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life in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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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거닐며 바라보는 나무 하나하나가 영화고 음악이고, 나의 컨텐츠다.
by DAISHI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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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20.02.24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초간단 리뷰
  2. 2019.01.28
    [스포주의] '증인' 초간단 리뷰
  3. 2018.07.21
    [쬐금스포] 영화 '인랑' 초간단 리뷰
  4. 2017.12.11
    '강철비' 초간단 리뷰
  5. 2017.08.31
    'VIP'에는 없고 '아수라'에는 있는 것
  6. 2017.01.25
    [스포일러 주의] '더 킹' 조금 덜 간단한 리뷰
  7. 2016.09.27
    '아수라' 초간단 리뷰
  8. 2014.10.13
    '마담뺑덕' - 보기보다 지적인 러브스토리
  9. 2010.09.10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무엇을 볼 것인가? (4)
  10. 2010.03.22
    [잊혀진 한국 영화감독을 찾아서-14] 장현수

1. 봉준호 감독이 어디선가 한 이야기를 듣고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그는 이야기를 쓰면서 "이 장면은 어떤 의미를 갖고 이 장면은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고민하진 않을 것이다(통상 그런 건 보는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를 써내는 방법은 단순하다. 예를 들어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엄마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하게 할까?" 등. 한 가지 상상을 시작하고 거기서부터 인과관계에 맞춰 사건을 풀어간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의 기승전결이 있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있겠지?"라는 상상에서 시작해 인과관계에 맞춰 의식의 흐름대로 풀어가다 보면 그럴싸한 이야기 한 편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아주 엄청난 능력이다. 

2.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여기 1억원이 든 가방이 있어"라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1억원의 가방이 있고 돈이 필요한 사람이 아주 많아"라는 발상이다. 이때부터 돈 놓고 돈 먹는 돌고 도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끔 나는 영화글을 쓸 때 "이 장면은 이런 의미가 있고 저 소품은 저런 의미를 가진다"라고 보는 것에 허무감을 느낀다. 정작 만든 사람은 그 장면과 소품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소위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평론가들의 지적 허영이 빚은 '중2병'이 아닐까 싶다. '짐승들'은 그런 '중2병'에 아주 적절한 치료제다. 이건 도저히 해석할 것도 없고 풀어 쓸 것도 없다. 어떤 게임은 아무 생각없이 해야 더 잘 돤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보드게임인데 원숭이 인형이 매달려있고 인형이 매달린 막대기를 빼는 게임이다(대충 그랬던 것 같다). '짐승들'은 마치 그 게임을 닮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3. "아무 생각이 없다"는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영화가 시대상을 반영하고 메시지를 담을 필요는 없다(만약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영화에 대한 애착을 접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쾌감을 준다. 또 다른 영화는 어지러진 퍼즐조각을 조립하는 재미도 준다. '짐승들'은 후자에 가깝다. 가만 생각해보면 퍼즐을 조립할 때 그렇게 머리를 쓰진 않았던 것 같다. 퍼즐을 조립할 때 필요한 것은 관찰력과 집중력이지 이해력과 계산능력은 아니다(퍼즐을 이해하고 조립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즐은 재미있다. 딱히 머리 쓸 일은 없지만 퍼즐은 지적 쾌감을 준다. '짐승들'은 딱 거기까지만 향한다. 그 이상의 지적 유희는 허락하지 않는다. 

4. 이제 남은 것은 B급 장르영화의 쾌감이다.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고 신체절단과 폭력의 향연이 펼쳐진다. '폭력영화'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어렵다. 사회통념에 어긋나지 않는 사고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으 폭력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그것이 즐비한 영화를 멀리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폭력영화도 그 나름의 매력을 찾아서 즐기는 편이다(그렇다고 실제로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 질문을 다시 해보자. '짐승들'은 폭력성을 무릅쓰고 봐야 할 만큼 매력적인 영화인가? 거기에는 확답을 할 수 없다. 이것은 합리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전개된 이야기이며 그것을 퍼즐조각처럼 흐트러놓고 조립하게 하는 영화다. 지적 쾌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기대보다 적고 의심의 흐름대로 쫓아가고 조립하다 보니 결론에 다다른 셈이다. 피와 신체절단을 각오하고 볼 만큼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다. 

5. 멀티캐스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주는 매력은 그리 크지 않다. 대체로 '나약하고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재미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심지어 감독조차 이 캐릭터들을 이야기의 도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캐릭터 자체에 애정을 쏟진 않는다. 그나마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캐릭터는 박두만 사장(정만식)과 메기(배진웅) 정도다. 일단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건달'이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처럼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둥글둥글한 사투리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아주 나쁜 놈이다. 개인적으로 아이러니한 것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둥글둥글하고 잔인무도한 박두만 사장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캐릭터다. 메기 역시 "저렇게 험한 얼굴은 어디서 데려왔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캐릭터다. 여느 영화에 나오는 '잔인한 똘마니'의 정석이지만 인상 때문에 잔인함 원톱을 먹을 캐릭터가 돼버린다. 캐스팅 잘했다. 

6. 결론: 영화의 가치에 비하면 감상글이 꽤 길게 나왔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결국 하는 얘기는 "이 영화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관객 역시 이 영화를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이것은 칭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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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연출자 이한'의 필모그라피는 꽤 재미있다. 2002년 영화 '연애소설'로 입봉해 '청춘만화', '내사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들은 말랑말랑하고 예쁘고 밝은 영화들이었다. 다만 그 맑음은 자연적인 맑음이 아니라 인공적인 맑음처럼 보인다.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새벽공기를 머금고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흉내내는 고무풍성처럼 보인다. 그런 이한 감독이 어떤 극적인 계기를 맞은 것일까? 2011년 '완득이'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돼서 나타났다. 그는 더 이상 맑음을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우리의 삶 어딘가에 있는 '맑음'을 찾으려는 구도자처럼 그는 삶 곳곳에 있는 '맑음'을 끄집어낸다. 당최 적응되진 않지만 그의 영화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꼭 존재해야 하는 영화들이다. 언제까지 피와 내장이 난무하는 영화만 볼 순 없기 때문이다. 

2. '증인'은 그의 맑음이 정점에 이른 작품처럼 보인다. 자폐소녀 지우(김향기)와 속물이 돼가는 변호사 순호(정우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는 두 사람의 우정을 통해 어딘가에 숨어있는 맑음을 찾아낸다. 이 이야기는 2개의 큰 축을 가지고 전개된다. 지우와 순호가 가까워지는 과정과 의문의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한국영화들이 고질적으로 보여온 '실수'를 범하기 딱 좋은 조합이다. 많은 것을 보여주려다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는 방식이다. '증인'은 아주 슬기롭게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 2개의 다른 이야기에서 유기적으로 엮일 부분을 확실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3. 지우와 순호의 우정을 다룬 부분은 둘의 성장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함부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지우와 신념을 져버리고 속물이 돼가는 순호는 사건을 통해 만나게 됐다. 그리고 사건을 통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서로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순호는 잃어버렸던 신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고 지우는 조금씩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들의 성장담은 절대 사건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흔히 이야기에 욕심을 내다보면 사건의 바깥으로 나가기 마련인데 '증인'은 철저하게 사건 안에서 머물러있다. 이 이야기는 정교하고 인내할 줄 안다. 얻고자 하는 결론을 위해 꾹 참고 걸어가는 수도승처럼 보인다. 

