. 

올해 전주영화제가 코로나19 영향으로 무관객 영화제가 된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메가박스 객사점이 영업을 종료하면서 전주영화제 상영관이 부족할 상황이었거든요. 4월말에 같은 자리에 씨네큐 전주영화의거리점이 문을 연게 영화제와 어떻게 연동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지만(첫 개관행사를 전주국제영화제로 할 수도 있었음) 메가박스 객사가 있을 때도 전주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만약 씨네큐가 예정대로 문을 열지 못했다거나 씨네큐와 협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면 올해 전주영화제는 더 정신없어질 뻔 했죠. 

부천영화제는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김봉석 전 프로께서 언급하신 여러 사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도 이 자리에서 차마 언급할 수 없는 여러 이슈들이 있었죠. 

영화제뿐 아니라 어딜 가도 20년 넘게 자리를 잡은 기관이라면 고인물과 적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히 영화판은 정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자리가 극히 제한적이라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위원장 같은 자리는 여러 사람이 탐내는 자리죠. 사무국장을 포함한 사무국 주요 요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의 경우 상근직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고 그만큼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약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3대 국제영화제는 여러 고인물과 적폐가 어우러져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코로나19로 영화제들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죠. 외국의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사태가 개선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전보다 관(官)이 개입하는 경우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관의 입김은 세죠. 게다가 영화제에 얽힌 이권다툼도 심각합니다(이것은 김봉석 전 프로님 말씀 참조). 때문에 코로나19는 영화제의 내적 쇄신을 꾀할 계기가 될 수 있겠군요. 

구체적인 대안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변해버린 관람문화를 수용하고 넷플릭스를 포함해 더 늘어나는 글로벌 OTT 플랫폼과도 상생의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지역 축제 방식에서 벗어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를 수 있는 행사가 돼야겠죠. 더 자세한 건 관계자들이 논의해서 답을 내놓을거라 생각됩니다. 

전주가 무관객 영화제를 하기로 했고 부천도 규모가 대폭 축소된다고 합니다. 개인적 생각은 이참에 부산도 조정을 하고 대규모 쇄신에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이전부터 부산국제영화제는 쇄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부산시장에 의한 쇄신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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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티 아킨'이라는 감독은 이름만 몇 번 들었다.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럽영화보다는 미국이나 한국, 일본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다. "유럽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생각한 이유는 사실 프랑스 영화 때문이다. 모든 프랑스 영화가 그렇지 않지만 어떤 프랑스 영화의 경우 등장인물들이 시끄럽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에 그걸 지켜보는 것이 괴롭다. 아직 그 괴로움은 즐길 준비가 안됐다. 파티 아킨은 독일사람이다. 나는 몇 편의 독일영화를 알고 있고 그 영화들을 좋아한다. 과거 빔 벤더스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을 좋아하고 최근에는 마렌 아데 감독의 '토니 에드만'도 재미있게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 아킨은 나에게 낯선 감독이다. 

2. 파티 아킨의 영화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파티 아킨 영화를 정말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한다. 거친 영화들에 호감을 드러낸 적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거친 영화도 거친 영화 나름이다. 파티 아킨의 영화는 국내에 소개된 사례도 적을 뿐더러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거친 영화'가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다. 그런데 올해는 뭐가 씌였는지 파티 아킨의 영화를 무려 두 편이나 봤다. 부천에서 본 '골든글러브'와 최근 개봉한 '심판'이다('심판'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인더페이드'라는 원제로 소개됐다). 두 편을 다 보고 파티 아킨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면 "얘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파티 아킨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겠다. 

3. '심판'은 의문의 폭탄테러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괴로워하다 법정싸움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테러가 일어라는 일련의 정치적 상황보다 테러로 가족을 잃고 괴로워하는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카티아(다이앤 크루거)가 괴로워하다 무너지고 법정에 이르는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영화는 아무런 자비도 없이 현미경을 들이대고 카티아의 행동과 내면을 관찰한다. 파티 아킨은 '골든글러브'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 혼카(요나스 다슬러) 관찰하면서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보듯 그의 내면 깊숙이 들어간다. 살인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일은 관객에게도 결코 쉽지 않다. 관객들은 '조커'를 보면서 미쳐가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고통을 느낀 바 있다. '골든글러브'는 감히 말하건데 '조커'보다 더 괴로운 영화다. 정상적인 사고로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을 들여다보고 그와 동일시 되는 과정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4. 가족을 잃은 여인의 슬픔과 동일시 되는 일도 괴롭다. 특히 아이를 잃은 어미의 상실감은 감히 감당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결코 감정적이지 않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슬픔은 한국영화 '생일' 속 전도연의 연기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더 괴롭다. 카티아의 내면은 단순한 슬픔보다 더 세밀하고 복잡하다. 거기에는 슬픔뿐 아니라 분노와 몰락 등 여러가지가 따른다. 이것은 표정이나 말투가 아닌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카티아가 사건 이후 하는 여러 행동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여기에 '상실'과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가져다 대면 모든 것이 납득이 간다. '생일'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사람은 극단적인 사건 앞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 '생일'과 함께 '심판'도 그것을 과감하게 표현한다. 급격한 슬픔 앞에서는 비이성적인 것이 리얼리즘이다. 

5. 그리고 영화 내내 보이던 비이성적인 것들은 마지막 행동에서 완성된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반전도 아니고 카티아에게 주어진 몇 개의 선택지 중 하나다(굳이 설명하자면 사이다에 고구마 말아먹는 기분이다). 파티 아킨은 극단적인 리얼리즘 앞에 어떤 카타르시스도 선사하지 않는다. 그는 '골든글러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쇄살인마 혼카는 영화 내내 답답하고 불쾌한 존재다. 그의 행동과 말은 '영화 속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을 법한 카타르시스가 완벽하게 거세된 체 불쾌한 리얼리티만 있다(사실 이 정도로 리얼한 영화에서 연쇄살인범에게 카타르시스를 부여한다면 정말 진지하게 감독이 싸이코패스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심판'은 '골든글러브'와 결이 다른 영화다. '골든글러브'에서 카타르시스를 거세한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복수극의 외피를 입은 '심판'에서 카타르시스를 거세한 것은 관객들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악몽을 선사하게 한다. '심판'은 '골든글러브'와 마찬가지로(혹은 다른 맥락으로) 괴로운 영화다.

6. 이쯤 되니 파티 아킨에 대해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진다. 그는 극적 장치를 배제한 극단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감독이며 자신의 영화 속 캐릭터에게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는 사람인가. 올해 본 두 작품을 통해 파티 아킨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거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연출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더 냉정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관객의 상상력이나 감정을 완전 차단하고 이야기만 마주하게 한다. 관객은 혼카나 카티아에게 분노나 연민을 가질 수 없다. 그저 이런 사람이 있었고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 이후에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메시지를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한편으로 파티 아킨의 영화는 꽤 친절한 영화일 수 있다. 다만 이야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은 관객에게 파티 아킨의 영화는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다. 

