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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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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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해당되는 글 1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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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두' 초간단 리뷰
  2. 201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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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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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에 무주산골영화제를 갔을 때 몹시 추운(6월 초) 와중에도 야외에 앉아서 심야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영화는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이었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인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라이브 음악공연과 함께 정말 무성영화 느낌을 내면서 봤다. 몇 개의 영화제에서 무성영화를 다시 틀면서 그때의 느낌을 재현하긴 했지만 온전한 무성영화의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긴 어려운 일이다. 무성영화에 추억이나 향수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거의 100년 전의 추억인 만큼 대부분 고인이 됐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무성영화는 그 온전한 모습 그대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다만 무성영화만이 가능했던 특징들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에게도 좋은 자산이 될 것이다. 

2. 김태용 감독의 '꼭두'는 영화와 공연 중 어느 카테고리에 두기가 어렵다. 이 작품은 포스터의 카피 그대로 '영화를 만난 국악'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에서 브릿지 영상을 넣는 경우는 많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연극을 연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활용될 뿐이다. 그러나 '꼭두'는 그런 개념과 다르다. 여기서 영상은 단순히 브릿지 개념이 아니라 극의 일부로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전체 이야기 중 저승의 챕터는 연극으로, 이승의 챕터는 영화로 구성돼있다). 게다가 이것은 영화를 살리기 위해 연극적인 연출을 활용하고 연극을 살리기 위해 영화적인 연출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저승의 수민이(김수안)가 추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로 그려지는가 하면 이승의 할머니가 저승의 수민이를 찾는 장면도 유기적으로 이어져있다. 이것은 영화와 공연의 가장 완벽한 '크로스오버'인 셈이다. 

3. 사실 돌이켜보면 태초의 영화는 공연과 영상의 크로스오버였다. 훗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운드(음악)가 영화의 일부로 녹아들었지만 태초에 그것은 영화와 별개의 독립된 예술이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미술, 패션, 문학 모두 독립된 예술이었다. 내 의식의 흐름은 이 지점에서 다소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영화만의 순수한 예술 영역은 있을까?".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나니 '편집'이라는 영역이 남는다. 초기 영화에서의 거장들은 대체로 '편집'을 통해 자신만의 표현을 해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괴팍한 결론이긴 하지만 나는 '꼭두'를 보면서 영화에서 편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영화를 치장한 것을 다 걷어내고 나면 영화만의 자산으로 남는 것은 편집 뿐이기 때문이다.

4. 이제 '꼭두' 이야기를 해보자.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꼭두이야기'라는 영화가 걸리면서 부터다. 김태용 감독이 연출하고 김수안, 조희봉이 출연한 이 영화는 사실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공연을 보고 나서야 잡은 감은 "'꼭두이야기'는 공연 '꼭두' 100% 영화로 만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실제로 공연 '꼭두'에도 마지막 장면은 무대 위에서 영화로 그려낸다. 영화 '꼭두이야기'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객석에서 저 멀리 무대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꼼꼼하게 배우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무대가 주는 웅장함을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할 것 같다. 

5. '꼭두'를 이야기하면서 '신과 함께'를 빼놓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둘 다 저승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꼭두'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만큼 어린이의 상상력에 기인한다. 그래서 '신과 함께'에 비한다면 갈등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그래서 어른이 본다면 다소 심심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이 심심함은 음악과 공연으로 충분히 상쇄된다. 공연은 국립국악원의 정체성에 걸맞게 국악공연이다. 국악기와 한국무용, 창(唱)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국악공연이다. 그러나 화려한 것은 기본이고, 멜로디가 현대적이다. 영화음악감독인 방준석 감독이 참여한 탓에 블록버스터 영화음악의 느낌이 강하다. 당연히 웅장함은 커지고 관객들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6. 나는 이야기의 심심함과 별개로 '꼭두'의 세계관이 마음에 든다. 어차피 죽음 이후의 세계는 가보지 않은 이상 누구도 알 수 없고 증언해줄 수 없는 곳이다. 기왕에 그런 세계라면 불편한 마음으로 접근할 이유가 없다. 간단하게 말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신과 함께'와 같다면 사는 것도 괴롭고 죽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물론 '신과 함께'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바탕으로 인간사의 복잡한 알고리즘을 말하는 영화다. 게다가 다이내믹한 이야기와 화려한 특수효과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나는 '꼭두'를 보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하다. 사람들은 "'패딩턴'을 보면 마음이 정화될 것"이라고 말한다(내 경우에는 아니었지만). '꼭두'를 보면 그 기분이 대략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심심한 이야기가 꼭 재미없으란 법은 없다. 일단 '꼭두'는 재밌다.

7. 어린 나이에 연기를 하는 배우들 자체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 나이 때 엄마한테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기나 했지"라고 생각하면 연기하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대견스럽다(물론 그 와중에도 "어서 빨리 다른 길을 찾아야 할텐데" 싶은 아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벽속에 숨은 마법시계'의 걔들이라던지...). 다만 나는 저 아이들이 온전히 커서 성인연기자가 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아역배우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100% 지지를 보내진 않으려고 한다. 아이로써 가능성을 존중하고 싶어서다. 김수안이라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차이나타운'에서였다. 꽤 강렬한 인상이었지만 온전히 배우가 될 지 두고봐야 할 일이었다. 그때의 수안이는 '배우'였으나 '스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8. '꼭두'에서 무대에 선 김수안을 보고 든 생각은 'Natural Born Actress'였다(아이돌 팬들이 아이즈원의 장원영을 보고 'Natural Born Idol'이라고 한다). 마치 무대가 놀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무대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나 싶었다. 사실 영화에서도 그렇게 즐겁게 연기하는 아이를 본 기억이 없다. '꼭두'를 보고 확실해졌다. 김수안은 연기를 즐기는 아이다. 재능이 있고 없고 열심히 하고는 나중의 문제다. 일단 이 아이는 지금 연기하는게 즐겁다. 그거면 됐다.

9. 결론: 만약 누군가 "'꼭두'는 영화인가, 연극인가"라고 물어보면 나는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 자식입니까, 어머니 자식입니까?"라고 되물을 것이다. '꼭두'는 영화라는 아버지와 연극이라는 어머니가 낳은 자식이다. 아주 대단한 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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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만화 '슬램덩크'는 농구를 가지고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0대 이상의 남자들에게 가슴 속 뜨겁게 차오르는 열정을 불어 넣어준, 의미있는 대작 만화책이다. 이 작품의 드라마적 재미는 여러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한 지점은 역시 강백호와 서태웅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다. 둘의 캐릭터와 능력은 완전 딴판이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헐리우드 형사 버디무비의 주인공들처럼 끊임없이 싸운다. 그러면서도 팀의 승리를 향한 열망은 둘의 유대감으로 작용하면서 중요한 순간에 눈부신 콤비플레이를 펼친다. 작가도 꽤 공을 들인 것 같은 두 사람의 '케미'는 이 작품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배우에 대한 리뷰를 쓰기로 하고선 뜬금없이 '슬램덩크'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신인여배우에 대한 인상이 마치 강백호와 서태웅같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은 장선과 최희서다.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아마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를 것으로 추측해본다). 한 배우는 오랜 시간 무명배우로 영화판에 머물다가 어느 중견감독의 메인프레임 영화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다. 아무리 '맛이 간' 대종상영화제라지만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엄청난 성과도 보여준다. 여기에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까지 거머쥐며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올해 최고의 신인여배우'에 이름을 올린다. 다른 한 여배우는 영화보다는 연극배우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2015년 한 인디영화에 출연해 그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다. 올해도 그녀는 한 인디영화에 조연으로 얼굴을 내민다. 크게 흥행하지 못한 영화지만 그녀는 꽤 괴랄한 캐릭터를 너무 능청스럽게 소화해낸다.


