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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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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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20.05.06
    잡담 200506 - 코로나19와 국제영화제
  2. 2020.02.03
    '성혜의 나라' 초간단 리뷰
  3. 2019.05.16
    [약간스포] '아무도 없는 곳' 초간단 리뷰
  4. 2019.05.10
    '맛있는 가족' 초간단 리뷰
  5. 2018.05.08
    이야기, 창작자, 그의 일상 그리고 삶의 이해
  6. 2017.06.10
    '폭력의 씨앗' 초간단 리뷰
  7. 2017.05.03
    '안티포르노' 초간단 리뷰
  8. 2016.02.26
    '설행-눈길을 걷다' 초간단 리뷰
  9. 2011.05.24
    '애정만세' - 사랑이 마냥 아름다운 줄 알았어?
  10. 2011.05.01
    '슬픈 트럼펫 발라드' - 미치광이 삐에로의 슬픈 서커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매년 국내 3대 국제영화제(부산, 부천, 전주) 중 최소 1개 이상은 무조건 갔습니다. 부산에서는 두 번 정도 '내부자'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나름대로는 우리나라 영화제의 생리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아는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최근 우리나라 국제영화제는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보입니다. 관객의 관심과 영화제의 지향점이 다르다던지, 효율적인 운영을 할 돈이 없다던지. 뭐 그런 문제들이죠. 

올해 전주영화제가 코로나19 영향으로 무관객 영화제가 된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메가박스 객사점이 영업을 종료하면서 전주영화제 상영관이 부족할 상황이었거든요. 4월말에 같은 자리에 씨네큐 전주영화의거리점이 문을 연게 영화제와 어떻게 연동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지만(첫 개관행사를 전주국제영화제로 할 수도 있었음) 메가박스 객사가 있을 때도 전주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만약 씨네큐가 예정대로 문을 열지 못했다거나 씨네큐와 협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면 올해 전주영화제는 더 정신없어질 뻔 했죠. 

부천영화제는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김봉석 전 프로께서 언급하신 여러 사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도 이 자리에서 차마 언급할 수 없는 여러 이슈들이 있었죠. 

영화제뿐 아니라 어딜 가도 20년 넘게 자리를 잡은 기관이라면 고인물과 적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히 영화판은 정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자리가 극히 제한적이라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위원장 같은 자리는 여러 사람이 탐내는 자리죠. 사무국장을 포함한 사무국 주요 요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의 경우 상근직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고 그만큼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약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3대 국제영화제는 여러 고인물과 적폐가 어우러져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코로나19로 영화제들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죠. 외국의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사태가 개선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전보다 관(官)이 개입하는 경우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관의 입김은 세죠. 게다가 영화제에 얽힌 이권다툼도 심각합니다(이것은 김봉석 전 프로님 말씀 참조). 때문에 코로나19는 영화제의 내적 쇄신을 꾀할 계기가 될 수 있겠군요. 

구체적인 대안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변해버린 관람문화를 수용하고 넷플릭스를 포함해 더 늘어나는 글로벌 OTT 플랫폼과도 상생의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지역 축제 방식에서 벗어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를 수 있는 행사가 돼야겠죠. 더 자세한 건 관계자들이 논의해서 답을 내놓을거라 생각됩니다. 

전주가 무관객 영화제를 하기로 했고 부천도 규모가 대폭 축소된다고 합니다. 개인적 생각은 이참에 부산도 조정을 하고 대규모 쇄신에 들어갔으면 좋겠군요. 이전부터 부산국제영화제는 쇄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부산시장에 의한 쇄신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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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영화는 보는 일 자체가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영화'의 정의가 반드시 '꿈과 희망, 즐거움'에 있지 않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영화를 보며 고통받는 일 또한 필요한 작업이라고 믿는다. 영화 내내 괴롭혀지고 시달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며, 고통의 끝에서 다다르는 기이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물론 이 작업 자체도 굉장한 인내가 따른다. 예를 들어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보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꽤 오랜 시간 관객을 제압하며 숨소리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고통의 끝에 이르러 주인공의 시선을 느끼고 영화관의 불이 켜졌을 때 관객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한강공원을 질주한 뒤 모래주머니를 벗어던지는 것과 유사하다('마터스'를 보는 행위는 그보다 훨씬 더 무겁다). 더 다양한 영화를 보고 이해하며 그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영화 속 인물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2. '성혜의 나라'에서 성혜(송지인)의 일상은 고통을 넘어 무기력에 머물러있다. 29살의 나이에 취직을 준비하며 편의점과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지만 꿈도 희망도 없어보인다. 수면제 처방을 받으며 한알씩 모아 기어이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이다. 7년 사귄 남자친구 승환(강두)과의 데이트도 무료한 일상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 성혜의 삶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보인다. 그저 스트레스성 위염과 공황장애 증상만이 그녀를 괴롭힐 뿐이다. 영화는 꽤 오랜 시간 성혜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아니,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성혜의 삶'에 할해하고 있다. 흑백의 무겁고 어두운 화면은 성혜의 무기력함과 스트레스를 더 배가시킨다. 낯빛을 알 수 없는 색감은 관객의 상상만으로 "이 여자, 많이 지쳐있구나"라고 느끼게 만든다. 그렇게 오랫동안 관객을 무기력과 스트레스로 초대한 뒤 영화는 터닝포인트를 심어둔다. 

3. '성혜의 나라'의 이같은 전개는 대단히 특이한 지점이다. 통상 보편적 삶이 배경이 되고 터닝포인트가 생긴 이후 변화된 삶에서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찾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와 반대로 배경을 엄청나게 깔아두고 터닝포인트 자체가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된다. 통상적인 이야기 전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아주 좋다. 그러나 시도의 결과물이 통상적인 전개보다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영화는 성헤의 결정에 관객이 공감해주길 바라고 있다. 때문에 오랜 시간 성혜의 삶을 보여주며 관객을 성혜에 이입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성혜의 삶은 너무 아날로그적이고 무기력해 오히려 이입하기 어렵다. 성혜와 같은 나이라면 1990~1991년생이다(이제 1992년생도 해당된다). 나는 그 또래들이 이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할 지 궁금하다. 

4. 분명 어딘가에 성혜처럼 사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당장 픽션 속 캐릭터 중에서는 드라마 '청춘시대' 시즌1의 윤진명(한예리)이 있다. 아등바등 아르바이트하고 공부하며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청춘시대'의 윤진명은 취업·고시 준비로 지쳐버린 세대의 상징과 같았다. 성혜가 진명과 같아질 필요는 없다. 지친 와중에도 누군가 다가오고 사랑을 하고 우정을 쌓는다. 성혜는 진명보다 더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서는 성혜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영화를 통해 마치 '보편적 20대 후반의 여성'인 것처럼 그려졌을 때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신문배달'이라던지 '종이통장을 통한 잔고확인' 등 디테일은 접어두자. 고통의 끝에서 무기력이 찾아오고 그것을 넘어섰을 때 자살충동이 찾아온다는 발상은 확실히 구시대적이다. 성혜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한 키워드는 '포기'다. 이 포기는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에서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던 어떤 것(취업, 결혼, 출산 등)들에 대한 포기다.