4. 여기에 두 배우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보여지지만 정우성은 공부에 찌든 순호를 연기하기 위해 어깨를 다소 굽히고 있다. 특히 법정장면에서는 그가 거북목을 하고 있는게 잘 드러난다. 실제로 정우성은 거북목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속세에 찌들고 고민이 많은 변호사의 얼굴부터 철딱서니 없는 어른까지 영화에서 여러 표정을 담아낸다. 여기에 김향기의 연기는 놀라운 수준이다. 그는 '자폐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소녀의 디테일과 감정을 연기한다. 멀리서 보면 '말아톤'의 조승우가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아이가 있다. 감독의 말대로 자폐아는 저마다 성격이 다 다르다고 했던가. 이것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자폐아 연기다. 특히 지우가 벽에 붙은 엄마의 표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이전까지의 모든 감정이 디테일하게 담겨져 있다. 그 장면에서는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모두 연기하고 있었다. 

5. 나는 '증인'의 이야기가 좀 더 과감하게 맑음으로 진격하길 바랬다. 사람이 죽어서 시작하는 이야기인 만큼 '나쁜 사람'의 등장이 불가피하긴 하지만 나는 영화가 그 나쁜 사람에게도 동정해주길 바랬다. 그랬다면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더 살아났을 것이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나쁜 사람은 없이 등장한다. 순호도 그렇고 지우의 친구 신애도 마찬가지다. 온전히 나쁜 사람도 없고 선한 사람도 없다. 선택에 있어 선과 악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순간에 드러난 것과 달리 인과관계를 거쳐 다른 결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 선한 의지로 한 일이 악한 결과를 가져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증인'은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이같은 전제를 부여한다. 다만 그것이 부여되지 않는 인물도 있어 다소 통속적인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다.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조금 더 맑았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이들의 미래에 대해 예측해봤다. 우선 순호가 변호사 생명을 걸고 터트린 사건은 대형 로펌과 회계법인이 개입한 존속살인 게이트다. 자극적인 사건이며 터지면 엄청나게 큰 이슈가 될 일이다. 순호는 변호사 생명을 걸고 그 사건을 터트렸다. 이것은 정치권에서 스카웃 들어가기 아주 좋은 이야기다. 아마 순호는 이번 사건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뒤 정치권에 입문하게 될 것이다. 순호 본인이나 주변인들의 사정을 살펴봐도 그가 정치권의 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7. 지우의 경우 내 희망사항이긴 하지만 그녀의 바램대로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다. 지우의 증상이 '서번트 증후군'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법은 외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은 분야다. 서번트 증후군 환자가 법전을 외워서 변호사가 되면 어떨지 궁금하다. 사실 이 발상은 드라마 '굿닥터'를 떠올리다 생각하게 됐다.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의사도 있다면 변호사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하는 쪽이 스토리가 괜찮을 것 같다.

8. 결론: 이 영화의 GV를 하면서 이한 감독을 처음 만났다. 마주보고 진지한 대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GV에서 본 이한 감독은 본인의 영화같은 사람이다. 영화가 만든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고 믿는 건 아니지만(그랬다가는 모든 공포영화 감독은 개또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다) 적어도 이한 감독의 경우에는 본인의 영화에 인성을 투영시킨 경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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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올해 초 오키우라 히로유키의 애니메이션 '인랑'을 다시 한 번 봤다. 확실히 그때는 김지운 감독의 '인랑'을 앞두고 복습하고 싶어서 본 의도가 크다. 그 정도로 내게 '인랑'은 대단한 기대작이었다. 어쩌면 올 여름 시즌 최고 기대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는 한국의 영화감독 중 누구보다 멋과 힘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매번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만 총과 코트는 마치 그의 정체성 같았다(사실 그의 정체성은 모자帽子다). 나는 김지운 감독의 멋부리는 방식이 좋다. 유치하지 않고 세련되게 멋을 부린다. 멋에는 유행이라는게 있지만 김지운 식의 '멋'은 그걸 초월해버린 듯 하다. 

2. 그런데 애니메이션 '인랑'은 그렇게 멋을 부릴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자비한 철갑수트를 입은 특기대 요원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에는 '멋있는 남자'보다 '고통스런 남자'가 더 눈에 들어온다. 김지운 감독은 이런 이야기에 '멋'을 불어넣는다. 정우성과 강동원, 김무열, 한효주, 한예리, 최민호 등 온갖 멋있는 배우들을 출연시키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하우로 멋있게 찍는다. 원작과 달라진 사소한 노선 변화. 그리고 더 깊게 들여다보면 영화 '인랑'은 원작과 완벽하게 차별화 된 노선을 취하고 있다. 

3. 사실 '인랑'의 원작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혼란스런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엄밀히 말해 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평행우주'라고 설명해도 좋을 듯 하다. 다만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점은 실제 역사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탄생한 1999년 역시 실제 시대만큼 혼란스런 '세기말'이다. 이 이야기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허무한 '세기말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인랑'은 세기말의 불안을 먹고 자란 이야기인 셈이다.

4. 그런데 지금은 2018년이다. 이미 세기말은 19년전에 지나버렸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한 듯 영화 '인랑'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기말로부터 30년이나 흘러간 '미래'다(다시 강조하지만 원작 '인랑'은 '과거'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가상의 세기말'을 만들어냈다. 진짜 세기말과는 30년의 간격을 두고 있지만 적어도 국제정세만큼은 진짜 세기말에 버금가는 '불안한 사회'다. 영화 '인랑'은 세기말의 정서만을 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세기말에게서 벗어나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기말의 불안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인간성'에 대한 고뇌보다 다른 것에 비중을 둔다. 바로 싸움이다.

5. 영화 '인랑'은 극적 재미를 주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원작의 깊은 고뇌 대신 특기대와 공안부, 섹트 등 세력 간의 다툼에 더 집중을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사실 원작 '인랑'이라고 첩보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첩보전'과 '고뇌' 중 원작이 택한 것은 '고뇌'였다. 그러나 영화 '인랑'은 이 중 '첩보전'을 택했다. 오락영화가 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나는 애니메이션 '인랑'을 대단히 재밌게 봤다. 그러나 그 이야기 그대로 여름 극장가 한복판에 출격하면 무조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겁고 진중한 이 드라마를 찾을 관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인랑'의 선택에 지지한다. 무엇보다 원작과 다른 해석을 볼 수 있어 반갑다. 

6. 영화 '인랑'은 노선이 달라지면서 한가지 과제를 떠안게 된다. 첩보전의 성격이 강화된 만큼 판을 더 복잡하게 만들 인물이 필요해졌다. 소위 특기대와 공안부의 싸움에 중간에서 훼방을 놓을 수 있는 '트롤러'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인랑'에는 새로운 인물 구미경(한예리)이 등장한다. 구미경이 개입하면서 판은 더 복잡해지고 아수라장이 된다. 그만큼 인물들 사이의 갈등도 더 심해진다. 원작이 후세의 갈등에 집중하느라 비교적 단조롭고 집중이 적었던 첩보전이 구미경의 가세로 복잡해지고 재미를 갖추게 됐다. 그 대신 원작의 후세였던 임중경(강동원)의 고뇌는 비교적 간단해졌다. 그는 갈등의 시간을 줄이고 비교적 빠르게 정체성의 결론을 내렸다. 아마 후세의 캐릭터와 갈등에 매료됐던 관객이라면 이 대목은 다소 아쉬울 수 있다. 

7. 사실 원작 '인랑'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볼꺼리가 화려한 작품은 아니었다. 드라마에 치중한 탓에 적재적소에 최소한의 액션만 들어갈 뿐이었다. 영화 '인랑'에서는 액션에 굉장한 공을 들였다. 특기대의 압도적 학살이 될 수 있었던 장면도 갈등요소를 추가해 더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만든다. 아마도 김지운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총기 액션을 가장 잘 연출하는 감독이 아닌가 싶다. 총기사용이 허가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 정도로 총 쓰기가 쉬운게 아니다. 