앞서 말한 배우는 최희서다. 올해 이준익 감독의 '박열'에 출연해 주인공 이제훈보다 더 주목을 받은 배우다. 사실상 '올해의 신인'은 그녀로 낙점이 찍힌 상태다. '박열'을 뒤늦게 본 만큼 나는 이제서야 그녀를 발견하게 됐다. 최희서가 연기한 가네코 후미코를 보고, 나는 서태웅을 떠올렸다. 서태웅은 '천재루키'다. 기술과 체력을 고루 갖춘 그는 모두가 주목하는 차세대 에이스다. 최희서의 기술은 대단히 정교하다. 그녀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사실상 일본인이 되기 위해) 한 노력들은 그녀가 보여준 기술의 일부에 불과하다. 익살스럽던 후미코의 눈빛이 돌변하는 순간, 갑작스럽거나 티나게 변하지 않는다. 감정과 눈빛이 변하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고 당당한 여인인 후미코가 박열(이제훈) 앞에서는 여린 여자가 된다(그 가운데 당당함도 잃지 않는다). 

후미코는 감정의 변화가 심한 인물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미쳤다'고 말하겠지만(극 중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만) 적어도 관객들에게는 그녀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모두가 후미코와 거리를 두더라도 박열과 불령단, 그리고 관객들은 후미코와 거리를 두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감정 변화가 정신병자처럼 갑작스러워서는 안된다(만약 그랬다가는 우리는 '23아이덴티티' 이후에 또 다른 다중인격 영화를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후미코의 표정과 감정, 태도가 바뀌는 모든 장면에서 '돌변'이라는 느낌이 아닌 '자연스러움'이 보여져야 한다. 최희서는 그것을 너무나 완벽하게 해낸다. 표정이 변하는 순간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기술을 구사하는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농구에서의 몇 가지 개인기(농구를 별로 안 좋아해서 이름은 잘 모르지만)들도 체력이나 그것에 기반한 스피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최희서 역시 시종일관 눈빛을 유지하고 얼굴 근육을 유지하며 표정을 바꾼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우선 후미코 자체가 에너지가 넘치는 여인이다. 이 에너지는 결코 가볍게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꽤 묵직할 수 있는 '박열'의 이야기에 청량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는다. 결코 지고지순한 여인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적인 여인 '후미코'로 자리를 지킨다. 후미코가 지켜야 할 위치를 고스란히 연기해낸 셈이다. 


'에너지'라면 이후 이야기 할 장선도 빠지지 않는다. 앞서 최희서를 서태웅으로 표현했으니 장선은 당연히 강백호다. 올해 관람한 그녀의 출연작 두 편('소통과 거짓말', '해피 뻐스 데이')에서 그녀는 굉장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소통과 거짓말'의 경우 어둡고 음침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장선의 역할은 거의 70% 이상이다. 스스로 엄청난 슬픔의 심연으로 빠져든 탓에 영화 전체를 무겁게 만들어버리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아우라'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지만 장선의 경우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장선이 연기한 인물은 슬픔의 가장 깊은 곳에 빠져들다 그 너머의 광끼를 마주하고 거기에 사로잡히는 인물이다. 이미 이 여인은 목소리와 손짓 하나까지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일상적인 대화조차 심연 너머의 허망함을 담아낸 목소리로 보여주고 있다. 

'해피 뻐스 데이'에서는 둘째 아들 성일(이주원)의 여자친구 정복 역할을 맡았다. 크게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일순간 툭툭 던지는 웃음소리는 주인공 선영(김선영)과 함께 관객들의 혈압도 높여준다.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일은 뭐든지 다 귀찮다는 듯 에너지를 빼버리고 연기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귀찮음'이다. 이는 선영의 '다급함' 혹은 '절박함'과 부딪혀 정복의 캐릭터를 완성하게 된다. 정복은 이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비호감'이어야 한다. 그래야 정복의 불량스러움이 한껏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극 후반부에 발산하게 되는 정복의 폭발(짜증)에도 힘을 실을 수 있게 된다. 영화 '해피 뻐스 데이'는 온갖 괴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괴랄하고 아픈 가족이야기다. 장선이 연기한 '정복'은 이 괴랄한 캐릭터들의 향연 속 독보적으로 눈에 띈다. 

장선에 대해 놀란 것은 두 영화를 본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만난 모습의 영향도 있다. 물론 모든 배우가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닮아야 할 이유는 없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과격한 역할을 자주 한 배우 마동석도 알고 보면 순박한 남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캐릭터 바깥에서 만난 장선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작품 속 역할이 그토록 극단적이었다면 적어도 그것을 연기할 수 있는 대범함 정도는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꽤 낯도 가리는 것 같고 발랄한, 스크린 벗어나서 다른 공식석상에 서면 별로 끼가 없는 여느 배우의 모습과 똑같았다. 대체 저런 배우가 얼마나 집중해야 '소통과 거짓말'의 그 모습이 나올 수 있는지, 나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개 관객으로서 두 신인 여배우에 대한 기대를 적는 걸로 끝을 맺겠다. 최희서는 오랜 시간 조연으로 머물다 '박열'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올해 가장 뜨거운 신인이 됐다. 필모그라피 상에는 '박열' 다음 작품으로 '옥자'가 적혀있지만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다음 주연작'이다(이 정도로 떴으면 지금쯤 읽어야 할 시나리오가 산더미일 수 있겠다). 부디 어느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건 자기 역량을 최대한 펼칠 수 있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영화계는 여배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많지 않다. 만족스러운 책(=시나리오)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하길 바란다. 이 배우를 마음껏 스크린에 풀어놓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부디 본인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책을 고르길 바란다.

