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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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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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9.03.16
    '러브, 데스+로봇' 초간단 리뷰 (3)
  2. 2019.01.17
    '미래의 미라이' 초간단 리뷰
  3. 2018.12.21
    '언더독' 제작보고회 - 도경수, 박소담, 박철민, 이준혁
  4. 2018.08.23
    '명탐정 코난:제로의 집행인' 초간단 리뷰 (3)
  5. 2017.12.12
    양우석 vs 연상호 - 바람의 전학생들 (2)
  6.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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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7.04.27
    목소리의 형태, 마음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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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6.08.22
    [스포주의] 서울에서 부산까지, 우리 집을 찾습니다
  10. 2016.03.17
    '주토피아'는 진정한 애들영화

-1.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한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시작했으면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끝내주는게 속이 시원하다. 매주 챙겨봐야 하는 드라마가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가 단편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저 '짧아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단편은 장편보다 시간의 제약은 더 많이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자유롭다. 긴 시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하는 장편과 달리 단편은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바로 밀어붙일 수 있다. 이야기라는 것은 참 괴팍하게도 공간(=시간)이 좁을수록 더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0. 옛날 애니메이션 중 '애니매트릭스'를 좋아한다. 이것은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계승한 스핀오프 애니메이션으로 여러 작가들이 참여해 '매트릭스' 세계관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 작품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다. 짧고 새롭다.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러브, 데스+로봇'은 '애니매트릭스'를 닮아있다. 짧고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애니매트릭스'(더 나아가 '매트릭스')의 기반이 된 사이버펑크 세계관까지 계승하고 있어 저 옛날 '아키라'나 '공각기동대', '메모리즈' 등 추억 속의 대작 저패니메이션까지 떠올리게 한다. '러브, 데스+로봇'은 여러모로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담은, 매력적인 녀석이었다. 


1. 무적의 소니: 지하세계에서 벌어지는 괴수의 싸움경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이들은 아바타처럼 인간이 괴수에 싱크해 싸움을 벌인다. 괴수의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만약 장편이었다면 '리얼스틸'처럼 다양한 디자인과 성능을 갖춘 괴수들이 등장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사람들의 암투와 배신, 반전도 간결하고 좋다. 괴수 디자인은 좋은데 사람 디자인은 별로다. 지나치게 '사이버펑크'의 전형이다. 물론 시즌1의 첫번째 에피소드로써 '러브, 데스+로봇'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에는 손색이 없다. 

2. 세 대의 로봇: 첫번째 에피소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진다. 아마 여기까지도 이 콘텐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인 모양이다. 인류는 멸망했고 세 대의 로봇이 여행을 떠난다. 인간문명을 탐사하던 이들은 살아남은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로봇들은 왠지 모르게 고양이에게 압도당한다. 아마 이 에피소드는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귀여운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잔인하거나 야한거 잘 못보는 사람이라면 이 에피소드 하나만 봐도 된다.

3. 목격자: 정말 잘 그렸다. 그림 방식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연상시키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잘 그렸다. 15분짜리 '기묘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전개도 좋다. 그런데 시즌 전체 중 가장 노출이 심한 에피소드다. 공공장소에서 보다가 놀라서 꺼버렸다. 시즌 전체가 '청불'이긴 하지만 이건 특히 '후방주의'를 붙여야 할 수준이다. 암튼 그림 하나는 끝내준다.

4. 수트로 무장하고: 어느 농촌에서 미지의 괴물들이 나타나고, 수트를 입은 농부들이 괴물과 맞선다. 괴물 vs 인간의 갈등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소 심심하다. 마지막에 반전이라고 등장하는 것들이 멋있긴 했다. 그리고 로봇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다만 그림이 지나치게 미국 동화책 느낌이다. 취향의 차이겠지만 따뜻한 톤의 그림으로 이런 크리처 액션을 선보이는 건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5. 무덤을 깨우다: 사이버펑크라기 보다는 그냥 호러다. 아무리 2D 애니메이션이라지만 크리처 디자인부터 액션, 이야기까지 너무 신경을 안 썼다. 솔직히 이번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 시즌을 달리려는 시청자가 있다면 이건 걸러도 좋을 듯 싶다.

6.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 제목 그대로다. 요거트가 지적 능력을 얻어서 정치를 하고 인간들을 지배한다. 황당하게 들린다면 인정한다. 이건 정말 황당한 이야기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세 대의 로봇'과 함께 가장 귀여운 에피소드 중 하나다.


7. 독수리자리 너머: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이벤트 호라이즌'을 단편으로 압축한 느낌에 그림도 잘 그렸다. 마지막에는 디자인 때문에 소름돋을 정도로 섬세한 터치가 돋보인다. 반전은 있으나 금방 눈치챌만 하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도 매우 야한 편이니 '후방주의'를 해야 한다. 

8. 굿 헌팅: 역시 이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사이버펑크 시대의 구미호'라고 부르고 싶다. 개화기의 홍콩이 사이버펑크로 발전할때 급 흥미진진해진다. 적당히 잔인하고 야하지만 그게 또 매력적이다. 그림 자체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야기와 연출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9. 쓰레기 더미: 뻔하고 지루한 에피소드지만 대형 댕댕이가 귀엽다. 잔인한데 웃음을 유발한다. 역시 걸러도 될 에피소드다.

10. 늑대인간: 늑대인간에 대해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한 에피소드다. 3D 그림을 아주 잘 그렸고 액션도 끝내준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탓에 장면이 상당히 잔인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에피소드가 장편 실사판으로 제작되는 것을 보고 싶다. 어차피 헐리우드 기술력이라면 이것을 장편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거라 예상해본다. ...사실 늑대인간 영화 안 본 지 오래됐다. 

11. 구원의 손: 제목만 들으면 '구원의 손길'을 잡는 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다르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에 '127시간'을 섞은 느낌이다(이 정도면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D 애니메이션 치고는 꽤 못 그린 편이다. 3D 그래픽이라는게 메카닉을 그리긴 쉽지만 사람을 그리긴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러브, 데스+로봇'에는 잘 그린 3D 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많다. 

12. 해저의 밤: 잘 그리고 예쁜 2D 애니메이션이지만 솔직히 이게 뭔지 모르겠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레퍼런스로 삼은 느낌이다. 물론 그런 휴먼드라마는 결코 아니다. 


13. 행운의 13: 정말 잘 그렸다. 거의 '아바타' 수준이다. ...사실 비행선 디자인이 '아바타'를 닮았다. AI와 인간의 사연이 꽤 감동적이다. 전쟁액션답게 아주 긴박감 넘치게 액션씬을 묘사했다. 끝내주는 액션과 그림을 보고 싶은 시청자라면 반드시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독수리자리 너머'와 함께 아주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다. 