8. '밀정'에서도 느꼈지만 김지운 감독은 예민한 화두를 다루면서도 절대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국뽕'에 빠지지 않고 부조리한 권력가와 음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의도한 것 만을 오롯이 해내고 쿨하게 이야기를 접는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태도는 한국의 많은 영화작가와 제작자들이 본 받아야 한다. 그리고 소재에 휘둘리지 않고 이야기만을 온전히 봐줄 수 있는 성숙한 관객도 필요하다.

9. 결론: '인랑'은 대중영화로 재탄생됐다. 나는 그것이 결코 하향 평준화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랑'이 취한 것은 대중성과 함께 정통 첩보영화의 원형이다. 돌이켜보면 김지운 감독은 늘 장르를 복원하는 작가였다. 이번에도 그는 첩보영화 하나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인랑'을 '여름 극장가에 걸맞는 대중영화'라고 썼다가 지웠다. 이 영화의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는 여름 시즌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하다 그냥 '김지운 영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그저 '김지운 영화'다. 


추신) 원작 '인랑' 리뷰 - daishiromance.tistory.com/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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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한국의 첩보영화를 만들기 정말 좋은 나라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여전히 대립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전쟁위기는 고조되기도 하고 완화되기도 한다. 언제든 지구대재앙급 첩보·전쟁영화의 배경이 될 수 있는게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꽤 그럴싸한 첩보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정도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니 결론은 아주 간단하게 도출된다. 첩보영화를 만들 인재가 없다. 첩보영화는 군사와 국제정세, 행정, 정치 등에 대한 사전지식에 대한 공부가 대단히 많이 필요하다. 어설프게 만들었다가는 알맹이만 텅텅 빈 영화가 나오기 쉽상이다. 

2. 양우석의 이력에 대해 '웹툰작가'라는 것 정도만 알지만 이 작가는 첩보영화를 허투루 찍고 싶어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의 새 영화 '강철비'는 굉장한 공부와 극단적인 상상력, 꼼꼼한 기획이 만나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굳이 '베를린'과 비교를 해보자면 '베를린'은 세련되고 섬세한 영화다. 그리고 '강철비'는 과감하고 탄탄하다. 대한민국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한까지 몰아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북한이 남한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극단적인 상황 말이다. 

3. '강철비'는 해야 할 이야기가 대단히 많은 영화다. 북한의 최정예요원인 엄철우(정우성)가 임무를 부여받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그러다 상황은 엄철우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고 그는 '북한 1호'와 함께 남한으로 넘어온다. 쿠데타로 혼란스런 북한과 그런 북한의 거물을 우연히 떠안게 된 남한은 긴박하게 혼란에 빠진다. 하필 남한은 대통령 선거가 마무리되고 인수위가 가동되는 시기다. 보통 이때는 정부나 국민이나 대단히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러니깐 여러 상황을 종합하자면 한반도는 '혼돈의 카오스'인 셈이고 음모에 휘말린 정예요원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라는, 혼란의 중심에 선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4. 영화는 이 혼란을 대단히 유기적으로 풀어낸다. 청와대와 미국 정부, CIA,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전쟁위기 상황에서 반응할 수 있는 모든 기관과 주변국의 상황을 적재적소에 담아낸다. 사실 이것만 가지고도 이야기를 풀 수 있었다. 보통 그렇게 풀어내는 사람이 폴 그린그래스다. '그린존'이나 '제이슨 본 시리즈', '캡틴 필립스' 등을 살펴보면 그는 오직 상황에만 집중해서 연출한다. '강철비'도 그랬다면 금상첨와겠지만 아직 그런 세련된 연출이 한국의 제작자들(관객 말고 제작자들)에게는 익숙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5. 그래서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은 '버디무비'다. 북한의 엄철우와 남한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가 등장해 남한과 북한이 투닥거리다 친구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꽤 흔한 인물관계다. 아마 관객들에게는 크게 특별한 흥미꺼리가 아닐 수 있다(올해 이미 '공조'를 겪었으니 말이다). 두 '철우'의 관계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제 역할을 한다. 제작자와 다수의 관객들에게 이 윤활제는 꽤 부드럽게 작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둘의 관계보다 더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 현직·차기 대통령의 관계다. 

6. 현직 대통령 이의성(김의성)과 차기 대통령 김경영(이경영)은 성향이 다르다. 호전적인 대통령과 대화 중심의 대통령은 위기상황에서 의견의 대립을 펼친다. 만약 이들 둘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면 '남한산성'에서의 최명길(이병헌), 김상헌(김윤석)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영화에서 둘은 그 정도 대립을 보이진 않는다). 영화에서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두 대통령의 생각은 그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이들의 관계는 남북관계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을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기조나 생각, 전략이 있지만 이는 사실상 5년에 한번씩 바뀐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무게감은 무겁게 자리잡은 것이 아니며 한반도는 언제든 위기국면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7.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일단 극영화다 보니 사건을 해결은 한다. 하지만 '완벽한 평화'가 아닌 '전략적 평화'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가 개봉하면 다소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이는 지금 한반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상징을 담은 결말이다. 남과 북은 여전히 갈라서 있고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영화 이후, 누군가는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에 대해 분노하며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고 싸울 것이고 누군가는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진전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천안함 때도, 연평해전 때도 있어온 이야기였다. '강철비'는 극단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 

8. 영화적으로 '강철비'가 재미난 부분. 의외로 이 영화는 스케일이 크지 않다. 많은 부분을 CG로 표현하지만 정작 중요한 몇 개의 부분은 조금 다르게 처리한다. 그러니깐 대형 폭발을 미니멀하게 처리하는 방식이다. CG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CG를 쓰다가 어색함을 줄 수 있는 장면은 다르게 처리한 것이다. 이건 존 카펜터의 '뉴욕탈출'에서나 본 연출이다. 물론 그 정도로 미니멀한 저예산 영화는 아니다. 

9. 앞서 언급한 두 철우의 관계는 다소 신파로 보일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둘의 관계는 이 긴박한 상황의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파 역시 불가피한 경우다. 이에 대해 '국뽕'이니 '억지 눈물샘' 자극을 운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비교대상을 언급하자면 '부산행'보다는 담백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논란이 될 지도 모를 '아재개그' 부분은 분명 웃기려고 넣은 장면은 아닐 것이다(전혀 안 웃기다). 그저 곽철우가 아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10. 결론: 어느 순간 한국영화는 '북한'과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오락적인 접근을 해왔다. 위험부담이 적고 흥행도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강철비'는 그 와중에 꽤 진지하게 접근한다(물론 다큐멘터리 수준의 진지함은 아니다). 무엇보다 남북관계에 대해 이보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영화는 못 본 것 같다.


추신1) 후반부에 북한이 구사하는 두뇌싸움은 약간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스포일러가 될테니 그 부분은 자제하겠다. 만약 그 부분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관객이 있다면 GV상영이라도 노려보길 바란다.

추신2) 영화에서 지드래곤의 '삐딱하게'가 등장한다. 이 노래가 들어간 앨범의 이름은 '쿠데타'다. '강철비'는 북한의 쿠데타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웃기려고 선택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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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사내놈들 천지'인 것은 너무 오래되고 흔한 일이라 딱히 감흥이 오지도 않는다. 그저 "저렇게 해야 장사가 되나부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만큼 '사내놈들 천지'인 한국영화는 '범람' 수준으로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다. 여기 그런 영화들 중 대단히 시끄러운 영화가 2개 있다. 하나는 지금 시끄러운 영화 '브이.아이.피'(VIP)이고 다른 하나는 몇 년 전 시끄러웠던 영화 '아수라'다. 물론 두 영화가 이끈 '시끄러움'의 맥락은 판이하게 다르다. 'VIP'는 젠더 감수성 결핍에 따른 시끄러움이고 '아수라'는 '이게 재미있냐, 없냐'에 따른 시끄러움이다. 후자의 경우 대중적으로는 크게 망했지만 엄청난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컬트영화'의 행보를 걷고 있다. 