5. 영화는 클라이막스 이후 성혜가 선택한 길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만약 5억원이 생긴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성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고 답했다. 가능한 선택이긴 하나 결코 그 선택이 끝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결국 '무기력'과 통한다. 성혜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한 휴식'이 아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건 성혜는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친구의 말처럼 카페를 차리건,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건. 갑자기 큰 돈이 생겼다는 것은 영원히 노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성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깨달을 것이다. 

6. 나는 '성혜의 나라'가 성혜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변하는 영화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기성세대가 바라본 20대'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한계는 과거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들었던 지점이다. '버닝'과 비교하자면 이 영화가 관찰하는 20대는 한결 도식적이고 단순하다. 이 지경이다 보니 성혜를 바라보는 긴 시간이 대단히 고통스럽다. 이것은 마치 '테리우스 없는 캔디' 혹은 'F4 없는 금잔디'를 보는 기분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성혜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동시대의 청년들을 얼마나 관찰했는가"라고 묻고 싶어진다. '성혜'를 '보편적 20대'가 아닌 '특별한 사람'이라고 보는 방법도 있다. 영화가 반드시 보편적 세대를 대표할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다만 그렇다면 나는 왜 '특별한 사람'의 일상을 1시간 넘게 지켜봐야 하는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편적 이야기인 것처럼 나열하는 이 영화의 태도는 이질감을 더욱 배가시킨다. 

7. 결론: '버티고'를 처음 봤을 때 이질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어떤 영화감독은 "내가 너희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줄게"라며 자신들이 바라본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거에도 그런 어른들은 있었다. 20세기 후반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판단한 10대의 이야기에 반발해 스스로 캠코더를 들고 영화를 찍었다. 그 영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게 영파여중 방송반이 만든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다. 매년, 매 세대에 그런 영화는 필요하다. 스스로 대변하는 영화. 


추신) 내가 알기에 강두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배우로 알고 있다. 강두와 송지인 배우의 커플 연기를 보고 "나이 많은 배우가 어린 배우랑 커플연기를 하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송지인 배우의 프로필을 검색하고는 강두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았다. ....워....굉장한 동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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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갑자기 죽는 소리 할 때는 심경에 변화가 있거나 요즘 몹시 힘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소위 '자살의 신호'나 '우울증으로부터 구조요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할 능력이 되지 않아 판단이 어렵다. 특히 나와 관계가 없는 '영화감독'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변호텔'은 아주 이례적인 작품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강변호텔'에 대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죽음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영화"라고 말했다. 거기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이제부터 이야기 할 '아무도 없는 곳'은 마치 김종관 버전의 '강변호텔' 같은 영화다. 물론 모든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심정과 연관 지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직전에 만든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에 이어 이번에도 '죽음'을 화두로 이야기를 던진다. 

2. '아무도 없는 곳'은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창석(연우진)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오래된 커피숍에서 미영(이지은)을 만나고 한적하지만 건조해보이는 공원 옆 카페에서 후배 유진(윤혜리)를 만난다. 그리고 출판일을 도와주던 사진작가 성하(김상호)와 바(bar)에서 일하는 주은(이주영)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건 죽음과 연관돼있다. 본인 스스로 죽음에 근접한 미영, 죽은 새를 마주한 유진, 아내가 죽으면 함께 죽으려는 성하, 죽을 고비를 넘긴 주은. 죽음과 가까이 한, 혹은 가까이 했던 사람들과의 대화는 어딘가 초연하다. 그들은 각자의 성격대로 삶의 마지막, 혹은 이미 지나버린 그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3. 그런데 이 초연한 순간에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바로 창석이다. 영국에서 결혼을 했던 창석은 아이를 낳았으나 어떤 일로 먼저 떠나보내게 된다. 이미 그는 '자녀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겪은 몸이다. 게다가 아내는 아직도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끔찍한 상실은 이들 가족의 울타리 뿐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 또한 파괴해버렸다. 그 때문인지 창석과 주변의 공기는 이른 새벽 해무처럼 낮고 짙게 깔려있다. 그런 창석의 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노부부의 모습이다. 시선이 노부부를 발견하기까지 따라가는 풍경은 아무도 없는 밤거리다. 마치 그 거리는 창석이 지나간 것처럼 어두운 공기만이 맴돌고 있다. 

4. 나는 이 영화를 본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리 젠킨스 감독의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빌 스트리트')이라는 영화를 봤다. '빌 스트리트'는 어린 시절 추억과 소울이 담긴 거리를 기억하기 위해 그 거리를 생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비춰준다. 초상화처럼 담긴 얼굴들은 거리에 담긴 이야기와 그에 따른 감정들이다. 다시 말해 거리는 사람을 통해서 기억된다. 김종관의 '아무도 없는 곳'은 '빌 스트리트'와 정반대에 있는 거리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있었던 거리에는 점점 사람이 사라져간다(상실). 우울함은 표정이 없이 공허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사람을 잃어가는 거리는 그곳을 관찰한 사람의 마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걷는 창석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 거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감독의 마음이기도 하다. 

5. 오래전에 봤던 김종관 단편선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서 살펴본다면, 이 영화는 김종관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통틀어 가장 우울한 영화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그의 현재 상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궁금함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강변호텔'을 만든 홍상수의 심정에 대해 추측만 할 뿐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점과 같다. 심지어 그는 엉망진창이 된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한예리)에게도 나비같은 날갯짓을 선사했다. 창석에게는 그것마저 없다. 그는 그저 사라져버렸다. 