7. 결론: 파티 아킨의 영화가 궁금하긴 하다. 그런데 솔직히 더 마주할 자신이 없다. 관객의 입장에서 전혀 흥분하지 않고 이성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과정이 몹시 괴롭다. 영화 앞에서 냉정해지기 위해 가져야 할 고행이라고 하기에는 이 햇살 좋은 날에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 의문이다. 파티 아킨의 영화는 자신 있는 사람만 덤비는 게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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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년 전, 나는 공모전에 낼 목적으로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시나리오는 기획단계에서 완성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실패하는 이야기'라고 불렀다. 몇 년 전 배우 심은경과 리듬체조선수 손연재가 SNS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고 구상한 이야기다. 당시는 구정 연휴 중이었는데 심은경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고 손연재는 러시아에서 훈련 중이었다. 두 10대소녀는 당시 "명절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식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 10대 소녀의 대화라기 보다는 해탈한 아저씨들의 대화에 가까웠다. 그때 나는 '실패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그 이야기를 구상하기 이전에 '드림하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꿈을 가진 청소년들이 노력해서 꿈을 이루는 이야기다. 

2. 나는 '드림하이'가 잔인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이루고 싶은 목표를 가진 것만으로도 힘들고 꿈을 향한 관문은 좁다. 모두가 꿈을 꾼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을 꾸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 그때의 좌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느낀 좌절감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을 가졌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가로 막혀 주저 앉았다(나는 지금도 '내가 만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구상한 이야기는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극복하는지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다시 강조하지만 그 이야기는 심은경과 손연재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픽션이다). 내가 만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 이야기를 꺼내서 써보고 싶다. 

3. 최윤태 감독의 '야구소녀' 시놉시스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드라마 '드림하이'와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 감정은 영화 초반부까지도 이어졌다. 저렇게 간절한 주수인(이주영)의 꿈이 부러졌을 때 누가 저 아이를 위로해줄지 걱정스러웠다.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간 후, 나는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야구소녀'는 내가 쓰고자 했던 '실패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드림하이'처럼 '하면 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꿈을 꾸고 있고 꿈을 꾼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실에 타협한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고 어울려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다. 나름 야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비정한 현실이 눈 앞에 보였지만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나도 모르게 주수인을 응원하게 된다. 

4. '야구소녀'가 갖는 최고의 매력은 주수인과 함께 주변 인물들에게도 합리적인 이유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주수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코치 최진태(이준혁)와 주수인의 엄마(염혜란), 아빠(송영규), 주수인의 친구 등. 심지어 주수인에게 제안을 건넨 구단 관계자까지, 모든 인물들은 그렇게 살고 그런 행동을 하는데 이유가 있다. 영화는 나름 그 이유들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때문에 균형도 잘 잡혀있고, 주수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소위 말하는 '발암캐'도 없다. 영화가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아빠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혼자 버티기도 힘든 아이야, 우리가 도와줘야 하잖아. 부모니깐 도와줘야 하잖아". 한 아이가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영화에서처럼 남자들이 득실대는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는 여자선수가 되는 일도 그렇고 그에 못지 않게 거친 꿈들도 마찬가지다. 

5. 이것은 주수인이 야구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에서도 드러난다. 주수인은 "직구가 빠른 선수가 프로무대에 간다"는 코치와 야구선배들의 말 때문에 직구를 강화하려고 연습한다. 때문에 어깨는 아작나고 구속은 다른 남자선수들에 비해 뒤쳐진다. 최코치는 주수인에게 '너클볼'을 권한다. 선수들이 많이 구사하지 않는 공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이전에 나온 영화들이었다면 주수인이 기적적으로 150km/h가 넘는 직구를 꽂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테지만 영화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프로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다. '무조건 노력하면 된다'는 말 대신 합리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은 꿈을 가진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6. 때문에 이 영화는 주수인이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이자 모두가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프로 입단테스트를 받는 주수인을 응원하는 다른 선수들이나 주수인을 보고 야구선수를 꿈꾸는 여고생처럼 이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꽤 등장한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주수인을 가로막았던 최코치나 엄마도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이것은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 중 한 단계 진보한 주제다. 한 사람의 꿈에 대해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 꿈에 함께 하는 사람들까지 살핀다. 극 중에서도 주수인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7. 이 영화의 제목이나 시놉시스, 혹은 이주영 배우의 발언(구체적으로 언급은 안하겠다)때문에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규정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여느 여성영화처럼 '나쁘고 무능한 발암캐릭의 남자'(주수인의 아버지가 여기에 근접할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 중 '악역에 근접한 순서'로 따지면 그는 한참 뒤에 있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앞서 얘기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행동을 하고 거기에 대해 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시킨다. 이 영화에 나쁜 사람은 없다. 편견에 휩싸인 사람과 자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있다. 그 편견을 깨고 자기 일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주수인'이라는 캐릭터에게 주어진 일이며 이 캐릭터는 그 일을 성실하게 해낸다. 

8. 결론: '야구소녀'는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스포츠영화의 정통성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관객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엄마나 코치, 구단관계자 등 캐릭터들의 행동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다"라던지 "저런 사람이 실제로 있어"라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편견에 쌓여있던 사람을 변화시킨 것은 주수인의 도전이었으며 그 도전에 힘을 실어주고 길을 잡아준 사람은 최코치다. 참 잘 쓴 이야기이며 잘 만든 캐릭터다. 그리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연출했다. '야구소녀'는 이야기가 튼튼한, 훌륭한 상업영화다. 


추신) GV때 물어보고 싶었는데 못 물어본 질문: 영화에서 야구팀 감독의 주수인의 장점에 대해 "공의 회전이 좋다"고 말한다. 이 힌트에서 최코치는 "너클볼을 개발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공의 회전이 좋다는 것은 직구의 경우 구속을 끝까지 유지시킬 수 있게 하고 변화구는 낙차를 크게 만든다. 반면 너클볼은 회전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공이다. 공을 긁는 변화구와 공을 밀어내는 너클볼은 매커니즘도 다르다. 영화에서는 '회전이 좋다'에서 '너클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이 흐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놓친 장면이 있는지, 혹은 야구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개봉하면 또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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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작가다. 혹자들은 그에 대해 '가족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의 영화 중 '가족'이 화두에 오른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더 정확히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기억을 살펴보면 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영화에는 아버지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그러나 유사가족도 있고 유사 아버지도 있다. '가족'은 한 작가의 세계관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화두가 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가지고 있거나 가족을 가진 적이 있었다. 가족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고, 때문에 현재 가족이 없는 사람도 가족을 그리워한다. 거의 모든 영화의 주인공은 동물적 본성을 가진 인간이다.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가족은 있다. 

2. 그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가족영화'라고 단정짓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세상 거의 모든 영화는 사실상 '가족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던져두고 시작했으니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아주 노골적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그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 영화에서 익숙하게 본 '아빠와 아들', '아빠와 딸'이 아닌 '엄마와 딸'이다. 그의 최근 영화들에 아버지가 중심이 된 적은 있었지만 늘 엄마는 있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유사 엄마'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어느 가족'에도 '엄마와 아들'의 구조는 존재했다. 그런데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의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직접적인 '엄마와 딸'이 등장한다. 여기서 아빠, 남편, 아들은 완벽한 조연으로 빠져있다. 차라리 이 영화는 '여성영화'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다. 