우선 두 영화는 닮은 부분이 명확하다. 앞서 말한대로 '사내놈들 천지'이고 제대로 된 여성캐릭터를 찾기가 어렵다. 폭력적이며 어두컴컴한데다 영화를 다 보고 개운하게 극장을 나서기 어려운 영화다. 사실 언듯 외형만 보면 두 영화의 차이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두 영화는 아주 '명백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VIP'에 비해 '아수라'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VIP'의 지향점이 '아수라'여야 한다는 건 안다(차라리 '신세계'가 지향점이면 더 나았으리라). 하지만 'VIP'가 가져야 했던 부분을 '아수라'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먼저 영화가 갖는 에너지의 차이다. '아수라'는 영화 내내 대단히 격렬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남자영화'라는 단어가 다소 낯설긴 하지만 그런 단어가 있다면 바로 '아수라'에게 붙여야 할 영화다. 이 에너지는 대단히 묵직하고 빠르며 격렬하다. '아수라'가 이런 에너지를 가질 수 있었던데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에너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등장인물들이 가진 에너지의 양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탓에 이것의 충돌은 굉장한 스파크를 만들어낸다. 'VIP'도 이런 모양새를 가진 것처럼 홍보한다. 하지만 'VIP' 속 인물들의 에너지 차이는 현저히 다르다. 김광일(이종석)은 수동적이나 판을 지배하며 뒤흔들고 있고 채이도(김명민)와 리대범(박희순), 박재혁(장동건)은 이 판에서 놀아난다. 여기에 폴(피터 스토메어)까지 가세해 판을 더 심하게 흔든다. 거대한 힘 앞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한도경(정우성)에 비한다면 세 사람은 꽤 무기력하게 휘둘린다. 'VIP'는 '아수라'가 아니니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취할 순 있다. 하지만 관객이 바라던 것은 그게 아니다.

'VIP'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은 너무 뻔한 김광일의 캐릭터다. 귀한 집 도련님에 잘 생기고 번지르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는 꽃미소로 답례할 뿐, 딱히 두렵다는 생각이 안들고 오히려 지루하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나쁜 놈' 캐릭터가 '노잼'이다 보니 영화 전체가 동력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나쁜놈 투성이'인 영화 '아수라'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는 연쇄살인범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생계형 나쁜 놈'이다.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나쁜 놈이 된 경우다. '취미형 나쁜 놈'인 김광일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나쁜 짓의 동기가 다른 상황에서 김광일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아수라'의 박성배(황정민)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른 나쁜 놈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모든 판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다. 심지어 라이벌 관계로 보였던 김차인 검사(곽도원)까지 수중에 쥐고 흔들어버린다. 이야기에서 판을 지배하는 사람은 그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줘야 한다. 다른 예로 '시빌워'에서 어벤져스를 통째로 쥐고 흔들었던 제모 남작(다니엘 브륄)은 나름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하지만 워낙 막강한 캐릭터들의 틈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시빌워'는 MCU 역사상 가장 존재감이 미미한 빌런이 등장한 영화가 됐으며, 남은 것은 어벤져스 멤버들의 싸움 뿐이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지만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의 빌런이 될 타노스(조쉬 브롤린)는 공개도 되기 전부터 존재감이 막강하다. 그는 굉장히 많은 어벤져스 멤버들을 흔들어야 할 사람이다. 김광일에게 타노스를 기대할 순 없지만 최소한 박성배만큼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했어야 했다. 

어쩌면 'VIP'는 애시당초 '아수라'와 다른 영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관계의 충돌과 그로 인한 갈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게 'VIP'라면 '아수라'는 거대악들의 충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개인의 처절한 사투를 다루고 있다. 갈등의 고리를 만드는 면에서는 '아수라'가 한결 단순하다. 이 말인 즉슨 'VIP'는 어쩌면 폭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신세계'도 그리 폭력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사람에 따라 폭력적이라고 보긴 하더라). 그러니깐 'VIP'는 폭력영화에 능숙하지 않은 연출자가 만든 폭력영화라고 볼 수 있다. 박훈정은 이야기에 능숙한 사람이다. 반면 '아수라'를 만든 김성수 감독의 필모그라피 속 폭력성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비트'나 '태양은 없다', '무사' 등 이미 비범한 영화를 만들었고 '아수라'는 오랜만에 그가 내놓은 정통 폭력물이다. 김성수는 본인이 애시당초 잘하는 것을 들고 나온 셈이다. 

박훈정 감독은 현재 차기작 '마녀'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뇌를 100% 활용하는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며 상당한 폭력성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폭력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과격하고 잔인한 묘사만이 아니다. 한 예로 '레이드'의 이코 우웨이스가 주연한 영화 '헤드샷'의 경우 '레이드'의 기대감을 업고 공개됐지만 현실은 '레이드'보다 느리고 잔인하기만 한 폭력영화다. 둘 중 뭐가 더 재밌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레이드'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폭력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 그리고 폭력의 에너지를 만드는 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다. 때로 영화의 답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기도 하다. 부디 다음 영화에서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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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재림 감독의 '더 킹'을 보기 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다소 우려하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정부의 어느 시기 이후 쏟아져 나온 일련의 '분노유발 영화'와 관련된 것이다. 한국의 관객들은 분노할 꺼리가 많다. 뉴스 헤드라인 몇 줄만 읽어도 혈압이 솟구칠 지경이다. 국민들 상당수가 물 없이 찐고구마를 먹은듯 답답한 속내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꽤 괜찮은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그것을 노린 영화들이 최근 상당수 쏟아져 나왔었다. 나는 '더 킹'도 이런 영화들의 연장선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면 '분노'만큼 팔아먹기 좋은 상품이 없기 때문이다. 


2. 영화가 분노를 상품화 하는 것은 걱정해야 할 일이다. 분노라는 감정에 무뎌진다는 것은 뉴스에서 쏟아지는 일련의 좋지 않은 소식들에 덤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최순실이 "억울하다"고 고함치는 것에도 우리는 큰 황당함을 느끼기 어렵다. 이미 여러 차례 황당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관객은 '분노'를 아껴둘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해 분노할 꺼리가 충분히 넘쳐나기 때문이다. 


3. '더 킹'은 나의 이런 우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영화다. '더 킹'을 본 관객이라면 느끼겠지만 보는 내내 딱히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1% 실세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낄낄대며 웃기 바쁘다. 이들의 행태에 웃다보면 나중에는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게 된다. 이런 당혹감은 피터 잭슨 감독의 '데드 얼라이브'를 볼 때 처음 느꼈다. 스크린에서는 좀비들이 썰리고 으깨지고 즙이 되고 있는데 관객은 낄낄거리고 있다. 그 끔찍한 지옥도가 우스꽝스럽고 피와 내장에 무뎌지게 된다. 그 순간 관객은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4. 한강식(정우성)과 1%의 사람들이 노는 모습은 유쾌하다. 유사 장르의 한국영화에서 묘사된 은밀하게 퇴폐적인 것과는 좀 차이를 보인다. 당장 예를 들어 '내부자들'의 실세들이 안가(安家)에서 노는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내부자들'의 3인에 비하면 한강식과 무리들은 천진난만하고 귀엽게 논다. 여기에서 관객이 '분노'라는 감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그 순간은 이들에게 동조하는 것처럼 같이 낄낄거리고 흥겨워진다. 그러다 보면 "이 악랄한 놈들이 노는 것에 내가 같이 흥겨워하다니"라며 놀라게 될 것이다. 