6.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주은이다. 그녀는 이전의 김종관 영화 속 여성캐릭터들과 달리 외모와 성격이 꽤 강하다. 그렇다고 '걸크러쉬'이 매뉴얼에 들어맞는 강함이 아니라 '시원시원함' 정도의 강함이다. '더 테이블'이나 '최악의 하루'에서도 여성캐릭터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감이었고 누군가는 조금 밉상이었다. 어떤 형태건 김종관 감독이 이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담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아무도 없는 곳'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랬기에 그곳에 있는' 인물들이다. 연출자가 애정을 가지고 가꾼 캐릭터라기보다 가장 적절하게 존재해야 하는 캐릭터로써 배치한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창석과 유진이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빛의 사라짐'을 그대로 표현한다. 빛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물이 사라지고 심지어 실루엣도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밤거리에서 창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더해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전 영화들에 비해 인물들이 예쁘게 보이는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7. 결론: 김종관 감독은 '아무도 없는 곳'이 상실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아는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영화를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내리겠다. 영화 속 곳곳에 짙게 깔린 죽음의 정서는 우리가 아는 익숙한 거리를 맴돈다. 참 다행스럽게도 죽음에 대한 이 영화의 정서는 '강변호텔'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죽음 전체와 개인의 죽음에 대한 차이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는 '강변호텔'보다 훨씬 더 우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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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 김윤석에게는 어린 팬들이 꽤 많다. '지천명 아이돌' 설경구와 비교 데이터를 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꽤 많은 팬을 거느린 모양이다. 그런 김윤석의 팬들이 만든 플랜카드에는 기발하고 빵 터지는 '고급 드립'들이 아주 많다. 그 중 한 드립, "따님, 아버님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말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영화도 아닌 일본영화에서 그 드립이 실제로 등장할 줄은... 먹방 시트콤 제목같은 '맛있는 가족'의 영어 제목은 'My Father, the Bride'다. 그러니깐 아빠가 신부가 됐다는 의미같은데, 이게 무슨 뜻일까 싶긴 하지만 사실 영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제목은 영문에 더 가깝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빠가 신부가 되는 얘기다. 

2.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살펴보면, 엄마의 기일을 맞아 외딴 섬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간 토카(마츠모토 호노카)는 아빠 세이지(이타오 이츠지)가 엄마의 옷을 입고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세이지는 놀란 토카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재혼하게 될 상대인 카즈오(하마노 겐타)를 소개한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토카와 달리 너그러운 섬 주민들은 세이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토카가 섬에서 보내는 며칠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지게 된다. 

3. 처음에는 크로스드레서가 등장하는 퀴어영화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세이지는 단지 아내의 옷을 입고 있을 뿐 '남자'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아내'가 되고 싶은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죽은 아내를 너무 사랑하고 그리워해 아내가 되기로 한 남자다. 이거 정말 애절한 사랑이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그 애절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유쾌하게 담아낸다. 물론 성 정체성에 고민을 하는 10대 소년도 등장하지만 차별을 두진 않는다. 영화는 "누구나 자유롭게 입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복장의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4. 그러나 영화는 이상한 지점에서 성 고정관념을 갖는다. 세이지는 아내를 느끼기 위해 아내의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러고 하는 일이 요리와 집안일이다. 아마 세이지는 아내가 살아있을 때 집안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을 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바깥 일에도 매우 바빴을 것이다. 그러니깐 이 가정은 남편은 나가서 돈 벌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이다. "과거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도시가 아니라 섬마을이라면 엄마의 역할은 더 전형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시골'이라는 제한적인 환경에서도 엄마에 대해 좀 더 입체적으로 접근했던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엄마'의 이미지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맛있는 가족'은 성 정체성에 대해 묻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해 묻는 영화다. 영화에서 토카는 도쿄에 살고 결혼에 실패한 젊은 여성이다. 필요에 의해 결혼을 했고 필요가 어긋나자 결혼은 실패했다. 반면 세이지는 교사 시절 제자였던 카즈오와 결혼을 한다. 둘은 모두 남자이지만 동성애자는 아니다. 섹스나 이성애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세이지는 결혼식 중에 아내의 사진을 들고 있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한다. 이 결혼에 작용한 것은 '가족애'다. 함께 지내며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작용해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다. 영화에서 '대체 가족'이 다뤄진 경우는 많다. 아빠와 엄마, 자녀로 형성된 전형적인 가족의 구조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나 가족을 이루는 경우를 말한다. 결국 '맛있는 가족'이 보여주는 것 역시 대체 가족이다. 그리고 많은 대체 가족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가족의 참된 의미를 묻는다(지상파 일일드라마 시놉시스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6. 결론: '맛있는 가족'은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소동극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빠가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 가운데 훈훈한 가족애와 애절한 멜로도 담겨있지만 오글거리진 않는다. 튼실하게 잘 만들었고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물론 극장에 걸릴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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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랑 캉테의 영화 '워크숍'은 프랑스 남부 라시오타라는 마을에서 스릴러 소설을 쓰는 워크숍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로랑 캉테의 다른 영화인 '더 클래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이야기 안에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던져준다. 이 이야기의 경우, 기억에 남는 논쟁거리 중 하나가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은 그의 생각이나 무의식이 이야기와 맞닿아있냐"는 점이다. 간단하게 설명해,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사람은 살인에 대한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변태성욕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내면에 변태가 살고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꽤 간단한 질문 같지만 의외로 난해한 물음이다. MBC 'PD수첩'을 통해 까발려진 어떤 영화감독의 실체는 이 간단한 질문에 쉽게 부정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나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인간과 그의 창작물들을 온전히 분리하지 못하는 편이다. 적어도 영화에는 그의 취향과 기호가 들어가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그의 무의식도 영화에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근들어 영화와 자신을 일체화 시켜서 그 안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어떤 영화감독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아주 사적인 영역을 영화에 담는다. 나는 몇 번이고 영화와 (알려진) 그의 삶을 떼어놓고 보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그에게 씌워진 '거장'이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를 보고, 나는 그가 '거장'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결국 개인의 차이였던 것 같다. 어떤 영화감독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영화에 담는다. 또 다른 영화감독은 자신이 본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담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호를, 무의식을,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는다. 작품과 창작자를 분리하는 것이 결국 개인에 따라, 작품에 따라 가능한 영역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볼만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오래전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정치적 상황에 맞춰 해석하는 일은 영화 자체에 대한 가능성과 해석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일"이라고 정의내렸다. 나는 그의 정의를 지금의 경우에 가져오고 싶다. 때로는 영화와 감독을 분리하는 작업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설령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새로운 영화보기의 대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꽤 흥미로운 영화보기가 될 것이다.


2. 데이빗 린치의 '블루벨벳'이 논쟁적인 영화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데이빗 린치의 필모그라피에는 그보다 논쟁적인 영화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활동하는 한 영화글쓰기 모임에서 '블루벨벳'에 대한, 엄청나게 신랄한 비판을 읽게 됐다. 글의 내용은 간단했다. 무단침입에 관음증 환자인 제프리(카일 맥라클란)를 미화하고 성범죄의 피해여성 도로시(이사벨라 롯셀리니)를 성욕에 굶주린 변태 여성으로 낮춰 표현했다는, 그런 식의 내용이다. 여기에 데이빗 린치가 촬영현장에서 이사벨라 롯셀리니를 성적으로 모독했다는 증언까지 추가돼있었다.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글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고 싶을 지경이다. 글에 대해 솔직히 크게 공감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생각이었고 신선한 시선이라고 여겼었다.