장선은 '해피 뻐스 데이' 이후 올 연말 하나의 연극을 했다('썬, 시연, 보엠'이라는 공연이다). 일단 그녀가 영화에 더 뜻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출연한 '해피 뻐스 데이'와 '소통과 거짓말'은 모두 이승원 감독의 작품이다. 만약 그녀가 영화에 더 뜻이 있고 이승원 감독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작품이 무엇이건 기대하게 될 것 같다. 이 여배우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 즉 그녀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역할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역할을 던져놔도 그녀는 역할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빠져들 배우다. 영화건 연극이건 드라마건, 나는 그녀의 다른 작품이 보고 싶다. 자신이 연기할 공간을 마음껏 휘젓다가 림에 공을 '두고 오는' 멋진 모습을...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배우가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최희서는 만인이 인정하는 '올해 가장 압도적인 신인'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단연 압도적이다. 이런 배우가 1년에 한 명 나온다는 다소 서글플 것 같다. 장선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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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오 2018.01.17 17:20 address edit/delete reply

    배우 장선에 주목해본다





1. 극장 직원에게 표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섰을때 처음 눈에 들어온 무대. 앙리 할아버지(신구)의 아파트. 기대했던 작품이었지만 꽤 심심한 아파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간혹 보아왔던 몇 편의 연극에서는 꽤 세련되고 심플한, 혹은 비밀스런 느낌을 담은 무대들이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그에 반해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간결하고 다소 심심해 보이는 무대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극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확신하게 됐다. 앙리 할아버지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세트는 절대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2.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이반 칼베락의 영화 '미스터 앙리와의 조금(?!) 특별한 동거'를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2015년작이며 국내에는 2016년 개봉(?)한 바 있다(솔직히 전혀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극장에는 걸지 못한 모양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고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고집불통 할아버지 앙리와 발랄한 대학생 콘스탄스(박소담)가 우연히 한 집에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캐릭터가 전혀 다른 두 인물을 같이 붙여놓고 아웅다웅 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흔한 전개다. 그런데 또 언제 봐도 재미가 있는 설정이 이런 '아웅다웅물'이다. 

3. 그런데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단순한 아웅다웅에서 한발 더 전진한다. 거의 '사랑과 전쟁'에 버금가는 대담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아마 혹자들은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가 꽤 위험해진다. 그런데 또 아주 절묘하게 이 '위험한 이야기'는 '가족의 화해'를 지나 '앙리 할아버지와 콘스탄스'의 우정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참 엉뚱하고 혼란스러운데 기어이 말미에는 이게 앞뒤가 맞아버린다. 

4. 생각해보면 이 연극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 코미디영화의 정통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다스럽고 혼란스러운데 이야기는 과감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신없는 프랑스 코미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정신없어서'다. 이 말대로라면 나는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도 대단히 별로로 보는게 맞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이 연극을 정말 재밌게 봤다. 연극을 보면서 그렇게 배 잡고 뒤집어지다 나온 기억은 장진 연출의 '꽃의 비밀' 이후 처음인 것 같다(수현재씨어터 광고글 아님).

5. 우선 이 연극의 매력포인트는 '츤데레' 할아버지 앙리에게 있다. 매번 투덜투덜대지만 의사소통과 감정표현에 서툰 사람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각별하다. 박소담이 연기한 콘스탄스는, 아마 그녀의 필모그라피에 있는 모든 캐릭터 중 가장 밝고 명랑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신데렐라와 네명의 기사'의 은하원보다 더 명랑하다). 정확히는 명랑하다 못해 엉뚱하고 서툰데다 거침없다. 이런 콘스탄스가 앙리 할아버지의 집에 세들어서 산다. 당연히 조용하진 않을 것이며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6. 젊은 소녀와 할아버지의 우정은 사실 '스포일러'라고 할 게 없을 정도로 결말이 뻔하다. 미래로 가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할아버지가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앙리 할아버지와 나'도 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조금 특별하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의 '우정'을 정면에 드러내면서 꽤나 가슴 뭉클하게 결말을 맺는다. 마치 이 결말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앞에 그렇게 웃겼나 싶을 정도다. 

7. 앞서 말한대로 앙리 할아버지는 투덜대고 까칠한 '츤데레' 할아버지다. 그런데 이날 앙리 할아버지를 연기한 신구 배우는 푸근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다(혹은 가정법원에 어울리시는 분). 물론 그 분이 '츤데레' 할아버지로 변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아주 멋지게 변신을 해낸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연극을 보고 이순재 배우의 앙리 할아버지가 너무 궁금해졌다. 까칠한 할아버지를 자주 하시던 분이 까칠함이 극대화되는 이 캐릭터를 연기하면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해졌다. 

8. 콘스탄스는 참 밝은 아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보면 볼수록 이 '밝음'은 불안을 감추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콘스탄스는 불안한 아이다.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탄 1시간30분 동안 기차 안에서도 그녀는 계속 불안했을 것이다. 실제 그녀가 갖는 불안은 이야기 속 갈등이 되는 불안과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 되는 불안 덕분에 그녀 내면의 불안이 뿜어져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콘스탄스는 앙리 할아버지와 아들 폴(조달환), 며느리 발레리(김은희)의 갈등이 해결되는 순간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기 시작한다. 

9. 사실 이 연극을 보고 '우리 사회에서 노인과 젊은이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볼까 했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세대를 초월한 따뜻한 우정과 화해를 느끼는게 이 연극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중파에서 하는 주말드라마의 시놉시스에 꼭 등장하는 말이 '가족의 화해와 사랑'같은 것이다. 나는 그 주말드라마가 무엇이 됐건 시놉시스가 '앙리 할아버지와 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극은 주말드라마같은 갈등과 화해와 사랑이 있다. 이게 꽤 '구식'이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어머님들이 즐겨보는 드라마는 사실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한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그 정도 막강한 재미를 가진 작품이다. 

10. 결론: 프랑스 코미디영화는 사실 한국에서 인기가 없는 편이다. 다소 수다스럽기도 하고 정신이 없기도 하다. 그리고 너무 과감한 전개로 한국 관객의 정서에 부합하지 못하기도 한다. 다행히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대단히 한글패치가 잘 돼있는 작품이다. 한국 관객들이 즐기기에 부담없는 작품이며 유쾌하고 따뜻하게 즐기다 돌아오면 될 것 같다. 꽤 편안한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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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의 영화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장편 데뷔작 '파이'부터 최근작 '노아'까지 시종일관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지식을 향한 욕망('파이') ▲행복을 향한 욕망('레퀴엠') ▲영생을 향한 욕망('천년을 흐르는 사랑') ▲최고를 향한 욕망('더 레슬러') ▲완벽을 향한 욕망('블랙스완') 그리고 ▲신앙에 이르기 위한 욕망('노아') 등이다. 그의 영화에서 성취로 이르는 욕망의 길은 파멸과 희생이 따른다. 때로는 완벽한 실패로 고통받기도 하고 때로는 상실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아를 잃어가며 성취하기도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소유하지 않아서 이르게 되는 길을 보여준다. 그것을 흔히 '열반'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얻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다. 

남연우 감독의 영화 '분장'은 이르지 못한 길에 이르려는 자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것은 '블랙스완'의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보여준 것 같은 '완벽을 향한 욕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오송준(남연우)은 연극 '다크라이프'의 주인공 주디에 이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자아가 혼란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송준이 이르려는 욕망은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동화되려는 완벽 외에 하나가 더 존재한다. 송준이 욕망했던 또 다른 길, 쉽게 얻을 수 있고 이를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 바로 '이해'다. 

