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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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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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해당되는 글 82건

  1. 2018.02.19
    네이버 유감
  2. 2015.11.03
    역사교과서 국정화, 교육 수준의 퇴보
  3. 2015.10.05
    한국 기자를 믿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1)
  4. 2015.05.09
    우리는 왜 연예인에게 가혹한가
  5. 2015.05.08
    '바바둑'과 잔혹동시, 아이는 어떤 꿈을 꾸는가 (2)
  6. 2015.04.13
    또 다른 '차별'을 이야기 해야 할 때 (2)
  7. 2014.04.30
    '한공주'&세월호 참사 - 어른들의 질서에 부서진 아이들
  8. 2013.08.25
    꼬꼬마 한일전, 김유빈 vs 아사다 마나
  9. 2013.07.14
    공포영화와 야동은 정말 위험한 존재인가 (2)
  10. 2012.06.18
    '신사의 품격' vs '마이블랙미니드레스' (2)


내가 이런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나 찾아보니 2010년에 유사한 내용의 글을 썼다(http://daishiromance.tistory.com/218). 지금부터 써내려갈 이 글은 8년전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다시 한 번 꺼내기로 마음 먹은 것은 포털사이트에 대한 여전하고 구체적인 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로 두드려 팰 때는 시리즈로 패줘야 효과가 있다고 수습기자 때부터 배웠다(물론 내가 팬다고 네이버가 간지럽기나 할 지 의문이다. 그럴리 없을 것이다). 이 일개 힘없는 블로거는 무려 8년만에 네이버에게 또 한 번 시비를 걸어보려고 한다. 

네이버에게 걸 수 있는 시비는 누구나 익히 아는 것이 될 수 있다. 검색어나 뉴스 배치를 조작하고 댓글로 여론을 형성한다는 루머(혹은 진실). 나는 그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다른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대목이 있다(사실 마음먹고 이으면 다 이어진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뉴스가 어떻게 공급되는지 알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합리적인 방법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게 이 글의 핵심이다.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되는 뉴스는 몇 개의 단계로 나눠진다. 검색을 통해 해당 언론사이트로 넘어가는 서비스나 해당 언론사의 뉴스를 네이버 내에서 서비스하는 방식이다. 이는 언론사의 뉴스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고 뉴스스탠드나 콘텐츠 제휴로 넘어가면 일정한 수익도 생기게 된다(광고수익이나 네이버에서 지급하는 수익 등이다). 메이저 언론사는 상관없겠지만 중소 언론사에게는 사활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 '네이버'다. 

뉴스검색 심사는 네이버와 카카오(다음)가 함께 위원회를 통해서 진행한다. 이들은 심사를 통해 양질의 언론사를 선별하고 좋은 품질의 뉴스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심사위원은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있다. 나는 포털사이트의 이같은 의도에 대단히 공감한다. 특히 요즘처럼 언론사가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좋은 뉴스를 골라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포털사이트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검색만 해도 유사한 내용의 뉴스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대체 독자들에게 양질의 뉴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심사하는 사람은, 독자가 믿을만한 사람일까? 물론 단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해서 취합한다고 하지만 심사위원 자체가 베일에 쌓여진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언론사에 대한 심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그 심사결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그저 당락 여부만 통보받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한차례 네이버에 대한 신뢰를 잃은 바 있다. 지난해 말 축구협회 고위급 인사가 네이버 뉴스 편집자에게 청탁해 축협에 좋지 않은 뉴스를 감췄다는 것이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이에 수차례 사과를 했지만 논란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은 네이버의 신뢰도에 심대한 타격을 미쳤다. 이로 인해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검색키워드 조작 역시 신빙성을 더욱 얻게 됐다. 이 시점에서 이들이 언론사를 심사한다는 행위 자체가 과연 공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포털에 서비스되는 언론사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네이버에 서비스돼다 탈락되는 언론사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정말 문제가 있는 언론사라서 탈락됐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검열'의 향기를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네이버에 서비스되는 언론사를 거래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 시스템은 간단하다. ①언론사를 만든다. ②네이버 심사에 통과해 뉴스제휴를 맺는다. ③제휴를 맺은 언론사에 프리미엄을 붙여 매각한다. 이런 시장이 생겨버리면, 과연 언론사와 거기에 속한 기자들이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띄고 '기자'답게 일할 수 있을까? 모든 초점은 기자의 사명이 아닌 네이버에 맞춰질텐데. 이 시장에서 생겨난 존재들, 그들이야 말로 기레기 밑에 있는 기레기일 것이다(나를 포함해서). 

나는 포털사이트가 언론을 심사해서(검열해서) 서비스하는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잭 스나이더의 영화 '왓치맨'(그래픽노블 원작)에 등장하는 대사 중 "누가 왓치맨을 감시하는가?"라는 말이 있다. 언론은 사회의 감시자다. 그 언론을 선별하고 감시하는 역할은 오롯이 독자에게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은 거대 권력이 가져서도 안되고 이익집단(기업)이 가져서도 안된다. 네이버는 국내 점유율 압도적 1위의 포털사이트다. 이들은 공익보다 기업의 사익이 우선시되는, 엄연한 기업이다(당연한 기업의 생리다). 그런 기업이 어쩌다보니 '언론'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됐다(압도적 점유율의 영향이 크다). 적어도 그들이 '공익'에 대해 눈꼽만큼이라도 생각하는게 있다면, 뉴스에 대한 권한을 독자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모든 언론사들이 "네이버!"만 바라보는 기현상을 막고 독자와 아무 장벽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기자라면 네이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기레기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것을 정책 제안이라고 봐도 좋고 한탄으로 봐도 좋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시장은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는 네이버도 크게 한몫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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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 역사가가 기록해 서술한 것이다. 즉 역사란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으며 '객관적인 역사'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역사란 일종의 '옛날이야기'같은 것이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나 군대 다녀온 예비역 선배가 사자만한 토끼를 봤다고 떠드는 것도 일종의 역사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에 대해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다. 그래서 역사란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사가의 생각에 따라 다양한 역사가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자, 정부에서 그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한다. 이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시키겠다는 대단히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역사관'. 일단 그런게 존재하는지부터 궁금하다. 내 생각에는 분명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영화관은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그리고 몇 개의 중소극장으로 구성돼있다. 이들은 '극장'이라는 시설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해 인테리어를 하고 서비스를 한다. 영화를 자주 보러 간 사람이라면 CGV와 롯데시네마가 다르고 메가박스가 다르며 서울극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 같은 CGV라도 대학로가 다르고 여의도가 다르다). 그래서 관객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가장 쾌적하고 서비스 좋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그런데 만약 극장이 국정화돼서 전국에 모든 극장이 CGV가 된다면 어떨까? 혹은 가요계가 국정화돼서 SM엔터테인먼트만이 가수를 양성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조금 더 위험한 예를 들어, 자동차가 국정화돼서 국내 도로에는 현대자동차만 다닐 수 있다면? 라면이 국정화돼서 모두 농심라면만 먹어야 한다면?