5.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악인들에게 동조하도록 만든다. 마치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에 "너도 책임이 없진 않을걸"이라며 묻는 것 같다. 실제로 박태수(조인성)는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쫓다 악인들에게 동조한 인물이다. 영화는 박태수의 나레이션을 따라 진행된다. 즉, 박태수가 악인에게 동조한 순간, 관객들도 악인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다. 단 한순간이라도 정치에 무관심한 적이 있었다면 저 악인들에게 동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에 무관심했다면 어느 순간 한강식같은(혹은 그보다 더 우스꽝스런) 인물의 지배를 받게 될테니 말이다. 


6. 다행스럽게도 박태수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돌아선 순간, 관객도 '동조'라는 죄책감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서 박태수는 그리 정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일이 틀어져서 집안이 망했고 친구를 잃었다. 그는 정치를 해서 나라를 바꾸겠다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끌어내리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사적인 복수'로 해석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결과 악인을 끌어내리게 된다. 사실 마블이나 DC의 '슈퍼히어로' 대부분은 거창한 신념보다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영웅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악을 접하고 나서야 신념을 갖게 된다. 박태수가 정의로운 신념을 갖게 됐는지 관객은 확인할 수 없다. 일단 그가 당선이 되고 안되고도 알 수 없다. 악인을 만든 것에 관객의 책임이 있듯, 박태수를 당선시키는 것도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당신이 왕'이기 때문이다. 


7. '더 킹'을 보고 떠오르는 영화가 꽤 많다. 앞서 언급한 '내부자들'이나 개봉을 앞둔 '스노든'이다.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판을 뒤집은 사람은 결국 '내부자'라는 점이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뒤집은 사람도 고영태 이사와 노승일 부장, 내부자들이다. 철옹성같던 삼성을 폭로한 사람도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다. 물론 박태수와 우장훈(조승우), 에드워드 조시프 스노든(조셉 고든 레빗)은 각자 사정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내부자에서 고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악행은 혼자 저지를 수 없다. 거액의 돈과 권력으로 유혹해도, 누군가는 나서서 폭로하고 무너뜨린다. 악행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다. 어쩌면 '더 킹'이나 '내부자들' 등이 전하려는 메시지도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다. 


8. '더 킹'을 보기 전에 걱정했던 부분 또 하나, 이미 관객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역대급 스캔들을 접했다. 그런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룬 '더 킹'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오래전 송능한 감독도 정치스캔들을 다룬 영화를 준비하다 더 영화같은 스캔들이 터지자 "내가 이러려고 영화감독했나"라는 자괴감과 함께 영화 만들기를 때려치웠다. 한재림 감독은 "'박·최 게이트' 이전에 기획된 영화"라고 하지만 '더 킹'은 확실히 이 스캔들 덕에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영화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어눌한 '비선 실세'(심지어 무당까지 이용하는)와 그들의 코미디는 최순실 못지 않은 개그기 때문이다(물론 한강식은 최순실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이다). 아마 '박·최 게이트'가 없었다면 관객은 이 이야기에 대해 "이 무슨 황당한 뻘소리냐"라며 저평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9. 앞서 말한대로 박태수는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가 정의로운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됐는지 관객은 확인할 길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정의로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민석 검사(최귀화)나 안희연 검사(김소진)처럼 자기 일에 묵묵한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여주는데 영화 후반부 상당 부분을 할해한다. 둘은 모두 큰 성공을 거뒀고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사실 박태수의 개표결과를 언급하는 시점부터 다소 계몽적으로 돌변한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토록 불편한 코미디를 웃어넘기고 나올 수 있는 '가장 개운한 엔딩'인 셈이다. 이미 극장문을 열고 나서면 '불편한 현실'이 버티고 있는데 일말의 희망이라도 주는게 나을 거라는 감독의 배려인 듯 하다. 


10. '더 킹'을 보기 전에 걱정했던 부분 마지막으로 하나,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검사를 데리고 조폭영화를 찍은 건가" 싶은 염려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영화는 일련의 한국산 조폭영화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물론 한결 천진난만하다). 근데 영화제 진짜 조폭이 등장하니 검사를 조폭으로 만든 것과는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는 검사를 조폭처럼 묘사해서 비하하진 않는다. 대신 영화에 나오는 진짜 조폭들은 한결 비범하고 멋있다. 점잖고 냉정하며 잔인한 김응수(김의성)는 끝까지 그 카리스마를 유지한다. 의리파 최두일(류준열)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멋있는 캐릭터로 봐도 무방하다(정우성, 조인성이 버티고 있어도!). 조폭은 멋있고, 검사는 유치하다. '더 킹'은 절대 검사를 조폭처럼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조폭은 멋있고, 검사는 유치할 뿐이다.


11. '더 킹'에도 아쉬운 부분은 존재한다. 얼마전 D모 악플러가 영화 '아수라'를 '알탕영화'라며 비하한 것에 대해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강식, 박태수, 최두일 등 공을 들인 남성 캐릭터들에 비해 여성 캐릭터들은 상당히 소모적이다. 박태수의 여동생 박시연(정은채)이나 아내 임상희(김아중), 불륜상대 전희성(황승언) 등 캐릭터들은 공을 들이지 않은 티가 심하게 난다. 그런데 여기에 단연 돋보이는 여성캐릭터가 있으니, 앞서 언급한 안희연 검사다. 당차고 유머러스한 안 검사는 '실세' 한강식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강한 여성이다. 비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녀의 존재감은 막강하다. 아마 이 영화가 '알탕영화'라는 비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안 검사일 것이다. 


12. 결론: 뉴스보다가 화내기도 지칠 때 보면 좋은 영화다. 대단히 괴상한 방식이지만 '더 킹'은 화내다가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오락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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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수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팔부 중 하나로 얼굴이 3개에 팔이 6개 달렸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이다. 특히 이 귀신은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천과 싸우기를 좋아한다. 아수라들이 모여사는 세계인 '아수라도'는 육도의 하나로 인간과 축생의 중간에 위치한 세계다. 수미산과 지쌍산 사이의 바다 밑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늘 싸움만 일어나는 세계인 셈이다. 김성수 감독의 새 영화는 이런 의미를 가진 '아수라'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물론 이는 시나리오를 읽은 황정민이 "완전 아수라판이구만"이라고 해서 바뀐 제목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수라'라는 말과 정말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2.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아수라'는 '아수라도'에 떨어진 인간 한도경(정우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악질경찰인 한도경은 사실 만만치 않은 '아수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한도경은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아수라'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한마디로 신들의 싸움에 인간이 휘말리게 된 것이다. 영화의 뒤로 갈수록 한도경은 대단히 억울한 사람처럼 보여진다. 당연히 '거신'(巨神)들에게 사지가 사로잡힌채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으니 안스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한도경 역시 만만치 않은 악질이다. 즉 이것은 한도경의 '업보'(業報)인 셈이다. 


3. 영화 '아수라'는 인과가 분명한 '지옥도'(地獄圖)다. 한도경을 포함한 인물들은 죄만큼 고통받고 휘둘린다. 이 영화는 정말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 선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굳이 찾자면 한도경의 아내 윤희(오연아)가 있겠지만, 유일하게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던 이 선(善)한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 선과 정의가 사라진 지옥도, 그게 이 영화다. 