연극배우 송준은 어렵게 노력한 끝에 유명 연극 '다크라이프'의 주인공 주디 역에 도전한다. 주디는 극 중 트랜스젠더 역할이다. 송준은 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트랜스젠더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들의 커뮤니티 속으로 스며든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트랜스젠더 이나(홍정호)를 알게 된다. 송준은 주디 역에 낙점되고 성공적으로 연기를 펼친다.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송준의 마음 속에는 혼란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송준의 혼란을 극대화 시킬 큰 사건이 찾아오게 된다. 


영화 '분장'을 처음 마주하기 얼마 전, 나는 시시콜콜한 연예뉴스를 듣게 된다. OCN의 드라마 '구해줘'에 관한 이야기다. 사이비 종교집단에 붙잡혀 위기에 처한 주인공 임상미를 연기하는 배우 서예지는 위기와 고통을 연기하기 위해 촬영 일주일 전부터 잘 웃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얼마전 본 영화, 안드레스 무시에티의 '그것'에서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연기를 사실적으로 담기 위해 페니와이즈(빌 스카스가드)와 아이들을 마주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전 문소리 감독의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의 GV에서 문소리와 게스트인 김옥빈은 "배우는 감정을 소모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촬영현장 바깥에서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말을 했다. 

배우는 감정을 통제하는 일이다. 실제와 다른 감정을 구현해내야 연기를 할 수 있고 완벽한 표현을 할 수 있다.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자신과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배우는 작품을 끝내고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일에 고통을 느낀다. 송준은 이 어려운 일을 위해 노력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영화 내내 송준이 주디에 스며들기 위해 하는 노력들은 모두 '기계적'이다. 인터뷰를 복기하고 대본을 연구한다. 실제 인물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의미없는 '책임감'을 갖는다. 

여기서 송준은 자신도 의도치 않게 주디의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실제 송준은 대단히 마초적인 사람이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복학생 선배'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배우가 아니었다면 절대 트랜스젠더에 다가갈 수 없는 성격일 것이다. 그런 그가 섣불리 성소수자들을 향해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실재에 마주하게 되면 송준은 이해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송준은 '주디'라는 벽을 만나게 된다. 이미 완벽하게 받아들인 줄 알았던 주디가 송준과 또 다른 실체를 갖고 그의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송준과 주디는 하나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완벽하게 다른 두 존재인 것이다. '이해'라는 거짓의 사라지자 둘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렸다.


국어에서 '이해'라는 말은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 ▲깨달아 앎 ▲잘 알아서 받아들임 등을 말한다. "이해는 고통스럽다"라는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 아마 아무말도 없이 물음표 몇 개를 내놓을 것이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이해인 것이지, 그게 어찌 고통스러울 수 있는가"라는 반문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해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단순히 '안다'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깨닫다'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깨닫다'는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감각 따위를 느끼거나 알게 되다 등을 말한다. 그것은 생각이나 궁리를 해야 하며 감각으로 느끼거나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지식에 통용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알게 됐을때 '깨닫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불교에서 자주 통용된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송준이 영화 내내 해 온 과정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에게는 '깨닫는 과정'이 결여돼있다. 송준은 이 과정을 생략한채 성소수자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한다. 송준은 주디를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 '이해'라는 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해한다'는 거짓이 아닌 진짜 이해를 넘어서야 주디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는 과정,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이르고자 했던 길과 유사하다. 본래의 자아가 무너져야만 또 다른 자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송준은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 자신이 무너져야만 완벽해질 수 있는 이 '연기'가 고통스럽다. 이것은 '이해의 고통'과도 통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하려는 욕망과 타인을 이해하려는 욕망은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여러 배우들의 일화처럼 오랜 고뇌와 연구로 얻어지는 길이며 그래서 더 괴로운 길이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기어이 자기 안의 악마를 끄집어내며 완벽한 '흑조'에 이르렀다. '분장'의 송준도 주디에 이르는 과정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한다. 창작된 이야기 속 다른 누군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선과 악'이라는 이성적 경계마저 초월한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창작자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연구하고 그 깊은 이면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자는 때로 악마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진 불나방같은 욕망과도 통한다. 불에 타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 순간의 불꽃을 향해 그 금기된 곳으로 질주한다. 


이제 '분장'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해보자. '다크라이프'의 마지막 공연, 송준은 "나보고 어쩌라는건가"라는 식의 울분을 토한다. '이해의 고통' 앞에서 그는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완벽한 연기, 이해를 거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쏟아진 것은 '박수갈채'다. 사실 영화 내내 송준을 괴롭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바로 '오해'다. 앞서 말한대로 송준은 주디를 연기하기 위해 기계적인 노력을 한다. 그러나 연극의 동료배우, 스탭들, 미디어와 관객은 송준이 주디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평가한다. 송준이 이해의 벽 앞에서 고통스러워 할 때도 그들의 태도를 일관된다. 

마치 이들은 '이해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송준이 영화 내내 해왔던 '섣부른 이해'를 그들은 그대로 답습해버린다. 이것은 송준의 고통을 보편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아라, 너희들도 다른 사람에 대해 섣불리 이해하고 있다. 언젠가 너희들도 진짜 이해라는 벽을 만났을때 고통받고 좌절할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듯 하다. 소름돋고 끔찍한 사실이지만 '섣부른 이해'를 우리 주변에서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흔히 '꼰대'를 구분하는 몇 가지 말 중에 "내가 너희때는..."이라며 운을 떼는 경우가 있다. 마치 "너희들은 고민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며 말을 시작하는 경우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젊은 세대들이 어른들을 바라보며 "은행 이자율 14%대면 살만했지"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저마다 다른 시대와 다른 계층, 다른 문화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완벽한 이해'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섣불리 '역지사지'를 언급하는 것도 우습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있을때 '이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분장'은 '실패한 블랙스완'과 같다. 니나가 걸어간 길을, 송준은 도망쳐버린다. 니나와 송준은 모두 박수갈채를 받는다. 한쪽은 흑조의 지옥에서 전해지는 박수갈채, 다른 한쪽은 '오해'라는 서슬퍼런 화살촉. 모두 고통스런 소리들이다. 이해는 '깨달아 앎'을 말한다. 깨닫는 일은 고통스럽다. 마치 열반에 이르는 승려의 고행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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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살의 신'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때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먼저 떠올렸다. 물론 별 관심이 가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에 아직 보지는 못했다. 어떤 영화인지 호기심조차 들지 않던 영화를 어쩌다 연극으로 먼저 접하게 된 것이다.  