혹자들은 "역사교과서를 극장이니 아이돌이니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냐?"고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역사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해석해 이론을 펼친다. 우리는 누구도 3.1만세운동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100명의 역사학자가 있다면 3.1만세운동에 대해 100가지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쥐뿔도 모르는 내가 감히 역사교육에 대해 한마디하자면 역사교과서는 달라야 한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역사교과서로 다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만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아이들은 역사에 대해 새롭게 탐구하게 될 것이다. 즉 아이들에게 역사를 '주입'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탐구'하게 하는 역사교육이 중요하다고 본다.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역사를 '주입'하겠다는 발상이다. 그것이 친일독재미화교과서인지는 나중 문제다. 교과서 국정화는 교육의 수준을 거의 일제시대 수준으로 퇴화시키겠다는 발상이며 국민들에게 공산품 찍어내듯 똑같은 생각을 집어넣겠다는 독재자적 발상이다. 지금 대체 누가 누구보고 빨갱이 운운하는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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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20살 정도 나이가 많은 사촌형이 있다. 공부를 유독 잘해서 집안 형제들 중 제일 성공한 사람이었다. 이 형은 서울대 법대로 진학했고, 엉뚱하게도 기자가 됐다. 30년 가까이 기자생활을 하며 정치부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기자가 됐건 현재는 다니던 언론사의 논설위원으로 지내고 있다. 


집안에 이런 '잘 나가는 형제'가 있는 건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당연히 스트레스다. 특히 나나 내 형처럼 한창 고등학교 다니는 애들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부모님은 크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 형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압박이 될 만큼 '수재'였다. 그래서 뭐 썩 마음에 드는 형은 아니었지만 이 형 덕분에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어쩌다 생겨버렸다. 기자, 참 대단한 직업이라고 느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군대를 다녀오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스태프를 하게 됐다. 아이디카드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게스트 초청 담당자들과 교류가 잦은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담당자들과는 "누나, 동생"하며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런데 영화제 기간 중, 나는 기자들과 많이 싸워야 했다. 프레스 초청 담당자가 기자들과 마찰이 생기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때가 많았다. 리스트에 빠져있어서 출력이 안된 적도 많았지만 다짜고짜 "카드 내놔라"며 프레스센터에서 꼬장부리는 경우도 많았다. 혈기왕성했던 나는 그때 기자들과 한참 많이 싸웠다.


2005년, 대학교를 1년 휴학하고 울산의 방송국에서 FD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시방 야간알바 하는 수준의 돈을 받으며 그럭저럭 재미나게 일 하다가 보도국 사회부장과 마찰이 생긴 적이 있다. 기자를 몇 년 해본 후 생각해보니 언론사 사회부장이라는게 되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혈기왕성하던 20대 때는 뭐 그런 것도 몰랐다. 그래서 멱살까지 잡으며 크게 싸우고 편성국 막내피디한테 욕은 욕대로 들어먹었다. 사촌형의 존재는 잊은채 "기자는 전부 양아치"라는 생각을 하고 3년 뒤, 나는 기자가 됐다. 



기자가 몸으로 떼우는 직업은 아니다.


이 글은 몇 년의 기자생활을 하며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정리하는 글이다. 아마 정통 기자선배들은 내 경력을 들으면 "어디 경력도 엉망진창인게 이런 글을 써?"라며 재떨이를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경력이 엉망이 된 것에 대해 우리나라 언론구조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언론사 중 70%는 도저히 다닐 수 없는 '부실기업'이다. 다른 업종은 어떨지 몰라도 이 바닥은 확실히 부실기업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이 또한 이 글에서 다뤄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이 글의 제목에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기자가 독자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기자가 기레기라는 소리를 듣게 된 원인 역시 앞서 말한 '부실기업'의 스토리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존재한다.



기자는 욕망을 거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진: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우리나라에는 언론사가 대단히 많다. 광역자치단체만 하더라도 최소 30곳 이상의 언론사가 출입한다. 여기에 기초자치단체부터 동네신문까지 합치면 시·도별로 100여곳의 언론사가 속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국단위로는 1500여개에 해당되며 여기에 중앙지와 전문지 합치면 2000곳에 육박한다. 


솔직히 이건 대단히 많은 수치다. 과거 경기도청 출입하던 시절 도청에 출입하던 '지방지'는 약 30여 곳이었다. 이들은 수원에 본진을 둔 지역언론으로 이들 중 규모가 작은 회사는 오직 도청과 수원시청을 상대로 광고를 얻어 회사를 꾸린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회사를 꾸리기 어렵다. 관공서에서 홍보비로 쓰는 예산은 한정돼있다. 그렇다보니 지역언론은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다른 회사가 생기기도 한다. 



기자는 진실 앞에 신중해야 한다.(사진: 영화 '특종:량첸살인기')


지역에서 언론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자 출신'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중앙지에서 기자 하다 온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풋내기 시절에는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중앙언론사의 시스템에서 도태된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지역언론사로 시작하거나 혹은 서울의 어느 작은 인터넷언론사로 시작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언론사는 나름 생존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생존방법은 대표(기자출신)의 인맥과 경험에서 대부분 찾아진다. 우선 돈 많은 투자자를 두고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언론사에 투자하는 재벌들은 대부분 돈은 쓰고 넘칠만큼 많은데 거창한 직함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언론사의 '회장'이라는 그럴싸한 직함이 주어진다. 언론사 회장이라는 직함이 대단히 돈이 되는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직함은 흔히 말하는 '갑질'을 하는데 유용하다. 한마디로 직접적으로 돈이 되지는 않아도 돈을 끌어모을 수 있는 권한을 갖추게 된 것이다. 


언론사를 만드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기에 취해서 언론사를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편리하게 '갑'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기자'다. 이들은 경찰이나 검찰, 혹은 더 높은 누군가를 만나도 큰소리를 칠 수 있다. 물론 재벌3세나 권력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은 기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먹고 덤비면 결국 이기는건 기자다. 그들은 여론을 선도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한민국 언론은 네이버가 독점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기자가 진짜 힘을 가지려면 여론을 선도하는 것, 더 많은 대중에게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힘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언론사들은 포털사이트에 자사의 소식을 걸려고 하고, 자극적인 뉴스들로 방문자를 유도하려고 한다. 네이버에 소식을 걸기 위해서는 뉴스양이나 방문자수에서 일정선을 맞춰야 한다.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는 언론사 상황에서는 뉴스의 질보다 양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심층적인 취재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뉴스의 수준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뉴스의 보도채널은 언론사 각자가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만의 생각을 온전히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네이버'라는 거대포털이 보도채널을 독점한 상황에서는 네이버가 갑이 되고 언론사가 을이 되기 마련이다. 세상 모두에게 '갑'의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을'이 되는 상황에서는 온전한 뉴스가 전달되기 어렵다. 이것은 이미 정부와 재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시점에서도 글러먹은 일이긴 하다. 


언론사는 세상 모두에게 '갑'이 돼야 한다. 하지만 절대 '갑질'을 해서는 안된다. 기자가 가진 '갑'의 권한은 오직 진실을 밝히는데만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일부 언론사들은 '갑이 되기 위해' 취재를 시작한다. 이들에게 '기사'란 영업의 수단이며 거래하고 돈이 될 기사만을 취급한다. 자연스럽게 소외된 어느 곳의 진실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한국언론에서 '뉴스'는 거래의 대상이다.(사진: 영화 '부당거래')


작은 언론사에 비하면 메이저 언론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엄청나게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비난하는 몇 개 언론사(혹은 방송사)의 젊은 기자들은 나름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과는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저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하고 위에서 지시 내려오는 일을 해낼 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데스크에 있다. 기사의 출고권한을 가진 이들은 회사의 정치성향과 광고주의 생각에 맞춰 기사를 출고한다. 젊은 기자들의 취재아이템은 부장이나 혹은 그 윗선에서 짤릴 수 있다. 혹은 애시당초 데스크의 눈치가 보여 본인 스스로 킬(기사를 죽이다)할 수 있다. 