14. 지마 블루: 한국영화 중 '인류멸망보고서'의 에피소드 하나를 연상시킨다. 해탈한 로봇이 이런 식으로 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림을 보는 맛은 별로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연출이 대단히 평범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 '레드라인'을 연상시킨다.

15. 사각지대: 역시 걸러도 될 에피소드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우선 재미가 없다. '사이버펑크 버전의 분노의 질주'인 모양인데 심지어 액션마저 재미가 없다. 

16. 아이스에이지: 이걸 애니메이션이라 불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실제 배우(토퍼 그레이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들이 등장한다. 냉장고 속 그래픽은 끝내준다. 다만 '이야기'라고 할만한 굴곡은 없다. 그저 신선하고 평범할 뿐이다.

17. 또 다른 역사: 가상 역사 앱의 데모버전인양 연출됐다. 당연히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 히틀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최초 달 착륙이 어떻게 될 지 보여준다. 병맛 느낌이 강한 헛소리, 결국 병맛이다. 별로 재미있는 녀석은 아니다.

18. 숨겨진 전쟁: 시즌의 피날레를 아주 화려하게 장식했다. 2차대전 쯤으로 추정되는 어떤 시대에 러시아 군대가 흑마술로 소환된 괴물을 잡는 이야기다. 잘 그렸고 아주 잔인하다. 괴물이 워낙 빠르게 지나가서 디자인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대충 '디센트'에 나오는 괴물을 연상시킨다. 액션 연출은 아주 기가막힌다. 이걸 스마트폰으로 봐야 하는게 아까운 수준이다. 가능하다면 러닝타임을 좀 늘려서 4DX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전투씬에서는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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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ims 2019.03.17 01:30 address edit/delete reply

    저도 봤는데 글로보니 다시 새록새록하네요.

  2. BlogIcon Yionguon 2019.03.22 12:59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단편만의 매력이 있는데 정말 가뭄 콩 나듯 있어서 아쉽습니다..ㅠㅠ 앞으로 비슷한 프로젝트가 더 나온다면 좋겠어요.

  3. bonny 2019.03.23 18:42 address edit/delete reply

    굿 헌팅 같은 경우는 사이버펑크보단 스팀펑크로 표현하는 게 더 좋죠! 산업혁명의 대체 역사물인 시스팀 펑크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죠!





1. 대단히 오래전에 나는 '저패니메이션의 신세대'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글이다). 당시 내가 언급한 사람들은 신카이 마코토와 호소다 마모루, 사토시 곤이다. 이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토모 카츠히로, 오시이 마모루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어 갈 기수들이 될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이 세 사람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사토시 곤이었다. '퍼펙트 블루'와 충격과 공포를 지나 '천년여우', '망상대리인',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날 확률', '파프리카' 등 모든 작품들이 놀라운 이야기와 표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천재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실 호소다 마모루도 아주 기발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시간여행부터 신들의 세계, 늑대인간 등. 그가 선택하는 소재는 경계가 없이 무궁무진했다. 

2. '미래의 미라이'는 다시 한 번 시간여행에 기인한 이야기다. 게다가 전작에서 엄마와 아빠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그는 이번에 가족의 의미를 좀 더 확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감독이 어디까지 의도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대단히 불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족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이고 우주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개인들에게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사회문제 중 하나를 신랄하게 꼬집은 것이며 우리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의 미라이'는 한 단계 진보한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이다.

3. 대학 시절(철학을 전공했다)에 불교사상을 배우면서 불교의 화엄사상과 연기설에 대해 인상적으로 들었다(고교 윤리 수업에서도 배운건지 모르겠다).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건,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형태로 인연을 맺고 있다. 사실 원인과 결과, 우연은 이야기를 만드는데 있어 중요한 도구다. 다시 말해 화엄사상은 모든 이야기에 쓰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미래의 미라이'처럼 이를 그물 형태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이 영화의 메시지 자체도 거기게 기인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문제다. 다만 이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개입해서 얻어진 결과다. 굳이 영화의 상황을 언급하지 않아도 태어난 과정에서 부모의 개입, 학교에서 친구와 선생님의 개입, 혹은 기르던 강아지, 길에서 만난 누군가의 개입으로 삶은 이어지고 인격은 형성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쿤(카미시라이시 모카)이 자전거를 배우기까지는 과거의 개입도 있었지만 공원 형아들의 개입도 있었다. 

4. 미래의 미라이(쿠로키 하루)와 가족의 색인을 들여다 볼 때 화엄사상의 메시지는 극대화된다. 복잡한 그물 형태로 구성된 이 색인 사건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나무가 씨앗에서 시작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린 다음 가지를 뻗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다. 낯선 타인이 관계를 맺는 것에서 시작된 가족이라는 것은 나무가 가지를 뻗어가듯 무한히 확장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찾기도 어려울 만큼 깊고 무한할 것이다. 

5. 게다가 계단 형태로 구성된 이 집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 이 집의 구조는 놀이방에서 시작해 정원-거실-침실로 이어진다. 이는 실내에서 놀 시기(영아)에서 뛰어놀 시기(유아)를 지나 삶을 살아야 하는 시기(성인)를 거쳐 쉼을 얻는 시기(노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 각자의 시기는 다른 시기에게 영향을 준다. 먼저 산 사람은 앞으로 살아갈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고 앞으로 살 사람은 먼저 산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이 집은 마치 인간의 삶을 도식화시킨 그래프와 같다(막대그래프). 

6. 그렇다면 관계를 통해 형성된 삶을 온전히 보여준 이 영화의 목적은 무엇일까? 저성장 시대에서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도 이 경우가 많다고 들었고 한국도 마찬가지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가정은 필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고 현재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미래의 미라이'는 이들에게 "삶은 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고 관계는 필수적인 것이다. 사람은 일평생 가정 속에서 살며 가정을 이룸으로써 삶은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일부 공감은 가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꼰대스럽다'는 인상이 강하다. 불가에서는 관계(인과)와 함께 개인의 수양을 중요하게 여긴다. 관계는 삶을 형성하지만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는 의미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유아독존 할 것이라는 그 판단은 다소 오만하다고 여겨진다.

7. 호소다 마모루의 '꼰대스러움'은 다른 장면에서도 묻어난다. 쿤의 부모들의 관계에서 엄마는 온갖 집안일을 다 하고 아빠는 집안일에서 도망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개인적인 견해야 "대부분의 가정들이 저렇게 살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개판인 집구석을 그려놨다. 왜 집안일을 다하는 여자가 당연한 것처럼 그려지냐"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답하자면 "영화 속 부부관계가 대다수 가정의 현실이고 거기서 부조리함을 깨닫고 각 가정에서 개선한다면 다행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누군가는 'SKY캐슬'을 본 학부모마냥 "저거봐 저 집 와이프는 집안일 다 하잖아"라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수 있다. ...이건 나도 답이 없다. 