2. 이것은 외국의 이야기가 원작이지만 한국에서도 흔히 일어날법한 이야기다. 자녀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상해사고로 이어지며 합의를 위해 부모들이 만난다. 부모들은 성공적인 합의를 위해 고상한 척 하지만 사실은 치열하게 견제하며 갈등하고 있다. 고상한 견제가 쌓이고 쌓이다 폭발하게 되면, 결국 합의의 장은 난장판이 된다. 아마 한국의 어느 학부모들도 충분히 겪었을,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이야기로 막이 오른다. 

3. 그런데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꽤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 알렝(남경주), 아네뜨(최정원), 베로니끄(이지하), 미셸(송일국)의 캐릭터가 바로 그것이다. 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던 이들은 알고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캐릭터다. 그 보편성은 다수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깐 남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여성상'과 여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남성상'을 고스란히 캐릭터로 옮긴 것이다. 

4. 먼저 알렝은 일 중독자다. 그리 도덕적인 일도 아니지만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 전화를 받는다. 그는 아네뜨를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여기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물론 인격체인 아네뜨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 부부의 갈등은 거기서 비롯된다). 자존심이 세고 자기중심적이다. 미셸은 다혈질에 (조금) 무식하다. 역시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책임질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편이다. 한마디로 허세만 있지 책임감은 부족한 남자다. 

5. 아네뜨는 고상하고 우아한 척을 한다.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며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집중한다. 물론 여기에는 아들도 포함된다. 우아함으로 무장한 아네뜨의 방어막은 뒤에 가서야 무너진다. 아마 그때쯤 가야 아네뜨의 '척'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베로니끄는 적극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말하기 딱 좋은 성격이다. 베로니끄는 이 '대환장 난동'이 벌어지는 모임을 추진한 사람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선다. 

6. 아마 남성관객들은 여성캐릭터들이 편치 않았을 것이고 여성관객들은 남성캐릭터들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물론 모든 캐릭터가 편치 않았을수도 있다). 이 캐릭터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 본 '이성상'이다. 그런 이성상들이 한 자리에서 '빅뱅'에 가까운 대충돌을 벌인 것이다. 그 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7. 그렇다면 이 대환장 난동극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그러니깐 '보통의 남자'와 '보통의 여자'가 만난 경우에 말이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다 기어이 흩날리는 꽃잎만을 남기며 폭발해버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채 연극은 폭삭 늙어버린 네 배우의 얼굴만을 보여준다. 이 대환장은 작가도 답이 없는 모양이다.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결국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모양이다. 이야기 내내 빵빵 터지고 웃어댔지만 어쩌면 이것은 사상 최악의 비극이다. 적어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줄이는데는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8. 결론: 이 심각한 비극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멀리 떨어져있다. 이야기 내내 벌어지는 대환장 난동극에 웃다보면 이 상황의 위험성이 피부로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저 웃다가 극장을 나서는게 다행일 수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머리를 맞대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느끼기 전에 극장에서 도망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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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광화 작가의 '남자충동'을 봤을때 첫 인상은 "올드하지만 꽉 찬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 '채움'이라는 것은 온전히 '캐릭터'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며 각 캐릭터는 하나하나 개성이 강하고 완성돼 있었다. '남자충동'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꼼꼼하고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꽉 찬 이야기는 주인고의 장정(류승범)의 예정된 비극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연극 '미친키스'는 '조광화展'의 두번째 작품이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장정(이상이)이며 이야기는 그의 비극으로 돌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자가 되길 원했던 장정'과는 조금 다른 장정이 등장한다. 이 장정은 사랑 앞에서 다소 비굴하게 굴면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시나리오작가'다. 한결 남자다웠던 이전의 장정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방법이 틀렸다는 것도 일치한다. 


2. 연극 '미친키스'는 '남자충동'과 마찬가지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충동'에서는 목포건달 이장정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면 '미친키스'에서는 사랑받길 원하는 남자 이장정이 출연한다. 장정의 주변인들 모두 상처투성이다. 장정의 연인 신희(김두희)는 신희대로 가치관이 어긋나고 사랑의 방식이 다른 장정 때문에 괴롭다. 신희의 스승 인호(오상원)와 영애(정수영)는 건조해진 부부관계, 메말라버린 사랑 때문에 괴롭다. 장정의 여동생 은정(이나경)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압박, 그리고 화려한 공허가 담긴 유혹으로 괴롭다. '미친키스'는 이렇게 상처받은 이들의 얽히고 섥힌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3. 이들의 관계는 '키스'와 '섹스'로 대변되고 있다. 키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관계를 증명한다. 키스를 갈구하지만 그것을 회피하면서 관계는 멀어지고 상처는 깊어진다. 상처가 깊어지고 커진 장정은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기어이 폭주해버리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떨어진다. 이 부분은 '남자충동'과 다소 차이가 느껴진다. 잘해보려 했던 '그때의' 장정과 달리 '지금의' 장정은 스스로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아마도 그것은 '남자다움'을 강요받은 장정과 '사랑을 갈구했던' 장정의 차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더 깊이 내재된 '남성성'을 공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결국 '조광화展'의 두 작품은 모두 '남자, 장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4. '미친키스' 장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봐도 좋지만 등장인물 다섯명 모두에게 중심을 두고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다. 흡사 이것은 산산조각 나 망가지는 '클로저'처럼 느껴진다. 모두 사랑에 상처를 받았고 섹스(혹은 키스)로 위로받길 원하지만 공허는 가시지 않고 있다. 결국 위로는 또 다른 공허를 낳고 도시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롭다. 도시에서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5. 앞서 봤던 연극 '남자충동'에 대해 나는 "캐릭터로 꽉 찬 이야기"라고 말했다. '미친키스'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진 캐릭터가 차곡차곡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연극이다. 그만큼 캐릭터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성공적으로 그것은 표현되고 있다. 단, 몇 군데서 '공감하기 어려운 선택'들이 있는 것은 마음에 걸린다. 예를 들어 왜 장정은 모두를 한 장소로 몰아넣었냐는 의문이다. 지키려 했던 여동생은 망가지고 사랑하는 연인은 떠나고 자신을 위로해줄 것 같았던 영애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겼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부득이한 선택이라면 이 표현은 "설득이 부족했다"고 밖에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장정의 절규와 모두를 모으는 과정 사이에 단 몇 초라도 설명이 더 필요했다. 기어이 장정은 그 파국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묻고 싶다. 