기자들은 선배기자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섣불리 낼 수 없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군대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몇 가지 직업군(기자, 의사, 군인 등)은 '군대문화'가 뿌리깊게 박혀있다. 이 직업군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의사처럼 사람 목숨을 책임진다던지, 군인처럼 나라를 책임진다던지, 혹은 기자처럼 여론을 책임진다던지. 세상 모든 '군대문화'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기자사회의 군대문화는 심각한 부작용을 보여준다. 



신중하지 못한 기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사진: 영화 '소수의견')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기사는 언론사 이름의 보호를 받지만 결국 기사의 시작(혹은 끝)에 달리는 이름은 기자 자신의 이름이다. 한마디로 기사를 책임지는 사람은 기자 본인이다. 그래서 기사란 온전히 기자 본인의 것이 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서 기사란 기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배기자와 부장, 데스크의 통제를 받으며 더 나아가 정부와 광고주의 통제도 받는다. 기자의 출고권한을 가진 데스크는 기사의 진실여부와 사회적 중요성만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언론의 데스크는 여기에 '회사의 이익'을 추가로 계산한다. 광고는 광고부에서 책임져야 함에도 말이다. 


군대문화가 '회사의 이익'과 맞물릴 경우 기자는 철저하게 손발이 잘린다. 그저 회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보병'이 돼버리며 이는 주체적인 취재를 방해하기 마련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짤방 중에 '오바마와 한국기자단의 만남'(?), 뭐 그런 내용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들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질문하지 못한 그런 내용이다. 이것은 결코 기자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한 질문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기자가 질문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마치 야구에서 포수가 공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한국 기자들을 보면 '질문을 두려워하는 기자'가 꽤 있다. 물론 이것은 '튀어선 안되는' 한국의 교육환경 탓도 있지만 군대문화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군대문화는 큰 언론사일수록 강하다. 그래서 큰 언론사의 기자들은 각이 잡혀있다. 하지만 그들은 회사의 정치성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에서 진실을 쫓는 기자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1인.


여담이지만 연예부 이야기도 잠깐 해보자. 언론사에서 연예부란 '방문자수'를 책임지는 곳이다. 종이신문 시절에는 '재밌게 읽을꺼리'를 책임졌다. 사실 과거나 지금이나 연예부의 역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쟁해야 할 언론사가 더 많아졌다. 당연히 이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예부는 '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낸다. 제작보고회나 언론시사회를 가더라도 쏟아지는 질문은 더 자극적이고 단순해졌다. 게다가 떠도는 소문에 대해 사실확인도 없이 기사로 쏟아내고 '증권가 찌라시'라는 확인되지 않은 낭설이 '정보'인양 취급받는다(실제로 증권가 찌라시를 본 적이 있다. 여기서 '연예인 찌라시'는 전체 내용의 10%도 채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별책부록' 수준이다. 심지어 이 소식조차 대부분 '틀린 소식'이다). 


사실 '기레기'라는 말도 연예부 기자에서 시작됐다. 언론인으로서 기본적인 역할도 못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한국언론의 거의 모든 기자들에게 적용하기 부족함이 없다. 결국 한국언론의 문제점은 이들이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을 다하기보다 다수 언론사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돈을 더 벌기에 급급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거대권력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낮은 자세 탓도 크다. 아마도 여기에는 포털사이트가 독점한 보도시스템이나 권력자들이 가진 무한한 권한을 탓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언론의 문제점에 대해 나름 구구절절 읊어댔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한국사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 펜은 힘이 세다. 그리고 기자는 세상 모두에게 '갑'이다. 만약 본문의 이 이야기들을 언론사 관계자가 본다면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반대로 되묻고 싶다. 


"만약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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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강인숙 2015.11.02 01:12 address edit/delete reply

    http://m.blog.naver.com/insuk7171/220368198376

    http://blog.daum.net/insuk7171/9

    https://m.facebook.com/checkpoint/block/?_rdr1.

    사법부와 지자체는 근무협약맺고 모든 관공서와 헌법의 기본권 생 명권. 평등권등 에 침뱃고 공무원 들 단체집단행동해 상습특수 폭행 죄로 사기처 의식주 구걸함.

    2. 청주흥덕경찰서. 청원경찰서. 검찰. 판사들은 나조사 작성당시 건물주및 그 일행들과 관련없다 몰래글적고 서명.도장.찍어라 폭행 .고문중

    3. 배부른 박근혜는. 청아대. 블로 그. 페이스북등 선거목적에 억울한 내 사연은 국민권익위원회등과 글 못쓰게 몇년째 차단중4. 13고정 1000모욕. 14노37명예 회손. 14고정737 가. 상해

    나. 증 거위조. 2건씩 누명쒸움. 각 방송사 기자들 접대로 내사연차단 후 2013. 8월부터 집내쫒아 2015 .10월 난 주소없음. 2012 .7.20. 햇빛없

    는 반지하방 계약후 2014.7.19일 만료지만 돈 반환거부중. 네이버. 다음넷. 아고라. 블로

    그. 카페. 페이 스북 유트브등 재목검색 일부차단. 덧글제한. 페쇠후 완전 범죄꾸밈도와주세요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일수 있으니 우선 안구정화부터 하자.


이것은 꽤 오래된 물음이다. 역사적 가치를 가질 만큼 진중한 물음은 아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여지가 있는 물음이다. 나 역시 적잖은 고민을 해 온 물음이며 이 물음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시작은 아주 단순하고 다소 유치한 물음이다. "왜 대중들은 연예인에게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연예인 팬클럽 활동하는 어린 학생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느 철 든 어른들이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 철든 어른들의 말에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이 쓸데없는 연예인 걱정에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결론이 깔려있다. 




확실히 대중들은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관심많은 일거수 일투족 중 거슬리는 장면 하나가 목격된다면 악플과 비난으로 맹공격을 퍼붓는다. 다소 과격하고 지나치다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다. 이것은 과거에는 '범법행위'에 국한된데 반해 최근에는 동료와 욕설을 주고 받거나 팟캐스트에서 말 한마디 잘못해도 엄청난 욕을 먹는다. 


연예인들이 이런 욕을 먹는건 가혹해 보일지라도 당연한 결과라고 본다. 대중의 애정과 관심으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라면 부득이한 발언이나 경솔한 행동으로 그 애정에 실망을 안겨줬을때 비난을 받는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애인 뒷바라지 해줬더니 외국 나가서 불법도박 하는거나 같은 격이다(실제로 팬들이 해주는 뒷바라지는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흔한 반론 중에 "연예인한테 그렇게 관심 가질 거 정치인한테도 관심 가져봐라"라는 말이다. 사실 정치인들도 연예인 못지 않게 관심을 받고 비난을 받는다. 차이라면 당연히 '인구수'의 차이다. 정치인에 대한 관심보다 연예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을 뿐이다. 일베나 오유 등 사이트를 가더라도 정치인이라면 여야 가리지 않고 원색적인 비난을 받는다. 트위터만 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정치인보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더 크냐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치인은 못 생긴 늙은이들이고 연예인은 잘 생긴 젊은이들이다(물론 예외도 있다). 그리고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직업이다. 중요한 건 바로 후자에 있다. '즐거움', 연예인은 춤과 노래, 연기, 개그 등으로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런데 사실 즐거움을 주는건 정치도 해야 할 일이다. 