피터 브라츠의 '블루벨벳 돌아보기'는 마치 '인랜드 엠파이어'의 방식으로 돌아보는 '블루벨벳'의 현장이다. 다시 말해 '메이킹 다큐'인 것이다. 당시 데이빗 린치는 40살이었다. 대단히 젊은 편은 아니지만 지금에 비하면 매우 젊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고민이 많고 꼼꼼하게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배우, 스탭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굴곡없이 현장을 이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영화의 촬영현장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블루벨벳'의 독특하고 괴상한 세계를 생각한다면 지나칠 정도로 '정상적인' 현장이었다. 심지어 이사벨라 롯셀리니와도 문제가 없어보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글이 '데이빗 린치에 대한 변명'이 되길 바라진 않는다. 물론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굳이 변호를 해줄 마음은 없다. 오히려 영화의 깊고 음침하고 기이한 세계가 그의 일상과 분리돼있다는 점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내가 그의 영화를 사랑해서 열정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것과 달리 그에게 영화는 "그저 생활이었나" 싶었다. 그랬을 것이다. 천하의 데이빗 린치에게도 영화는 고뇌와 창작의 산물보다 '그저 생활'이다. 물론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이 자신이 표현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고뇌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게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 관객과는 다르게 말이다.


3. 아주 오래전, 부산의 '비인가' 시네마떼끄인 '시네마떼끄 1/24'에서 1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고 관리일을 하면서 스터디 모임에도 참석했었다. 그때 '기획전' 2개를 프로그래밍 한 적이 있었다. 시네마떼끄 운영자 형과 취향에 맞지 않는 기획전은 내가 맡게 된 것이다(다행스럽게도 그 형과 나의 취향은 반대였다). 당시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공포영화 기획전'과 '아벨 페라라 특별전'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아벨 페라라의 영화들은 폭력적이고 퇴폐적이다. 그런 영화들을 만든 사람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벨 페라라는 자신의 영화 속 음악들로 이뤄진 공연의 다큐멘터리를 직접 연출했다. 이 공연은 프랑스 툴루즈와 파리에서 이어졌다. 아벨 페라라와 오랜 지인인 폴 힙과 조 델리아가 공연을 준비하면서 이어진 유쾌하고 예민하며 신나는 음악들과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락 다큐멘터리가 대부분 그렇지만 꽤 거침이 없다. 이것은 영상이 담아내는 이야기도 그렇고 락커의 성격도 그렇다. 아벨 페라라의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은 다분히 미국적인 블루스풍의 락음악이다. 피아노의 경쾌한 리듬과 기타의 거친 사운드가 어우러져 저절로 몸이 들썩여지는 음악들이 대부분이다. 이 음악에는 아벨 페라라가 상당 부분 관여해있으며 직접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참 다행스럽게도 그의 락 다큐멘터리 '프랑스에서'는 '아벨 페라라 영화'라는 인증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무대는 퇴폐적이고 아벨 페라라는 꽤 예민하다. 그런데 이 퇴폐적인 색채는 그의 영화 속 타락한 인간의 민낯을 덮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 마치 아벨 페라라가 "마음껏 쉬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그림 안에서 마음껏 노래하면서 쉰다. '노래하는 아벨 페라라'가 대단히 낯설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아주 감성적으로 음악을 즐긴다. 폭력적이었던 그의 작품 속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또 어울려 버린다. '프랑스에서'는 아벨 페라라의 한풀이이자 새로운 세계다.


4.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에 대해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아주 어릴적에 본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녀의 정부'나 '필로우북'을 돌이켜보면 그는 몹시 난해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었다. 나는 '피터 그리너웨이 알파벳'을 함께 보게 된 여자친구에게 그를 소개하면서 "데이빗 린치보다 더 난해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피터 그리너웨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 '피터 그리너웨이 알파벳'은 그의 아내 사스키아 보드케가 연출한 영화다. 그는 남편 피터 그리너웨이에 대해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라고 소개한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와 미술작품은 모두 '아방가르드'하다.

그런데 '피터 그리너웨이 알파벳'은 시작이 꽤 유쾌하다. 이야기는 피터 그리너웨이와 '다 큰 딸' 조에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아빠와 딸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딸은 철딱서니 없고 아빠는 유쾌하다. 아빠는 딸을 잘 알고 있고 딸도 아빠를 잘 알고 있다. 둘의 대화는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언어 그 자체가 아닌 '언어의 이미지화'를 추구한다. 이들의 대화는 마치 말과 말로 이뤄진 '몽타주'처럼 조합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대화'와는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세라 이미지 역시 '피터 그리너웨이'스러워진다.

놀라운 점은 사스키아 보드케의 연출이다. 그녀는 최소 50년 가까이 피터 그리너웨이의 곁을 지킨 사람이다. 아마 전세계의 어느 영화평론가나 연출자보다 피터 그리너웨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영화는 '피터 그리너웨이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표현한 피터 그리너웨이'같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화는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는 피터 그리너웨이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같은 영화가 돼버렸다. 아마 피터 그리너웨이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보다 친절하게 설명한 해설집은 없을 것이다.


5. 앞선 세 다큐멘터리('블루벨벳 돌아보기', '프랑스에서', '피터 그리너웨이 알파벳')는 거장 영화감독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데이빗 린치, 아벨 페라라, 피터 그리너웨이)은 특유의 난해하고 기이한 세계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로 유명하다. 대중들은 그들의 작품과 그들 각자를 동일시하기 쉬울 것이다. 작품의 강렬한 인상이 오래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생활인으로서 삶에 충실하고 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 각자는 철저하게 분리돼있고 세계의 창조주는 언제든지 빠져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세 다큐멘터리는 모두 그들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결국 이들 다큐멘터리는 그들 각자의 스타일 안에 머물러있다. 탈주를 시도하지만, 삶이 이어지듯 영화도 이어질 것이라는 선언과 같다. 

6.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영화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정체성은 온전히 분리될 수 있을까? 적어도 창작자에게 그것은 '편의'에 가까운 일이다. 편리하게 '나와 무관한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창작자의 힘이다. 그렇다면 관객도 편의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저 멀리 있고 남다른 사고를 하는 영화감독들도, 결국 우리 주변에 사는 '생활인'들이고 삶을 사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무의식과 가치관은 제 아무리 난해할 지언정 관객들이 사는 삶의 범위 안에 있다. 이제 조금은, 그들의 영화가 더 편안해질 것 같다. 


추신) 이 글은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온 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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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처음 개봉했을때, 예비역들은 쓸데없이 섬세한 디테일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었다. 마치 예비역 각자의 군생활을 들여다 본 것 같은 그 꼼꼼함에 치를 떨었으며, 특히 정말 꼼꼼하게 연기한 고문관 허지훈 이병(윤종빈)은 치를 떨게 했고 혈압을 치솟게 만들었다. 자다가 군대 다시 가는 꿈만 꿔도 하루가 드러웠던 예비역 사내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다시 가는 꿈'같은 영화였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길 바랬던 '군대 다시 가는 꿈'같은 영화는 7년뒤 연상호 감독의 '창'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애니메이션이라서 다행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라서 더 꿈같이 피부로 스며들던 작품이었다. 그렇게 예비역 남자관객들은 아무 죄 없이 '군대 다시 가는 꿈'을 두 번이나 꿨다. 