3. 이야기는 간단하다. 왕년의 슈퍼스타였던 여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는 최근 낸 회고록 때문에 주변인들과 갈등이 생긴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매니저 뤼크(알랑 리볼트)는 회고록 때문에 서운하고 딸 뤼미에르(줄리엣 비노쉬)는 어릴 적 기억과 다른 서술 때문에 화가 나있다. 파비안느는 주변인의 '깊은 빡침'에도 아랑곳 않고 "내 회고록이다"라며 자신의 기억이 담긴 책을 내놓는다. 그러다 '빡침'을 못 견디고 떠난 뤼크 때문에 뤼미에르는 졸지에 엄마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다. 파비안느는 새 작품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 라이징 스타 마농(마농 끌라벨)의 연기가 못마땅하고 자신이 조연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배우로서 과거의 영광을 지나 새로운 역할에 선 자신이 두렵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엄마와 딸은 화해를 하고 파비안느는 작품을 무사히 마칠 수 있냐는데 있다. 

4.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기억에 대한 담론, 모녀간의 화해, 전설적인 배우에 대한 존경 등 몇 가지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특히 영화 속 영화 형태로 등장하는 파비안느와 마농의 영화는 영화 바깥 파비안느와 뤼미에르의 관계에 대입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다. 이것은 흡사 마농의 캐릭터를 빌린 뤼미에르가 엄마(이자 누군가의 딸이었던) 파비안느를 이해하고 결국 화해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파비안느와 뤼미에르, 마농 등으로 대변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영화가 남기고자 하는 단 하나가 드러난다. 바로 '파비안느'다. 이것은 가족과 관계에 대한 영화가 아닌 한 개인에 관한 영화다. 

5. 파비안느는 한때 세자르상까지 수상했던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다. 흡사 까뜨린느 드뇌브 본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녀는 '여배우'로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회고록에도 드러났지만 그럴수록 딸, 남편, 매니저와의 관계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파비안느에게 주어진 또 다른 역할, 딸 아이의 엄마였으며 남편의 아내였고 매니저의 오랜 친구다. 사람이 살면서 맺은 여러 관계는 개인의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근거가 된다. 오래전 나는 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학생증을 안 가져온 적이 있다. 교수님은 주변의 다른 학생(친구)에게 "얘가 얘 맞냐"고 물었고 친구들이 맞다고 한 뒤에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과 관계가 근거가 된 셈이다. 

6.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파비안느가 낙엽이 내린 파리의 거리를 홀로 개와 산책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중간에 등장한 장면이며 마치 성룡영화의 NG장면처럼 등장한다. 이는 '영화 바깥의 장면'임을 보여준다. 혼자 거리를 걷는 모습은 이 영화가 '관계' 그 자체에 대한 영화가 아닌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파비안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촬영현장, 다시 말해 영화 바깥의 장면이다. 이때의 카메라 속 인물은 파비안느가 아닌 까뜨린느 드뇌브인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영화가 아닌 한 개인에 대한 영화이며 그 개인은 대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헌정영화다. 

7. 이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정의내려보자. 그는 가족영화만 만들던 사람이 아니다. 초기작인 '원더풀 라이프'와 '환상의 빛'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세번째 살인'에서 '가족'이라는 화두는 감춰져있다. '공기인형'은 고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아무도 모른다'는 고전적인 가족의 관계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따뜻하고 어떤 영화는 비정할 정도로 차갑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는 고전문학처럼 진하고 견고하다. 때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가족영화'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삶 가운데서 등장하며 때문에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이 사람은 삶을 들여다 보는 '이야기꾼'이다. 

8. 결론: 제목에 '진실'이 들어가고 영어제목도 'The Truth'라고 하니 꽤 무거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전혀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영화지만 편하게 볼 수 있고 꽤 귀여운 구석도 있다. 특히 그의 영화에서 늘 그랬지만 아이들은 참 귀엽고 여러 가지를 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꼬마아이는 정말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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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안 어울리는 것 둘이 만나서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은 언제봐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내가 형사버디무비를 좋아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성격도 다르고 이것저것 다 다른 두 캐릭터가 만나서 조화를 맞춰가고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은 큰 재미를 준다. 나는 한 번도 "그게 왜 재미있지?"라는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다. 그건 내게 "초콜렛이 왜 맛있지?"라는 질문과 같았다. 그건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고민의 방향조차 찾기 힘든 일이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화 '두 교황'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아이러니의 근간을 쫓는다. 그것은 꽤 종교적인 지점에 있었으며 신과 인간 모두에게로 범위를 확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삶 그 자체가 거대한 아이러니일 수 있다. 

'두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조나단 프라이스)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안소니 홉킨스)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은 성향과 국적, 성격, 취미, 기호 등 여러가지가 다 다르다. 세계적인 명망을 갖춘 두 종교인의 대화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깨달음과 지혜 등이다. 보통 이것은 꽤 신성하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돼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평범한 영화였다면 두 교황의 이야기를 그렇게 다뤘을 것이다. 그러나 '두 교황'은 이것을 보기 좋게 배신하며 시작한다. 오프닝 크레딧부터 '베사메무쵸'가 흘러 나오더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빈민가 거리에서 당시 추기경이었던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조나단 프라이스)는 군중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다. 이것은 따분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시민들과 편하게 소통하면서 나누는 '유쾌한 대화'다. 그리고 그는 시민들과 가깝게 만나며 추기경의 위치에 있지만 '이웃집 신부님'같은 이미지를 고수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죽고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린 가운데 호르헤와 라칭거 추기경(안소니 홉킨스)도 참가한다. 호르헤는 교황 자리에 욕심이 없지만 선거회에서 인지도는 높은 편이다. 반면 라칭거는 교황이 되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야심가다. 라칭거는 '종교인'이라기보다 '정치인'이나 '사업가'에 가깝다. 게다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대중의 인지도도 높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보수파 추기경으로 이루고자 하는 신념이 있고 야망이 있었다. 때문에 호르헤는 라칭거를 지지하고 그는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다. 시작부터 신도들에게 "나치"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역사상 가장 인지도가 낮은 교황'이 된 베네딕토 16세는 훗날 교황 측근의 스캔들과 교황청 기밀문서 유출로 곤혹을 치른다. 종교인으로서 좌절을 느낀 베네딕토 16세는 호르헤에게 교황직을 넘기고 물러나려고 한다. 