8. 결론: '미래의 미라이'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한 관계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는 1인 가구에서 외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다만 이 메시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혼자가 아니고 싶지만 혼자가 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앞마당에서는 동화적 판타지가 펼쳐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앞마당이 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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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퀄이긴 한데...


오랜만에 블로그에 직찍 사진 올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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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만화에 대해서는 취향이 확고한 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화에 대한 취향은 사실상 끝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토시 곤의 작품 몇 개('퍼펙트 블루', '망상대리인', '파프리카', '천년여우',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날 확률')를 본 후 모든 저패니메이션들이 시시해졌다(미야자키 하야오 마저). 그런 나에게 '명탐정 코난'은 솔직히 '전혀 매력없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소년탐정 김전일'은 가끔 보긴 했지만 '명탐정 코난'은 이제 그 황당한 설정부터 매력이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특히 '명탐정 코난'의 첫 인상이 '감벽의 관'을 통해 형성된 만큼 이게 '명탐정 코난'인지 '인디아나 코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탐정이라길래 탐정이야기 보러 갔더니 인디아나 존스 이야기가 나와있다. 짜장면 주문했는데 짬뽕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2. '제로의 집행인'은 20%의 기대와 80%의 '심기불편'으로 본 영화다. 물론 기대가 적었던 탓에 그럭저럭 재밌게 봤다. 특히 '공안'이라는 설정은 애들용 애니메이션답지 않게 진지한 설정이다. 흡사 정치·사회 스릴러에 가깝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 덕분에 애들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난해하다. 일본의 사법체계까지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어른인 내게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확실히 '단점'이다. 

3. 우선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과 어른 관객을 모두 잡으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모두 실패했다. '제로의 집행인'은 애들이 보기에는 난해하고 어른이 보기에는 유치하다. 어느 쪽에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안경찰과 검찰의 체계나 사물인터넷(IoT), 드론 등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확실히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다 결정적일 때 축구공을 걷어차는 장면은 유치하다. 이것은 욕심이 많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4. 전통이 깊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다양한 고객들을 겨냥하기 위해 가끔 일탈도 하곤 한다. '마크로스'의 경우 '마크로스 플러스'같은 웰메이드 성장영화가 있기도 하다. 다만 '마크로스 플러스'에는 로봇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로스 플러스'는 재미가 있다. '제로의 집행인'은 '마크로스 플러스'와 같은 위치를 고수하려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것은 전통이 깊은 시리즈물이다. 그 전통을 즐기는 매니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들을 위한 매력포인트도 집어넣을 수 밖에 없게 됐다. '제로의 집행인'은 소재가 괜찮았으나 이도 저도 아닌 구린 애니메이션이 됐다. 순전히 '고인물' 때문에 혁신을 하지 못한 격이다.

5. 나는 '명탐정 코난'을 즐겨보지 않는(사실 거의 안 본) 사람이기 때문에 '제로의 집행인'의 매력포인트는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남자주인공(코난)은 꼬맹이다. 여자주인공(란)은 얘가 걔라는 걸 죽었다 깨도 모른다(바본가?). 민폐 3총사는 줘 패버리고 싶다. 그렇다면 대체 이 만화는 누구를 보는 재미로 봐야 하는건가? '제로의 집행인'이 내놓은 대답은 '아무로'다. 아는 아무로라면 아무로 나미에랑 아무로 레이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아무로를 알게 됐다. 

6. '제로의 집행인'이 묘사한 '공안경찰'에 대해 진지하게 뭘 써볼까 싶었는데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이 작품이 묘사한 '공안경찰'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영화를 통해서 해도 충분하다. 그저 일본에도 '보이지 않는 검은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만 해보는게 좋겠다. 

7. 결론: 그래도 엔딩 타이틀곡 하나는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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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00 2018.09.06 12:45 address edit/delete reply

    공감이 전혀안됨

  2. ㅇㅇㅇ 2018.12.15 20:38 address edit/delete reply

    애초에 애들만화가 아닌데요 ㅋㅋ
    살인사건 나오고 사람들 죽는게 애들만화ㅋㅋ





적어도 내가 알기론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학벌이나 스펙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직업이다. 토익도 필요없으며 치열한 입사시험 준비나 면접을 준비할 필요도 없는 직업이다. 그야말로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영화감독이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좋은 영화를 만들 순 없다. 그리고 아무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될 수 없다. 영화를 만드는 문은 낮고 만만하다. 그러나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가는 문은 그 어느 곳보다 높고 단단하다. 그 길은 어느 누구의 도전도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영화계에도 꽤 특이한 길로 입봉한 영화감독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국어교사를 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했고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 각본을 쓰다 '초록물고기'로 데뷔했다. 오랜 시간 영화제작자로 살던 이준익 감독은 말 그대로 '어쩌다' 직접 연출을 하게 됐고 이후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던 강윤성 감독은 오랜 시간을 거쳐 '범죄도시'로 입봉하고 흥행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오멸 감독은 공연 기획과 연출을 하다 2009년 '어이그, 저 귓것'을 연출한다. 영화감독이 되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연출부에서 '끔찍한 수준'의 돈을 받으며 일을 하다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좋은 제작자를 만나 입봉하게 된다.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길을 거쳐 영화감독이 된다. 그런 길을 가지 않고 입봉하는 사람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지 않고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금부터 언급하는 한국의 영화판을 '아는 범위'에서 들여다 봤을때 대단히 이질적인 길을 가던 사람이다. 한 사람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비주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다른 한 사람은 프로덕션과 여러 기업에서 영화와 창작 분야의 일을 해왔다. 그리고 그는 웹툰작가가 됐다. 두 사람 모두 영화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이지만 주류 시장에 걸 수 있는 장편 상업영화를 만든 이력은 없다. 그러다 그들은 처음 만든 장편 극영화로 '천만관객'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양우석과 연상호다. 


1969년생인 양우석 감독은 고려대학교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MBC프로덕션과 SK인디펜던스, 올댓스토리, 로커스 등에서 근무했다. 대체로 스토리 기획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임원으로 재직했다. 잘 알려진대로 그는 웹툰 '스틸레인'과 '봉이 김선달' 등을 연재했으며(스토리 담당. 그림은 제피가루 작품) 이 작품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밖에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역시 책으로 출간돼있다. 이력에서 드러나듯 그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구상하는 일을 해왔다. '경력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야기에 대해 "쓰면 쓸수록 는다"는 말은 어느 정도 믿는 편이다. 아마도 양우석 감독은 오랜 시간 '이야기꾼'으로 다듬어졌던 모양이다. 