2. 이것은 마치 금단의 영역같은 이야기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지 않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곳은 야생의 질서가 세워진 사내들만의 공간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남자들은 이미 학창시절 '야생의 질서'를 겪는다. 마치 그것은 군대라는 더 거친 초원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겪고 온 세계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대부분의 사내들에게 군대란 그런 곳이다. 임태규 감독의 '폭력의 씨앗'은 그 '군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무 악랄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야생의 그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현실적인 디테일로 군대의 질서를 묘사해낸다. 마치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편을 보는 듯한 도입부였다. 

3. '폭력의 씨앗'은 이런 디테일에서 한껏 더 전진한다. 선임병들의 폭력을 간부들에게 고발하려던 주용(이가섭)은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선임병들과 외박을 나가게 된다. 선임병들은 고발자를 찾기 시작하고 일병인 주용은 소원수리 전적이 있는 필립에게 고발 사실을 떠넘기려 한다. 그러나 갈수록 일은 꼬이게 되고 주용은 '최악의 하루'를 보내기에 이른다. '폭력의 씨앗'은 '일병 이주용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일은 이미 꼬여있는데 이것을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최악의 하루'가 이어진다. 여기에 인천사는 누나(김소이)와 매형 수남(박성일)의 가정사까지 알게 되면서 주용의 머리는 터질 지경까지 이른다. 사실 후반부로 갈수록 '군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게 돼버린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 이주용에 대한 잔상은 지울수가 없다. 철원에서 외박 나온 이주용이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넘어가기(점프) 까지 그 험난한 여정에는 폭력적인 선임병과 전투모를 버스에 두고 내리는 고문관 신필립 이병이 있었다. 군 내부의 폭력에 항거하던 이주용은 격한 스트레스에, 결국 그 조차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인 '폭력의 씨앗', 영화대로라면 폭력은 시스템에서 싹트고 자라는 것이다. 질서가 폭력을 만든 셈이다. 

5. 질서가 폭력을 만드는 원리를 알아보자. 군대에서 '질서'를 만드는 것은 '계급'이다. 계급으로 복종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여기에는 사소한 행동에 대한 제한으로 서열을 절대화 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고참이 허락할 때 까지는 전투모를 벗지 않고 짝다리를 짚지 않는다거나, 고참이 지시한 것에 대해서 걸어서 움직이지 않는 등의 행위다. 사소한 행동의 제한은 고참의 지위를 더욱 막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이 속한 제한적인 공간은 서열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만큼 그 공간의 질서도 세상의 전부가 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인격이 매장되는 셈이다. 

6. 군인들은 그 강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급의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인생막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절대적인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주용 같은 계급의 중간자는 결국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폭력이 싫어서 간부들에게 고발을 했지만 폭력은 이 절대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그런 이주용이 군대 밖의 세상에 나갔을때, 또 다른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 

7. 누나를 폭행하던 매형은 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성공한 치과의사인 매형 수남은 밖에서는 친절하고 안에서는 폭력적인, 전형적인 '꼰대'다. 그는 가정 안에서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것을 두고보지 못한다.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밖에서 만난 '고위층 인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수남의 폭력적 성향이 어디서 왔는지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정에서의 계급에 대해 아내를 자신보다 낮은 계급으로 보고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손찌검을 한다. 그가 휘두르는 폭력 역시 군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8. 수남과 주용이 만난 것은 폭력의 두 축이 충돌하는 것이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누나는 두렵기만 하다. 결국 둘 다 똑같은 '폭력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형은 수남의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폭력과 분노,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던 주용의 하루, 그리고 그 다음날은 그렇게 망가져버린다. 

9.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남자의 모습은 조광화 작가의 연극 '남자충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을 꿈꿨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정(류승범)의 가부장적 사고는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연극 '남자충동'과 영화 '폭력의 씨앗'은 모두 가부장적 사고가 낳은 폭력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 폭력의 씨앗을 심어서 자란 나무는 분노라는 꽃을 틔우고 파국이라는 열매를 낳는다. '폭력의 씨앗'은 이 시대의 '꼰대'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10.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에게는 '본격 암유발 영화'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그 망할 계급사회를 지켜보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미필자(여성)들이 군필자인 남자친구나 오빠에게 "재미난 영화가 있는데 함께 보지 않을래?"라고 꼬셔서 가는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보게 할 가치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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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이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찾아보니 9회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사무라이의 모험을 다룬 영화였다. 그것은 요즘에서야 유행하는 흔한 타임슬립 영화와는 개념이 다른, 등장인물과 관객의 무의식을 헤엄치는 영화였다. 무의식 속에서는 역사의 긴 시간을 관통하는 폭력의 내재된 본성이 뱀처럼 꿈틀대며 모든 시대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관객에게 익숙한 내러티브는 아니었다. 이것은 일상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아닌 '의식의 이미지화'에 가까운 표현방식이었다. 상황과 시간의 흐름이 아닌 그저 '의식'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때 본 그 영화는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기 미안할 정도로 의식 깊은 곳만을 건드린 영화였다. 한마디로 우리가 아는 극영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 다시는 '이조'같은 영화를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13년뒤 전주에서 '이조'와 꼭 닮은 영화 '안티포르노'를 만나게 됐다. '안티포르노'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열정적인 감독 소노 시온이 연출한 로망포르노리부트 프로젝트 중 하나다. '로망포르노'는 45년전 닛카츠영화사가 어려워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신진 영화작가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네 마음대로 영화를 찍어봐라"며 맡긴 프로젝트였다. 조건은 간단했다. 약간의 돈, 최소한의 촬영기간, 그리고 10분에 한번씩 섹스씬이 등장하면 끝이였다. 그 밖에 모든 것은 감독의 역량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로망포르노는 자유롭게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신진 영화작가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됐다. 대단히 독특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로망포르노를 만들었던 작가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중견감독이 됐다. 사실상 현대 일본영화의 근간이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3. 소노 시온의 '안티포르노'는 이러한 규칙을 잘 지킨 리부트 프로젝트다. '안티포르노'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은 '분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성, 피고용인, 신인여배우, 예술가, 여학생, 성폭행 피해자 등으로 대변되는 모든 '약자'의 위치를 떠안고 있는 쿄코(토미테 아미)는 로망포르노 촬영현장에서 자신의 무의식이 폭발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의 무의식을 쫓아간다. 앞서 언급한 영화 '이조'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쫓는 것 같던 이 영화는 기어이 무의식의 심연으로 빠져버린다. 이미지의 홍수, 대사(를 가장한 아우성)의 범람, 색채의 혼란이 뒤엉키며 이 영화는 잠재된 트라우마를 찾아다니고 있다. 