라칭거와 호르헤는 존재 자체가 대립적이다. 국가와 대륙도 다르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성향도 다르다. 당연히 종교적 이슈에 대한 입장도 다르고 음악과 축구를 좋아하는 취미도 다르다. 그런데 이들은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의 것들을 인용하며 닮아간다. 예를 들어 호르헤가 "그것은 타협이 아니고 변화입니다"라고 말을 하면 얼마 뒤 다른 대화에서 라칭거가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라칭거는 교황업무로 이동을 해야 할 때 자신을 찾아온 호르헤와 함께 가길 원한다. 그렇게 성격이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당연히 교황을 물려줘도 제일 상극인 호르헤에게 물려준다. 이것은 보수정당의 지도자가 정권 말기에 진보정당의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두 지도자는 대단히 종교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들이며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렇지만 자신이 집권하면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과 성향이 같거나 비슷한 지도자를 선택하고 지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라칭거는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사람을 지목한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함께 공감할 것이 있는 사람은 금새 가까워지고 친해질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닮은 사람은 서로 보완해야 할 것들을 알지 못한다. 반대되는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고 발전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엄청난 갈등은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라칭거가 호르헤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실패한 것들을 이룩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을 지목했다. 이것은 전세계 모든 정치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지만 대부분 실천하지 못한다. 두 교황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를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상호보완의 정치'를 하기에 우리의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너무나 성장하지 못했다. 

호르헤는 라칭거의 '교황 제의'를 처음에 거절한다. 애시당초 그가 교황을 만나고자 했던 것은 '추기경 은퇴 서류'에 싸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은퇴를 위해 교황 제의를 거절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교황이 되기를 주저한다. 실제로 호르헤는 1970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당시 예수회 소속으로 인권운동에 침묵하고 군부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심지어 동료였던 신부 둘이 군부에 체포돼 끔찍한 고문을 당할 때에도 호르헤는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호르헤는 처음에 "신부들이 체포된 것에 침묵했다"고 알려지며 비난을 받았으나 실제로 그는 두 신부의 석방을 위해 군부를 설득했다. 결국 두 신부는 풀려났으나 호르헤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채 해외로 돌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라칭거는 그런 호르헤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으나 호르헤에게 그 일은 마음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호르헤가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고 교황의 제의를 받은 것은 그가 속죄하고 오랜 시간 종교인으로 헌신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결한'(그렇게 믿고 있는) 종교인을 인간적인 위치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아이러니, '다르다'는 것은 시대에 따라 상하관계와 권력을 만들어낸다. 세력이 큰 종교는 세력이 작은 종교를 탄압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것은 다른 종교뿐 아니라 하나의 종교 내부에서도 존재한다. 마치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친문', '비문'으로, 자유한국당 안에서도 '친박', '비박'으로 나뉘어지듯 가톨릭이나 기독교 안에서도 저마다 다른 종파로 나뉘어진다. 집단이 분리되는 것은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한 갈등을 유발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여준 라칭거와 호르헤의 애매한 대립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나는 무신론자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고난을 감당할 수 없어서 기댈 수 있는 핑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실체'라고 말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저 인간이 나약해서 만든 '핑계의 대상'이라고 믿는 편이다. '두 교황'을 보고 "신앙이 생길 것 같다"며 온갖 찬사를 남겼지만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다. 다만 인간이 '신(神)'이라는 존재를 만든 이유에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인간이 저마다 집단화돼있고 집단끼리 갈등을 유발할 경우 권력의 상하관계가 형성된다. 신은 그 상하관계를 무마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즉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데 인간끼리 계급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즉, 신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설령 그 인간이 '교황'일지라도. 

이 때문에 호르헤의 1970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성인군자에게 바라는 고결함은 사실 인간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날때부터 언제 어디서든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죄를 짓고 반성하며 변하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죄의 무게만큼 반성하고 속죄하며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살인범이 고해성사로 죄를 씻어내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라칭거는 호르헤의 과거를 알고도 그를 교황으로 지목했다. 라칭거는 호르헤의 잘못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구하면서 종교인의 책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지은 후 40년 동안 호르헤는 존경받는, 훌륭한 종교인으로 성장했다. 죄를 잘 다스려 교황이 될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죄를 잘 다스려 훌륭한 종교인으로 남을 것이다. 신부님이 사하여 준다거나 예수가 십자가에 짊어지고 갔다고 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살면서 지은 죄는 살아서 죄값을 치르고 갚아야 하는 것이다. 

'두 교황'은 앞서 말한대로 여러 아이러니의 집합체같은 영화다. 보수와 진보의 아이러니, 국가의 아이러니, 인간과 신의 아이러니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아이러니는 '인간과 신'의 관계다. 이것은 '합리와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신앙은 합리적이지 않다. 가톨릭 신부나 기독교인이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쉽게 생각해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쫓는 일이다. 목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오르는 일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이는 불교에서도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종교적 경지에 이르는 일은 엄청난 고통과 노력을 강요한다. 라칭거는 그 노력에 고스란히 몸을 던졌다. 반면 호르헤는 스스로의 삶을 살면서 그 가운데 종교적 길을 찾았다. 

종교적 경지를 위해 불합리한 길마저 감수해야 하는 것과 절대 다수에게 이익을 주는 옳은 길을 가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신앙을 위해 합리를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합리 안에서 신앙을 찾는 일은 분명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나 부처 등 종교적 경지에 이른 지도자(이 경우에 이들을 '신'(神)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에게는 '제자'가 있었다. 즉 이들은 '스승'의 위치에 있으며 보이지 않는 실체를 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을 가르쳤다. 제자는 이 말을 배우고 이해해 자신들의 삶에 체득하고 그 가운데서 얻는 깨달음을 다음 제자에게 전파한다. 이는 우리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종교는 학습에서 시작했으며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현대에 와서 이것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변해버렸다. 


실제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영화 '두 교황'은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 대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신앙을 쫓는 대신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그 안에서 신앙을 찾으라고 하고 있다(적어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렇게 살았다). '두 교황'은 내가 태어나서 본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아이러니한 영화'에 속한다(몇 편 안될거다). 신앙과 합리, 신과 인간,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름'을 허물고 모두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상대의 가치관을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관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간단하고 당연한 일인데 의외로 어렵다(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상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 혹은 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겠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황도 지은 죄가 있다. 