정치라는 건 귀찮고 지저분한 남의 집 싸움이 아니다. 정치야 말로 식당의 라면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는 것과 같이, 어제와 다르게 오른 콩나물값과 같이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정치가 즐거움을 준다는 건 정치를 통해 국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만약 정치가 한 번이라도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다면 우리는 만만치 않게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관심은 이 즐거움과 무관하다. 오히려 분노와 두려움에 기인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한 관심도 엄연히 관심이긴 하다. 중요한 것은 나는 정치인들에 대한 지금의 관심에도 '애정'이 기인한다고 본다. 어쨌든 애정이 있어야 때려도 때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분노로 인한 관심은 금방 지친다는 점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렇게 지치게 되면 결국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된다. 아마도 지금 많은 사람들은 벌써 정치에 대해 지쳤을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정치란 재미없고 지루한 것이다. 법안을 후벼파고 숫자놀음을 해도 재미없는게 정치인데 그것마저 안하고 지들끼리 싸우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재미없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정치인은 충분히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대중들도 알고 정치인들도 안다. 미취학아동만 아니라면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가 즐거움을 주는 건 교촌치킨에서 봉황새를 튀겨다가 간장치킨 만드는 것만큼 뜬금없는 소리다. 이건 정치인들이 반성해야 한다. 즉 정치인이 연예인보다 욕을 안 먹는 것은 욕하는 대중의 잘못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잘못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의 창구는 언제나 열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을 덜 먹는다는 것은 대중들이 정치에 대해 피로를 느끼고 있으며 애정도 식고 멀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더러운 부패 정치인들은 그걸 원할지도 모르겠다. 대중들이 무관심해져야 더 해먹을 수 있으니 대중들을 지치게 하는 것. 부패 정치인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라질 수 있을까?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랑과 관심을 얻을만한 정치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얻을 정치인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정치 전반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될 것이다. 예시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타이니지의 도희를 띄워서 타이니지 다른 멤버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가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는건 어쩌면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영화 '러블리 본즈' 중)


사실 정치인은 대중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위치다. 그만큼 정치를 행한다는 건 어려운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의 정치계에서 '존경할만한 정치인'은 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구린내나는 속내만 품고 있고 야당은 야당대로 지들끼리 싸우기 바쁘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근데 대통령은 대체 뭐하는건지 모르겠다. 애정을 보내고 존경할만한 정치인이 없다. 그만큼 정치인들이 잘못하고 있고 그러니 사람들이 정치에서 즐거움을 느낄 일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일은 없다. 


결과적으로 지금 정치인들은 연예인보다 못하다. 대중들이 보내는 관심도 그렇고 직업이 대중들에게 주는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정치도 아이돌의 가요만큼 즐거울 수 있다. 그게 안되니 문제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불가능 할 것이다. 어쩌면 "정치도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말 자체가 꿈과 같을 것이다. 그래도 감히 꿈을 꿔보자. 말도 안되는 이상일지언정 최소한 꿈 꿔볼 수는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연예인들이 이렇게 욕 들어먹고 까이는데 대해 자존심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부끄러움 정도는 느꼈으면 좋겠다. ...그것도 이상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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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반시사인줄 알았는데 블라인드 시사였다. 이미 지난해 나온 영화고 부천영화제를 통해 일반관객에게도 공개된 영화지만 그래도 블라인드 시사다. 당연히 리뷰 쓰는데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최대한 자제하면서 쓴다고 썼는데 마음껏 쓴 기분은 아니다. 미친 척 하고 시원하게 쓸까 하다가 그래도 블로그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조심스럽게 써본다.




미혼남인 내게 '잔혹동시'는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슈였다. 특히 어릴 적부터 스튜어트 고든이나 브라이언 유즈나, 조지 로메로, 웨스 크레이븐 등 호러 거장들의 영화를 보며 자란 나에게 '잔혹동시'는 "뭐 애가 그럴수도 있지" 정도의 시시한 이야기꺼리다. 아직 육아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아마 지금 당장 속도위반으로 애 낳아서 키워도 사춘기까지는 최대 15년이 걸린다. 멀고도 먼 이야기다. 


그런에 엉뚱하게도 내가 '잔혹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바둑'이라는 공포영화 때문이다. 사실 '바바둑'은 아멜리아(에시 데이비스)에게 몰입해서 봐야 할 영화다. 하지만 '바바둑'은 아이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다. 아마 TV에 종종 나오던 아동심리 전문가 운운하는 교수님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바바둑'의 또 다른 주인공인 6살 꼬마 사무엘(노아 와이즈먼)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잔혹동시'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바바둑'과 잔혹동시는 아이의 몰랐던 부분을 보게 하는 중요한 텍스트다. 




'바바둑'에서 엄마인 아멜리아와 사무엘의 관계는 여느 호러영화에 비해 다소 특이하다. 다른 호러영화라면 아이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엄마는 다소 스트레스가 있을지언정 아이에게 다정하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견고할수록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위기가 더 크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바둑'에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약간의 균열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공격적이고 엄마는 스트레스에 짓눌려있다. 마치 언젠가 심하게 뒤틀릴 것을 암시하듯 복선을 깔고 있다. 영화는 엄마의 스트레스에 대해 꽤 합리적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어른인 관객들의 시선에서는 아이가 엄청난 밉상일 것이며 엄마의 스트레스에 충분히 납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까지 아이가 갖는 스트레스에 대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아이는 병이 있고 다소 공격적 성향을 가진 '특이한 아이' 정도로 비춰진다. 결과적으로 이 아이는 특별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 원인은 엄마(정확히는 부모의 특수한 상황)에게 있다. 




많은 미국영화를 보면 아이들의 두려움은 꽤 특이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벽장 속이나 침대 밑의 괴물이라던지 옷장 위 귀신이라던지, 꽤 판타지스럽게 두려움을 표현한다. 실제 미국의 아이들이 그런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 역시 어릴때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주로 거울이나 엘리베이터, 혹은 시골 할머니집 푸세식 화장실 변기 속. 