2014년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은 어쩌면 시대를 잘 타고난 영화일 수 있다. 억압된 시대에 간절한 그리움을 품고 탄생한 이 영화는 좋은 배우와 진중한 각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변호인'의 강점은 절대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을 보여주고 사건에 개입시키다 인물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침착하지만 느리지 않게 쫓아간다. 결코 들떠있거나 흥분되지 않았지만 관객은 지루할 틈도 없이 온전히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점은 '강철비'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북간의 긴박한 대치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사건의 순간에 어디를 보여줘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드라마를 집어넣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양우석의 강점은 철저한 자료조사에 있다. '픽션'을 전달하는 일은 관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없는 일을 마치 진짜인양 관객에게 들려줘서 믿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절대과제다. 거짓말을 진짜처럼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가짜를 뒷받침할 진짜'는 거짓말을 위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양우석 감독은 여기에 대단히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변호인'의 경우에는 거대한 진짜를 끌어와서 세세한 드라마를 더한다. 그 덕에 드라마는 진짜가 되고 이야기는 극적효과를 얻게 된다. '강철비'는 한국과 북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미국 등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려간다. 결과적으로 양우석의 강점은 꼼꼼한 조사와 침착함을 더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볼 수 있다. 


1978년생 연상호 감독은 상명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애니메이션 회사인 한신코퍼레이션에서 근무했다. 1997년에 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연상호 감독은 2004년 스튜디오 다다쇼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그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어둡고 비관적이다. 군대와 학창시절, 종교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는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절망을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애니메이션의 범주 안에서 이토록 극단적인 절망을 추구하는 연출자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울거라 예상된다. 그런 연상호가 실사영화를 만든다고 했을때 관객들은 "생지옥을 실사영화로 보겠구나"라는 예상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좀비영화라고 하니 동쪽에서 해가 뜨듯 생지옥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난해 만들어진 영화 '부산행'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좀비영화다. 게다가 달리는 열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꽤 재밌을만한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연상호의 이야기'다. 우울증 간접체험을 하고 나오기 딱 좋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때 관객들은 꽤 예상밖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연상호가 신파를?"이라는 반응이다. 물론 이 신파는 상업영화에 필요한 윤활제 정도의 역할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부산행' 역시 '연상호'라는 인증마크를 달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였다. 심지어 우리는 한국영화 사상 최악의 악당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용석(김의성)을 직접 만나지 않았던가. 용석의 존재만으로도 우울증 간접체험을 하기엔 충분하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과 실사영화를 만드는 일은 비슷한 듯 하지만 꽤 다르다. 흔히 알고 있는대로 상상한 것을 구현하는데 있어 물리적 한계를 겪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화실에서 이뤄지는 '그림'은 무엇이든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사영화로 넘어가면 자본의 제약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나는 연상호 감독이 '부산행'을 만들며 자신이 상상한 모든 것을 그대로 만족스럽게 구현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다시 한 번 '한국에선 낯선 영화'를 들고 돌아오려는 걸 보면 상상한 것을 실사로 구현하는데 꽤 만족을 한 모양이다. 아마도 그의 차기작 '염력'이 기대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뚝심 때문일 것이다.


양우석과 연상호에게는 꽤 많은 공통점이 있다(NEW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점은 빼자). 우선 이들은 첫 장편영화('변호인'과 '부산행')로 '천만관객'을 돌파했다. 그리고 웹툰(만화)에 참여했으며 애니메이션(만화)을 연출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은 한국영화의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연출부를 통해 영화를 배운 사람도 아니다. 이 말인 즉슨 기성세대의 영화적 전통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영화를 전공했다면 영화판의 선배들에게 배운 경험이 있을 것이고 연출부에서도 선배 감독들의 작업방식을 보고 배우게 될 것이다. 적어도 연상호와 양우석은 영화에 한해서는 누군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력이 없다.

기성 영화인들의 전통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명세나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 입장에서는 기성 영화인들의 활동이 단절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2003년 이후 새로 쓰여진 것 같은 한국영화의 정체성이 꽤 아쉽다. 그 이전의 세대들에게도 분명 배울 것이 있으며 지금의 세대들도 이르지 못한 그 시대, 그 작가의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성 영화인의 전통을 존중하지만 나는 이방인에게도 영화가 열려있길 바란다. 더 많은 상상력이 영화로 구현될때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확보된다. 양우석과 연상호의 영화에는 기성 영화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개성이 있다. 어쩌면 한국영화에 가장 절실한 사람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제작자와 배급사일지도 모르겠다(NEW 광고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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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17 02:00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검색으로 2018.04.07 07:23 address edit/delete reply

    멋진 글입니다





0.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시리즈를 통째로 학습하지 않은 '머글'의 입장에서 글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쥐뿔도 모르는게 나댄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대로 리뷰를 쓰자"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래전 '마크로스 플러스'나 '파이널 판타지:어드벤트 칠드런', '파이널 판타지:킹스글레이브'를 쓸 때도 나는 시리즈에 대한 이해가 없이, 보이는대로 리뷰를 끄적인 바 있다. 

1. 스즈미야 하루히. 얘기는 많이 들어본 분이다. 한때 꽤 우울했다고 말만 들었지 실제로 활약상을 본 적은 없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게 된 계기를 밝힐 순 없지만 정말 우연히 보게 됐다. 일단 시작부터 다짜고짜 추워하는 주인공 쿈(스기타 토모카즈)의 한탄으로 시작한다. '너의 이름은'을 떠올리게도 하는 첫 장면이지만 꽤 아저씨같은 쿈의 목소리 때문에 빠르게 '너의 이름은'은 지울 수 있었다. 이 첫 장면부터 나를 끌어 당긴 것은 다름 아닌 나레이션이었다. 번역을 잘한건지 원래 대사를 잘 쓴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나레이션과 대사들이 처음부터 맛깔나게 이어진다. 내 시선을 끌어 당긴 것은 그림도 목소리도 아닌 대사의 '문장력'이었다. 

2. 영화를 보기 전, 나는 "하이틴 로맨스물치고는 색감이 건조하군"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원색적인, 튀는 컬러감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색감은 더욱 건조한 무채색으로 변했다. 그제서야 깨닫게 된 사실은 "이거...평범한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잖아"라는 것이다. 평행우주인지 타임패러독스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더니 이야기는 갑자기 미스테리 스릴러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히라노 아야)가 사라진 세계'에 떨어진 쿈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딱히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험'이라기엔 그리 신나지도 않는다). 