나는 영화 '두 교황'이 너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러니의 대환장판'도 너무 좋고 늘 매혹되는 '범 인류적인 이야기 주제'에 '긍정적인 결말'도 좋다.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두 할아버지의 꽁냥질'이 유쾌한 것도 있지만 이들의 대화에서 묻어나는 종교와 인간에 대한 성찰도 좋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좋다. 내가 아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시티오브갓'이 처음이다. 그는 대단히 강렬하고 스타일리쉬했으며 자신의 색채가 강했다. 그런데 '두 교황'은 그 색채가 많이 묻어나지 않는다. 거물급 주연배우인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에게 많은 부분을 할해한다. 그러면서도 영화의 주제와 마찬가지인 아이러니를 표현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해한다. 예를 들어 콘클라베 장면에서 아바의 '댄싱퀸'이 나온다거나 가톨릭 벽화가 가득한 교황청 내부 공간을 배경으로 재즈가 흘러나오는 장면, 두 교황이 나란히 앉아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아르헨티나 vs 독일)을 보는 모습 등이다.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이런 장면들과 함께 두 주연배우는 명연기를 펼친다. 이들의 연기는 누구 하나 튀려고 하거나 메소드 연기를 펼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대화가 대부분인 영화에서 이들은 주고 받는 앙상블로 조화를 이뤄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두 배우의 연기조차 영화의 주제인 '아이러니'와 '조화'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만큼 두 배우의 연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이 영화는 놀랍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고 거슬릴 것 없이 영화는 조화롭다. 그리고 "종교의 권위가 대중 곁으로 내려왔다"는 인상은 이 영화가 더 좋아지게 만든다. '두 교황'이 담고 있는 이야기(혹은 실제 두 교황의 삶)는 우리 사회와 각자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 바램이라면 정치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맹신은 신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삶에 충실하면서 그 안에서 지지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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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메라가 담아내는 '육체'라는 것은 실제로 느끼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모두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그것을 느낀다. 그러나 많은 영화들은 그것에 힘이 있고 유연하고 부드럽다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관객들 대부분은 드웨인 존슨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갤 가돗처럼 늘씬하지 않다. 당연히 미셸 로드리게즈처럼 근육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톰 히들스턴처럼 늘씬하지도 않다. 바쁜 하루를 사는 우리의 육체는 그저 엔진과 배터리, 구동축과 관절을 가진 유기체에 불과하다. 한가람 감독의 '아워바디'는 그런 육체를 바라본다. 아무런 로망도 없고 미화도 없이, 온전히 자의식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써 육체다. 우리는 거울이 아닌 맨 눈으로 온전히 스스로의 몸을 바라볼 일이 없다. 나는 내 뒤통수를 두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등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아워바디'가 이것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진 않지만 영화는 '내 몸은 안녕하신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정확히는 '내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2. '아워바디'에 대해 '육체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이유, 다시 말해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 있다. 영화는 8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자영(최희서)의 일탈로 시작한다. 시험에 지친 자영은 어느날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안지혜)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건강함에 매료돼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다. 시놉시스의 내용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무기력한 청춘이 달리기를 통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얻어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영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어느 장면에 이르러 무참이 깨진다. 영화는 이렇게 상식적인 전개를 3번 정도 뒤집는다. 이 뒤집히는 방향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도 달라진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이 영화의 주제'가 끊임없이 박살난다. 

3. 영화가 뒤집어지는 첫 번째 지점은 현주의 죽음이다. 자영과 함께 동반자의 위치에 있던 현주는 달리던 중 갑자기 차에 치여 죽는다. 앞서 현주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은 드러났으나 이는 주제의 전환에 영향을 줄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현주의 죽음 이후에도 '스스로 일어서는' 자영의 모습을 통해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그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아워바디'는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을 끝없는 심연으로 몰아세운다. 그러다가도 극복을 한다면 영화는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되지만 이때부터 자영의 달리기는 병적인 집착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 집착한 죽은 현주에 대한 집착일 수 있고 실패했다고 믿는 자신으로부터 도피일 수 있다. 

4. 두 번째 뒤집어지는 지점은 자영이 정부장(장준휘)과 섹스를 하는 순간이다. 장면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야근을 하던 인턴 자영이 우연히 사무실에 들른 정부장과 술을 마시게 된다. 아슬아슬한 대화가 오고가다 자영은 정부장에게 "저 나이 많은 남자 좋아해요"라는 말을 한다. 앞서 현주는 자영과 술을 마시면서 "나이가 서른살 쯤 많은 남자와 섹스하는 것이 로망"이라고 말한다. 자영은 죽은 현주의 판타지를 대신 충족한 셈이다. 이것이 장면의 의도다. 이 장면이 뒤집어지는 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장면의 분위기나 정부장의 뉘앙스로 봤을때 이 장면은 "정부장이 자영을 덮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장 그렇게 돼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지만 영화는 반대로 자영이 정부장을 덮친다. 그리고 건강한 메시지를 가진 것처럼 굴던 영화는 이 장면 이후 이상한 아슬아슬함을 갖는다. 그것은 직장 내 괴롭힘(왕따)와 같은 시선이고 관객 역시 그런 시선을 갖도록 유도한다. 관객은 분명 자영이 현주의 판타지를 대신 충족시킨 것을 알지만 이후 분위기는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박평식 평론가가 '엉뚱한 장면 하나가 치명상'이라고 말한 장면이 이 지점이 아닌가 싶다. 

5. 이후 타인의 시선을 인지하게 된 자영은 친구 민지(노수산나)와 대화 후 회사를 관둔다. 초반부에 자영의 오열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회사에서 자리잡고 난제를 극복하길 바랬을텢만 영화는 그것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그리고 자영은 엄마(김정영)와 여동생(이재인)에게 비싼 밥을 사고 최고급 호텔로 향한다. 앞서 자영은 현주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성적 판타지는 최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 시켜먹으면서 하루 종일 섹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와 복도를 따라 호텔로 향하는 자영을 보면서 누군가가 있는 방으로 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호텔에는 자영 혼자만 있다. 그녀는 혼자 룸서비스를 시켜먹고 섹스 대신 자위행위를 한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몸'과 몸의 주체인 '자아'뿐이다. 

6. 첫 번째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영이 달리기를 통해 삶의 의지를 얻어 열심히 살 것으로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열심히 산다는 것'은 자영만의 독자적인 기준이 아닐 수 있다.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건실한 회사에 취직해서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보편적 기준,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역시 엄마의 말을 빌어 그것을 계속 강조한다. 두 번째 전환에서 자영은 앞서 말한대로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대신 충족한다. 자영은 처음부터 현주의 아름다움과 삶을 동경했다. 그러나 카페에서 드러난 현주의 표정과 심경의 변화는 그녀 역시 자영과 같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줬다. 자영이 정부장과 잠자리를 갖기까지 자영은 현주 역시 자신과 같은 위치였음을 의식하지 못한 듯 하다. 다시 말해 현주는 이상향이 아닌 동등한 위치의 타인이다. 타인의 성적 욕망은 개인에게 온전히 반영될 수 없다. 성적 판타지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주의 판타지를 옮긴 자영에게는 온전한 쾌락이 아닌 스트레스만 따른다(정작 자영과 정부장의 섹스신은 생략돼있다). 

7. 마지막 전환은 섹스에 대한 얘기다. 첫 장면에서 자영은 경수(오동민)와 섹스를 한다. 이때 자영은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있을 뿐이다. 자세를 바꿔서 자영이 위로 올라가보지만 이때는 섹스가 잘되지 않는다. 영화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섹스에서는 위에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는다(그래서 박찬욱의 '아가씨'에서는 위에 올라간 사람이 없다).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의지와 감각대로 허리를 움직일 수 있음을 말한다. 자영과 현주의 대화에서도 '어린 남자와 섹스'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며 불만을 나타낸다. 정부장과 섹스에서 자영은 위에 올라타 일을 주도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아무것도 주도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섹스는 두 사람이 함께 하지만 두 사람의 의지와 감각이 온전히 반영될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절정에 이르는 순간도 다르고, 심지어 동성끼리도 그 순간을 합의시키기는 어렵다. 즉 섹스에서는 갑을관계가 생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영화는 내내 그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위행위는 가장 주체적인 섹스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조율해 절정에 이른다. '아워바디'의 마지막은 자영이 가지고 있는 성적 판타지의 정점에서 스스로 그것을 주도하는 장면이다. 그제서야 자영은 자기 몸의 온전한 주체가 됐고 온전한 몸의 권리를 되찾았다. 