사실 그런 아이들의 두려움들은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 한밤의 엘리베이터가 낯선 곳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라는 상상, 혹은 거울에 비치는 나 자신이 내가 아닐 것이라는 상상. 아이들이 겁이 많은 것은 상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바바둑'의 사무엘은 두려움때문에 엄마에게 의존하지만 스트레스에 지쳐가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 사무엘의 두려움은 역시 상상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상상 너머에는 현실적 스트레스가 몇 가지 작용한다(그 부분은 사무엘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건 사실 그리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아이의 두려움이 뿌리없는 상상에서 비롯되진 않을 것이다. 모든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잔혹동시를 지은 아이는 이제 11살이다. '바바둑'의 사무엘보다는 성장한 아이지만 그래도 '어린이날'을 누리는 다 같은 어린이다. 잔혹동시에서 보여지는 공격적인 내용들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반증이다. '학원가기 싫은 날'은 학원과 학원에 가라고 잔소리하는 엄마에 대한 스트레스에 대한 표현이다. 제어되지 않는 상상력이 마음껏 드러난 탓에 이렇게 '잔혹한' 내용으로 묘사된 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이런 상상이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꽤 착하게 자랐다"고 생각되는 아이들도 이런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왜냐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이들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제어되지 않는 상상으로 아이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나고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지"라는 상상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앞서 말한대로 두려움으로 인한 상상은 결국 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 아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두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지만 반대로 스트레스로 인한 두려움도 있는 것이다. 즉 두려워하고 있는 거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억제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스트레스건 그것을 분출함으로써 해소시킬 필요가 있고 잔혹동시는 그런 분출의 일환이다. 아이의 상상이 아기자기하고 귀엽길 바라는 건 부모의 욕심이다. 귀신이나 괴물을 상상해내는 것도 결국 아이들이다. 


아이를 키우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그건 '바바둑'의 아멜리아를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영화 속 악령인 바바둑은 다소 상징적인 모습이다. 애시당초 바바둑은 동화책을 통해 등장했으며 다소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유아적 상상력에 기반한 악령이란 소리다. 하지만 바바둑은 엄마의 극심한 스트레스의 상징이 된다. 다시 말해 엄마의 스트레스가 유아적 상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실 아이가 갖는 스트레스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부모에게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에게 모든 추궁을 하는 건 다소 가혹한 일이다. 영화에서 보는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의 스트레스를 유아적 상상으로 형상화한 것은 나름의 합의점을 찾으라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엄마가 아이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바바둑'은 아이의 스트레스를 엄마의 책임으로 돌리지만 결코 엄마에게 가혹하게 굴진 않는다. 아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엄마가 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아이를 구해내는 것이다. 아이의 두려움과 엄마가 한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가혹하게 굴지 않는 것은 두려움에 빠진 아이를 구해낼 해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시 잔혹동시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잔혹동시를 책으로 낼 생각을 하고 아이를 감싸주는 엄마가 존경스럽다. 아마도 엄마는 잔혹동시에서 아이의 두려움을 봤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두려움을 감싸주기 위해 그것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비난하고 악플을 달고 있다. 편하게 말하자면 "내 새끼 아닌데"라는 마음이 작용하는 댓글들 같다. 


자, 아이의 두려움은 단지 부모만의 책임일까? '학원 가기 싫은 날'에 등장하는 두려움의 대상은 엄마에게도 있지만 '학원'에도 있다. 어느 집 아이건 그 아이가 갖는 두려움의 원인에는 부모 이상의 더 큰 것이 있다. 아이의 두려움과 그에 기반한 왜곡된 상상의 원인은 결국 모든 어른들과 그들이 구성한 사회에 있다. '바바둑'의 사무엘이 느끼는 두려움에도 영화에서 드러난 외적인 갈등들이 작용했다. 아이의 두려움은 모두의 책임이고 잔혹동시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고리타분한 얘기같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 그림은 영화와 무관한 '이웃집 바바둑'이다. [출처: http://tinywonderstudios.tumblr.com/ ]


여담1) 사실 '바바둑' 이야기의 완성은 결말인데 이게 나름 블라인드 시사회(하지만 제목은 알고 간)로 봤기 때문에 결말에 대한 언급은 아끼도록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미완성이다. 아쉽지만 뭐 미완의 상태로 글은 나름 정리된 것 같다. 하지만 결말까지 언급하면 이 글은 더 재미있게 완성될 수 있을텐데...아쉽다.


여담2) 호러영화로서 '바바둑'은 굉장히 클래식하다. 저택의 구조나 조명, 심지어 클라이막스의 효과 역시 클래식 호러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팔로우'도 그렇지만 역시 클래식 호러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호러영화를 잘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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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5 18:56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15.07.05 18:59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뭐 대단한 글이 아니라서 잘 들을 필요는 없는데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고는 여겨진다.


남녀차별에 대해 전부터 트위터에 짧게 떠들어대던 이야기를 좀 정리해볼까 한다. 언젠가 정리가 필요한 이야기긴 했는데 작성자 뇌구조가 단순해서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이건 좀 복잡한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조건에 한해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한다. 그 조건이란 그들이 부르짖는게 '남녀평등'이 아니라 '여성우월'이 될 경우다. 상호간의 이해가 없이 "여자니깐 무조건 대접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어설픈' 페미니스트라면 대놓고 혐오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차별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이제는 '성'(性)에 대한 차별 위에 '권력'과 '자본'에 의한 차별이 덧씌워지고 있다. 지위가 낮으면 차별당하고 돈이 없으면 차별 당한다. 이러한 차별의 양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늘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부장적인 사상 때문에 더 심했다. 남자인 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 속 여성이 받아온 차별은 심각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이 좀 더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차별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나아지면서 어느 한 켠에는 '차별받는 남성들'도 늘고 있다. 


최근 개그맨 장동민의 여성혐오 발언이 논란이다. 팟캐스트에서 말한 모양이다. 대충 내용을 봤는데 차마 읽기도 더러운 저질 발언들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네티즌들이 분노했고 특히 여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끔찍하다"는 말로 격한 분노를 표현했다. 그 분노를 이해 못한다는 건 아니다. 아니, 나 역시 같이 분노했고 장동민에 대해 팬으로서 보낸 호감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 분노는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분노한 사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 몇 개의 장면(www.instiz.net/pt/2264160?id=pt&category=2)들이 있다. 앞서 링크 걸어둔 대로 젊은 남자아이돌들이 방송에서 당하는 성추행도 상당하다. 남자시청자들이 여기에 둔감해서 이슈가 안 될 뿐이지 나는 방송에서 드러난 일련의 남자아이돌 성추행 사건들이 장동민의 여성혐오 발언만큼 '끔찍한' 일이라고 본다.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은 방송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성범죄 남성 피해자 역시 여성에 비해서는 아직 모자라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물론 가해자는 남성일수도 있고 여성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해자들의 지위가 더 높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서 싸워대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권력의 이간질에 놀아나 싸우는 꼴 밖에 안된다. 이제 '사회적 약자'란 단순히 '여성'으로 국한지을 수 없다. 성별을 넘어서 비정규직, 젊은이, 성소수자, 왕따, 저소득층 등등 '여성'을 넘어선 이 많은 계층들이 모두 '사회적 약자'다. 우리가 약자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면 나는 그 대상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내릴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장동민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 그 '사랑'에 부합하는 가치를 보이지 못했다면 지금 쏟아지는 이 정도 비난은 받아들여야 한다. 소비자가 구매하길 원하지 않는 상품은 진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연예인은 그런 위치다. 


장동민 발언의 배경에는 여성상위 사회에 대한 알량한 피해의식이 깔려있다고 본다. 물론 그 '여성상위'란 독자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장동민을 포함한 옹달샘이 그것을 '웃음코드'라고 판단내린 건 그런 피해의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차별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할 건 '어설픈' 페미니스트들 뿐 아니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SNS상에서 목소리를 더 내고 있는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있는 자들의 거슬리는 발언 때문에 서두를 다소 공격적으로 달았다. 누군가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여성인권을 부르짖을때 한쪽 구석에서는 그런 응원의 구호조차 받지 못한 약자인 남성들이 있다. 