4. '안티포르노'가 찾으려는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그것은 '억압된 성'에 있다. 분노가 억압당하고 섹스와 색채가 억압당한다. 여기서 성(性)은 색깔과 목소리, 분노, 또는 성 그 자체로 표현된다. 거칠게 표현된 이미지가 뒤엉켜 발현된 것은 한 어린 여성의 내재된 성욕. 그러나 그 조차도 자신의 눈에만 드러난 채 흩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영화 내내 치열하게 소리친 '욕망의 권리'는 먼지가 돼버린 것이다. 화려한 색채를 띄고 있지만 '안티포르노'는 공허한 영화다. 섹스의 권리조차 거세당한 현대여성의 서글픈 초상인 셈이다. 


5.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워서 얻어내야 할 권리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 아이를 키우기 좋은 나라, 건강한 성교육을 보장하는 나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나라, 여성의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 결국 모두가 안심하고 섹스할 수 있는 나라다( http://daishiromance.tistory.com/718 ). 일본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사는 한국은 남성에 비해 여성은 성(性)에 대해 당당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관습이 그 원인일 것이다. 그 치열한 아우성을 듣고 싶다면 '안티포르노'를 보는 것이 좋다. 그러니깐 이 영화는 몸의 권리를 보장받길 원하는 어린 여성의 목소리인 셈이다. 


6. 여기에 더해서 영화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한다. 바로 소노 시온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일본영화계가 예전같지 않다는 건 이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작자(투자자)의 입김이 거세진 영화계에서 창작자의 힘은 더 약해진다. 소노 시온은 분명 여기에 분노하고 있다. 마치 이상일 감독의 영화 '분노'에서 거칠게 씌여진 '노'(怒)라는 글자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감정을 거칠게 써내려가고 있다. 이미지가 폭주하고 색채가 범람하며 관념과 무의식을 온전히 형상화해서 옮길 수 있는 영화. 불과 얼마전 일본에는 그런 영화가 있었다. 소노 시온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7. 결론: '안티포르노'라는 제목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보자. "포르노를 안티한다". 남자들의 성욕의 배설구였던 포르노를 안티한다. 쿄코는 포르노배우(혹은 매춘부)가 되길 스스로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도구가 아닌 주최적으로 선택하길 원한 것이다. 그 선택 또한 쿄코(여성)의 권리가 된다. '안티포르노'는 가장 공격적이고 저돌적이며 사려깊은 여성해방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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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듯 한국 근현대문학같은 느낌도 든다. 극단적인 상처를 받고 구석에 몰린 주인공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외피'(外皮)다. 하지만 실상으로 들어가면 흡사 '반전스릴러'의 모양새를 띈다. 특히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인셉션'이다. 스포일러가 될까 말은 못하겠지만...'인셉션'이다. '인셉션'.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면적으로 마리아(박소담)는 수녀다. 그러나 여기에 '무속신앙'이 등장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사상'도 등장한다. 화엄사상은 우주 만물이 저마다 관계를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한다(대학 때 배운거다... 오래전이다). 그래서 '화엄'은 그물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리아가 그린 그림과 닮았다. 즉, 이 영화는 가톨릭과 무속신앙, 불교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교리를 전하는, 마치 '종교융복합'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영화다. 


3. 이 영화의 메시지는 앞서 말한 3개의 종교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구원을 얻을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하는 타인, 혹은 주변인은 모두 그물망처럼 얽혀있다. 그 그물은 생각보다 촘촘해서 하나의 교차점이 다른 교차점과 겹치는 것, 마치 영혼을 교류하는 것처럼 만날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대단히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는 영화다. 문제는 이게 너무 촘촘해서 원장수녀님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4. 그래서 이 영화는 굳이 등장하는 모든 종교적 관점에 대해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치 개론 서적 내지는 백과사전처럼 촘촘하게 짜놓은 이 영화의 교리는 필요할때 필요한 부분만 꺼내서 익히는 것이 좋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영화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것이다. 대사로도 관객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할 때는 "좀 너무한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5.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마치 소개팅 나왔는데 자기 혼자 떠드는 상대를 보는 것 같을 수 있다. 이런 답답함에서 한줄기 빛이 되는게 주연배우들의 연기다. 


6. 사냥꾼(최무성)의 대사는 정말 한국 근현대문학같다. 최소 '메밀꽃 필 무렵'까지는 거슬러 올라간다. 대사가 예쁘다는 말은 아니다. 대사가 참 구식이라는 말이다. 유독 사냥꾼의 대사만 그렇다. 시간되면 감독님께 물어보고 싶다. 


7. 정우(김태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한다. 처음에는 "알콜중독자가 왜 저리 멀쩡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후의 연기를 위한 포석이었다. 마치 임권택이나 장선우의 8, 90년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처절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제'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이런 연기야 말로 관객에게 영화를 더 스며들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8. 마리아는 '어린 수녀'다. 영화의 중반이 지나서야 "아, 관객이 생각한 것보다 더 어린 수녀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박소담은 자기 나이보다 꽤 어린 수녀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나중에 마리아가 "아저씨"라고 부를때는 흡사 '아저씨'의 소미(김새론)를 보는 것 같다. 박소담 역시 차분하게 역할에 몰입한다. 물론 터트릴때는 터트릴 줄 안다(터트리는 장면이 나온다). 


9. 내가 박소담의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발음'이다. 꽤 또박또박 발음하지만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울림도 좋아서 대사가 잘 들린다. 이 영화는 그런 박소담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10. 사실 영화를 만든 김희정 감독의 디테일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꽤 괜찮은 장소를 찾았고 꽤 괜찮은 날씨를 기다렸으며 꽤 괜찮게 배우들을 이끌었다. 꽤 괜찮은 이야기를 써냈고 꽤 괜찮은 결론을 지었다. ...그놈의 '인셉션'만 빼면 완벽했다.


11. 결론: 아...망할 '인셉션'




추신) 소담아, 아재가 응원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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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좀 있네요.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고유브랜드인 '숏!숏!숏!'부문에 두 명의 영화감독을 불러들였다. 현재 한국 인디영화계에 슈퍼스타인 양익준 감독과 어쩌면 슈퍼스타가 될 지도 모를 부지영 감독을 불러들여 '애정만세'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단편을 붙였다.