8. 나는 '아워바디'가 '내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 몸은 온전히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고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이것을 두고 '자기만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 만족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걷기 시작하고부터 체득한 운동인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배워야 할 정도로 우리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데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몸을 온전히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타인의 존재를 하나씩 지운다. 애인을 지우고 친구를 지우고 직장을 지운다. 그리고 동경하는 상대를 지우고 가족도 지워버린다. 이야기 내내 그렇게 다 지워버리고 나서 결국 남는 것은 나와 내 몸이다. 영화의 제목은 '아워바디'(Our Body)지만 공교롭게도 이것은 '마이바디'(My Body)에 대한 질문이다. 내 몸은 온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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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자스민차향기조아 2019.10.01 18:2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관람 후기 잘 보았습니다. 영화 포스터가 왠지 끌려서 읽었어요. 원래같으면 사실 이런 류의 영화는 제 취향은 아닌데 읽다보니 한 번 보고 싶네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 분석을 하면서 본다는 게 신기합니다. 저는 그냥 재미있다 아니면 재미없다 인데 말이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맑은 기운을 준다. 그것은 때로 무기력한 삶을 반전시킬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아이돌'들에게 약간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최고의 자리에 올랐건, 그러지 않았건 정말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이며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아이돌'보다는 '존경'이라는 단어에 조금 근접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을까? 액면상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일꾼'보다는 '상전'의 이미지에 가깝다. 국회의원은 수천페이지의 문서를 며칠 안에 훑어야 하고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법안을 만들기 위해 밤새 고민해야 하는,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치열하게 살고 있다', '열심히 일했다'라는 걸 느끼긴 어렵다. '상전'의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근 본 2개의 영화, '다키스트 아워'와 '원 네이션 원 킹'에는 의회의 모습이 대단히 많이 등장한다. 두 영화는 각각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동기 속 의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라가 혼란스런 시기가 되면 의회는 당연히 바빠진다(바빠져야 한다). 암흑기를 벗어나기 위한 저마다의 의견이 등장하고 이것들을 조율하기 위한 의견 교환이 이뤄진다. 다만 대한민국 국회의 실제 모습을 제외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암흑기의 의회가 어떤 일을 했는지 지켜볼 기회는 많지 않다. '다키스트 아워'와 '원 네이션 원 킹'이 귀한 영화인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에서 드러난 의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의회는 대한민국 국회와 어떻게 다를까? 

우선 '다키스트 아워'의 영국 의회와 '원 네이션 원 킹'의 프랑스 의회는 대단히 시끄럽다. 혼란스런 시기인 만큼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열띈 토론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토론은 사실 승자와 패자가 나눠지는 스포츠는 아니다. 의회에서의 논의는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고 여기서 조율을 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라가 혼란스런 시기라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의회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누구나 크게 싸울 수 있는 곳이다. 흔히 우리는 국회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어이구 또 싸우네"라며 욕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의회는 원래 싸우는 곳이다.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매번 순탄할 수는 없다. 그 과정은 어느 전쟁터 못지 않게 치열하고 살벌할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국회는 여전히 비난을 받는다. 나는 우리나라 국회에 대한 비난도 정당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국회에서의 싸움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대신 싸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뢰의 문제다. 오랜 시간 이어진 부조리하고 부패한 정치의 행태는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들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도 그게 정말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국회에서의 싸움은 국민을 위한 싸움인지 당의 이익과 권력을 위한 싸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솔직히 후자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더 많다.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 '야당'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제 아무리 정의로운 정권, 위대한 지도자라도 1개 정당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정책의 결정에 있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한 합리적인 정책을 펴기 위한 장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의회 역사에서 '건강한 정당'을 본 기억이 있는지 돌이켜보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건강한 국회의원은 간혹 본 적이 있어도 당 전체가 건강하게 일하는 경우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야당'이라는 존재는 정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견에 반대를 할 때는 반대 이후의 대안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야당이 반대 이후의 대안을 제시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에서의 싸움은 '그들만의 전장'이 돼버렸고 신뢰를 잃은 국민들은 정치에 등을 돌려버렸다. 여기에 대안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역시 '선거' 밖에 없다. 사회생활을 열심히 한 30대 이상의 사람들이 얻는 깨달음 중에 하나는 '사람은 고쳐서 쓰는게 아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함부로 바뀌지 않는다. 다만 제대로 된 사람들 데려다 앉히고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줘야 한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서울·경기 지방의회는 아주 비정상적인 정당 비율을 구성하게 됐다. 이는 앞선 지방선거에서 부산과 울산·경남이 보여준 모습과 닮아있다. 그런게 바로 메시지다. 

'다키스트 아워'의 경우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원 네이션 원 킹'은 방청석에서도 발언을 막 해대는 모습이 보인다. 영화가 재현한 당시 프랑스 의회의 모습에는 대단한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그 와중에도 권위를 찾으려는 의원들이 있다). 의견이 대립된 의원들과 방청석의 의견까지 어우러지면서 영화 속 의회는 정말 살벌한 싸움터가 된다. '원 네이션 원 킹'에는 의회의 모습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여기는 싸움터가 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로 뜻을 모은다. 프랑스 대혁명의 격변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모습이다. 사실 '다키스트 아워'는 의회의 활기를 잘 보여준 영화이긴 했으나 이는 엄연히 윈스턴 처칠(게리 올드만)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그에 반해 '원 네이션 원 킹'은 완벽하게 시민과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다(바게뜨뽕이 차오른다). 민주주의가 국가적인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고 혼란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어떻게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켜냈는지 궁금하다면 이들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내게 '다키스트 아워'와 '원 네이션 원 킹'은 의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의회는 싸우는 곳이다. 다만 이 싸움에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그 말인 즉슨 싸움의 양 측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대의를 위해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설득 당했다면 기꺼이 양보도 해야 한다. 단 한 번도 그런 합리적인 싸움이 이뤄지지 않은 의회라면 '병 든 의회'임이 분명하다. 의회는 싸우는 곳이다. 다만 건강하게 싸울 필요는 있다. 대한민국의 국회는 과연 건강하게 싸움박질을 하고 있을까?


추신)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무력이 사용되는 극단적인 경우도 종종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할 때' 극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위한 퍼포먼스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깽값을 물리건 법정소송에 돌입하건 그들 각자의 문제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폭행치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극단적인 퍼포먼스도 '좀 그럴싸하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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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정이 지어지고 틀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어쩌면 꽤 편리한 일이다. 별 다른 고민할 필요없이 시키는 것, 정해진 것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윈터솔져'에도 나온 황당한 대사지만 자유가 인간을 더 오만하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꽤 그럴싸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규칙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방해하는 일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 동물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뇌를 100% 사용할 경우'에 대한 상상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루시', '마녀' 등)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이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라는 예술은 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많은 규칙들이 작용한다. 이는 극영화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계부터 촬영과 편집, 심지어 연기에도 규칙이 있다. 이는 이론서(書)에 공인된 규칙이기도 하고 어떤 거장에 의해 대물림된 규칙이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유능한 작가들은 이같은 규칙을 비틀면서 영화를 만들고 연기를 하지만 때로 이것은 또 다른 규칙이 돼 스스로 답습하기도 한다. 완벽하게 규칙을 깨부수는 일은 그래서 꽤 어렵다. 