3. 이 이야기의 플롯이 평행우주와 타임 패러독스라면 이것은 굉장히 끝내주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다. 이전에 등장한 유사한 이야기들을 통틀어 꽤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여기에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전작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연관성이다. 물론 나는 전작을 보지 못했지만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전작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부분이 여럿 관찰됐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전작과 합쳐졌을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이야기라는 것이다. 마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속 이야기의 틈새를 파고들어 메꿔낸, 훌륭한 '보충설명서'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엉뚱하게도 이 이야기를 본 후, 나는 전작이 무척 궁금해졌다. 

4. 아재인 나에게 솔직히 지금 저패니메이션은 다소 부담스럽다. '아키라'나 '공각기동대', '왕립우주군', '3X3아이즈', '시티헌터', '드래곤볼', '북두신권' 등을 보고 자란 나에게 큰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대단히 어색하다. 마치 강경옥이나 박희정 작가의 만화책을 보는 것처럼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이 강하게 든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편견'은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저패니메이션의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스즈미야 하루히'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은 "저것은 내가 볼 작품이 아니다"라는 점이었다. 큰 눈에 귀여운 소녀들을 보면 '팔기 좋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러브라이브'라는 작품의 이미지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과 같다). 우선 나는 이런 편견에 사과해야 할 것 같다. 

5. '스즈미야 하루히'의 이야기가 가진 파괴력을 접하고 나니 저 옛날 사토시 곤의 작품들이 떠오를 지경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사토시 곤을 찬양하는 '덕후'이며 '스즈미야 하루히'는 사토시 곤의 작품들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야기를 비틀면서 지능적으로 풀어가는 능력은 사토시 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작화의 감각적인 표현력은 일부 지점에서 사토시 곤의 작품들보다 앞서기까지 한다. 이쯤되면 대체 내가 어쩌다가 이제서야 이걸 보게 됐는지 안타까울 지경이다. 

6.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드는 이유는, '소실'에서는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스즈미야 하루히에 대해 알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스즈미야 하루히가 사라져버린 이야기다. 이야기의 상당 부분에서 스즈미야 하루히는 사라져 있거나 실제와 다른 아이로 등장한다. 여러 덕후들을 매료시킨 스즈미야 하루히와 나가토 유키(치하라 미노리), 아사히나 미쿠루(고토 유코)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대단히 궁금하다. 

7. 결론: 전작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TV판이라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봐야 할 것 같다. 저패니메이션의 상상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물론 버블경제 시절의 작품들에 비하면 작화가 많이 죽긴 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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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게 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렇다. 문득 "나는 왜 죽는게 두려운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하드에 야동은 지웠는가? 친구에게 빌린 5000원은 갚았던가? 여러가지 생각이 거쳐갔지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다. 내가 죽어서 슬퍼할 사람들 때문이다. 사람들이 슬퍼할 걸 생각하면 "내가 저 사람들 다 죽을때까지는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죽었을때 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는 미련없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생각보다 '죽음'이라는 것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천문학과 출신이 자살률이 높다는 소리가 있다. 우주의 섭리를 알게 되면 인간의 삶이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궂이 이 근거없는 낭설에 첨언을 하자면 '삶을 하찮게 보기'는 우주를 알지 않아도 느끼게 된다. 야마다 나오코의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는 시작부터 삶을 정리하고 죽으려는 주인공 이시다 쇼야(이리노 미유)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우주의 섭리를 알게 돼서 죽으려는 것도 아니고 울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서 죽으려는 것도 아니다. 이시다의 죽음(시도)은 일종의 도주다.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행위다. '삶을 하찮게 보기'는 우주를 알지 않아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삶이 "실패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시다의 삶은 6학년이었던 어느 어린 시절부터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장난치는 것이 낙이었던 이시다의 삶에 니시미야 쇼코(하야미 사오리)가 나타난다. 니시미야는 귀가 들리지 않는 소녀다. 노트를 통해 반 친구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다가가려 하지만 이시다와 우에노(카네코 유우키) 등 친구들은 니시미야에게 거리감이 생긴다. 기어이 니시미야는 반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고 가장 적극적으로 왕따에 가담한 아이가 이시다다. 결국 왕따 사실은 어른들의 귀에 들어가고 니시미야는 전학을 간다. 그리고 이시다는 니시미야가 당했던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 균열은 6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시다를 따라다니게 된다. 이시다의 자살시도가 실패한 뒤 그는 망가진 삶을 바로 잡으려는(?) 막연한 생각에 니시미야를 찾아가게 된다. 삶이 실패했다고 느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망가려했던 순간이 지난 후, 이시다는 그 망가진 삶을 수습하려는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이시다는 6년전 그 사건 이후 외톨이로 지낸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X표시가 된 채 '이시다가 마주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외로운 섬처럼 홀로 지내던 이시다가 망가진 삶을 바로 잡는 것은 새롭게 '인간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 대부분은 이시다가 '인간관계'를 바로 잡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을 감안하면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로 니시미야다. 앞서 말한대로 그녀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다는 말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시작점은 대화다. 니시미야와 그 주변인은 그 지점에서부터 서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니시미야를 통해 이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언어를 통한 소통의 장애'다.



그런데 이 관계에서, 6년전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순간을 돌이켜보면 소통의 장애는 단지 언어의 장애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정작 소통에 장애가 있고 관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니시미야지만 관계에 장애를 겪는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다. 오해하고 갈등하다 등을 돌리게 되고 멀어지게 된다. 이 대목에서 봤을때 관계란, 언어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언어야 말로 소통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것은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영화 '프랭크'를 봐도 알 수 있다. 비언어적 음악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방감을 얻는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의 음악은 문명사회가 개개인에게 주는 압박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목소리의 형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말을 통해 오해를 쌓게 되고 마음을 통해 오해를 풀게 된다. 