4. 영화 '아수라'는 한국영화에서 근래 보기 드문 강렬한 폭력성을 지닌 영화다. 이 폭력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애시당초 그렇게 연출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의 폭력은 관객의 진을 빼놓는 '고통스럽고 처절한 폭력'이다. 마치 영화는 관객을 이 악랄한 지옥으로 초대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김성수 감독은 관객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런 몹쓸 짓을 한 것일까?


5. 우선 한도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자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강한 힘을 가진 경찰이다. 갑을(甲乙)관계로 봤을때 경찰은 사회적으로 당연히 갑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경찰에게 더 강력한 두 명의 갑(甲)이 나타난다. 한 명은 검사 김차인(곽도원), 그리고 또 한 명은 부와 권력을 가진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 영화에서 박성배는 한도경의 '고용주'와 같은 존재다. 한도경의 상급기관 종사자와 고용주, 둘은 공교롭게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둘은 치고받고 싸운다. 둘은 싸움의 승리를 위해 두 세계에 걸쳐진 한도경을 이용한다. 한쪽을 등지더라도 한도경은 자신의 목숨이 보장받지 못한다. 


6. 사실 한국영화에서 이런 난처한 처지에 놓여진 인물은 종종 볼 수 있다. 경찰과 조직 사이에 놓여진 이자성(이정재)이나 구남친과 현남친을 동시에 만나는 난처한 상황에 놓여진 은희(한예리)가 떠오른다('신세계'와 '최악의 하루'). 이자성과 은희 모두 '두 관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돌파구'가 있었다. 이자성에게는 정청(황정민)이 있었고 은희에게는 마음의 돌파구인 료헤이(이와세 료)가 있었다. 그런데 한도경에게는 도망칠 곳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도경은 이 '아수라도'에 꼼짝없이 갇혀서 김차인과 박성배의 '갑질'에 휘둘리게 된다. 


7. '아수라'는 갑질이 만연하는 '아수라도'에 꼼짝없이 갇혀서 갑질에 사지가 붙들린채 휘둘리다 죽어가는 한 인간의 지옥같은 삶으로 관객을 초대한 것이다. 영화는 왜 굳이 이런 짓을 했을까? 갑질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의 벌거벗은 현실. 익숙해져서 인지하지 못하는 '을'(乙)의 삶을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도경처럼 사는 사람은 매우 많다. 살아남기 위해 '갑'(甲)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정체성을 잃고 돈의 맛에 익숙해지는 삶. 꽤 많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도경은 카메라를 바라본다. 마치 거울을 보듯 스크린 너머 관객들을 바라본다. 관객도 스크린 너머 한도경을 바라본다. 마치 거울을 보듯...


8. 사실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저렇게 인물들이 악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등장인물 모두가 나쁜 놈들이다. 사실 이들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앞서 말한 '아수라'에 가깝다. 관객들에게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 정도 악랄해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 덕에 관객들은 작가가 의도한 '지옥'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악랄한 이야기가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놓이지 않는가. 내가 사는 동네의 시장이 박성배같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9. '아수라'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처럼 '나쁜 갑'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쁜 갑'이 등장하는 영화는 그들을 징벌하면서 정의를 구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아수라'에도 '나쁜 갑'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을 징벌하는 정의는 없다. 즉, 이 영화는 돌파구도 없고 정의도 없다.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영화인 셈이다. 


10. 결론: 나쁜 놈들이 모여서 싸우는 이야기니 당연히 관객은 정을 붙일 캐릭터가 없다. 그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래, 나는 착한 사람이었어"라는 자신감이라도 갖게 된다면 이 영화는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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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누구나 아는 이야기, 혹은 인물을 재해석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관객에게는 아는 이야기가 뒤틀리는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고 작가에게는 큰 노동력을 들이지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자주 이뤄지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것이 드라마 '쾌걸 춘향'이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전부다. 그래서 '마담뺑덕'은 매우 반갑고 설레는 영화다. '심청전'으로 무려 치정극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은 국내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 될 것이다(물론 스코어가 그리 좋지는 않다). 

'마담뺑덕'은 흥미진진한 치정극이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진하게 우려냈으면 '사랑과 전쟁'의 에피소드로 방영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마담뺑덕'은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다 못해 싱거울 정도로 건조하다.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는 건조한 것이 극적 재미를 배가시켰다. 아마 이야기가, 감정들이 더 진해서 관객이 완전 몰입했다면 관객의 머리에서 '심청전'이 지워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심청전을 지워선 안 될 이야기다. 이야기의 진짜 묘미는 '뒤틀린 심청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활하듯 연기한' 이솜은 탁월한 캐스팅인 것이다. 

관객과 거리를 두는 이 영화의 전략은 베드신에서도 잘 드러난다. 흔히 베드신을 촬영할때는 몇 가지 전략이 있다. 홍상수처럼 멀찌감치 거리를 둬서 지켜보게 하는 방법이 있고 봉만대처럼 시선이 몸을 탐닉하며 같이 흥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색, 계'처럼 몸짓이 언어가 되어 인물의 관계와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담뺑덕'은 이 세가지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들어갔다 나왔다 비틀다가 대화하다가. 꽤 긴 시간 이어진 '육체의 대화'는 이야기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지점이 됐다. 그래서 이후에 심학규가 어떻게 심봉사가 됐고 청이가 어떻게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으며 용왕님은 어떻게 만났는지, 이 모든 이야기가 뒤틀리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담뺑덕'은 엄밀히 따지면 사랑이야기다. 여기서 집착과 치정은 감히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덕이(이솜)와 학규(정우성)의 모든 행동들이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뭐 집착도 따지고 보면 사랑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 둘은 복수를 주고 받으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내치지 못하는 모습들, 여기에 '사랑'이 있다. 그것이 정말 순수한 집착이었다면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됐을 것이다. 심지어 이 사랑에는 청이(박소영)마저 개입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덕이를 끝장낼 수도 있는 청이었지만 덕이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남아있었다. 청이 역시 덕이를 애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복수와 치정은 눈녹듯 사라지고 심청전을 구성하는 세 인물의 애증만 남았다. 임필성 감독은 심청전에 애증을 얹어 '마담뺑덕'을 완성한 것이다. 

'마담뺑덕'은 매우 전략적이다. 치밀한 전략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앞서 말한대로 '사랑과 전쟁'이 됐을 것이다. 임필성 감독의 완급조절은 마치 사비 알론소처럼 완벽하다. 사실 임필성 감독은 이야기 만들어내는 능력은 매우 탁월한 사람이며 그것을 풀어내는 재주 또한 발군이다. 문제는 유독 흥행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늘 느끼지만 흥행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 이처럼 발군의 감각만 유지한다면 언젠간 터질 사람이라 생각한다. 필모를 살펴봐도 충분히 노는 걸 즐기는 감독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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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를 지난해까지 14년동안 매년 가다보니 이제는 응당 10월만 찾아오면 본능적으로 몸이 근질근질한다. 아마도 이것은 중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년에는 "영화제를 끊어보자"며 안 갈려고 마음먹었지만 다리오 아르젠토가 온다는 소식에 "내가 졌다"며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었다. 그게 벌써 1년전이다. 이제 또 10월이 찾아오고 부산국제영화제의 계절이 오고 있다.

9월 7일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번 상영작들을 공개했다. 영화제 구경만 여러해 동안 하다보니 이제는 상영작만 봐도 분위기가 대충 보인다. 무엇이 빠른 매진을 보일지, 지난해보다 뭐가 나아졌는지 등등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나름 분석한 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소개할려고 한다. 특히 올해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마지막 해인만큼 그 의미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올해는 억지로라도 영화제를 가 볼 예정이기에 이 글은 필자 개인에게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1) 아시아 영화의 창 ↑, 월드시네마 ↓

섹션을 둘러보니 아시아 영화의 경향을 소개하는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이 크게 강화됐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면 일본과 중국, 홍콩, 태국의 기성작가들이 이 부문을 포함해 여러 부문에서 작품을 출품했다는 말이다.