사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지난 4월 2일 매일경제에 기고된 이채원 영화평론가의 글(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315840&utm_source=twitter&utm_medium=sns&utm_campaign=share)을 읽었다. '페미니즘'의 정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인상적인 글이다. 특히 "여성(남성)은 나의 적이 아니다. 나의 어머니(아버지)이고 누이(형제)이고 딸(아들)이며 아내(남편)이고 친구이다.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나와 같이 소중한 존재이다. 남성/여성, 남성성/여성성, 남자다움/여자다움이라는 편 가르기보다는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페미니즘'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실 이건 굉장히 예민하고 어려운 것이다. 어느 성이건 '성 평등'을 부르짖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성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없이 부르짖는 구호라면 또 다른 '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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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봄이오는소리 2015.04.14 01:18 address edit/delete reply

    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2. ㅇㅇ 2015.05.08 00:31 address edit/delete reply

    장동민 화이팅 기죽지마라~~






영화 '한공주'와 세월호 참사는 이야기의 맥락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 말을 우선 전제로 깔아둬야 필자나 독자 서로 오해가 생길 일은 없을 것 같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했고 서로 다른 맥락을 가진 이야기는 이야기의 진행과정 내내 서로 다른 길을 가다가 마지막에서야 만난다. 하지만 우리가 시선을 아주 멀찌감치 떼어놓고 본다면 두 이야기는 하나의 큰 범주 안에 묶여있게 된다. 그 범주란 폭력적이고 치졸한 어른들의 단면이며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상처투성이 아이들의 무덤덤한 일상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질서


흔히 우리나라는 '전쟁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라고 평가받는다. 그 경제발전에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한 아버지 세대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분들이 살고자 발버둥 친 덕분에 지금 우리나라는 꽤 살만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그 '살만한 나라'를 위해 우리가 얼마나 윤리와 도덕을 져버렸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부정부패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정부패들에 대해 그것이 발생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분명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이 지금 재벌이 됐고 사회지도층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또 자신들이 쌓은 부를 지키고 싶어할 것이다. 당연한 이치다. 그들이 부를 쌓기 위해 친구도 등졌을 것이고 믿음도 져버렸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억울한 희생 또한 밟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 습득한 방법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어른들의 질서란 생각보다 가혹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공부해야 하고 대학가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회사에 입사해서는 일하는 걸로도 모자라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봐야 하고 결혼은 사랑보다 경제적 사정을 우선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결혼 후 낳은 자식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하지만 '한공주'와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진 이야기는 이러한 질서 속에 아이들일 집어넣는 걸로도 모자라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리기 까지 한다. 어른들이 지켜온 이기적이고 부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거나 차가운 바다속에 잠기게 된다.




구겨넣어진 아이들


'아이들'이라고 명명했지만 이 역시 범위를 확장시켜보자. 공부에 찌들고 취업, 내 집 마련에 찌든 세상의 모든 청춘들이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청춘의 삶이란 쉼없는 고난의 연속이다. 사색할 여유도 없고 꿈 꿀 여유도 없이 사회의 질서를 쫓기 위한 쉼없는 달리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꿈도 멀어지고 사색도 멀어지게 된다. 

꿈이란 늘 고난이 따르는 법이라지만 그것이 사회가 만든 고난이어선 안 될 것이다. 흔히들 꿈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고 하면 어른들은 "노력해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올바른 사회라면 그 꿈이 뭐가 됐건 응원하고 지원해줘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많이 부족한 사회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은 꿈 꿀 권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전쟁 직후부터 내려온 쳇바퀴같은 어른들의 질서 속에 살아가게 된다. 




'한공주'의 이야기를 해보자. 한공주(천우희)는 꿈도 있고 재능도 있는 아이다. 아주 가난하진 않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한공주는 특출나게 모범적인 아이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모난 아이도 아니다. 그런 한공주가 상처를 입게 된 건 또래의 아이들로부터다.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하지만 영화는 한공주가 상처입는 과정을 거기서 시작하지 않는다. 공주는 상처를 입었지만 나름 씩씩하게 극복하려 한다. 자신을 방어하며 삶을 찾으려 하고 새로운 친구들과 새 삶을 꾸리려고도 한다. 어른들의 시선은 여전히 가혹하지만 공주는 친구들 덕에 위기를 잊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물어가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건 어른들이다. 

공주의 상처가 곪아 터졌을 때 어른들의 시선은 냉정하고 가혹했다. 누구 하나 공주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어른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공주를 지켜주던 담임(조대희) 역시 어른들의 질서에 순응하는 희생양일 뿐이다. 공주를 지켜주던 울타리가 사라지자 공주의 상처는 새 친구들에게도 전염된다. 

세월호 참사 역시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대로다. 회장의 부정함이 부실한 여객선을 들여왔고 선장의 이기심이 아이들을 선실 안에 방치시켰고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정부의 늑장대응으로 버려졌다. 결국 200여명의 아이들이 바다 속에 잠겼다. 200여개의 꿈 역시 사라지게 됐다. 




아이들보다 중요한 어른들의 안위


우리나라는 유교적 질서가 자리잡은 나라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그런 생각들은 곳곳에 남아있다. 유교적 질서에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필자는 이 나라의 어느 지점에서 이 질서가 아주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어른들은 자신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아이들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말로는 아이들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탐욕스런 어른들에게 남의 아이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한공주는 학교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됐고 자기 아이만 지키려는 탐욕적인 어른들에 또 한 번 상처입었다. 세월호 속 아이들 역시 수익을 챙기려는 기업인들의 횡포와 자리를 보존하고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정부 관료들에 의해 희생됐다. 




아이들을 지켜줄 수 없고, 지키지 않으려는 나라는 어떤 의미일까? 그건 꿈과 미래를 포기한다는 의미다. 뮤지션의 꿈이 있던 한공주, 운동선수와 과학자, 연예인, 정치인을 꿈꿨을 세월호 속 아이들. 또 꿈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에 충실했을 아이들.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 200여개의 꿈을 수장시켰다.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고귀한 꿈을 파묻어 얻으려 한 것은 알량한 자신들의 안위일 뿐이었다. 아이들의 꿈과 미래보다 현재 자신들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국가에 과연 미래가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일이다.