개인적으로 <애정만세>라는 이름의 영화는 1994년 차이밍량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워낙 오래전에, 그것도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본 영화라(어린 마음에)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사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영화다. 차이밍량에 대한 안 좋은 기억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안 좋은 기억을 가진 제목 '애정만세'가 한국 신진감독들의 옴니버스 영화로 재탄생 됐다. 정말 다행 중 다행스러운 일은 새로 나타난 이 <애정만세>는 꽤 맘에 드는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산정호수의 맛>

언젠가 '여자는 엄마를 꿈꾼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http://daishiromance.tistory.com/363). 모든 여자 안에 숨쉬는 '모성'이라는 것과 그것이 깨어나는 시기에 대한 나름의 고뇌였다. 부지영 감독의 단편 <산정호수의 맛>은 필자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엄마는 여자를 꿈꾼다'를 말하고 있다. 근데 이 문장은 좀 유명한 편이다. 가사에 치여 청춘을 잃어버린 엄마는 늘 소녀적 감수성을 꿈꾸기 때문이다. 당장 최근 개봉한 영화 <써니>도 이같은 주제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산정호수의 맛>은 <써니>와 달리 한결 진지하고 섬세하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아줌마 순임(서주희)은 야릇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깬다. 그 꿈은 회사 야유회에서 어린 직장동료 준영과의 야릇한 추억. 꿈에서 깬 뒤 순임은 반항아 딸이 새로 산 어그부츠를 몰래 신고 나와 야유회 장소였던 산정호수로 무작정 간다. 야유회때 준영과 함께 한 추억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지만 이미 산정호수는 그때의 계절을 지나 꽁꽁 언 한 겨울을 향하고 있다. 순임은 산정호수에서 준영과의 추억을 하나하나 되새기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현실에 점점 외로움을 느낀다.

순임은 언듯봐도 40대 중후반을 넘어선 억척스런 아줌마(혹은 엄마)의 모습이다. 그런 아줌마가 소녀처럼 한 총각을 못 잊어 추억의 장소까지 무작정 찾아갈 정도인 이야기를 보며 조금의 낯 뜨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드러나진 않았지만 순임은 아마도 남편없이 반항아 외동딸을 키우는 아줌마일 것이다.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이 아줌마에게는 그닥 살갑지 않은 딸 뿐이다. 딸이 저 지경이니 이 아줌마는 기댈 사람이 사실상 없는 셈이다. 특히 영화 초반 준영의 집 앞에 무작정 찾아가 쭈뼛거리며 서성대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아줌마에게 준영은 어떤 의미였을까? 늙고 지쳐서 잊고 지냈던 '사랑'에 대한 설레임이었을 것이다. 그와 오리배를 타고, 커플 핸드폰줄을 나누고, 숲 속에서 순임의 상처를 살핀 모든 순간이 순임에게는 다시 사랑이 찾아온 듯한 아련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리셋된 첫사랑처럼 순임은 그 행복했던 여운을 안고 산정호수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순임은 겨울의 산정호수에서 꽁꽁 언 외로움과 상처만 잔뜩 담아왔고, 출근해서 만난 준영에게서는 그의 지독한 냉대에 서운함을 느꼈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처럼 순임은 가슴 아프고 쓰라린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산정호수의 맛>이 전하는 사랑은 애절한 그리움과 그에 동반되서 찾아오는 배신, 외로움, 상처다. 한마디로 '사랑'의 어두운 면인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두운 면조차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뜨겁게 설레였기에 식을 수 있고,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상처가 따른다. 그러나 상처받았기에 뜨겁게 사랑한 것이다.


<미성년>

양익준 감독의 <미성년>은 꽤 유쾌한 사랑이야기다. 물론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유쾌하지 않은 설정도 있지만 그것조차 결국에 가서는 잘 풀어버리는 베짱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미성년>은 궁극적으로 '연애의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고생과 녹음실 엔지니어 아저씨의 이야기다.

전날 숙취에서 깬 진철(허준석)은 두 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침대 옆에 왠 낯선 여자가 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자를 데리고 온 장소가 모텔이 아니라 자신의 녹음실이라는 것. 어쨌거나 이 발칙한 여자에게 짬뽕 잘 먹여서 돌려 보내지만 다음날 이 여자는 다시 녹음실로 찾아온다. 교복을 입고... 여고생 민정(류혜영)은 진철에게 "미성년자랑 잤다고 확 불어버릴까?"라며 협박아닌 협박을 해 어울리게 된다. 진철은 원치 않는 여고생 친구를 두게 된 것이다.

진철과 민정은 '청소년성보호법위반'관련 사항만 함구한다면 그리 무리없는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변에는 예기치 않은 방해요소들이 있다. 진철의 마음을 후벼파고 떠난 옛 여자친구와 민정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옛 남자친구. 공교롭게도 모두 옛 연인이다. 진철과 민정 모두 옛 연인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 고난과 상처의 남녀는 우연한 기회에 꽤 거칠고 위험한 만남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은 결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친다.

어쩌면 <미성년>은 꽤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철이 덜 든 아저씨와 맹랑한 소녀의 사랑은 우리가 익히 봐 온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섹스'라는 키워드까지 과감하게 끌어온 위험한 사랑은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이 사랑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사랑의 로맨티시즘을 파괴해버린다. 아저씨와 소녀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꽤 멋지고 귀여울거라 생각할테지만 그것과 달리 이들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결국 여고생과 잠자리를 갖고, 여고생의 엄마한테 들키고 서로 어울린 죄 밖에 없는데 남자는 경찰서도 가게 된다. 사실 <레옹>도 한국의 이야기였다면 청소년보호법 위반이 적용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처럼 판타지를 파괴해버린 로맨스라고 새드엔딩을 맞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30대 아저씨와 10대 여고생의 사랑, 둘은 이미 성관계도 가져서 사회적 지탄을 적잖게 받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고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안 만나면 되는거다. 이 영화는 결국 그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용기있는 선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로맨스에서 판타지를 빼더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판타지따위는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 현실의 사랑 또한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스스로 판타지를 깨버림으로써 관객들의 일상에 작은 설레임을 안겨준다. <미성년>의 가장 큰 임무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는 크게 성공했다.


<애정만세>는 꽤 귀엽고 아련한 소품이다. 이 두 개의 단편 속에는 사랑의 양면을 고스란히 나눠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움과 쓸쓸함, 고난과 역경.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판타지 쏙 걷어낸 리얼한 사랑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좋을 것 같다.


여담1) <산정호수의 맛>에 출연한 배우 서주희는 필자에게는 "이름만 낯 익은 연극배우"다. 영화를 통해 확인한 그녀의 연기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섬세하고 예민하다. 배우의 내공이라는 부분이 꽤 직접적으로 와닿는 연기였다.

여담2) 필자가 예전에 일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산정호수에 간 적이 있다. 영화는 필자가 산정호수를 갔던 길과 동일한 경로로 가고 있다. 그런데 참고할 부분은 운천터미널에 내려서 큰 길로 올라가 산정호수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는 부분, 운천터미널에서 산정호수로 가는 시내버스는 단 1대 뿐이다. 즉, 이 버스의 배차간격은 1시간 20분이 넘는다. 운천터미널에서 수유터미널까지 걸리는 시간과 동일하다.