특히 일본과 태국의 기성작가들의 작품이 두드러지는데 일본의 대표적 장르영화감독 미이케 다카시는 <13인의 자객>을 출품했으며, '오픈시네마' 부문에는 <제브라맨2>를 출품했다. 별 일 없으면 이 분 올해도 내한하시지 싶다. <쉘위댄스?>, <으랏차차 스모부>로 유명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쉘위댄스?> 이후 다시 한 번 '댄스영화'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신작 <댄싱 채플린>은 흥겨운 춤과 함께 채플린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차가운 정치스릴러와 하드보일드 영화를 주로 만들던 사카모토 준지는 <도시의 이방인>으로 영화제를 찾았으며, 기타노 다케시도 오랜만에 정통 갱스터영화 <아웃레인지>를 들고 찾아온다. 제일교포 3세 이상일 감독도 <악인>으로 영화제를 찾아올 예정이며, <자살클럽>, <노리코의 식탁>으로 유명한 소노 시온 감독도 정통파 고어영화인 <차가운 열대어>로 영화제를 방문한다. <바이브레이터>를 연출한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시대극 <번개나무>는 아오이 유우가 주연한 영화로 만약 그녀가 내한한다면 일본영화팬들이 몰려들어 매진사태를 유발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태국영화도 유독 강세를 보이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마니 라트남 감독의 영화 2편(<라아바난>, <라아반>)이 소개될 예정이고, 태국 장르영화의 거물 위시트 사사나티엥은 폐막작 <카멜리아>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한데 이어 자신의 작품 <레드 이글>을 출품하기도 했다. 중국의 떠오르는 흥행감독 펑 샤오강은 대규모 재난영화 <대지진>으로 영화제를 찾을 예정이고, 오우삼 감독은 수차오핀 감독과 함께 <검우강호>로 영화제를 찾는다. 특이 이 작품에는 정우성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이밖에 오랜만에 <증명서>로 부산을 찾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챙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면 월드시네마 부문에는 관객의 구미를 당길만한 익숙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 '아시아 영화의 경향을 알아보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특성에 맞춘 것인지 모르겠지만 '월드시네마' 부문에도 현재 베를린과 베니스, 칸에서 주목하는 유럽 신진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니 한 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고다르에게 얽매일 순 없지 않은가?


2) 장르영화 팬들에게 대만족

아마도 장르영화 팬들은 올해 영화제가 유독 즐거울 것이다. 흔히들 부산국제영화제라고 하면 "어려운 영화들만 튼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투정을 하는 팬들도 즐길만한 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제 홈페이지(http://www.piff.org)에는 상영작 정보와 함께 영화의 장르를 표시해두고 있다. 영화를 잘 모르는 관객들이라도 취향에 따라 골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작은 배려로 보인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 정보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 주목할만한 작품들은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가운데 <대지진>, <제브라맨2>, <검우강호>, <차가운 열대어> 등 자기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들도 챙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오픈시네마에서 상영되는 헐리우드 SF영화 <스카이라인>은 전세계 최초로 부산에서 공개되는 것인 만큼 SF영화 팬들은 챙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장르영화 팬들이라면 놓치지 말고 챙겨봐야 할 부문이 바로 '미드나잇 패션'이다. 이 전율의 심야상영은 늘 흥미로운 작품들을 많이 생산해내는데, 상영작 라인업을 살펴보면 지난 2년간 "수위가 약했어"라는 비난을 들은 만큼 그것을 뿌리치려는 각오가 눈에 띈다.

이 부문에서 상영하는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 직원>, <스토커>, <허스크>, <줄리아의 눈> 등은 잔혹한 호러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을 충족시켜줄 것이며, 올해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부산에서 최초로 무삭제 상영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도 이건 꼭 챙겨보고 싶다. 여기에 흥미로운 설정이 돋보이는 SF 스릴러영화 <앨티튜드>와 <머시니스트>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브래드 앤더슨의 <배니싱>도 눈에 띈다. 또 꽤 괴롭기로 유명한 홍콩 호러영화 중 하나인 <드림홈>도 챙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윤성호 감독의 온라인 시트콤 <할 수 있는자가 구하라>는 그 인기에 힘입어 극장판으로 제작돼 부산에서 첫 선을 보인다. 또 많은 팬들이 기다렸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스트리트:머니네버슬립스>도 부산에서 선보일 예정이며, 올리버 스톤 감독이 직접 내한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은 챙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어쩐지 매진이 임박

사실 요즘들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온라인 초스피드 매진이 되는 영화들을 살펴보면 작품 자체의 우월함보다는 내한하는 배우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만큼 유명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면 광속매진의 위험이 매우 높다. 아직 내한 게스트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별 일 없으면 부산을 찾는다"라는 전제하에 광속매진 위험작들을 살펴보면 대략 몇 편이 눈에 띈다.

먼저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상영되는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가장 유력하다. 별 일이 없다면 현빈과 턍웨이의 무대인사가 유력한만큼 팬들의 관심이 높을 것이다. 여기에 훈훈하고 애잔한 스타일의 멜로영화, 김태용 감독의 전작들을 통해 얻게 된 연출력의 신뢰 등을 감안한다면 <만추>는 예매순위의 가장 상위에 세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추'



여기에 오우삼 감독의 <검우강호>도 극장개봉예정작이지만 부산에서의 인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2008년 부산을 초토화시킨 '놈덕후(영화 <놈놈놈> 오덕후, 주로 일본아줌마들을 칭함)'들이 다시 한 번 부산을 습격한다면 <검우강호>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회매진을 기록할 것이다.

<검우강호>가 빠르게 매진된다면 역시 그만큼 빠르게 매진될 영화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악마를 보았다>다. 이병헌의 출연작인 점과 <놈놈놈>을 연출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일본아줌마들의 구미를 자극할 것이다. 물론 영화를 본 후 일본아줌마들의 반응이 사뭇 궁금하지만 말이다.

'악마를 보았다'


사실 부산국제영화제의 광속매진작이 배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가정해보면 외국영화보다는 한국영화의 광속매진 가능성이 높다. 왠만한 거물급 배우가 내한하지 않는 이상 한국영화의 광속 매진이 유력하다.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 많은데, 원빈 주연의 <아저씨>와 강동원, 송강호 주연의 <의형제>가 광속매진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광속매진에는 분명 복병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부산에서는 어떤 누가 내한할 예정이 없었음에도 광속매진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나 <두꺼비기름> 등이 있다. 올해도 이런 작품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아오이 유우의 영화 <번개나무>가 가능성이 높지만 이 영화는 '오픈시네마' 상영작이다. 3000여석을 매진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가능하긴 할테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13인의 자객'

부산국제영화제를 여러 차례 방문한 입장에서 이런 다양한 견해를 내봤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뚜껑이 열려봐야 안다는거다. 올해 영화제는 김동호 위원장의 마지막 해이자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영화제가 될 것인만큼 기대가 크다. 슬슬 움직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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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잿빛영혼 2010.09.27 17:35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뭘 봐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어제 카달로그를 구해놔서...

    그냥 막 고른게 맹인영화관,말라볼리아가사람들, 아웃레이지, 어느감독의수난, 우리의 신념,욜, 엄마시집보내기, 휘파람, 스님과 록스타, 악인,신과인간...
    오늘내일동안 열심히 짜봐야겠지만요;

    일단 한국영화들은 개볼할거니까 미뤄두고요.

    • BlogIcon DAISHI ROMANCE 2010.09.27 22:10 신고 address edit/delete

      아이구 화려하게도 골라두셨네요.