3. 돌이켜보면 프랑스라는 나라는 '혁명의 국가'답게 늘 규칙을 깼던 것 같다. 1895년 만들어진 '영화(활동사진)'라는 매체도 사진과 회화의 정지된 장면에서 오는 미학을 깨버렸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누벨바그 역시 이전의 영화 이론을 깨버렸다. 1980년대에도 누벨이마주라는 이름으로 (다소 추상적이긴 했으나) 영화 이미지의 큰 변화를 꾀했다. 가스파 노에의 영화 '클라이맥스'가 누벨바그나 누벨이마주에 비할 대단한 영화적 혁명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틀을 깨부순다'는 의미에서 이전의 영화운동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사실 21세기의 영화에서 더 이상 깰 이론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우리는 모든 이론이 붕괴된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도 만났고 블록버스터는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는 무엇을 혁명해야 하는가.

4. '클라이맥스'가 과감하게 뒤집은 것은 우리가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도덕이다. 이 영화는 언제 오프닝크레딧이 나오고 엔딩크레딧이 나오며, 얼마나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다. 도저히 상식적인 시작과 끝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편집하지도 않으며 상식적으로 찍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련의 무용단들이 우연히 마약을 복용하면서 벌어지는 대환장파티(근친상간·존속살인)는 관객들의 멱살을 잡고 쾌락과 고통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이 영화는 보는 일 자체가 고통스럽고 아득한 체험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영화는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

5. 저 옛날, 얼굴에 바늘(Pin)이 바둑판 배열로 그득히 박힌 수도사는 쾌락과 고통이 한끗 차이임을 설파했다. '클라이맥스'를 보면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비상식적인 고통이다. 원색적인 조명과 뽕끼 가득한 음악은 정신이 아득해지게 만들면서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고통인지 쾌락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은 이성과 규칙으로부터 자유를 안겨준다. 그것은 마치 고통을 넘어서 오르가즘에 다다르는 것과 같다. 영화 내내 쾌락과 고통이 부침개 뒤집어지듯 뒤집히다 끝내 하나가 돼버리는 모양새다. 그리고 영화를 다보고 극장문을 나서며 밝고 이성적인 빛을 맞이할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쾌락(=고통)으로부터의 도피와 쉼(休)이다. 

6. '클라이맥스'는 영화적 체험의 새로운 장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섹스하는 기분이며 영화라는 마약을 복용하는 기분이다. 가스파 노에는 관객들에게 그런 체험을 안겨주기 위해 영화가 어떤 극단에 치달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는 모든 관객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성적 사고의 벽이 갖는 높이와 견고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의 벽이 높고 견고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이상하고 지루한 '쓰레기'가 된다. 물론 그 반대라면 이 영화는 '섹스 할 상대'이자 마약이 된다. 모든 영화가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를 어떻게 즐길지는 압도적으로 관객의 몫에 달렸다. 

7.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덕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도덕은 동물적 본성을 억제하는 도구로 사회를 구성하고 존엄성을 보호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다만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대해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마저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온전히 탐구할 수 없다(인간은 여전히 탐구할 꺼리가 많은 동물이다). 한국은 도덕을 넘어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내다보는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 도덕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영화나 대중매체가 도덕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도덕적 소양을 기르는게 우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표현에 대한 억압을 먼저한다. 그것이 대중들의 도덕적 소양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8. '클라이맥스'가 주는 쾌락과 고통의 카타르시스를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노출이나 폭력 수위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 약하지만 이 영화는 부도덕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유교 국가에서는 감히 공개하기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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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경근 감독의 영화 '군대'는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영화감독 겸 미디어아티스트인 그는 제철공장을 기이한 시선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철의 꿈'을 만든 바 있다. 그만큼 '군대'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낯설게 바라본 군대의 풍경과 현학적인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본 영화 '군대'는 전역한지 10년된 아저씨가 들려주는 군대이야기였다. 그는 이 군대이야기를 위해 한 젊은이의 군생활 2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렇다면 대체 박경근 감독은 왜 이 무모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시도를 감행할까? 누구나 다녀온 군대에 대체 뭐가 특별한게 있어서...

2. 초등학생 시절 학교 운동장은 대단히 넓어보였다. 끝에서 끝까지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이 대단히 큰일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어른이 돼서 다시 보면 그곳은 그저 작은 공간에 불과하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지만 전역하고 다시 바라보면 우스꽝스럽고 작은 공간이다. 감독은 2년 동안 공을 들여 이 이야기를 찍어냈지만 이곳이 최대한 우스꽝스러워 보이길 바랬다. 이 영화의 기획안 당시 제목인 '군대놀이'처럼 아이들의 놀이를 위에서 내려다 보듯 영화를 감상하길 원했다. 

3. 군대라는 곳은 규칙이 많다. 그것은 군법이나 규정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무생활의 온갖 잡다한 규칙들과 제식 등이다. 당장 영화에 등장하진 않지만 직각식사 같은 것도 세상 쓸데없는 일이다. 영화는 그런 '보여주기' 규칙들을 강조하고 있다. 당장 관찰대상인 우철이가 의장대로 자대배치를 받은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의장대만큼 제식과 동작이 중요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놀이에만 존재하는 규칙이다. '군대'는 그 규칙에 기인해 펼치는 놀이와 같은 군대생활을 보여준다(주의해야 할 것은 '놀이'라고 표현했다 해서 군생활이 그리 재밌지는 않다).

4. 당장 영화에서 등장하는 '쓸데 없어 보이는 것들'을 추려보자. 우철이 종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분대장부터 당직하사, 당직사관, 내무반의 모든 장교들, 중대장에게 신고한다. 신고하는 사람만 대여섯명 이상이다. '우리의 주적(主敵)'에 대한 글짓기를 낭독한다. 세상이 변해버린 2018년에는 그런 글조차 쓸데 없어 보인다. 훈련소 교회 종교행사에서는 '실로암'이 흘러나오고 펜타포트락페스티벌 못지 않은 훈련병들의 떼창이 펼쳐진다. 물론 거기에는 종교적 믿음은 없어보인다. 이 쓸모없는 것들은 우철에게 통과의례와 같은 우울증을 안겨준다. 

5. 군대에서 사병에게 강조하는 것은 '조국에 대한 충성과 상관에 대한 복종'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 몇 마디만 바꾸면 새로운 집단에서 사용할 문장이 나온다. '회사에 대한 충성과 상사에 대한 복종'이다. 군대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집단이지만 그 집단의 또 다른 기능은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원을 배출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나 직장에서 외치는 '군필자 우대'의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군대놀이의 목적은 군대와 그 바깥에서 유용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국가를 지키는 이같은 명분은 우철의 전역모자처럼 우스꽝스러울 수 밖에 없다.