6. '설득되지 못한 장면'을 제외한다면 이 연극은 굉장한 힘으로 관객을 압도할 것이다. 멜로이야기 치고 이처럼 힘이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드물다. 이것을 '격정멜로'라고 불러야 할 지는 고민을 해 볼 일이다. 그 사랑이 격정적이었다기 보다는 외로움과 상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격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7. 결론: '남자충동'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 역시 세련된 것은 아니다. 역시 오래전 쓰여진 연극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정성껏, 공들여 만들어진 캐릭터들의 향연이라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모든 캐릭터가 다중적일 필요는 없다. 평면적이더라도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캐릭터는 충분히 입체적일 수 있다. '미친키스'는 어떤 연극보다 깊이있는 캐릭터들이 즐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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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패배주의적 정서에 젖은 '조폭영화'의 흥행이었다. 1992년 '걸어서 하늘까지'를 시작으로 '게임의 법칙', '본투킬', '비트', '초록물고기', '테러리스트' 등의 조폭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고른 지지를 얻었다. 일부 관객들에게는 "폭력적이다", "범죄자들을 미화한다"는 비난도 얻었지만 조폭영화가 한국영화에서 한 시대의 흐름을 차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광화 작가의 '남자충동'은 조폭영화가 득세하던 90년대 후반, 연극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2. '남자충동'은 목포 건달 이장정(류승범)의 성인이 된 후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친구들과 화투에 빠진 아버지(김뢰하)와 그런 남편에게 지친 어머니(황정민), 카페에서 기타 연주하는 동생 유정(장역산), 자폐증상이 있는 막내동생 달래(송상은)가 장정의 가족들이다. 장정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존경하는 '대부'의 알 파치노처럼 '패밀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 목포에서 '건달'로서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장정이 가족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가족은 분노하고 장정을 피하다 흩어진다. 장정의 마음과는 다르게 가족, 주변인과 갈등은 더욱 커진다.


3. 사실 이 이야기는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동료,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 장정의 마음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하지만 장정은 그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른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친구와 후배를 품어주는 방법을 모른다. 돈 꼴레오네, 혹은 마이클 꼴레오네같은 '대부'가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과 다르게 흘러간다. 많은 조폭영화가 그랬지만, 성공을 향해 달려갈수록 실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것이 장정의 삶이다. 


4. 이야기는 장정의 삶과 계획이 꼬여버린 원인을 그의 과거에서 찾고 있다. 장정의 아버지는 도박과 폭력을 일삼으며 가장의 권위와 남성성을 가족구성원들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그가 속한 '건달사회'는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장정 스스로도 조직원들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한다. 장정의 성장환경과 강요된 남성성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한다. 흔히 "폭력은 대물림된다"는 말을 한다. '남자충동'은 대물림되는 폭력,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5. 아마 지금의 관객들은 '남자충동'을 '낡은 이야기'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확실히, 익숙한 '조폭영화'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20년은 된 이야기니 "낡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닌 이야기다. 하지만 '남자충동'은 낡았을지언정 굉장히 알찬 이야기다. 우선 이 이야기는 장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장정 뿐 아니라 주변인들이 함께 빛이 난다. 이 캐릭터들과 함께 이야기는 캐릭터들로 빈틈없이 들어차게 된다. 아무것도 없이 2인 이상의 캐릭터가 붙어서 화학작용만 일으켜도 이야기가 전개되고 알찬 긴장감을 유발한다. '남자충동'은 10인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단언컨대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무대 한 쪽 구석의 기타리스트조차 존재감을 발휘하며 알차게 제 역할을 한다. 


6. 사실 이 연극을 "봐야겠다"라고 마음 먹은데는 '류승범의 첫 연극'이라는 점이 컸다. 그의 연기를 눈앞에서 보면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 이쯤에서 앞선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자면 류승범이 연기하는 장정은 '목포 건달'이다. 자, 류승범이 '건달'을 연기한다. 꽤 익숙한 그림이다. 류승범은 자신이 가장 자신있게 하는 역할이며 대중들이 류승범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바로 그 역할이다. 류승범은 날개 돋힌 듯 가장 본인다운 역할을 하며 커튼콜까지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를 펼친다. 류승범의 박력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연극의 티켓값은 아깝지 않을 것이다. 


7. 그런데 여기에 또 좋은 배우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마치 2007년 첼시의 존 테리와 페트르 체흐처럼 후방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황정민과 김뢰하는 믿고 보는 든든한 배우들이다. 여기에 마음껏 끼를 펼치는 '울랄라세션'의 박광선과 자폐아 달래를 연기하는 송상은도 압권이다. 마치 2007년 첼시의 조 콜과 아르옌 로벤처럼 좌우 측면에서 빠른 속도와 재치로 관객의 진영을 뒤흔든다. 그리고 단단 역할의 문장원도 뒤로 갈수록 관객을 강하게 빨아들인다(그런데 단단은 그 역할의 배경과 안 어울리게 몸이 상남자다). 물론 영화의 스트라이커는 장정, 류승범이다. 


8. 결론: 마치 명품 빈티지 가구처럼 세련되지 않았지만 튼튼한 이야기가 관객을 매료시킨다. 이 이야기의 속을 꽉 채운 정성스런 캐릭터들은 하나 하나 관객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을 살려낸 것은 배우들의 열정 넘치는 탄탄한 연기다. 순전히 "배우 때문에 보러 간다"고 말해도 충분할 만큼 배우와 캐릭터의 매력이 살아있는 연극이다. 



추신1) 오래전, 최강희 주연의 영화 '애자'를 보며 "사투리가 어색하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나는 부산 출신이고 '애자'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니 당연히 할만한 지적이었다. '남자충동'은 목포가 배경인 만큼 모든 대사가 전남 지역 사투리(전북보다 더 억센)다. 그쪽 사투리에 대해 자세하게 모르니 이게 어색한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오래전 벌교 출신의 군대 고참을 만났을때 반쯤 못 알아들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럭저럭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추신2) 사투리를 잘 따라가지 못하면 상당량의 대사를 못 알아들을 수 있다. 


추신3) 커튼콜을 못 찍게 해서 아쉽다. 살다살다 이렇게 멋있는 커튼콜은 처음 본다. 류승범 졸라 멋있어 ㅠㅠ


추신4) 대학로TOM은 다 좋은 상영관 규모에 비해 화장실이 너무 부족하다. 이곳에 가려면 어느 정도 각오하는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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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지연 2017.02.20 01:57 address edit/delete reply

    리뷰가 정말 공감되고 알찹니다 ㅎㅎ진짜 류승범으로 시작했지만 남자충동이라는 연극의 완성도와 만족도가 높아서 기분이 좋더라구요 :)





1. 대체 이게 언제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대략 20년은 넘은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도 프랑스의 거장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이다. 지금의 관객에게도 어필할 요소가 충분한 작품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2.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말은 대단히 유치하다. 차라리 영화 '맨인블랙'이 더 세련됐다 싶을 정도로 이 결말은 심심함을 안겨준다. 물론 20년 전이었다면 이 결말은 대단히 신선할 수 있다. 거의 20년전 '맨인블랙1'(1997)이 유쾌하게 표현한 결말에 대해 이 연극은 꽤 오싹하게 접근한다. 아마 '혹성탈출'(1968)의 결말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3.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마 이야기가 중반부에 접어들면 누구라도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SF물에서 사용된 결말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사만타(안유진)와 라울(오용), 두 배우만으로 꾸려지는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대화와 성격, 관계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4. 우선 라울과 사만타의 관계는 몇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이성과 감성, 지식과 육체, 고뇌와 충동, 성악설과 성선설 등 여러가지 인간사의 '대립'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초반에 많은 갈등을 보인다. 이들의 갈등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중요한 여성이 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사회가 정의내린 남성성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지점에서 논쟁을 이어간다. 