      저는 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현재까지 시간표를 못 짜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 오후쯤 돼야 관람작이 확정될 듯 하네요..ㅋㅋ

  2. BlogIcon 잿빛영혼 2010.09.27 23:3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저도 저기서 많이 빠질 듯 해요;;
    이번에는 여서일곱편쯤 볼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확정하는것도 일이지만, 더 큰 문제인 예매가 있으니까요,ㅎㅎ

    • BlogIcon DAISHI ROMANCE 2010.09.29 07:03 신고 address edit/delete

      저도 이래저래 일정 조절해서 시간표 확정했습니다.

      하루에 영화 많이 봐봤자 나중에 내용만 꼬이고, 머리만 아파요.

      부산에 장기간 체류하실 거 아니라면 하루에 두 편 정도 보시는게 적당할 듯 합니다.

      이것은 15년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이니 믿어도 될 거에요.




장현수 상세보기

[Filmography]

연출 : <걸어서 하늘까지>, <게임의 법칙>, <본 투 킬>, <남자의 향기>, <라이방>, <누구나 비밀은 있다>
각본 : <개같은 날의 오후>, <그후로도 오랫동안>


'잊혀진 한국 영화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가장 처음 언급한 인물이 김영빈 감독이었다. 굉장히 터프한 남자영화를 즐겨 만든 인물로 한국영화계에 '조폭영화'를 거의 최초로 도입시킨, 어떤 의미에서는 악영향을 끼쳤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오늘 소개할 이 인물은 또 한 명의 남자영화 감독이자 개인적으로 "영웅본색 리메이크를 연출해주세요"라고 우기고 싶은 감독이다. 그러나 김영빈 감독의 남자영화와는 어딘가 사뭇 다른 '로맨틱한 터프가이'를 만들어 낸 감독, 장현수 감독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85년 이원세 감독이 연출하고 이혜영, 조용원 주연의 <여왕벌> 연출부 생활을 시작으로 89년 곽지균 감독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조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곽지균 감독과는 이후 90년 <젊은 날의 초상>까지 함께 작업을 했으며, 1992년 드디어 장현수 감독의 장편데뷔작 <걸어서 하늘까지>를 만들게 된다.

'걸어서 하늘까지' (1992)

정보석, 배종옥, 강석우, 송옥숙 주연의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사랑과 배신, 야망을 잘 표현한 영화로 1년 뒤인 93년에는 최민수, 김혜선, 손지창, 이상아 주연의 드라마도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지붕뚫고 하이킥>을 비롯해 나이 먹을수록 찌질남을 연기하는 정보석은 이 당시만 해도 장현수 영화의 '로맨틱한 터프가이'를 처음 연기한 배우이기도 하다. 지금도 정보석은 미남이지만 이때는 정말 미남이었다.
<걸어서 하늘까지>는 그해 대종상 각색상, 편집상, 신인감독상을 비롯해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미술상, 조명상, 촬영상,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과 여자최우수연기상을 휩쓸며 그 해 최고의 영화로 자리잡게 된다.

1994년 장현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인생에서 가장 큰 걸작 하나를 내놓게 된다. '한국형 느와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패배주의적 갱스터 액션의 걸작으로 자리잡은 영화 <게임의 법칙>이 그것이다. 이 당시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배우 박중훈과 함께 오연수, 이경영, 이일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면에서 골고루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장현수 감독과 함께 각본가로 참여한 강제규 감독은 이천 춘수대상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본 투 킬' (1996)

이후 96년에는 한국의 여러 중견감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결과는 영 시원찮은 편이었다.

이후 장현수 감독 자신의 장기를 잘 살린 남자영화 두 편을 내놓게 된다. 1996년 당대의 청춘스타 정우성, 심은하가 출연한 <본 투 킬>과 2년뒤인 98년에 만든 <남자의 향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사실상 장현수 감독의 쇠퇴기를 알린 작품이었다.

96년작 <본 투 킬>은 킬러 길(정우성)과 가수를 꿈꾸는 룸싸롱 호스티스 수하(심은하)의 슬픈 사랑을 다룬 영화로 <게임의 법칙>과 연장선상에 놓인 비극적 갱스터 멜로영화다.
사실 이 영화가 아주 절망적인 실패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배우들의 퀄리티에 비해서 대박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나름 분석해보자면 거의 장현수 감독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한 한국형 느와르가 몇 년 째 발전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 투 킬>은 비록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화지만 스타일 면에서는 전작 <게임의 법칙>이나 김영빈의 <테러리스트>와 비교해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 투 킬>이 절망적인 흥행실패를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정우성, 심은하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향기' (1998)

<남자의 향기>는 상황이 더 절망적이었다. 하병무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탄탄한 원작과 연기파 배우들이 출동했지만 성적은 역시 시원찮은 편이었다. 정우성에 비해 스타성이 조금 떨어지는 김승우와 함께 초짜 신인배우 명세빈이 출연했으며 조민기, 장세진, 김래원, 이요원 등 탄탄한 조연진들이 뒷받침한 영화다.
사실 이 영화의 흥행스코어로 보자면 아주 심각한 실패를 거둔 영화는 아니다. 멀티플렉스가 도입되기 전인 이 당시에 서울관객 15만이라면 기본 이상은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스코어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헐리우드 직배사에서 배급한 첫 한국영화라는 점이다. 월트디즈니 배급사인 브에나비스타가 직접 배급에 나선 이 영화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 70여개 극장에 개봉됐다. 이 정도 백업이 있었으면 전국 100만은 진작 넘겼어야 했다.

또 이 영화는 탄탄한 원작소설을 가진 덕분에 원작을 읽은 독자로부터 본의 아니게 비교당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원작이 탄탄한 덕분에 2003년에 안재모, 한은정 주연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영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꽤 인기가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영화보다는 나았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라이방' (2001)

장현수 감독은 이 실패 이후 3년간 심기일전 한 끝에 2001년 조용히 한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 10억원이라는 저예산과 함께 영화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을 출연시켜 만든 블랙코미디 <라이방>이 그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사는 택시기사 3명의 인생역전극을 다룬 블랙코미디로 흥행면에서는 저예산 영화답게 벌어들였지만 비평면에서 큰 찬사를 얻으며 성공을 거뒀다. 특히 세 남자의 인생역전을 그려낸 정교한 시나리오가 크게 인정을 받으며 부산영평상과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 부문을 싹쓸이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장현수 감독이 드디어 자신의 장기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2004년 그는 또 한 번 실수같은 영화를 만들게 된다. 영국영화 <어바웃 아담>을 리메이크한 로맨틱 코미디 <누구나 비밀은 있다>가 그것이다.
이병헌, 추상미, 최지우, 김효진이 출연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면에서 모두 대실패를 보이며 배우들의 이름값이 아까운 영화로 전락하게 된다. <라이방>이 성공했을때만 해도 장현수 감독은 작가주의적 인물로 거듭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로맨틱코미디가 안 어울린 것인지, 대자본을 투입한 영화가 안 어울린 것인지 의문점을 남긴 채 장현수 감독은 이후 6년간 자취를 감추게 된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2004)

장현수 감독은 사실 2008년에 <영웅본색> 리메이크의 연출자로 거론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현재 장현수 감독의 조연출 출신이자 <파이란>,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을 연출한 송해성 감독에게 넘어간 상태다. 송해성 감독의 연출력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영화'에 일가견을 보인 장현수 감독의 전력을 고려해볼때 <영웅본색>은 그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굳이 그 프로젝트가 아니어도 장현수 감독이 언젠가 자신의 장기를 잘 살린 마초향기 물씬 풍기는 영화로 돌아와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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