그렇다면 왜 '언어'는 '소통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타인의 사정'을 온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언어'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왕따 가해자인 6년전 이시다는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나쁜 짓의 최전방에 서 있다. 이시다는 착하게만 구는 니시미야에게 거부감이 생긴다. 이시다가 나쁜 아이가 된 데는 본인도 잘 모를 속사정이 있다. 니시미야가 대책없이 착하게만 구는데도 속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우에노가 니시미야를 괴롭힌 이유도 있고 이시다의 일행들이 그를 등진 속사정도 존재한다. 그것 역시 누구도 알지 못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말한다. '역지사지'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영화에서 꽤 인상적인 장면 중 불꽃놀이 장면이 있다. 니시미야의 가족들이 이시다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는 장면은 이후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이시다의 주변인들이 각자의 가족과(혹은 홀로) 불꽃놀이를 보고 있다. 이것은 '이시다의 주변인'으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아닌 그들 각자의 영역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시다는 알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영역과 속사정이 존재한다. 친구가 되고 더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은 그러한 영역을 공유하는 일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아마 거기에 지친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관계가 비틀어지고 상처받는 일은 쌓이면 쌓일수록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에게 예민해지게 된다. 나는 때로 "성격이 사납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는게 두려워서 방어하고 싶었던 것이 '공격성'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요즘들어 이게 점점 더 심해진 것 같다. 내가 세워둔 성격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단 경계부터 하기 시작한다. 운이 좋아서 이것을 풀게 될 계기를 얻는다면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부터 만들게 되는 것이다. '목소리의 형태'를 본 후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내가 경계했던, 경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애시당초 마음의 문을 먼저 닫아버린 것도 나였고 경계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공격성을 드러낸 것도 나였다. 정말 피해야 할 사람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목소리의 형태'는 나의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타인과의 관계는 원래 어려운 것이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진득하게 앉아서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과 너의 관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 한 번 봤다고 내 성격(경계심) 자체가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살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도망치고 싶어질 때 이 영화를 떠올리며 위로를 얻게 될 것 같다. '목소리의 형태'는 오래 두고 천천히 얘기하면 좋을 '친구'와 같은 영화다. 



추신) '목소리의 형태' 리뷰


-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 영화는 장면전환이 대단히 감각적이다. 다소 오바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물의 심리에 감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도 훌쩍 뛰어 넘어버리고 어둠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도 한다. 어쩌면 대단히 판타지스럽지도 않은 이 이야기가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감각적인 장면전환이 대단히 절실한 영화였다. 어떻게든 인물의 감정을 화면에 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 니시미야 캐릭터는 그 성장배경을 감안해도 비현실적으로 착하다. 모나게 자랄 수 있었지만 니시미야는 지나치게 착하다. 이런 착함 덕분에 이 이야기는 아주 가끔, 어린 시절 봤던 만화책 'Boys Be...'를 떠올리게 한다. 착해빠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풋풋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사실 교복페티쉬를 자극하는 이야기다). '목소리의 형태'는 이 정도로 극단적인 판타지는 아니지만 니시미야가 착하게 굴 때마다 그때 그 만화책이 떠오른다. 이것은 이야기가 관객의 일상에 전달하는 메시지와 다소 멀어지게 만든다. 한마디로 "현실에 저런 아이가 어딨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새삼 궁금하다. 현실세계에 니시미야같은 친구가 있을까?


-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예쁘고 잘 생겼다(특히 소녀캐릭터들은 미연시 게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죄다 예쁘다). 피규어라도 내놓을 속셈인지 물어보고 싶다. 


- '리틀 포레스트'와 '치하야후루' 이후 눈에 들어오는 배우 마츠오카 마유가 '어린 이시다'의 목소리를 연기했다고 한다. ...그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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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년전 봤던 '신데렐라' 실사영화와 '미녀와 야수'가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두 영화 모두 디즈니 걸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신데렐라'에 대해 내가 했던 말은 "자녀가 있다면 함께 보고 싶은 영화"였다. 물론 릴리 제임스의 연기는 심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영화 자체는 침착하고 진중한 동화라서 좋았다. 


2. '미녀와 야수'는 우선 엠마 왓슨이라는 '대형 스타'가 출연한다. 신예 릴리 제임스와 비교한다면 '거물급 배우'다. 그 덕분인지 국내 흥행성적이 꽤 좋은 편이다. 게다가 작품의 정체성에 걸맞게 진지하고 깊지만 예쁘게 연기한다. 배우만 본다면 '신데렐라'보다 한결 보기가 편하다. 루크 에반스, 이완 맥그리거, 이안 맥캘런, 엠마 톰슨, 케빈 클라인, 스탠리 투치 등 거물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던가. 


3. 헌데 '미녀와 야수'는 상당히 경망스런 연출을 선보인다. 관객들에게 "볼꺼리를 주겠다"는 신념을 가슴깊게 새긴 것처럼 여러 장면에서 '화려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뮤지컬'의 특징이 있었기에 '화려함'은 이 작품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몇몇 장면은 "굳이 저 정도로 화려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시계나 촛대 등 소품들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라던지, 마을주민과 소품들의 난투극이라던지. '미녀와 야수'는 화려한 장면이 굉장히 많다. 벨의 식사장면이나 개스톤(루크 에반스)을 소개하는 선술집 노래장면 등, 힘 줘서 강조한 장면들은 매우 멋지다. 하지만 '강약 조절'에는 확실히 실패한 느낌이다. 앞서 '신데렐라'에 대해 "자녀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라고 했는데 '미녀와 야수'는 자녀와 봤다가는 빠른 시일 내에 아이의 안경을 맞춰줘야 할 것 같다. 


4. 이 와중에 '미녀와 야수'는 의외로 심각한 이야기를 건네는 지점이 많다. 이미 개봉 전부터 게이 캐릭터로 논란이 된 르푸(조시 게드)를 포함해서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성 안의 소품들이 신선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 모든 캐릭터들은 성 안에서 무도회를 벌인다. 나는 이 장면이 마치 '숏버스'의 클라이막스처럼 느껴졌다. 인종과 성별, 계급을 초월한 범 인류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평화로웠다. 정작 이 영화의 비주얼은 아이들을 겨냥한 듯 '지나치게' 화려하지만 이야기의 속내는 매우 진지해서 정체성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는 개봉불가 판정을 받고 러시아에서는 16세 이상 관람가로 상영한다. 물론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5. '미녀와 야수'에는 여러 재미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개스톤이다. 처음에는 그저 '덜 떨어진 마초' 정도로 보였으나 이야기 후반으로 갈수록 꽤 악랄한 악역이 된다. 물론 그가 야수를 그토록 증오하는데 개연성은 부족하지만 야수(댄 스티븐스)와 벨의 사랑에 강력한 위협이 되면서 극의 재미를 준다. 특히 루크 에반스 같은 진지하게 생긴 배우가 어린이 영화에서 '덜 떨어진 마초'를 연기하니 상당히 어색했다. 다행스럽게도 후반부로 가면서 이 어색함은 사라졌다. 


6. 가끔 CG가 과한 영화를 보면 "차라리 애니메이션으로 부르는게 낫지 않나?"라고 생각을 한다. '미녀와 야수'도 그 중 하나다. 'Be Our Guest'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엠마 왓슨의 얼굴도 CG로 처리한 듯한 장면이 보인다. 확실히 그 대목은 화려하고 멋있는데 만화같았다. 이것도 나름 논쟁꺼리가 될 지 모르겠다. "블루스크린 위에 모션캡쳐로 만든 캐릭터가 연기를 한다면 이것은 영화인가 만화인가? 스크린 안에 그 무엇도 실사를 찍은 것이 없는데..."