5. 이들의 논쟁은 앞서 말한 여러 '대립'들이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온 '논쟁'에 대한 일종의 축소판이다. 사소한 대립부터 인류의 존폐가 걸린 논쟁까지,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학계까지 이어언 모든 논쟁을 연극으로 녹여낸 것이다. 이 논쟁에 대해 나름 결론을 내려보자면, 현대사회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결국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셈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지만 결국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다. 재벌가의 악행이 혐오스럽지만 그들이 만든 기업의 제품을 쓸 수 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로가 필요한 관계며 북한과 남한도 마찬가지다. 여당과 야당의 갈등도 거세지만 어느 한 개 정당만 남아서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보수를 외치는 사람도, 진보를 외치는 사람도 결국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6.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인간사의 갈등이 얼마나 무의미가 불필요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어릴적 누군가 농담처럼 한 이야기 중에 "천문학자의 자살비율이 높다"는 말이 있다. 우주의 신비를 알아갈수록 지구에서 인간으로의 삶은 너무 하찮고 의미가 적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극 '인간'이 관객에게 전하는 결론도 그와 닮아있다. 인간사의 수많은 갈등도 결국 우주의 신비와 그 너머 미지의 존재 앞에서는 작고 하찮은 것이다. 


7. 이야기를 각색한 사람은 문삼화 연출이다. 연극 쪽에 지식이 없어서 유명하신 분인지는 모르겠는데 지난번에 봤던 '블랙버드'의 연출자다(그러고 보니 그것도 2인극이다). 프랑스 희곡이지만 상당한 '한글패치'가 이뤄졌다. 꽤 수다스럽고 현대적인 설정이 많이 등장한다. 다소 촌스러운 결말은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가볍고 유쾌해서 관객들이 보기에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현란한 연출도 관객이 연극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8. 단, 이 연극이 공연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은 개인적으로 꽤 불편한 곳이다. 여느 소극장과 달리 마치 '사각의 링'처럼 생긴 이 무대는 꽤 신선한 공간이었지만 자칫 배우의 등을 오랫동안 봐야 할 일이 생길 수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하는 연극을 보게 되면다면 한 번 볼 때와 두 번 볼 때의 느낌이 완전 달라질 것 같다. 


9. 결론: 근데 이거 영화로 만들면 꼭 '쏘우'1편 같겠다. ...재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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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극 '꽃의 비밀'은 따지고 보면 대단히 슬픈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남편에게 학대당하고 무시 당하던 네 명의 여인들은 우연치 않은 사고로 남편을 모두 잃게 된다. 마침 다음날 보험공단에서 의사가 찾아와 남자들의 보험가입을 권유하게 되고, 간단한 신체검사 후 보험가입이 완료되면 아내들은 남편의 죽음을 알려 보험금을 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새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2. 이 이야기가 슬픈 이유는 가정에서 억눌린 여인들이 울분을 토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 과정이 굉장히 '처절하게' 펼쳐진다. 여기서 말하는 '처절함'은 흔히 말하는 '소동극'이다. '꽃의 비밀'은 이 소동극을 유쾌하게 펼쳐낸 연극이다. 


3. 사실 연극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나는 '장진 표 연극'을 접한 적이 없다. 장진의 작품은 주로 영화로 접한 것이 전부다. '꽃의 비밀'은 장진의 영화들과 많은 부분 통한다. 대사를 통해 주는 유머가 꽤 재미있다. 그리고 '우연'이 쌓이면서 소동을 일으키고 '난장판'을 만들어내는 재미도 좋다. 만약 영화로 장진의 작품을 접한 사람이라면 꽤 익숙하게 이 재미를 즐길 수 있다. 


4. 특이할 점은 한꺼풀씩 비밀을 벗겨내는 재미가 좋다. 평화로운 듯한 네 여자의 일상이 한순간 붕괴되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여기에는 비밀을 벗겨내고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미스테리극처럼 드러난다. 이 부분 역시 꽤 괜찮은 재미를 줄 수 있다. 


5. 아쉬운 점이라면 보험공단 의사가 집에 도착한 후부터 '김상진표 코미디'처럼 배우들이 과한 액션을 펼친다. 이전까지는 대사와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대단히 유쾌했지만 의사가 도착하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다소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6.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하다. 내가 봤던 11월 29일 첫공연은 이선주(소피아), 배종옥(자스민), 소유진(모니카), 지나(김보정), 이동현(카를로), 전윤민(산드라) 캐스팅이다. 이중 배종옥의 캐릭터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엽다. 마치 디즈니 만화 속 공주님의 조력자처럼 귀엽고 듬직하다. 사실상 이 이야기 전체의 씬스틸러다. 


7. 반면 소유진은 저 목소리로 객석 뒷자리까지 대사가 전달될지 걱정스러웠다. 중간자리에 앉아서 다행이었지만 2층 객석도 있는 극장에서 과연 극장 전체를 압도할만한 톤을 가졌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나 역시 대사가 안 들릴 지경이었다. 


8. 앞서 말한대로 이 이야기는 네 명의 여자가 보여주는 '처절한 투쟁'이다. 마음껏 웃다가도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라는 고민이 생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여자가 여자로써 살아남기 위해 남성성을 입는 처절한 투쟁"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 보면 이 이야기는 "페미니즘적 이야기인가, 여성에 대한 조롱인가"로 논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연극을 볼 관객의 판단으로 남겨두겠다. 일단 나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겠구나"라고 판단했다.


9. 결론: 어쨌든 이 연극은 웃다가 지쳐 더 이상 웃을 힘이 없을 정도로 2시간 내내 껄껄 웃다가 나올 연극이다. 진지하게 생각만 하지 않으면 이 세상 피로 다 잊고 즐길 수 있는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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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블랙버드'는 단 두 인물(혹은 세 인물)의 관계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20대 여성 우나(채수빈)는 어느날 병원에서 잡지책에 실린 레이(조재현)를 보고 그를 찾아온다. 50대 레이는 '피터'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우나는 그런 레이를 어떻게든 찾아내 그의 직장으로 왔다. 놀란 레이는 우나를 휴게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안내한다. 단 둘만 남겨진 작은 방에서 우나는 레이에게 15년전 그 날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40대의 레이와 12살의 우나는 15년전 만나서 성관계를 가진 사이다. 그 일로 레이는 수감생활을 하게 되고 우나는 어린 나이에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각자의 상처를 가진 레이와 우나, 레이는 과거를 모두 지우고 새로운 삶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기회조차 잃은 채' 그 날의 기억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우나는 애써 잊고 살던 레이의 앞에서 그날의 기억을 자꾸 들춰낸다. 그리고 레이는 고통스러워하며 우나를, 우나가 꺼내놓는 기억들을 외면한다. 