6. 나는 계급을 이야기할 때 로버트 래드포드가 주연한 '라스트 캐슬'을 종종 언급한다. 대단히 재밌는 영화는 아니다. 감옥영화와 전쟁영화를 묘하게 크로스오버한 기발한 영화이긴 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사병과 장군이 맞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나 사병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장군은 사병을 설득시킨다. 사실 전세계 어느 군대건 제식이나 의장대 사열은 존재한다. 다만 미군과 한국군이 다른 점은 공과 사가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는 상명하복이 철저하지만 대화에서는 동등한 위치라는 것이다.

7. 우리 군대도 많이 변했다고 한다. 내가 복무하던 15년전에 비하면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군대와,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공과 사의 구분일 것이다. 간부는 합리적인 명령을 전달하고 사병은 합리적인 명령에는 따라야 한다. 다만 불합리한 명령에는 의견을 제시하고 상관은 이를 들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의 바깥에서는 동등한 위치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권력은 변하는 법이다. 그러니깐 우리나라 성인 중 대략 절반은 군대를 다녀왔거나 복무 중인 사람이다. 사회를 지탱하는데 있어 이는 굉장히 큰 부분이다. 만약 군대라는 집단이 합리적으로 변할 수 있다면 군대에서 세상을 배워서 나온 사람들의 사회생활도 좀 더 합리적이고, 곧 사회 전체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합리적인 사회에는 허례허식이 없다. 효율과 능률은 중요시하는 집단에서는 가장 최선의 길만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우스꽝스런 군대놀이도 조금 바뀔 수 있다. 

8. 그런데 이 영화 '군대'에서 박경근 감독의 태도는 다소 고압적이고 꼰대같았다. 우철의 이야기에 자신의 군생활 추억을 덧씌우는 건 이해하더라도 관객이 판단해야 할 지점에 자신의 나레이션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편히 보이는 지점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 '군대'는 어느 지점에서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있다. 마치 예비역 선배의 군생활 무용담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견딜 수 있고 누군가는 질색을 할 것이다. 그 분류를 임의로 나누진 않겠다. 

9. 결론: '군대'가 개봉하면 꽤 재미난 풍경이 벌어질 것 같다. 남자들의 군대얘기를 꺼내기에 이보다 좋은 떡밥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아트하우스나 예술영화관 곳곳이 군대얘기 나누는 아재들로 넘실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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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영화를 볼 때 그것은 명료하지 않고 흐릿한 지적활동에 기인한다. A와 B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닌, 이것은 A일 수 있고 B일 수 있으며, 혹은 둘 다 아닌 다른 어떤 것이 A·B인 척 한 것일 수 있다. 경계가 모호할 때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이것은 마치 네비게이션이 "1km 전방에서 우회전이거나 좌회전입니다"라고 안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때로는, 혼란스러운 것들이 머리를 더 맑게 해줄 수 있다. 장률 감독의 영화 '군산:거위를 노래하다'는 명료하지 않고 경계가 모호한 것들을 통해 단호하고 확고한 결론을 찾아낸다. 이 애매한 한 문장은 "술을 한계치 이상으로 마셨더니 정신이 또렷해졌다"라는 말과 같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면 이 영화가 좋은 대리만족이 될 수 있다. 

2. 나는 군산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시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장률 감독이 선택한 것은 도시가 가진, 유난히 매력적인 하나의 표정이다. 그 표정은 '모호함'에 가깝다. 일제가 조선의 물자를 침탈해가던 기지로 활용된 군산은 지금도 일본의 건축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군산은 이것이 하나의 정체성이 돼버렸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도시'는 일본과 한국,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도시다. 그런데 심지어 '현재의 도시'(공무원들)는 그 모호한 것들을 도시가 가진 정체성으로 정의내리려 한다. 군산은 누구도 자각하지 못한 '조용한 혼란'을 겪는 도시일거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적어도 장률 감독의 시선에 들어온 군산은 그런 혼란이 있어보였다). 

3. 영화의 첫 장면, 윤영(박해일)과 송현(문소리)는 군산으로 즉흥여행을 온다. 우선 관객들은 둘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오래 만난 연상연하 커플일 수 있고 갓 시작한 썸타는 사이일 수 있다. 가까운 듯 거리감이 있어보이는 이 관계에 대해 관객들은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이 빈공간에 대해 관객들은 임의의 판단을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이후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객의 이해도 달라질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연도 정확히 모른체 남의 사정에 대해 관객은 임의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이 불완전함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힌트를 준다. 그것은 바로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다. 

4.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가정(假定)'이 있다. 예를 들어 송현이 "나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잠깐 살았는데 그때 쭉 중국에서 살았다면 나도 조선족이 되는거다"라는 식이다. 영화에는 이런 식의 가정이 몇 차례 등장한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가정'에 모두 담겨져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 각자를 규정짓는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을 구분하는 도구이자 수단이 되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짓지는 못한다.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산'은 '우연'이라는 도구를 통해 정체성을 마음껏 뒤집어버린다. 

5. 이야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꽤 편리한 도구다. '그러던 어느날' 등의 방식으로 등장하는 우연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가장 쉬운 수단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도구다. 그 순간 거기에 있어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 드디어 영화는 윤영과 송현이 어떻게 만나서 군산까지 오게 됐으며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지 보여준다. 이 역시 모두 우연히 벌어진 일이다. 결국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를 규정짓는 것들은 모두 우연히 정의내려졌다. 그래서 우리는 몇 가지 사사로운 분류에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인간의 정체성은 원인과 결과의 범우주적인 알고리즘에 의해 규정된다. '군산'이 보여주는 것은 그 복잡한 '인간 정체성의 원리'다. 

6. 사실 장률 감독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왔던 사람이다. 연변 출신인 장률은 처음부터 경계에서 살던 사람이며 경계를 넘나들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경계를 너머 한국에 머물러있다. 한국에서 6년을 살았다는 장률 감독은, 그렇다면 한국 사람인가 아닌가? 아마 누군가는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장률 감독의 대답은 "한국 사람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문화가정의 아이나 피부색이 조금 다른 사람을 보면 정체성을 묻는 실례를 범한다. '군산'은 민족주의에 기인한 그와 같은 정체성의 물음이 '쓰잘데기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은 꽤 강력하고 부정할 수 없다. 

7.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윤영과 송현의 관계에 대해서는 원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모호함 투성이다. 칼국수집 사장님(문숙)의 과거, 주은(박소담)의 정체성, 주은과 윤영이 섬에서 겪은 일 등. 많은 것을 감춰두고 있다. 이 영화는 몇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삶의 한 조각이다. 그 순간은 어떤 일의 원인일 수 있고 어떤 일의 결과일 수 있다. '군산'의 후반부는 빈공간을 채우는 과정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빈공간이 있다. 남은 빈공간은 여전히 관객이 알아서 채워야 할 일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윤영과 송현의 관계에 대한 빈공간을 채웠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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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친절한김씨 2018.10.12 16:07 address edit/delete reply

    군산이 참 거리가 이쁜 곳이 많죠!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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