7. 엠마 왓슨을 포함해 다들 노래를 잘한다. 그 덕분인지 '라라랜드'에서 엠마 왓슨이 연기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대단히 어울리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옅게 남아있는 그 영국식 영어가 L.A.를 배경으로 어떻게 들릴지는 잘 모르겠다. 루크 에반스도 굉장히 노래를 잘한다. 젊을때 뮤지컬 좀 해 본 모양이다(그의 과거는 잘 모르겠다). 


8. 앞서 이 영화가 지나치게 경망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은 단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가장 큰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야수가 야수의 얼굴을 해도 너무 잘 생겼다는 점이다. 저 정도 야수의 얼굴이라면 벨이 거부감을 갖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귀엽기까지 하다). 차라리 '엑스맨'에 등장한 비스트(니콜라스 홀트)가 더 '야수'스럽다. 그 잘생긴 니콜라스 홀트를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미녀와 야수'의 야수도 더 무시무시한 야수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어린이 관객들이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에 '샤랄라'하고 인간으로 돌아오면 또 잘생겨지니 말이다. 


9. 결론: 어린이 관객은 어린이 관객대로, 어른 관객은 어른 관객대로 만족할만한 영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소 어지럽게 관람할 수 있다.



추신) 디즈니 명작 애니메이션의 실사화가 앞으로도 진행된다면 나는 '환타지아 2000'의 실사화가 보고싶다. 정말 끝내줄 것 같다. 물론 풀CG로 가야 할 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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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과 '부산행'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두 작품의 연결고리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두 작품의 리뷰는 별개로 놓고 써도 무방하다. 하지만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연상호 감독은 서울역에서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에서의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분명 두 작품은 세계관 외에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화두가 있을 것이다. 그 화두를 추적하는 것은 퍼즐처럼 나눠져 있는 디스토피아를 더해서 '한국식 아포칼립스'를 마주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서울역'과 '부산행'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는 '좀비'라는 재앙이 나타나면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좀비인지 이 사회의 질서인지 헷갈리는 지옥도를 그려놓고 그게 이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의 진짜 공포는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불안에서 시작된다. 그 불안은 이 사회의 질서와 사람들의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두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화두가 있다. 바로 '가족'과 '울타리'에 대한 것이다. 이 화두에 대해 두 작품은 대단히 상반적인 입장을 취한다. 마치 '붕괴된 가족'과 '붕괴되지 않은 가족'으로 나뉘어 비교·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사회에서 가족 역학에 대한 보고서를 보는 것과 같다. 



'서울역'은 모조리 '붕괴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가출소녀와 그녀의 성매매를 알선해 돈을 챙기려는 남자친구, 그리고 그 주변의 관계. '서울역'에서 '붕괴된 가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집이 없음'에서 드러난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의 공통점은 "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혹은 불완전한 '가족'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서울역'의 주요 이야기는 '딸'을 찾으려는 석규(류승룡)와 '아빠'를 찾으려는 혜선, 여자친구를 찾으려는 지웅(이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족을 찾으려는 자들의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구도 '가족'을 찾지 못한다. 혜선의 아빠인 척 등장한 석규는 아빠가 아니고 혜선에게 빚을 받으러 온 포주다. 사실상 기웅과 별 다를 바 없는 입장이다. 기웅이 혜선을 애타게 찾은 이유는 혜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두려움 때문이었고 극한상황 속 '일말의 인간성'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지만 '가족같은 정'이 피어날 부분은 찾기 어려웠다. 아마 두 사람이 운 좋게 살아남아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기웅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연상호의 세계관'이라면 말이다. 


혜선과 기웅, 석규가 만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이다. 72평형 이상의 고급아파트를 전시해놓은 모델하우스에서 이들은 다시 만난다. 부르주아의 상징과도 같은 이 집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집'이다. 다시 말해 '보여주기식 가족'인 것이다. 이 가짜 울타리 안에서 이들은 최악의 비극을 마주한다. 가족이 될 것만 같았던 이들은 누구도 가족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를 갖는 것만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를 얻어 '84평형 고급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자신들의 울타리인지, 혹은 다림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은 불안한 울타리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집과 함께 또 다른 울타리인 '가족'은 이름 뿐인 가족인지, 혹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견고한 울타리인지. '서울역'은 '집'이라는 울타리를 잃은 자들의 비극이다. 그런데 그들은 '집'이라는 공간이 없어 비극에 처한 것인가, 아니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서 비극에 처한 것인가. 영화가 끝날 즈음, '형님'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아저씨가 더욱 애잔해 보일 것이다. 



반면 '부산행'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확실히 드러난다. 석우(공유)의 가족은 '엄마의 부재'라는 불완전한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수안(김수안)이라는 끈을 중심으로 근근히 이어져있다. 사실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가족의 끈은 희망적이다. 상화(마동석)와 성경(정유미)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가족이다. 영국(최우식)과 진희(안소희), 그리고 야구부는 '팀'이라는 끈으로 묶인 관계다(이들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봐도 무방하다). 


'부산행'은 이처럼 단단한 끈으로 묶인 '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에는 가족이 부재한 용식(김의성)을 중심으로 한 부조리와 고난이 따른다. 용식은 주변 사람들을 가지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관계란 '필요'에 의한 것일 뿐 '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필요'에 의해 사는 사람은 '정'에 의해 사는 사람들을 고난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는 운수회사의 임원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정'에 의해 사는 소박한 가족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모양새다. 


자본주의 또 다른 정점에 있는 펀드매니저 석우는 이 질서에 훈련된 일개 병사일 뿐이다. 사실 그 역시 극 초반에는 용식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석우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너무 착한 딸 수안(가족) 덕분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석우의 인간성을 끝까지 지킬 수 있게 해준 것은 수안(가족)이다. 


그렇다면 이 '가족'의 생존기는 성공했을까? 영화 초반에 설정된 가족은 사실상 완전 붕괴됐다. 좀비와 부조리라는 '대재앙'은 울타리가 없는 자에게는 인간성의 끝을 보여줬고 울타리가 있는 자에게는 그 울타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부산행'에서는 기어이 성경과 수안이 살아남아 새로운 울타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보여준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화두와 이어지는 대목이다. 



이제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결론에 마주할 수 있다. '부산행'이 개봉했을 당시 관객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재미는 있는데 '신파'가 거슬린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즉, 관객들 중 상당수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족애'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몇 가지 '부조리'에는 현실감을 느꼈다면 석우와 수안의 가족애에는 "영화다"라는 생각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보고 있었다. 