우나는 지독하게 레이를 증오하고 있다. 우나에게 레이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저씨'다. 레이를 사랑해서, 레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우나지만 낯선 곳에 버려져 두려움에 떨다, 기어이 타인의 시선 속에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런 우나가 레이에게 가질 감정은 '증오'에 가깝다. 그래서 우나는 레이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를 외면한 채 꾸역꾸역 기억을 들춰낸다. 이미 재판을 거쳤고 모든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졌던 상태다. 하지만 우나는 말하지 못한 사실들이 있었다. 레이가 보지 못했던 순간의 우나, 레이가 알지 못했던 고통에 시달린 우나. 우나는 그 모든 것을 레이에게 이야기하고,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우나는 따지고 싶어서 레이를 찾아온 것일까?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90분 동안, 우나는 여러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분노, 조롱, 공포, 허무, 슬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감정, 그리움. 잡지책에 실린 레이를 보자마자 찾아온 우나는 사실 레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 15년전 12살의 우나는 레이를 사랑했다. 그리고 15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면서 우나는 레이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갔다. 어쩌면 고통처럼 남아있던 그날의 기억 때문에 우나는 레이를 잊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레이는 우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어느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욕정을 알고 괴로워했다. 레이는 어린 우나를 보면서 욕정이 생길 수 있음에 괴롭고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아동성애'에 대한 책을 보면서 자신이 아동성애자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우나와 성관계를 가진 레이. 이 어린 소녀와의 사랑, 욕망을 감당할 수 없어 레이는 괴로워한다. 그러다 우나와 엇갈려버리고 둘은 예기치 못한 이별을 한 뒤 이 사랑은 '아동성폭행범'과 '피해아동'으로 나뉘어져 마무리를 짓게 된다. 


레이는 그런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고 새로운 직장을 얻고 과거의 기억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추악한 '아동성애자'가 돼버린 레이는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레이는 눈 앞에 우나가 나타나도 도망치려고 한다. 레이에게 우나는 '귀신'같은 존재다. 잊으려고 억지로 감춰둔 기억같은 존재다. 그 기억이 다시 레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에 대한 설명은 모두 두 사람의 증언(기억)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다. 즉 관객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정보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레이와 우나의 대화에서도 기억이 차이를 보인다면 관객은 더더욱 두 사람의 대화로 이뤄진 이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연극 '블랙버드'의 개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 없게 한다는 것. 우나는 12살의 자신이 순진한 어린 아이인 줄 알지만 레이를 포함한 어른들은 우나를 '성숙한 아이'로 기억한다. 어쩌면 우나는 레이에게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성착취를 당했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을수도 있다. 


레이 역시 우나를 사랑한 것인지 어린 여자아이를 홀려 성관계를 가진 것인지 본인 조차 알지 못한다. 이야기 내내 우나에게 추궁을 당하던 레이가 내뱉는 말들은 관객들이 '변명'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하다. 내내 변명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러다 관객이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즈음, 다시 한 번 거대한 의심덩어리를 관객에게 던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레이는 변명같은 말을 하고 기어이 우나를 버리고 떠난다.


사실 15년 전, 레이는 어린 우나를 여관에 버려두고 떠난다. 우나는 사실 '어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보다 '레이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에 더 큰 상처를 안고 있다. 레이에게 모든 것을 내 준 밤, 텅 빈 방에 홀로 버려진 우나는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과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성인이 돼 레이를 찾아간 우나는 예기치 않게 또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진다. 사랑을 확인한 것처럼 보였던 레이와 우나, 하지만 레이는 황급히 우나를 버리고 방을 떠난다. 마치 확인된 모든 사랑이 '거짓'인 것처럼...


아마 관객은 이 이야기를 가볍게 바라보면 "무슨 이야기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깊게 이야기를 바라보면 굉장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치 두 개의 '유주얼 서스펙트'가 충돌한 것과 같으며 섹스와 사랑의 '라쇼몽'과 같은 이야기지만 끝까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의 줄다리기는 기어이 '관객의 몫'이 된다. 즉 이 이야기는 관객이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완전 다른 이야기가 돼버린다. 매우 흥미롭고 기발한 발상이다. 그리고 단순하고 미니멀하지만 아주 지적인 이야기다. 



'블랙버드'는 단 2명의 배우(혹은 3명)가 제한된 공간에서 온전히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펼치는 이야기다. 즉, 배우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야기다. 그래서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연극 짬밥 오래 먹은 조재현은 연극판에서는 충분히 믿고 볼 수 있는 배우다. 이제 문제는 배우 채수빈이다. 채수빈은 2014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출연한 후 '블랙버드'가 두 번째 작품이다. 2014년 당시에는 등장인물만 무려 6명이었고 채수빈이 공연한 '이경' 역할은 트리플 캐스팅이었다. '블랙버드'에서 '우나'는 채수빈과 옥자연의 더블 캐스팅이다. 그러니깐 채수빈이 기성 연극 무대에서 이토록 엄청난 양의 연기를 소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극을 보면 알겠지만 우나가 소화하는 대사의 양은 엄청나다. 어느 정도냐면 90분동안 우나는 단 한 번도 무대 밖으로 퇴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특성상 레이는 우나의 감정을 받아주는 역할이다. 즉 우나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다. 우나가 레이와 헤어지던 날을 회상할 때 이런 관계가 정점에 이르는 장면이 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나는 거의 20분 가까이 홀로 대사를 한다. 연극을 자주 보지 않아서 '독백'이라던지 '1인극'에 대해 경험한 적은 없지만 20분 가까이 대사에 맞춰 감정표현을 하며 줄줄 대사를 뱉는 장면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장면 뿐 아니라, 온전히 두 사람의 에너지로 채워야 하는 무대에서 채수빈은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특히 앙상블을 위해 조재현이 자신의 에너지를 감추고 비워낸 공간을 채수빈은 자신의 에너지로 채운다. 경력이 짧은 어린 배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경력이 짧아 테크닉은 능숙하지 않게 느껴질지 몰라도 관객을 빨아들이는 에너지만큼은 대단히 강렬하다. 이쯤 되니 옥자연의 우나도 대단히 궁금해진다. 분명 채수빈과는 다른 우나를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블랙버드'는 안 그래보이지만 대단히 독특한 연극이다. '40대 남자와 12살 소녀의 성관계'라는 파격적인 배경을 두고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묻는다. 그것은 관객이 두 사람의 말, 이야기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완전 달라진다. 연극은 때로 영화가 시도하지 못한 파격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블랙버드'는 그런 파격을 갖춘 연극이다. 아마 관객들은 이 연극에 대해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할 지 모른다. 누군가는 "두 사람은 사랑이었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레이는 추악한 아동성애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우나는 나쁜 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 그들 각자가 이해한 이야기는 그들의 마음 속에 차 있는 시선일 것이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블랙버드'의 감상법이다. 



추신) 올해 3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이 연극이 공연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는 제프 다니엘스가, 우나는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했다. 이쯤 되면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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