여담3) 만약 이 영화에서처럼 성인과 미성년자가 서로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면, 남자는 처벌받지 않는 것인가? 법조계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시점이다.

애정만세
감독 양익준,부지영 (2011 / 한국)
출연 서주희,허준석,류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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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 편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많은 배경지식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럴때면 아무리 영화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관객들이라도 영화를 보기가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풍부한 배경지식을 가진 영화라도 반드시 필요한 법. 작가의 의도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편의 영화에는 풍부한 배경지식만큼이나 많은 재미를 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의 <슬픈 트럼펫 발라드>는 분명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부터 1970년대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물론 이 기간 중 스페인의 역사적 사건들은 배경지식으로 등장하지만 영화 속 삐에로들의 비극적 운명 속에 잘 녹아들어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필자는 스페인 근현대사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상징적 기호들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그저 스페인 근현대사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설명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슬픈 트럼펫 발라드>는 굳이 스페인 근현대사를 몰라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웃음과 눈물, 로맨스와 공포, 미학과 엽기 등 영화가 녹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걸작이다.

1937년 하비에르(카를로스 아레세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광대다. 그는 공연 도중 반군에 차출돼 광대 옷을 입은 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 총과 칼을 든 삐에로는 전쟁터에서 엄청난 학살을 펼치며 공을 세우지만 결국 군대에게 체포된다. 영화는 초반부의 이 전쟁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포탄과 연기가 오고 가는 처절한 전쟁터를 누비는 삐에로, 그리고 그의 총칼은 전쟁터를 압도한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회화적인 광경인가? 그리고 이 광경은 이후에도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쨌거나 아버지 광대는 군대에 체포되고 아들 하비에르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하다가 아버지를 잃게 된다. 이후 어른이 된 하비에르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광대가 되지만 어릴적부터 받아온 많은 상처때문에 아버지처럼 웃기는 광대가 되지는 못하고 웃기는 광대를 받쳐주는 '슬픈 광대'가 된다. '슬픈 광대' 하비에르가 들어간 서커스단에는 미모의 곡예사 나탈리아(캐롤리나 방)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탈리아에게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서커스단의 실세인 '웃기는 광대' 세르지오(안토니오 드 라 토레)다. 나탈리아를 너무 사랑하지만 폭력적인 성격때문에 늘 그녀를 괴롭히게 되고 하비에르는 그런 세르지오와 대적하게 된다.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은 하비에르와 나탈리아, 세르지오의 삼각관계가 나타난 뒤다. 폭력적인 세르지오와 그를 피해 사랑을 나누는 나탈리아, 하비에르. 뭔가 낯익은 구조가 떠오른다. 입꼬리를 올린 화장을 하고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삐에로(세르지오), 눈물자국을 그린 채 우울한 얼굴을 한 삐에로(하비에르), 그리고 줄에 매달린 채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곡예를 펼치는 곡예사(나탈리아). 이 세 명이 펼치는 사랑의 암투야 말로 한 편의 서커스인 것이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영화는 영화 사상 가장 잔혹한 서커스 한 편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서커스가 펼쳐지는 곳은 '죽은자들의 계곡'에 위치한 152m의 거대한 십자기 위다. 이곳은 프랑코 독재시절 정치범 2만명을 동원해 16년간 강제노역을 시켜 만든 곳으로 프랑코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

이 십자가 꼭대기에서 하비에르와 세르지오, 나탈리아는 사랑의 쟁취를 위한 죽음의 서커스를 벌인다. 이미 이곳에는 두 명의 삐에로가 있지만 이들의 얼굴은 결코 익살스럽지 않다.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진 웃기는 삐에로와 광끼에 사로잡혀 얼굴을 망가뜨린 죽음의 광대. 그리고 사랑에서 길을 잃은 슬픈 여 곡예사. 마치 폭력과 독재의 스페인 역사를 조롱하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슬픈 서커스와 같다.

앞서 말한대로 하비에르의 아버지가 총칼을 든 광대가 되어 전장을 누비는 모습은 그의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염된다.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 하비에르(그 과정은 영화로 확인하는게 빠르다)는 가성소다로 얼굴을 망가뜨리고 뜨겁게 달군 다리미로 연지곤지를 찍은 채 그토록 되고 싶었던 '웃기는 광대'가 된다. 그리고 그는 총을 든 채 거리를 누비며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는다.

역사의 소용돌이 휘말린 억울한 광대는 독재의 시대를 뒤흔드는 혼돈의 광대로 환생했다. 그래서 하비에르의 광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억울한 넋을 달래는 슬픈 익살로 느껴진다. 그래서 이 정신나간 하비에르를 보고 있으면 마냥 웃거나 몸서리 칠 수 만은 없다. 그 광끼와 익살에는 모두 슬픈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슬픈 트럼펫 발라드>는 앞서 말한대로 짧은 러닝타임(108분) 안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미 삐에로와 서커스단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충분한 익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비에르와 나탈리아의 슬픈 로맨스, 하비에르의 기구한 운명과 광끼, 세르지오의 잔인함 등.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꽤 많은 요소들을 이 한 편 안에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페인 근현대사를 굳이 몰라도 영화 자체만으로 충분히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울컥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만큼 처절하고 슬프다. 그리고 그 처절함은 영화 전반의 오만가지 감정과 어우러져 인물들의 허무함이 고스란히 와닿는다. 장르영화로써 이 정도면 최고로 슬픈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눈물겨운 서커스가 국내에 개봉할 가능성은 반반인 것 같다. 적당히 잔혹하지만 영화 자체를 보기 전에는 그 매혹을 끌어낼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영화를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제 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는 많은 '대서사시'들 가운데 가장 개봉가능성은 높다는 소식이다. 제 아무리 수준높은 걸작들이라지만 4시간이 넘는 영화를 섣불리 개봉시킬 극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인 소망으로 이 영화는 부디 국내 개봉을 했으면 좋겠다.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 고야상,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이 대작이자 영화구조, 재미면에서 완벽한 이 걸작을 부디 많은 국내관객들과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 소원이다. 영화배급사 관계자들이 이 리뷰를 읽어주길 바란다.


여담)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는 전작 <액션 뮤탕트>와 <야수의 날>에서 꽤 저예산티 풀풀 나는 연출을 선보인 바 있다. <슬픈 트럼펫 발라드>는 나름 CG도 적절히 섞어가며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선보인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라도 부디 국내개봉이 이뤄지길 바란다.

슬픈 트럼펫 발라드
감독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2010 / 스페인,프랑스)
출연 안토니오 드 라 토레,카를로스 아레세스,캐롤리나 방,산티아고 세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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