여담) 공직사회의 밑바닥

※ 이 글은 본문과 연관이 있는 듯 하지만 연관이 없을 수도 있고 뭐 아리까리한 글임.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월호 참사는 공직사회의 밑바닥을 보여준 사고다. 물론 '한공주'에서도 만만치 않은 공직사회의 바닥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공직사회의 관료주의와 형식, 실적을 중시하는 업무방식이 구조의 속도를 더디게 했고 유가족들의 마음에 대못질을 했다. 그런데 그 대못질을 해댄 만행들을 살펴보면 참 공무원스러운 일들이었다. 상관을 대우하고 서류와 사진을 통해 업적을 남기는 등 말하자니 쪽팔리는 이 상황들은 사실 공직사회의 흔한 일상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는 어디까지나 별도의 사고원인이 있고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이런 상황과 별개로 공직사회는 분명 각성해야 한다. 그리고 '한공주'에서 보여진대로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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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아역배우가 발굴된다는 건 언제나 멋진 일이다. 모든 경우가 그렇진 않지만 이건 마치 그 나라에 풍성한 배우가 구축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늘 두 명의 아역배우를 비교해볼려고 한다.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태어났으니 한일 월드컵은 모를 세대들이다. 이들 두 아이들은 귀여운 외모와 그에 못지 않는 '탄탄한 연기력' 심지어 '자연스러움'까지 갖추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국선수 김유빈 - 차원이 다른 감정몰입과 찰진 사투리


2005년 1월생인 김유빈양은 2010년 드라마 '오 마이 레이디'로 데뷔했다. 이후 드라마 '주홍글씨', '애정만만세', 독립영화 '저주의 기간' 등에 출연했다. 그러다 2011년 문채원, 박시후 주연의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아강이' 역할로 출연해 귀여움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김유빈의 매력은 역시 똘똘한 외모와 감정몰입, 찰진 사투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주목받는 국내 아역들은 몇 있었지만 김유빈은 이들과 분명 노선이 다르다. 다른 아역배우들이 '학습된 연기력'을 선보일 때 이 아이는 유독 '감정에 충실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것이 학습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이 아이의 연기를 보고 있지만 "몰입하고 있구나"라는 것이 절로 느껴진다. 그러한 연기가 장 잘 묻어난 작품이 가장 최근작인 드라마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최원(이동욱)의 딸 최랑으로 출연한 김유빈은 적재적소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연기를 선보인다. 그것도 모자라 아역답지 않은 다이나믹하고 풍부한 표정변화는 요즘 젊은 연기자들이라도 충분히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또 송해와 함께 찍은 '기업은행' 광고에서도 세대를 초월한 구수함을 과시하며 주목받는 아역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무기를 확고히 하고 있다. 


이런 김유빈의 모습은 흡사 '여행자' 시절 김새론을 떠올리게 한다. 다작을 하지 않으면서도 노선을 확고히 하면서 다른 아역들과 차별화된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이 장차 김새론 같은 '개성파 아역'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일본선수 아사다 마나 - 열도를 넘어선 월드스타


아사다 마나는 이미 일본에서 스타가 된 것도 모자라 세계시장을 겨냥한 월드스타로 성장했다. 아마 와타나베 켄, 사나다 히로유키, 키쿠치 린코 등을 다 합쳐봐도 최연소 헐리우드 진출 일본배우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물론 '퍼시픽 림'에서 아사다양이 등장한 장면은 짧았지만 그 순간에 눈물연기와 공포에 떠는 모습은 세계시장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했다. 


아사다양 역시 유빈양과 같은 2010년에 영화 '고스트: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에는 송승헌도 출연했으니 한국과의 인연도 져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 '고백'에서 유코 선생(마츠 다카코)의 딸인 미나미로 출연해 짧은 순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사다 마나가 주목을 받은 작품은 2011년 영화 '버니드롭'을 통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버니드롭'은 6살 이모와 27살 조카와 좌충우돌 동거기를 담은 작품으로 아사다양과 마츠야마 켄이치의 호흡이 잘 맞아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한 작품이다. 






아사다 마나의 무기는 특유의 해맑은 모습이 될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물론 해맑고 깡총깡총 뛰어놀긴 하지만 아사다 마나는 유난히 크고 환하게 웃는데다가 그것이 주목될만한 쳐진 눈꼬리와 큰 입을 가지고 있다. 물론 '퍼시픽 림'에서 보여준 감정몰입 역시 칭찬해 줄 만하다. 특히 어른들도 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 하는 연기에 있어서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한다. 


아사다 마나의 연기력 중 주목할만한 부분이 바로 '퍼시픽 림'에 등장한다. 현대 연기자들이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가상의 대상을 상대로 연기하는 것이다. 헐리우드야 워낙 CG가 보편화되다 보니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 연기해야 할 일이 많지만 한국은 그런 경우가 흔치 않다. 대표적으로 '7광구'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곱씹어 보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연기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다 마나는 짧은 순간 이 부분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보통 인재가 아님을 세계 시장에 입증했다. 




꼬꼬마 한일전=상생의 한일전


조금 거창하고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해보자. 아마 이 두 아이들은 앞으로 펼쳐질 연기 인생 내내 한 번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둘이 출연한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릴 일도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를 비교해본 것은 연기력으로 주목받는 아이의 등장은 언제봐도 반가운 일이다. 두 아이들이 '한일전'이라는 이름으로 빅매치를 붙지 않더라도 부디 각 나라의 훌륭한 배우로 성장해줬으면 하는게 관객으로써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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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다. 윤리와 도덕적 관념을 누구보다 중시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부던히 노력한다. 그런데 나는 때로는 이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막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것은 최근 일련의 사태들과 아주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우리 어른들을 보며 내리게 된 결론이다.

 

얼마전 용인에서 끔찍한 토막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이 10대라는 것 또한 우리에게는 엄청난 충격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경기지방경찰청의 어떤 보도자료를 받고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지게 됐다. 범인에 대한 기자 질의응답을 요약한 문서에서 왜 기자는 뜬금없이 공포영화 이야기를 물어봤을까? 물론 가장 충격적인 것은 거기에 대해 시크하게 대답한 범인이지만 2차적으로 그런 질문을 꺼낸 기자에게 충격을 받게 됐다. 사회부 사건기자의 어떤 매뉴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뜬금포가 아닌가 싶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여성가족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게 됐다. 이들은 야동에 대한 규제를 선언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성범죄 예방'을 꼽았다. 야동보고 딸딸이(자위행위) 한 번 해 본 사람이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야동유저들은 "야동보고 나가서 성범죄 저지를 사람이라면 야동을 보지 않아도 저지를 사람이다"라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공포영화가 살인과 연결되고 야동이 성범죄와 연관될 것이라는 단순명료한 결론을 내놓고 있을까?

 

 

반 윤리의 극단에 치닫는 영화를 보고 당신은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까?


사실 아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기술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모방할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의도'면에서 따져 봤을 때 전적으로 영상물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기득권층과 어른들의 비겁한 책임회피일 뿐이다.

 

나는 살인과 성범죄의 모든 책임은 사회구조상의 빈부격차와 억압을 양산하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자본에 의한 격차가 심해지고 그에 따른 피지배 층이 지고 가야 할 짐이 너무 커지면서 그 극단에 이르러 발생하게 되는 반발심이 잔혹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 예로 아동 성폭행의 경우 단순한 '성욕의 해소'로 보기에는 여러가지로 무리가 있다. 사실 이건 '로리콘'과도 다른 양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피지배자로 억눌리면서 그 스트레스가 극단에 치닫는 사람이 자신의 정복욕구에 대한 '기형적 과시'로 가장 약한 어린이들을 해하는 모양새가 된다. 굳이 연결짓자면 이것 역시 '억눌린 성욕'으로 풀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성욕 이상의 복잡한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공포영화는 이것에 대한 욕구분출의 장이 된다고 본다. 억눌리고 금기된 욕망들이 스크린을 통해 분출되고 반 윤리의 극단에 치닫는 이미지들이 나열되면서 내면 깊은 곳의 윤리와 도덕을 끄집어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러니깐 야동을 즐기는 유저들이 말하는 '현자타임'이라는게 이런 식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유혈낭자한 영화를 본다고 피를 봐야 현자타임이 오는 건 아니지만 반 윤리적 살인과 유혈낭자의 끝을 보고 나서야 "이렇게 살면 안되지"라고 느끼게 되는게 바로 호러영화의 현자타임이다.