반면 '서울역'은 조금 더 체감해서 느낄 여지가 있다. 당장 서울역을 한번이라도 이용해 본 관객이라면 만난 적이 있을 노숙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석규와 혜선, 지웅의 이야기는 일주일에 4회 이상은 뉴스로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리고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장면 역시 대단히 낯이 익다. 즉 '공감'이라는 기준으로 봤을때 슬프지만 '부산행'보다는 '서울역'이 관객과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이들 두 개의 이야기는 어떤 실험처럼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마치 한국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내구성을 점검하는 것과 같다. 마치 자동차의 내구성을 점검하기 위해 폭우와 폭설, 고온, 저온 등 다양한 조건에서 테스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울타리를 다양한 악조건에 놓고 실험한다. 이 악조건이란 현재 한국사회의 부조리들, 그리고 좀비라는 재앙이다. 실험결과 이 울타리의 내구성은 그리 강하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조건에서 실험했을때 외부충격에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으며 균열에 대한 복원성도 약한 수준이다.



사회부 뉴스를 펼쳐보면 우리는 '붕괴된 가족'의 비극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사건은 신문의 1면을 장식하며 수사과정과 범인의 뒷이야기가 연일 보도되곤 했었다. 그만큼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그 범죄는 점점 더 잔혹해지고 기상천외해진다. 


그 가족들에게는 어떤 '외부충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외부충격이 가해졌을때 혜선의 친아버지처럼 딸을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애시당초 불완전한 형태로 구성된 가족(석규와 혜선)은 예고된 비극으로 향하기 마련이다(석규의 대사 중 "거기 애들이 다 나를 아빠라고 불러"라는 부분이 있다). '서울역'이 보여준 비극은 사실 뉴스 사회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가족의 비극'이었다. 정작 그 중요한 순간에 좀비는 나타나지 않고, 모든 일은 집(모델하우스)에서 벌어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부산행'과 같은 가족을 꿈꾼다. 아빠는 성공한 아빠(석우)거나 듬직한 아빠(상화)이길 바랬을 것이고 자녀는 한없이 착하길(수안)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족의 이야기를 관객은 '단지 영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을 버린 아빠(혜선의 친부), 혹은 자식을 팔려는 아빠(석규) 혹은 남편(지웅)만이 남아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판타지에 이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관객에게 내던졌다. 만약 관객이 '서울역'의 비극에 대해 '부산행'의 판타지보다 단 1%라도 더 가깝게 느꼈다면 그것이 우리의 '가족'과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즉 이 두 개의 이야기는 관객에게 "당신 가족의 울타리는 견고합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 가족의 울타리가 견고하다면 참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구성이 의심스럽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 균열을 보수해야 할 것이다. 이들 두 이야기는 서슬퍼런 경고와 같다. "좀비와 마주했을때, 당신의 가족은 서울역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부산행 열차를 탈 것인가?"



추신) '부산행'과 '서울역'이 갖게 될 흥행의 차이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큰 차이는 "이것이 편하냐, 안 편하냐"의 차이다. 아무래도 비극에 가까운 만큼 '서울역'이 관객들에게는 더 불편한 이야기다. 그리고 '부산행'이 관객들에게는 더 영화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영화라는 거리감 때문에 더 편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가 있는가 하면 우리의 민낯을 너무 적나라하게 까발려서 불편한 영화가 있다. 아마 '서울역'이 흥행을 하지 못한데는 이 '불편함'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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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풍자'라는 걸 할 줄은 몰랐다. 이 친구들 풍자에 상당한 소질이 있다. 게다가 이 풍자는 미국과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도 꽤 오싹하게 다가온다. 사실 이 영화가 정말 무서운 건 '악당'이 아니라 분열을 통한 통치방식이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들끼리 서로 치고 받게 하는 것은 권력자가 가장 쉽게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기득권자에게 국민 개인은 전혀 두렵지 않다. 집단으로 모여 목소리를 낼 때 이들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 집단이 아무리 모여도 더 커지지 않고 그에 반하는 세력 역시 비슷한 크기로 존재한다면 권력자는 국민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흔히 '국민'이라는 이름을 판다. "국민이 원하고 있다", "국민을 위해" 등. 분명 이들이 말하는 국민은 정말 대한민국 국민이다. 물론 자신들을 지지하는 국민만 해당된다. 국민이 분열될 경우 정치인은 이와 같은 명분을 갖는다. "나 역시 (나를 지지해주는)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국가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국민을 속이고 자기 잇속을 챙기는 탐욕스런 정치인마저 이같은 명분을 갖게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국민의 여론이 통일되는,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토피아' 역시 그런 세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대로 국가는 개인의 의견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집단화돼서 다른 집단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홀딱 벗고 생활하는 동물의 권리도 존중돼야 하고 나무늘보의 라이프스타일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옷을 입는 동물이 옷 벗은 동물을 억압할 권리는 없다. 


유서깊은 호러영화 중에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있다. 여러차례 리메이크 된 영화지만 가장 최근에 리메이크된 '인베이전'은 역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집단 간의 갈등이 사라진 세상의 비인간성'이라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과 갈등이 사라진 세상이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일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국론을 강제로 통합시킨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주토피아'는 국가의 분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베이전'처럼 국론의 강제적 통합 역시 경고하고 있다. 이 영화가 지향하는 세상은 싸우더라도 화해할 줄 알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이다. 물론 나무늘보가 시속 185km/h로 달리는 것은 다른 동물을 위협하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나무늘보라도 가젤의 노래에 맞춰 춤 출 권리는 있다. 법은 법이고 처벌은 처벌이고 권리는 권리다. 누구나 국민이라는 소리다.


'주토피아'가 놀라운 이유는 이런 이야기가 다문화 국가인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주토피아'가 묘사하는 세계는 미국과 완벽하게 닮았지만 그 곳에서 국론의 분열과 대립을 걱정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여러 수십개로 찢어진 게 아닌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둘로 갈라진 것 말이다. 사실 '라스트홈'같은 자본주의적 분열과 먹이사슬이라면 납득이 갈 지 몰라도 '주토피아'같은 원초적인 분열을 미국 내에서 고민한 것은 의외다. 이 이야기는 '인종차별'과도 다소 패턴이 다르다. 말 그대로 이것은 '주토피아'에서의 이야기지만 의외로 미국보다 한국에 더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추신1) 내가 어디가서 "'주토피아'는 애들영화 아니냐"고 말하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애들영화 아님"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나는 진심으로 이 영화는 애들이 봐야 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때는 싸우더라도 화해할 줄 알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추신2) 문득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여성상'이라는 주제로 기획글을 써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글은 나보다 트위터에서 떠들기 좋아하는 모 평론가가 쓰는게 어울리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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