 

 


살인과 섹스는 가장 말초적인 자극들이다. 그만큼 인간 내면에 꽁꽁 숨겨둔 욕망의 분출이다. 인간을 '동물'로 분류한다면 이것은 이성과 윤리가 지배하는 문명사회구조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욕구의 분출이다. 실제로 많은 포르노그라피들은 섹스에 대해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학을 대입시켜 관계를 풀이하기도 한다. 살인과 성폭행 모두 억압된 인간의 지배욕이 분출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지배와 피지배의 극단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조금은 더 대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게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지배하려 드는 여러 계층들(특정 계층을 지칭하진 않겠지만)이 오히려 공포영화, 야동보다 더 위험한 존재이지 않을까?

 

p.s) 물론 필자는 살인과 성폭행을 저지른 썅놈들에게 동정을 보내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며 그들의 사지를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런 글을 쓴 것이다. 공포영화와 야동을 백날 규제하고 비난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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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sephia 2013.07.16 23:13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으흠........ 사쿠라 마나가 누군가 했더니 AV배우인가요?




요즘 TV드라마 중 가장 핫한 드라마를 꼽자면 '신사의 품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동건, 김하늘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김수로, 김민종, 이종혁, 윤세아 등 걸출한 스타들이 대거 출동하다보니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헌데 이 명품드라마로 각광받는 드라마가 이야기구조를 따져보면 의외로 상당히 단순한 구석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하다기 보다는 아주 익숙하기까지 하다.


음... 그래 솔직하게 말하겠다. '신사의 품격'의 인물과 이야기 구조는 아주 정확하게 말해서 '마이블랙미니드레스'의 확장판인셈이다. 썩 바람직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마이블랙미니드레스'는 20대 후반의 싱글여성 4인의 일과 사랑을 '나름대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같은 구조로 '신사의 품격' 역시 성공한 40대 싱글남성 넷의 일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인물들의 계층만 바뀌었을 뿐이지 두 작품은 사실상 거의 동일한 구조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에 대한 평가는 거의 극과 극이다. '마이블랙미니드레스'는 영화를 본 관객들로부터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낮은 평점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반면 '신사의 품격'은 방송 첫 주만에 '시크릿가든'에 필적할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인기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다. 물론 이같은 극과 극의 반응에는 연출자의 능력이나 극본의 재미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블랙미니드레스'가 악평을 받던 당시 '인물들에 대한 공감지수'가 언급됐던 점을 비춰볼 때 두 작품의 극과 극 반응에는 영화적인(혹은 드라마적인) 구성요소와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작품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요소가 있을테지만 가장 큰 요소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앞서 말한 '인물들에 대한 공감지수'다. '마이블랙미니드레스'는 20대 후반 여성들이 주인공들이다. 경우에 따라 20대 여성이라면 충분히 성공을 이뤄냈고 자기 삶을 즐길 줄 아는 계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20대 여성이라면 성공한 삶을 위해 좀 더 노력하고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도 성공을 위한 좌충우돌을 충분히 그려내고 있지만 이야기는 그들의 삶에 대한 노력보다 상류사회를 즐기는 모습을 비추는데 더 주력하고 있다. 그런 치열한 삶을 사는 20대들에게 '마이블랙미니드레스'는 "사치스럽고 골빈 동년배들의 일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 '신사의 품격'은 40대 싱글남들의 이야기다(아, 물론 극 중 한 명은 결혼했다). 이들은 각각 건축사무소 소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귀부인의 연하남편 등등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 언듯 보면 되게 럭셔리한 삶을 즐기고 있지만 딱히 럭셔리하지도 않다. 딱 한 명만 뺀다면 이들은 자신의 직업과 성취도에 맞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조차 그리 현실적이며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청자는 이들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0대라면 충분히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이야기의 완성도' 면에서도 40대의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더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얻고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뤄낸 40대 남성이라면 그만큼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신사의 품격'은 네 남자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극의 흥미를 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물론 20대 후반의 네 여성들에게도 분명 과거의 이야기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세월의 연륜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이다. 특히 '추억'은 술과 같아서 오래 묵혀둘수록 깊이가 더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사의 품격'은 여기에 깨알같은 유머들로 극적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긴 드라마다 보니 네 남자를 중심으로 주변인물들이 다양하게 배치되어있고 그들과의 유대관계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보니 극적 재미는 '신사의 품격'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하지만 '마이블랙미니드레스' 역시 충분한 극적재미를 보여줄 수 있었지만 상류사회에 대한 보여주기에 급급하다보니 재미와 공감대를 둘 다 잃게 됐다.


특히 '신사의 품격'은 40대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근엄한 어른으로 묘사하지 않고 '소년'에 가깝게 묘사하며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누군가의 말을 새삼 보여주고 있다. 이 귀여운 아저씨들이 여성 시청자들의 격한 공감을 얻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동건, 김수로, 김민종, 이종혁 등 '원래 매력남'들이 연기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글을 쓰다보니 이 글이 40대와 20대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글로 비춰질지 염려된다. 우선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밝혀둔다. 20대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40대에도 충분히 소년같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우리의 삶'이 아니라 대중앞에 보여지는 이야기로써라면 '마이블랙미니드레스'의 '럭셔리한 20대'는 완벽한 실패작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들과 동년배인 여성관객들이라면 박한별, 윤은혜, 차예련, 유인나의 완벽한 몸매는 "흥!칫!뿡!"이 절로 나오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테니 말이다. 남성관객은? 어차피 그들이 선호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성공한 40대의 럭셔리 라이프에서는 아저씨들 삶의 깊이와 연륜이 묻어난다. 또 그들의 소년같은 모습은 일상 속 아저씨들의 답답한 모습에서 벗어난 일종의 '로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20대 여성들의 모습 역시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공이 클럽에서 이성과 만나고 명품을 사기 위한 성공이라면 동년배의 여성들조차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20대가 공감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그들의 노력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전 KBS에서 최규석 작가의 만화 '습지생태보고서'를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했다. 매우 처절한 20대 청춘들의 모습이었고 심지어 이들이 열망하는 것 역시 '마이블랙미니드레스'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빠르게 그들을 꿈에서 깨게 한다. 그리고 산 속 작은 집에서 또 다른 희망을 꿈꾸게 한다.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년이 즐거운 이유는 청춘의 노력을 이뤄냈다면 충분히 즐길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말이다.


결론은 '신사의 품격', 의외로 진지하고 이야기꺼리가 많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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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leehk0813 2012.08.16 22:49 address edit/delete reply

    제가 두달뒤에 비슷한 소재로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글이 있는지 모르고 그런 글을 쓰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 BlogIcon DAISHI ROMANCE 2012.08.16 23:06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제가 쓴 것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재밌는 글이네요 ㅋㅋ 죄송할 것 없어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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